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수께끼 강화

수수께끼 비밀의 강화로 더욱더 불가능성의 거리를 넓혀버리는 단절성 강화

일만달란트 탕감 비유

(마 18:22,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마 18:23, 개역)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마 18:24, 개역)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용서란 심판을 통해서 증거 하고
구원이란 왜 구원인지를 저주를 통해서 보여준다.

영생이란 영원한 철저한 가루만들기 단절만들기 십자가라는 단절로써 대신 죽으심으로써 생명을 증거하신다.

아름다움이란 철저한 외면인 싫어버림바 로써 단독적이고 독보적인 아름다움을 극상화로 보여준다.

용서의 왕 비유에서 왜 반드시 심판을 보여주는가? 심판의 방식이 아니고서는 용서를 증거하지 않는다. 죽음이 아니고서는 생명을 증거하지 않듯이, 비언약이 아니고서는 언약을 증거치 않고, 어두움이 아니고서는 빛을 드러내지 않으신다.

(요 11:8, 개역)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요 11:9,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요 11:10, 개역)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악마가 아니고서는 예수님 자신의 선하심을 드러내지 않으신다. 일으켜세울려면 실족하는 방식아 아니고서는 그 차이성이 드러나지 않는다.

결국 이 비유는 창세기 노아의 함 저주라는 도저히 해석 불가를

더더욱 해석불가 강화 즉 거리를 좁히는 해석이 아니라 거리를 더욱더 벌려버리는 불가를 더더욱 불가로써 강화 시키는 비유이다.

구원을 방주라는 방식을 통해 완료(창조)하심으로써 그 완료성에 대비된 미완료적인 인간의 행위(창조에 대한 차이성-모방)의 결집을 보여주는 그 원천이 바로 함의 사고방식이요 그 함이 애굽의 건설 즉 바벨탑의 건설을 형성하게 된다. 에덴동산을 맛보지 않고서는 그 잔상을 흉내낼수 없다. (함이 구원을 맛보고서도 그 의미를 자기유익으로 끌어당김으로써 자기를 위하여 구원을 챙겼기에, 정작 피의 의미는 모르도록 차단했기에 방주의 잔상을 그들은 자발적으로 챙기기를 시도하는 바벨탑을 건립하게 된다. 이 바벨탑과 방주와의 차이성으로써 복음을 증거하시는 것이다. 세상나라와 하나님 나라의 차이성을 하나님 나라 만이 세상나라의 실체를 들추어내어야만 그 차이가 나타나듯이 그 이전에는 세상 나라에 포로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마치 율법 강화처럼 보이는 산상수훈처럼 (그것도 모르고 이제는 산상수훈을 또 지키겠다고 하는 해석으로써 가능성을 증거한다는 자체가 위선에 위선을 더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부재성이 더더욱 드러난다. (간격의 차이성이 더욱더 부각이 된다.)

즉 율법도 단 하나도 못 지키는 인간들이 율법을 쥐었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죽였듯이
더더욱 산상수훈은 율법 강화로 다가옴으로써 더욱더 율법을 쥠으로써 주님의 은혜성을 더욱더 벌려버리는 불가능성을 더욱더 그들은 행함이라는 가능성으로 그 결핍을 채울려고 하기에 악마의 정체가 더욱더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다.

적그리스도가 주의 이름으로 자기를 포장하듯이
더더욱 영적아버지 영혼의 의사들이 자신의 신앙적 열심이다 라고 하는 자들이 나타나도록 되어 있다.

(마 24:5, 개역)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마 24:24, 개역)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막 13:22, 개역)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백성을 미혹케 하려 하리라』
(요이 1:7, 개역)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아래는 지난 과거에 쓴 글을 보다가 갑자기 이 내용이 용서의 일만달란트 탕감비유 속에 나타난 절대로 용서 받지 못하는 비유가 아 바로 이 내용이구나 라고 문뜩 보였다.

