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재성으로써의 비유

福音書 硏究資料室(공관복음 연구자료실) 구속사 성경연구에서


비유 연구-1 - 이근호 목사 글쓴이: 김유미 08.10.05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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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에 관하여

이근호 목사


마태복음 7:24-29 기초 비유)

7: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같으리니
7: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7: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7: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7: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7:29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세상 일이 내 마음대로 안되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의 원대로라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영원토록 살고 싶습니다. 또 그런 쪽으로 마음과 행동을 옮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것이 옳지 않음을 아시고 멸망, 혹은 심판이라는 것을 마련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노선으로 우리의 걸음을 날마다 수정케 하십니다. 물론 인간들도 나름대로 최후의 심판에 대해서 준비는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알 수 없는 공포심으로 인해 생긴 것입니다. 그 공포로 인하여 도리어 죄를 짓는 것이 또한 인간들입니다.

엄습해 오는 알 수 없는 공포에 대해 나름대로 대처하기 위해서 극도로 자기 방어에 나서다보니 그것이 곧 그 사람의 종교가 되고 그 사람이 삶이 되고 그리고 죄가 되어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인간들이 만든 것이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처방책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왜 예수님께서 '무너짐'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는 것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하신 모든 말씀은 온전한 율법임을 분명히 선언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흐지부지 될 말씀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내 말을 듣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이와 같으니라"라는 천명이 이런 취지입니다.

예수님의 설교 말씀은 누구를 편들기 위한 설교가 아니라 순전히 예수님께서 앞으로 하실 일에 관해서 있는 그대로 드러낸 설교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내려준 산상설교에 의해서 반드시 심판을 감행하시겠다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5:10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여기에 보면, '그리스도의 심판대'라는 표현이 있는 것을 보아서 예수님이 심판을 감행하시는 당사자이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5:22에 보면,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진정으로 우리가 이 말씀을 곧이곧대로 믿는다면, 인생을 처음부터 새로 시작해야 합니다. 여기서부터 말입니까? 예수님의 심판대로부터 말입니다.

심판을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심판을 맡기시는 그 취지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심판의 기준에는 예수님이 우리 인간을 위해 하신 일을 토대로 하겠다는 하나님의 의지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쉽게 생각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지 않았고 십자가의 대속의 일을 하시지도 않았다고 할 때, 그 때에 만약 심판이 감행된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은 확실하게 다르게 됩니다.

어떤 식으로 다를까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18에서 예수님 말씀하신 것처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라는 이 기준에 의해서 감행될 것입니다.

흔히들 예수님에게는 관심이 적고 그 대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을 두고자 하는 교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시고, 그 살아계신 분이 우리 인간에게 지시를 하시면, 그 지시에 따르는 자는 구원이 될 것이고, 그 지시를 무시하고 실천에 못 옮기는 자는 지옥에 갈 것이다고 여기는 사람이 참으로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런 분들에게 제가 예수님 이야기하면, 그 사람은 무슨 이야기를 못알아 듣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대꾸하십니다. "예수 이야기 하지 말고,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실천할 항목만 제시하란 말이야"하고 말입니다. 하나님도, 예수님도 모든 인간들이 이런 사고방식에 묶여 있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아십니다.

따라서 이런 사람에게는 예수님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그저 자신의 선한 행위만 발휘할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면서 교회에 출석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이 감행하는 심판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려주기 위해서 율법에 의한 심판이 얼마나 철저한가를 확실하게 해두시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설교를 하시는 것은 그 당시 유대 신학자들을 염두에 둔 말씀이었습니다. 그들은 모세 율법에 대해 연구해서 나름대로 구원과 저주의 기준을 장만한 것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그런 기준들은 예수님의 뜻을 제외시킨 채 나온 기준들입니다.

그러나 이미 하나님께서 모든 심판을 예수님에게 일임한 입장에 있다는 것을 유대 신학자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따라서 율법을 지켜서 천국에 들어가겠다는 생각이 얼마나 무모하고 어리석은 짓인가를 산상설교를 통해서 가르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9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즉 예수님의 가르치시는 것은 기존에 이미 유대인 사회나 인간 사회에 퍼져있는 그런 가르침과 전혀 다르다는 겁니다.

