마태복음 58. 인자의 날과 인자의 형상 (피의 형상 새 창조)

인자의 날에 비로소 창조되는 보이지 않는 형상 인자의 형상(벌거벗은 형상)

죽었다가 사흘만에 살아난 형상 창조 (죽었다가 살아난 경험, 잃어버렸다가 되찾은 경험, 처음자리, 무능의 자리)

자기 형상과 개인 사적 종말신앙 으로 빠져나가버리는 인간들

인자의 종말과 인간의 종말의 차이의 극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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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4:15, 개역)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마 24:16, 개역)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마 24:17, 개역)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질러 내려 가지 말며』
(마 24:18, 개역)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질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마 24:19, 개역)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마 24:20, 개역)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마 24:21, 개역)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마 24:22, 개역)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
(마 24:23, 개역)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마 24:24, 개역)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마 24:25, 개역)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마 24:26, 개역)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마 24:27, 개역)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마 24:28, 개역)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지니라』


왜 노아가 아니라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인가? 사적인 믿음의 조상 개념 따위란 없다.

집단 이스라엘 때문이다. 그래서 기업이라는 의미가 반드시 나와야 하며

그 기업은 반드시 분리성과 연관되어 있다. 그 분리성은 아브람 과 아브라함의 차이성이다.

아브람은 반드시 아브라함의 하나님에게서 깨어져야만 한다.

어떤 면을? 노아언약에 의하면

함의 사고방식을 깨어져야 한다. 우상이다. 사적인 구원 사적인 믿음 사적인 약속 개념이 깨어져야 한다. 자기를 챙기는 우상이기에

그래서 그는 우상 조각가 로써 믿음을 사적으로 생각하는 또는 앞으로든 과거로든 약속을 사적으로 해석하는 그 해석들이 다 박살이 나야함을

모든 인간을 대표로 해서 박살이 나야 한다.

이런 사적인 생각을 지적받는 즐거움을 통해서
죽음으로 뛰어드는 집단 이스라엘이 형성이 된다.

죽음속에서 태어난 자들
죽음을 어깨에 메고서 우상들을(사적인 구원) 섬기는 자들과 자기를 위하여 신을 찾는 자들과 전쟁을 벌리고자
최종적인 자아와 전쟁하는 자로써 세움을 받게 된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착각한 기업이 과연 무엇인가? 그 약속은 뭔가를
개인적인 해석과 주님이 이루어써 공짜로 미래완료로써 받은 해석과의 차이성을 더욱더 극대적으로 벌려놓는 그 지혜앞에서
철저하게 뚫혀지고 걸림돌 앞에 가루가 되어 실족하여서
왜 이 피 만이 옳았는가를 계시자로써 증거(전달)케 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복의 근원 악과 선을 가르는 (복받을 긍휼 받은자와 저주의 심판 받을 자를 가르고 나누고 분리 시키는)
복이란 원수의 성문을 여는 자 곧 여자 곧 신부가 신랑이라는 예수님이라는 머리를 증거함으로써
신랑과 우상과의 차이성을 드러내는 자이다.

뭐뭐 아니고 뭐뭐 이다 를 증거하기 위해서
우상의 실체를 드러내는 피를 증거하는 자이다. 피의 형상과 우상의 형상의 대립을 드러내는 자이다.

우상의 형상을 드러내기 위해서 죽음에 뛰어드는 그것이 복이다.

벌거벗겨진 형상이 알고보니 뒷걸음질 해서 긍휼로 입혀지는 형상이였다.

(롬 4:2, 개역)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롬 4:3, 개역)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롬 4:4, 개역)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롬 4:5, 개역)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롬 4:6, 개역)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롬 4:7, 개역)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롬 4:8, 개역)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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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과 산 자의 하나님 (마가복음 12:25-27)

산 자의 하나님

2009년 4월 19일                                  본문 말씀: 마가복음 12:25-27

(막 12:25, 개역)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막 12:26, 개역)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을 의논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막 12:27, 개역)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

사람이 성경 말씀을 오해하지 않으려면 속 시원하게 이 땅을 뜨고 싶은 심정으로 성경 말씀을 볼 때입니다. 이 마음가짐은, 자기에 대한 일체의 미련은 사라지고 자신이 마땅히 죽어야 될 맞음을 수긍하는 마음가짐입니다. 하나님에게 있어 개인 죽음이란 것은 없습니다. 전체 죽음입니다. 일괄 죽음입니다. 너나 할 것이 없이 다 죽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구원도 사람들에게 새삼 무엇을 기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평적으로 인간의 능력을 확대된 만큼 구원하기에 더 수월한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수직적으로 상승시키는 방식으로 구원하십니다. 왜냐하면 모든 자들이 이미 죽은 자들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 사람의 성경이나 실적을 묻지도 않고 구원하십니다. 단 말씀 웨 얹어서 구원하십니다.

이로서 말씀은 용수철과 같은 구실을 합니다. 사람 덩치를 용수철에 올려놓고 튕겨버리면 그대로 로켓처럼 하늘을 향해 솟아 나아갑니다. 순전히 말씀의 위력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실제로 어떻게 성도에게 작용할까요?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 자신을 소개하시면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에서 ‘하나님’을 떼어버립시다. 남는 것은 ‘아브라함’입니다. 이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이 아무리 용을 써도 부활되거나 산 자라는 호칭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뿐만아니라 다른 사람이 이 아브라함에게 아무리 명령하고 호통을 치고 요령을 알려주어도 아브라함은 산 자로 달라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배제한 아브라함은 더 이상 아브라함이 될 수도 없고 ‘산 자’도 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홀로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아브라함과 관련된’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십니다. 즉 하나님께서 직접 아브라함을 제작해야만 합니다. 아브라함은 처음에는 아브라함이 아니었습니다. 전에는 ‘아브람’이었습니다. 이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바뀌어놓았습니다. 어떻게요? 말씀의 능력으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 아브라함이란 ‘산 자’ 제작에 있어 하나님께서는 이삭이라는 약속으로 난 자식을 주시고 그 자식이 아브라함을 대신해서 제물로 바쳐질 때, 그 제물을 받고 아브라함을 ‘산 자’로 만드시는 겁니다. 이 때 아브라함으로서 한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사람에게 있어 본인이 본인의 구원을 가로막게 됩니다. 