어떤 신학자가 신약과 구약은 불연속성이라는 말을 했다. 존브라이트

그러나 그렇게 밖에 보이지 않는 이유는

구약 자체도 해석 불가인데 신약은 그 불가의 강화 더욱더 거리를 벌려놓기 때문이다.

그러나 답이 완료로 덮친자에게는 더욱더 쉽게 다가온다.

왜냐하면 문제나 답을 자기 쪽에서 일체 찾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매일 주어지는 답으로 매일 주어지는 문제를 찾는 솔솔한 재미를 누릴 뿐이다.


구약 수수께끼 자체도 못 풀도록 되어 있는데

신약은 거기에다가 엎친데 덮친격으로 이중 삼중으로 구약 수수께끼에다가 겹겹의 패스워드를 걸어 놓은 것이다. 그 증거가 유대인을 들어서 예수님의 가장 적대자로 삼으신 것이다. 철저한 단절성이다. 원가지도 이 패쓰워드를 풀 입장이 못 되는데 버림받은 가지는 오죽 더 하겠는가?

수수께끼 비밀의 강화 이다. 마치 창조의 비밀을 소멸의 단절성으로 강화하듯이
사랑의 비밀을 지독한 미움으로써 그 사랑의 비밀을 은밀하게 더욱더 강화 하는 것이다.

(참고로 난 이 일만달란트 비유가 누가복음에 17장 있어야 하지 않는가 라는 생각이 맴돌았다 그런데 정작 그 부분인 누가복음에서는 겨자씨 한 알의 믿음으로 누가복음은 서술하고 있고 곧 바로 열명의 문둥병자 속에 잃어버린자 찾는 내용으로 증거 된다.

결국 일만달란트 비유는 마태복음에 있는 이유는 구약의 그 단절성을 더욱더 강화 하기 위해서 유대인에게 말도 못할 용서를 퍼부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정작 처음자리인 이스라엘 자리를 사적으로 챙기는 바람에 결국 집단 이스라엘 즉 새 이스라엘의 의미를 보여주기 위해서 도리어 새 이스라엘 때문에 철저하게 심판받는 모습으로 증거 된다. 용서를 사적으로 챙길 수가 없다는 원 가지 행태들을 보여주고 있다. 처음부터 원 가지를 찍힘(누락)을 보여주는 입장으로써 옛 이스라엘의 역할을 다 보여주고 있다. 진노의 그릇은 반드시 진노의 그릇의 성향으로만 드러난다.

(롬 11:16, 개역)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롬 11:17, 개역) 『또한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롬 11:18, 개역)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 자긍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롬 11:19, 개역)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이운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함이라 하리니』
(롬 11:20, 개역)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롬 11:21, 개역)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롬 11:22, 개역)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롬 11:23, 개역) 『저희도 믿지 아니하는 데 거하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얻으리니 이는 저희를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롬 11:24, 개역)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스려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은즉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얻으랴』
(롬 11:25, 개역)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롬 11:26, 개역)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롬 11:27, 개역) 『내가 저희 죄를 없이 할 때에 저희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
(롬 11:28, 개역) 『복음으로 하면 저희가 너희를 인하여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을 인하여 사랑을 입은 자라』
(롬 11:29, 개역)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롬 11:30, 개역) 『너희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롬 11:31, 개역)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치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저희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11:32, 개역)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롬 11:33, 개역)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롬 11:34, 개역)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롬 11:35, 개역)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롬 11:36, 개역)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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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을 허무는 믿음 

2006-11-11 23:06:20 조회 : 185  이름 : 김대식

바벨탑을 쌓는 죄를 심판하는 믿음의 등장

창 10장-12장


지난 시간에 노아 홍수로 인해 땅을 회복 했습니다. 그래서 땅은 쉬지도 않고 낮과 밤을 봄여름가을겨울을 반복하면서 은혜를 베푸신다는 무지개 언약을 선언하십니다. 그 은혜는 바로 노아가 깨달은 바처럼 거룩한 분의 희생이 아니면 눈물이 아니면 올 수 없는 은혜이기에 노아는 정결한 짐승을 잡아서 제사를 드립니다.