어떤 식으로 가르침이 다릅니까? 서기관들은, 율법을 해석하는데 있어 인간의 실천력으로도 실현 가능하다는 쪽으로 율법을 해석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지킬만해서 주신 것이지 아예 지키지도 못할 것이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농락하고 가지고 논 것 밖에 안되는 절대로 그런 취지로 율법을 주신 적이 없을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예수님의 율법 해석은 이러합니다. 그 어떤 인간이 나서도 도저히 지키지 못하는 것이 율법이라는 겁니다. 그렇다고해서 하나님께서 그 율법을 못지켜도 그냥 봐주는 법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나 인간은 꼼짝없이 율법에 갇혀 있는 셈이 되는 겁니다.

율법 안에 갇혀 있기에 율법을 온전히 지켜서 율법에 의해 의롭다함을 얻어서 영생을 얻든지, 아니면 율법을 항상 지켜내지 못해서 거룩치 못하다는 판결과 함께 영원한 지옥불에서 못 빠져 나오든지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처지를 나중에 분명히 알았던 사도 바울의 소감을 들어봅시다. 갈라디아서 3:10에 보면,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라고 고백합니다.

또 3:21-22에 보면,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성경이 모든 것을 죄아래 가두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실체를 밝히 보시되 어떤 식으로 보시느냐 하면, 모든 인간이, 그러니까 그 누구도 하나 예외없이 다 죄 안에 가두어두시기 위해서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 사실도 모르는채 율법을 잘 지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고 나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런 인간들의 한계를 보여주기 위해 갈라디아서 5:3에 보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 전체를 의무감으로 행해 보겠다는 자는 여전히 율법 아래에 가두워져 있는 사람에 해당됩니다. 물론 아직 구원받은 적이 없는 자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에 보면 이런 사람은, 성령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여전히 육체에 그대로 있는 자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당연히 약속의 자녀가 아니라 저주의 자녀입니다. 저주의 자녀들의 특징은 자신이 구원받는데 있어 '율법 지키기'가 필수적이라고 믿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2:16에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라고 말입니다.

즉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원수가 어떤 종류의 사람인가를 분명히 잘 파악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공로를 쓸데없는 것으로 돌리려는 사람은 아직도 자신이 누구지를 잘 모르고 사는 사람입니다. 바로 이런 비유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비유입니다.

만약 한 인간의 됨됨이를 집으로 비유한다면 어느 인간이 겉모습에 치중하지 자기 기초에 대해서 알고자 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비록 과거에 어두운 어린 시절을 보내었지만 장성하여서 번듯하게 잘 살면 과거의 모든 허물이 덮힌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심판에 있어서 따지는 것은 과거 어린 시절의 그림자가 아닙니다. 보다 더 근본적인 권세가 인간에게 작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악마의 힘입니다. 즉 자신이 그동안 악마의 힘의 사주를 받고 이 세상에서 출세하고자 노력해 왔다는 것을 자신의 본질로서 인정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기초로 있다는 사실을 어느 인간도 알 길이 없습니다. 오로지 성령님이 오실 때만 알 수 있습니다. 육적인 인간은 자신의 기초를 육적인 행함으로 달성할 수 있는 것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바로 그런 자들인 바리새인들이요 서기관들입니다.

그러나 야고보서 2:10의 말씀처럼,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됩니다. 따라서 당연히 우리는 지옥가야만 하는 운명을 갖고 이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죄를 남보다 많이 지었기에 죄인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죄인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단순히 죄질 가능성 정도가 아니라 아예 악마의 하수인 노릇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우리 인간들입니다. 어느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령, 즉 예수님께서 하신 일의 능력이 임하게 되면 이는 곧 사죄함의 능력이 도달된 것이고 그런 사람에 한해서 그 사람은 의인으로 다시 태어나는 겁니다.