이런 오류를 비켜나가는 방식을 하나님은 채택하신 것입니다. 타인이 자신을 위해 대신 저주를 받는 식으로 구원해내시는 것이고 ‘산 자’로 만들어내시는 겁니다. 이 때 아브라함은 단지 자신에게 일어난 이 모든 일을 복으로 여겼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아브라함 본인의 솜씨가 아니라 성령님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라고 갈라디아서 3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방금 말씀드린 이런 구원 방식에 의해서 이의를 주장할 위인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의 항변은 이러합니다. “왜 하나님은 인간들의 선을 행한 자질을 애써 거부하시는가?  왜 일방적 구원만 고집하느냐?”라고 말입니다.  갈라디아서 3:10-13에 보면,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즉 하나님 말씀은 인간들로 하여금 왜 구태여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관여해야지만 하는지를 말해줍니다. 그것은 그들이 저주받을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이 말씀을 통해서 전달됩니다. 사람들은 성경에 나오는 용어들, 즉 죄라든지, 저주같은 용어들에 생소합니다.

이러한 부정적 용어에 반발을 심하게 하게 됩니다. 즉 비록 자신이 천사나 신이 아니기에 모든 율법을 다 지킬 수 있다고 나서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양심적인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심없는 선함까지 묵사발 만드는 것이 도저히 참지 못하겠다는 겁니다. 바로 이러한 용어 불일치는 인간들이 십자가 의미를 몰라서 그러합니다.

쉬운 예를, 결혼식장에 어떤 남자와 여자는 처음부터 ‘남편’과 ‘아내’라는 용어를 듣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들을 한데 엮어서 “신랑, 색시”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막 결혼하게 된 남자와 여자는 그 의미가 무엇을 뜻하는지 도무지 감이 오지를 않는 겁니다. 어떻게 해야 참된 신랑다운 신랑이 되는지, 어떻게 해야 참된 신부다운 신부인지를 모르게 됩니다.

용어과 현실의 불일치가 생기게 마련이고 그 간격을 메우기 위해 평생을 걸쳐서 애쓰고 노력하게 됩니다. 이와마찬가지로 율법의 완성인 십자가를 통해서 비로소 소개되는 ‘축복’과 ‘저주’ 개념이 인간들이 생각하는 죽음 개념을 영 연결이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주장합니다. “내가 죄 지은 것은 인정하겠다. 그렇다고 해서 ‘저주’라는 받아야 될 이유는 모르겠다”는 식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오류는, 말씀이 자신을 만들고 있다는 생각을 못하고, 자신이 말씀을 새삼 지켜나가는 식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생긴 현상입니다. 즉 말씀의 완전은 십자가 사건입니다. 거기서 죄의 결과인 저주의 실체가 드러나고 부활을 통해서 죄없는 자가 받을 영광과 축복의 실상도 나타납니다.

즉 예수님이 당했던 그 저주는 실은 우리가 당해야 될 저주였습니다. 예수님에게 일어난 부활은 어디까지나 예수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만을 의지하는 모든 자들의 운명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로서 사람은 자기가 말씀을 지키므로서 조성해나가는 인생이 아니라 말씀이 조성으로 나가는 인생입니다. 이 말씀으로 인해 저주와 축복, 두 부류로 갈라집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경우를 보면, 그들이 말씀을 지킨 것이 아니라 말씀이 그들 내부에 친히 작용한 것이었습니다. 이로서 그들에게서 두 갈래의 하나님의 속성이 나오게 됩니다. 하나는 저주입니다. 다른 하나는 축복입니다. 인간의 죄로 인해 당연히 저주받아 마땅함이 나오는 갈래와, 또 다른 갈래는, 십자가 피는 그 어떤 죄라도 용서 못할 그런 무능력한 피가 아님을 말해주는 갈래입니다.

성도에게는 이 두 개의 속성이 다 나오는 말씀의 증인되고자 하나님께서 찾아오신 것입니다. 26절에 보면,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는 구절이 나옵니다. 모세는 직접 하나님을 뵈었습니다. 하나님은 불로서 나타났습니다. 마치 다니엘 세 친구가 불 속에서 하나님과 만난 것과 같습니다.

이런 불 속에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신학이나 철학이 아닙니다. 오직 “살려주세요!” 이 것뿐입니다. 우리는 기생 라합을 본받아야 합니다. 비록 창녀됨이라는 천한 신분도 개의치 않고 무조건 항복했습니다. 구약의 불 속은 신약에 오면 ‘십자가 앞’입니다. 십자가를 보면서 우리도 “살려 달라”고 할 뿐입니다.

2000년 동안의 세상 기독교 신학의 주류는 이것입니다. 예수 믿게 되었으면 바르게 살아야 구원된다는 주의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기입니다. 거짓말입니다. 성경은 이런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생이 다가도록 인간들에게 저주받을 죄만 나오고 그 저주스러운 죄는 오직 하염없이 반복되는 예수님의, 피 적용으로 의인된다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혜택을 입은 자만이, 더 이상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주님을 위해 사는 자입니다. (고후 5:14)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평생이 하나님의 솜씨를 보이는 작품의 일평생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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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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