자 이제 이 땅의 깨끗해 짐에 있어서 아무런 힘이나 노력이나 도움을 준 적도 없는 자가 이 은혜를 무시하고 도전합니다.

그 사건이 바로 노아의 셋째아들 함의 죄악입니다. 함이 여호와의 은혜 입은자 노아가 포도농사 짓고 포도주를 마셔서 취하여 벌거벗은 채로 잠든 것을 오히려 그런 내용을 형들에게 고자질 하면서 비웃어 버립니다.

분명 자신도 방주 속에서 은혜 때문에 구원 받았는데 그 구원의 의미를 제대로 노아를 비웃은 것일까요? 도대체 은혜 받기는 받았을까요? 은혜 속에 있었으면서도 은혜가 무엇인줄 몰랐기에 고자질하며 비아냥 거렸던 겁니다. 그런데 반면 셈과 야벳은 반대로 노아의 벌거벗은 몸을 뒷걸음질 하여서 자신의 옷으로 덮어 주었습니다. 즉 은혜 받았기에 은혜를 제대로 안 행동이 나온 겁니다.

한 마디로 이 사건은 여호와 하나님이 철저하게 자신의 희생과 은혜 베품을 아는 자는 가려내신다는 의미입니다.

마치 뒷걸음질 하여 우리의 죄악을 덮어주는 은혜가 아니면 노아홍수심판에서 살수 없었는데 그 은혜를 무시하고 오히려 덮어주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수치를 고자질하는 이 은혜를 모르는 모습을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겁니다.

은혜를 모르는 자는 절대 용납하지 않겠다 입니다. 당연하지 않을까요? 얼마나 죄가 미웠으면 땅을 1년 이상 물이 덮어져 있을 정도로 깨끗하게 탈수를 해서 땅을 회복해 해 놓았는데 또 거기에다가 알필요 없는 선악이라는 죄의 생각으로 더럽히고 있으니 가만히 있을 하나님이 아닙니다.


자 그런데 바로 이 함과 가나안이 하나가 된 이 죄악을 본격적으로 파해치고 분해하고 분석하고 해부조사를 해 들어가기 시작 합니다.

또 다시 노아홍수처럼 한꺼번에 싹쓸이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죄의 깊이를 하나 하나 해부하면서 죄가 무엇인가를 보여주시고자

함과 가나안의 땅은 이제 여호와의 공격 대상이 됩니다.

함 땅과 가나안 땅에서 벌어지는 일들로 인해서 인간은 죄가 무엇인가를 봐야 합니다.
하나님이 왜 죄를 싫어하시는지를 이제 본격적인 죄 해부작업에 우리는 동참되어 내 속에 이런 죄악이 있다는 것을 봐야 합니다.

노아는 이제 예언을 통해 자신의 사적인 생각을 유언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하나님이 하실 일들을 선포 합니다.

술에서 깨어난 노아가 이미 다 알고 예언을 하기를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들의 종들이 종이 되기를 원한다 라고 예언을 하고
당사자는 함인데 함의 막내 아들인 가나안을 다짜고짜 이렇게 예언을 합니다.

또 은혜를 아는 셈과 야벳은 손자들이 아닌 그 당사자를 축복합니다.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라고 예언을 합니다.

그런데 이 예언이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이스라엘 역사 속으로 그대로 이루어져야하는 겁니다. 아니 예언 자체는 이미 성취 되었음을 선언하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성취 했니 못했니 와는 상관 없이 성취되어서 나타날 뿐입니다. 완성된 것들이 나타날 뿐이다는 겁니다.