물론 그리스도 안에서의 의인입니다. 그리스도 밖으로 나오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의인이 아닌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6:22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진정을 자신이 누군지를 아는 자에 한해서 죽도록 주님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 마태복음 13장의 비유들 - 인간은 절대로 구원받지 못한다 !! )

* 여기에 그 유명한 비유들이 나오는데, 이 비유들의 핵심은 '인간은 절대로 구원받지 못한다' 라는 것이다. 다만 외부에서 들어와서 빼내어줄 때에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처음에는 미미해 보이지만, 그러나 나중에는 진짜 하나님임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 지금은 예수님이 시시해 보이지만, 그러나 마지막 때에 가면 심판주임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종교 지도자들이 반대를 하니까, 그것이 상식적으로 맞아 보이지만, 그러나 사실은 그들이 마귀들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감정싸움도 아니고, 그 내막을 살펴보면, 하나님과 마귀의 엄청난 권세싸움이고, 대 혈투라는 것이다. 바로 비유가 이런 식으로 전개된다는 것이다.

* 그러므로 예수님의 천국비유는, 처음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갈수록 엄청난 내막이 들어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러 비유가 있는데, 같은 것의 반복이라고 봐도 된다는 것이다.

(마 13:1-9) 그 날에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섰더니 /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 뿌릴쌔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 씨 뿌리는 비유가 보여주는 것은, 간단한데, 어떤 인간도 마귀의 유혹을 이길 수 없고, 환난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이다. 재리의 유혹도 역시 그렇고 말이다. 그런데 어떻게 옥토에 떨어져서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가? 오직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다.

* 씨 뿌리는 비유가 확대되고 구체화 된 것이, 13장 49절에 나오는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낸다는 것이다. 인간이 무엇을 해서 악인이 선하게 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선택하셔서 골라낸다는 것이다. 그러니 행하는 것과는 정반대라는 것이다. 주께서 생겨나게 하신다는 것이다.

(마 13:49)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

그 당시에 이미 현미경이 발명되어서 정자와 난자를 발견했기에, 그래서 정자가 있다는 것은 아는데, 그렇다고 해서 형상을 포기하는 것이 아닌데, 이런 정자가 있다고 해도 말이다. 난자는 밭이고 남자의 정액 속에 이런 정자 안에 이미 아기가 들어있어서, 그래서 아기가 점점 더 커진다는 것이다. 정자가 그 밭에 떨어지는데, 마치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지듯이 말이다. 그렇게 해서 열매를 맺고 말이다.

이것은 그야말로 씨뿌리는 비유(?)인데, 여자는 수동적인 밭이고 남자가 씨인데, 즉 적극적인 자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남자의 정자 안에는 온전한 사람이 있는데, 다만 크기가 작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밭에 떨어져서 '탁' 하고 깨어지게 되면, 그 아이가 점점 커져서 나중에 엄마 배속에서 나와서 더 커져서 결국은 어른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할매들에게 물으면 다들 그렇게 알고 있는데, 그런데 이것이 '멘델' 이라는 신부에 의해서 깨어지는데, 그 안에 온전한 인간이 들어있지 않음을 나중에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그 안에 온전한 인간이 없다고 하면 심각한 일이 발생되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는 것이다.

지금 제가 창조의 비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인간들이 왜 이렇게 창조에 대해서 집착하는고 하니, 물론 십자가는 전혀 모르고, 신학이든 철학이든 간에 신이 피조물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거기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다는 것이다. 그 어떤 종교든 교회이든 말이다.



마태복음 13:1-9 예수님의 비유)

13:1 그 날에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13:2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섰더니
13:3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13:4 뿌릴쌔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13:5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13:6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13:7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13: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13:9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나는 내가 지킨다"라는 방식은 오기에 불과합니다. 어느 인간치고 오기없는 인간은 없습니다. 심지어 노숙자들에게 오기로 똘똘 뭉쳐져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모든 일을 이런 오기를 일체 인정하지 않는 쪽으로 실시 하십니다.

그건 왜 그럴까요? 인간들의 생각하는 바가 날 때부터 악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물론 이 말씀을 듣는 이들은 각자 마음 속에 새로운 각오와 오기로 말씀을 받게 됩니다.

즉 "예수님 말씀만 하옵소서. 제가 그 말씀대로 잘 지켜서 반드시 구원에 이르는 사람이 되겠습니다"라는 결심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엄청 오해한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는 그 뒤에 긴긴 말씀의 내력과 배경이 깔려 있는 상태에서 하십니다.