곧바로 그 다음 장인 창세기 9장에 나타납니다. 족보가 등장합니다. 족보가 등장하면 뭔가를 자꾸 두패로 나눈다고 보시면 됩니다. 어디서 우리가 배웠지요 창 3장 15절을 근거로 한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의 전쟁을 가인의 족보와 아벨의 족보를 통해서 배웠습니다.

또 마찬가지입니다. 함과 가나안의 족보는 상세하게 나옵니다. 또 찬양자 셈의 족보는 상세하게 나옵니다. 그러나 야벳 족보는 없습니다. 상세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언대로 셈의 장막에 거하기 때문에 누구와 누구의 싸움이 됩니까?

함+가나안 족보와   셈+야벳의 족보 싸움인 겁니다.

자 그런데 지난 족보와 지금의 족보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뭘까요?

반드시 하나님의 원수인 적군에 해당하는 자들은 영웅 호걸들의 힘이 결집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것이 가인의 족보의 특징입니다. 여전히 함과 가나안의 족보도 그러합니다.

함의 족보는 창 10장 8절에 세상의 처음 영걸로써 니므롯이라는 특이한 사냥꾼에 대해서 언급하는데

속담에 그는 여호와 앞에서 특이한 사냥꾼이로다 라는 말이 떠돌정도로 유명인 이다는 말인데 이것 또한 라멕의 찬양처럼 뭔가 자랑거리가 될만한 것들을 마치 하나님으로 복 받은 냥 그들은 항상 내세우는 모습이다는 겁니다.

또 성의 건축은 가인이 에녹 성을 쌓듯이 뭔가 힘의 결집을 말하여 힘의 축적을 말하는 창고에 뭔가 가득 소유물이 차서 쌓아둘 공간이 있기에 그것을 방어하고 사수하고 또 그것을 복으로 여긴다는 의미가 되는 겁니다.

가나안의 족보 또한 마차가지입니다. 간략하게 나타났지만 함과 가나안 족보의 공통점은 땅의 차지입니다. 땅을 회복한 이유가

땅을 회복해서 다시는 인간 때문에 땅을 싹쓸이 하지 않겠다는 그 은혜가 땅을 서로가 많이 차지하라는 말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기를 위하여 은혜를 이용해 먹는 겁니다.

반면에 셈의 족보는 특이 사상이 죽었더라가 없습니다.
그러나 특징은 사람 이름 나열 뿐입니다. 그리고 딱 하나 에벨이라는 자가 두 아들을 낳았는데 하나의 이름을 벨렉이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그 때에 세상이 나뉘어 졌다고만 나옵니다.

뭐 내세울꺼리 하나 없지요?

그런데 세상이 나뉘어 졌다는 것이 뭐길래

바로 그 다음 11장에 다시 족보가 언급이 되는데
두 패로 나누어 지는 것이 좀 다른 모습으로 전개 됩니다.

좀 더 사건 중심으로 다시 족보가 다루어 지는데

바벨탑을 짓는 집단들과 셈의 족보 속에서 한 인물이 등장하는데 바로 아브람입니다.

아브람이 중요한게 아니라 아브람에게 여호와께서 일방적으로 나타나서 일방적으로 무슨 일을 하시고 가시는데 그것이 바로 언약입니다.

그 언약은 아브람이 큰 민족을 이루도록 하겠고 아브람에게 복을 주어서 아브람 이름을 창대케 하겠고 아브람은 복의 근원이 되며 복의 근원인 아브람을 축복하는 자는 축복하고 아브람을 저주하는 자는 저주 하는 바로 아브람을 통해서 땅의 모든 민족이 복을 얻을 것이다고 언약을 하십니다.

즉 이 말은 아브람이 이제부터 함과 가나안 땅을 심판하는 마치 노아를 중심으로 홍수심판 했듯이 이제는 아브람을 중심으로 죄악을 심판하시겠다는 싸움 걸기 전쟁 걸기 시비 걸기를 하시겠다는 겁니다. 누구에게? 바벨탑을 쌓는 모든 인간들에게

그럼 바벨탑이 뭐길래 여호와 하나님이 전쟁을 하시겠다는 걸까요?

노아 홍수 심판 이후에 노아 자손들이 퍼졌는데

온 땅의 말소리가 하나요 언어가 하나였는데 즉 사투리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동방으로 이동중에 시날 평지에서 거주하면서 서로가 말하기를 벽돌을 만들어 튼튼하게 구어서 돌을 대신하고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여 성과 대를 샇아 높여서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자

그렇게 해서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왜 노아 홍수로 인해 흩어짐을 당했으니까

이것은 구원을 소유할려는 발상인 가인의 성쌓기를 하나님의 표와 동편을 기억한 생각에서 여전히 나오는 겁니다. 즉 구원을 그들은 포기 한적 없습니다.

에덴동산의 잔상의 이미지가 남아서 인간은 성 쌓기를 멈추질 못합니다. 그것이 곧 성전 쌓기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반드시 그 성을 누락 시킵니다.

그래서 인간은 더더욱 결집합니다.

이름을 내고 흩어지지 말고 하나가 되자 라는 것은 가인의 주장처럼 불공평한 하나님을 빼버리고 우리들끼리의 구원의 세계를 이루자 라는 겁니다. 그래서 뭐든지 쌓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나 주님은 허물어 뜨립니다. 그래도 인간은 쌓기 합니다. 그러나 또 무너뜨립니다.

이 싸움이 계속 지금까지 진행 됩니다. 성화론도 일종의 쌓기인 셈입니다. 구원을 자신들의 거룩된 모습으로 쌓기를 하는데 있어서 주님은 허물어 뜨립니다. 인간들의 손으로 세운 교회 또한 바벨탑으로써 구원을 소유할려고 합니다. 그래서 성화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허물어 뜨리시고 흩어버리십니다. 그 허물어 뜨리는 일을 하는 자로써 셈의 족보에서 아브람이 등장하는 겁니다.

자 아브람은 그럼 그런 못된 버릇이 없을까요? 있습니다.

더더욱 우리들 또한 그런 못된 버릇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이 우리와 같은 모습을 지닌 자로써 뽑혀서 바벨탑을 쌓는 인간과 별반 다를바 없는 성쌓는 버릇을 지닌 인간인 아브람이 자기 머리도 못 깍는 주제에 남의 버릇을 어떻게 깍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하십니다. 그래서 우상을 조각하여 만드는 자인 아브람을 뽑습니다. 뽑아서 아브람 속에 있는 그 성쌓는 버릇을 먼저 작살 내고 이름을 체인지 해서 아브라함이 비로소 알게된 그 믿음의 의미를 앞장 세워서

바벨탑 쌓기로 흩어져 버린 그 버릇이 흩어진 그 곳에서도 여전히 성쌓기 하는 자들의 그 성을 무너뜨리는 믿음을 아브라함이 앞장 세워서 가는 곳 마다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는 축복받고 아브라함을 저주 하는 자는 저주 받는 복의 근원이 되는

약속의 여호와 이름을 무기로 앞세우는 겁니다.

이것이 거룩한 전쟁입니다.

거룩한 여호와의 전쟁은 힘으로 하는 전쟁이 아니라 칼과 무기 방패로 하는 전쟁이 아니라

따라합시다 믿음으로 하는 전쟁

그러면 아브라함이 이 전쟁을 하는 조건이 될려면 뭐가 있어야지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 합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힘으로 낳은 자식이 누구일까요? 약속은 내가 이루어야 해 라고 해서 낳은 자식은 이스마엘

그런데 자기 힘으로 낳지 않은 자식이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이삭입니다.