즉 마태복음 13장에 이를 때까지 그 전에 예레미야가 있었고, 이사야도 있었고. 다윗과 모세 시절도 있었고 그리고 창세기 시절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다 포함해서 지금 이 마태복음 13장에서 말씀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때부터 줄기차게 내려오는 그 일관성에 준해서 비유의 말씀을 하시기에, 이런 예수님 앞에서, "주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반드시 내가 지켜내어서 구원에 이르게 해야지"라고 마음 먹는 것은 너무나도 예수님의 마음과 다른 태도입니다.

마태복음 13:11에 보면,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사람들을 설득하고 그들의 오기와 각오를 충족시키는 말씀이라면 결코 이런 말씀을 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정답은 이것입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노력과 오기를 부린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전혀 그 장단에 맞추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왜 하나님은 일을 이렇게 하실까요? 여러분 하늘에서 내려오는 햇빛과 빗물이 사람들의 요구에 의해서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선인이든 악인이든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햇빛과 비를 내리십니다. 이 지상에서 인간들이 어떤 행동을 하든지 관계없이 말입니다.

바로 이러한 은혜성이 창세기 9장에 나오는 노아와의 맺은 약속으로 인해서 주어집니다. 바로 이 일방적 은혜성과 동일하게 마지막 최후의 심판을 통과하는 것도 오직 은혜를 입은 자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입니다. 오기와 신념으로 뭉쳐져서 산다고해서 심판에서 통과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인간들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예수님은 이런 은혜성 노선 밖으로 이탈하여 일하시지 않습니다. 즉 누구나 다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는 자를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은혜를 준 자에게만 은혜를 알게 하시는 방식으로만 인간들을 구원하십니다.

물론 이러한 취지에 대해서 여러분들은 어리둥절 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기본 선입견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제가 문제 하나 내겠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 자기 잘못을 분명히 알았습니까 아니면 몰랐습니까? 분명히 아담과 하와는 자기 잘못을 시인했습니다.

그렇다면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 안쫓겨 나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추방되었습니다. 우리네 상식같으면, 하나님은 자기 잘못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뭐든지 원상회복시켜 주는 자비로운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하나님은 가차없이 아담과 하와를 추방시켜 버렸습니다.

그 이유는, 결국 하나님께서 생명나무 위주로 움직이지 결코 인간 위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만드실 때, 인간 위주로, 인간을 절대시하기 위해서 만드신 것이 아니라, 생명나무의 의의와 가치를 절대시하기 위한 조치로서 인간들 만드신 겁니다.

에덴동산은 결코 인간을 위한 하나님이 혼수품이 아니었습니다. 생명나무의 취지를 위하여 만든 동산이었기에 그 안에 죽음의 선악과도 함께 있었고 아예 동산 한가운데를 자리 차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란 은혜없이는 존재할 가치가 아예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시는 겁니다.

앞으로 천국에 들어가야 될 자에게도 이 원칙이 그대로 적용됩니다. 순수하게 은혜로만 사람을 구원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과 예수님의 생각입니다.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진다"라는 의식은 도저히 하나님이 용납하지 않는 사고방식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우리의 책임감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인간이란 애초부터 '자기 것'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어떤 목사분이 저에게 이런 전화를 했습니다. "목사님, 개척교회하는데 힘드시지요?"라고 말입니다.

저는 이 소리를 듣고 너무 화가 났습니다. 왜냐하면 목사란, 진리를 알고 그 진리를 전할 수 있는 그것으로 전부를 다 얻은 것이고 그 즐거움과 행복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개척교회 때문에 힘든다고 느끼는 것은 곧, '자기 것'이 따로 있다는 말이 되고 이것은, '내 것의 인생은 결국 내가 책임져야 하지 않느냐"라는 식의 사고방식에 불과합니다.

이런 자는 구원되지 못할 자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은혜로만 구원시키십니다. 마치 비와 햇빛이 우리들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쏟아지듯이 말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에서는 예상치도 않는 사고와 병으로 고생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병실에서 저쪽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있노라면 은근히 화가 치밀게 마련입니다. 자기보다 더 나쁘고 악하고 제멋대로 사는 사람들은 저토록 건강하며 활기차게 살아가는데,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보려고 애쓰는 자기 자신은 왜 이처럼 악한 상황 속에서 헤매는지를 생각해 볼 때 부화가 치밀어오를 것입니다.

구약 욥기에 보면 욥이 이런 경우를 당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도 줄기차게 하나님께 원망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욥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광야에 비를 내리는 이유를 네가 아느냐?" 광야란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요. 텃밭도 없는 곳입니다. 짐승도 없는 곳입니다. 우리 인간들 눈으로 볼 때에 하나님은 정말 쓸데없는 곳에 비를 내리시는 은혜를 베푸시는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허비하는 듯한 은혜, 즉 광야같이 아무 짝도 소용없는 우리 자신들에게 비내리는 심정으로 하나님은 자신의 은혜됨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은혜를 입은 자만이 구원받는 것입니다.

광야보다 더 무가치한 것이 우리 자신인 것을 아는 자만이 천국 백성이라는 겁니다. 바로 이런 차원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는 겁니다. 오직 천국을 허락 받은 은혜받은 자를 골라내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의 '귀있는 자 들을지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 여러분 만약 들을 귀없다고 여겨봅시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비유에 대해서 어떻게 들리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일반적인 농사짓는 모습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나의 비유로 들리는 것이 아니라 실제 일어나는 경우를 하나 그냥 채택한 것에 불과합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를 다시 보게 되면,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쌔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입니다.

자... 여러분들은 어떤 식으로 이해하려고 합니까? 네 가지의 서로 다른 결과를 가져온 농사에 대해서 상식선에서 예수님께서 이야기 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복잡하게 됩니다. 우선 우리들이나 그 당시 사람들이나 제자들이, 농사철에 어떤 결과들이 여러 가지로 나올 것인가에 대해서 먼저 예수님에게 물어본 적이 있습니까?

예를 들면, "예수님, 어떻게 하면 농사 잘지을 수 있어요?"라고 물어본 적이 있느냐 말입니다. 분명코 없습니다. 이처럼 아무도 예수님에 대해서 농사에 관해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불쑥 예수님께서 이런 식으로 언급을 하셨다는 대부분의 사람은 이렇게 반응을 나타낼 것입니다. "그런데 어쩌란 말입니까?"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는, 이미 인간들이 천국에 대해서 먼저 물어볼 그 어떤 권한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사야 45:15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참 재미있지 않습니까? 분명히 '구원자'라고 하나님을 소개하면서도 그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숨어시는 형태로 구원을 하신다는 겁니다. 참으로 기이하고 놀라운 방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한가지 뿐입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구원에 환장해서 구원자나 하나님을 찾아다닌다 할지라고 구원은 어림도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들을 귀도 없는데 무슨 수로 예수님을 믿겠습니까? 따라서 비유 자체를 분해하면서 해석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결실이 맺혀야 될 자에게만 이해가 되는 식으로 예수님의 비유는 전개되는 겁니다.

어떠한 인간의 노력도 가미되지 않는 겁니다. 단순히 이미 옥토로 지정받았기에 그냥 예수님에 은혜에 의해서 열매가 맺힐 뿐인 것입니다. 참으로 이것이 너무나도 당연하고 쉽고 편하게 들리는 사람은 자기 오기를 포기한 사람이요 곧 천국의 백성들입니다.




마태복음 13:11-17 비유에 대한 해석)


13:11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
13:12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13:13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13:14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3: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13:16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13: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기독교는 예수님의 죽으심부터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에서 뭐가 나올까요? 옛말에, '한국사람은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등장할 때, 사람들은 잔뜩 기대하는 바가 있었습니다.