이 이삭 만이 믿음으로 낳은 자식입니다. 그런데 진짜로 믿었나요? 아닙니다. 오히려 비웃었어요 비웃었는데 여호와 하나님은 뒷걸음 치듯이 우리의 허물을 덮으셔서 웃음이라고 고쳐버렸습니다. 그래서 비웃음아 비웃음아가 아니라 웃음아 웃음아 라고 부를 수 있도록 뭔가 덮여져서 낳은 자식인 겁니다. 뭘까요? 바로 은혜 곧 사랑입니다. 희생정신으로 하나님의 낮아지심으로 낳은 겁니다. 이것을 또 분명히 하고자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합니다. 이 말은 
남자가 남자 다워야 남자이지 라는 성인식을 말하는게 아니라 태어난지 8일만에 하는 것은 다른 종족들이 휼내내거나 성인식 용으로 하는 할례가 아니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경험을 가진 약속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 약속의 사람은 하늘에서 준 자식이기에 육에서 육으로 난 자식이 아니다는 겁니다. 둘째로 약속의 자식은 죽음이 통하지 않습니다. 죽음을 오히려 툭툭 시비걸고 싸움 붙는 자입니다.

죽음을 피해 도망치는 자들이 아니라 죽음아 덤벼 덤벼 라고 죽음을 아주 우습게 보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이 이삭을 하나님은 바치라고 합니다.
왜 믿음이 있는지 볼려고

왜 믿음이 있어야 할까요? 믿음이 없으면 싸우지는 못해요

싸울려면은 힘을 모아야지 믿음이 있어서 뭐하게요?

여호와의 거룩한 전쟁은 바벨탑을 쌓는 인간과 똑같은 식의 싸움을 할까요? 그 반대입니다.

힘 빼는 전쟁을 합니다.

버려 버려 버려 왜? 여호와의 이름만 앞장 세우는 믿음의 전쟁이기에

그래서 이삭을 바치라고 했을때에
얼마나 아브라함이 마음이 아팠을까요?

세상에 세상에 이 어린 자식을 꽁꽁 묵어서 제물로 바치라고 하니 아버지 마음이 찢어지는 겁니다.

그러나 바치지 아니하면 죄와 싸울 수 없어요. 죽음을 이길 수 없어요,

그래서 아브라함은 바칩니다. 그리고 이삭을 칼로 찌를려고 하는 순간

스톱 멈추어라 왜 믿음 있는 줄 확인했기에

그러나 이 행함이 있는 믿음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라 예수님의 믿음을 두고 말하는 겁니다.

마치 독생자 예수님을 원수들의 손에 넘겨서 죄없이 하실려고 하나님이 흘리는 눈물을 담은 십자가의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서 아브라함이 미리 앞당겨서 맛배기로 보여주는 겁니다. 누구의 믿음을? 예수님의 믿음을 바로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이 십자가의 사랑이 힘없는 거룩한 전쟁입니다.

믿음으로 하는 전쟁입니다. 이 사랑이 아니면 인간의 죄로 쌓는 성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죽음을 이길수가 없습니다. 죽음이 무서워서 자꾸 성을 쌓고 교회를 쌓는 겁니다. 그러나 그 성을 무너뜨리는 것은 오직 믿음 뿐인 겁니다.

그래서 성을 무너뜨리는 유일한 무기인 믿음을 바로 아브라함으로부터 출발합니다. 그래서 믿음의 조상이 아브라함인 겁니다.

예수님 우리는 교회를 바벨탑 쌓듯이 내 구원을 내 소유로 삼고자 내 믿음으로 구원을 챙길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요. 바로 아브라함도 이런 육의 생각을 믿음 없음을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이 개입하셔서 비웃음을 웃음으로 믿음없음을 믿음으로 바꾸셔서 이제 죽음마저도 이길 수 있는 예수님의 믿음을 앞장 세워서 인간의 손으로 지은 성을 무너뜨리는 거룩한 전쟁을 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믿음을 선물로 받아서 그 어떤 인간의 믿음으로 쌓은 바벨탑을 무너뜨릴 수 있는 믿음의 담대함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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