그 분에게서 나올 게 뭔가는 아예 따져 보지도 않고 무조건 얻을 것은 일단 챙겨보자는 식으로 나옵니다. 원래 구경꾼들이 모여들 때는 이유없이 그냥 모여드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이라는 분에 대한 소문이 들면, 그분이 직접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는 감안하지 않고, 새로운 것이라면 일단 갖고 보자는 식으로 접근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예수님은 모든 것을 빼앗으려 오신 분입니다. 소위 믿음이라는 것을 빼앗으려 오신 분입니다. 천국에 대한 믿음을 점검하려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제대로 된 믿음이 있는 자는 더욱 더 많이 받게 되고 천국에 대한 바른 믿음도 아니면서 믿음이 있다고 우기는 자는 그 엉터리 믿음까지 도로 폐기해 버리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어떤 자들이 빼앗길 수 밖에 없는 신앙을 소유한 자들입니까? 현대인들은 스스로 서려는 자들입니다. 교회와서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배워서는 그 배운 지식으로 이제는 자기 손에서 신앙을 유지하고 지탱하려는 방도를 찾으려고 합니다.

"하나님, 저도 이제 복음에 대해서, 천국이 뭔가에 대해서 어느 정도 자신감이 있습니다. 정말 이제부터는 제대로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돌리겠습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식의 신앙관과 천국관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는 바입니다.

지옥가는 것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 불가능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아니면 그 누구도 지옥에 들어갈 수 없듯이 천국도 같은 원리입니다. 마치 엄마의 손에 이끌리어 횡단보도를 건너는 어린 아이의 경우와 같습니다.

어린 아이는 엄마 한테 장담합니다. "엄마, 나 저 신호등의 신호가 무엇을 말하는지 이제 알아. 빨간불은 건너가지 말라는 것이고 파란 불은 건너가라는 신호래. 엄마 이제 나는 엄마 손목에 안잡혀도 나 힘으로 건너갈 것 같아"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횡단보도를 다 건너갈 때까지 그 아이는 엄마에게 단단히 손목이 붙잡혀 있어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들은 틈만 나면 자립하려고 하고 독립하고 독자적으로 자기 인생을 본인이 책임지려고 합니다.

인간이 독자적으로 봐서 얼마나 선한가 악한가를 가지고 그 인간의 가치가 결정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선함은 독자적인 자질이 아니라 누가 그 인간의 손목을 꽉 잡고 있는가 여부와 그분과의 관계성 문제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에 의해 붙잡힌 바가 되지 않는 천국과 신앙은 하늘에서 원하시는 그 천국과 신앙이 전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천국의 비밀'입니다. 보통 천국이라고 우리가 연상하기에는 그냥 하늘에 존재해 있는 그 '무엇'으로 생각하기 십상입니다.

제게 어릴 때 별명이 있습니다. '건들바위'입니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건들건들 거린다고 해서 집안 어른들이 붙여준 별명입니다. 집안 어른들 입장에서 저를 보기에 피곤했겠지요. 가만히 존재해 있어야지만 정확하게 초점을 맞추어 저를 관찰할 수 있는데, 자꾸 건들거리니까 정확하게 저를 관찰할 수가 없는거지요.

즉 변화나 운동이 없이 그냥 마냥 동일한 상태도 정지되어 있다면 정확히 그 내막과 실체를 규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참 변화도중에 있는 사물은 뭐가 뭔지 정확하게 포착이 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천국이 하늘에 그냥 고정되어 있기를 바랍니다. 마치 마당에서 옥상에 있는 물탱크를 쳐다보듯이 쳐다 봄의 대상으로 고정되어 있기를 바라는 거지요. 그런데 만약 그 물탱크가 미쳐 환장을 해서 옥상에 가만히 있지않고 갑가지 마당으로 내려와서 개집에도 들어갔다가, 헛간에서 굴려다니면서 온갖 것에 다 받혀서 유리창도 깨고, 정원의 꽃나무 가지도 부러지게 만들고, 안방을 진흙 진창으로 만들어 놓는다면, 도무지 종잡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혼잡을 한껏 떨고 난 뒤 물탱크가 옥상 위에 도로 올라가면서 말하기를 "네들이 물탱크를 알아?"라고 한다면 아마 기가 찰 것입니다. 고정된 물탱크가 아니라 움직이는 물탱크를 사람들이 감히 상상치도 못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 가운데 물탱크가 사납게 부산을 떨고 돌아다녔으니 사람들의 뇌리 속에 물탱크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바로 이와같이 천국이라는 것이 평소에 사람들이 생각한 그 '좋은 나라 이미지'로서의 천국이 아니라 한참 활동 중인 천국이라는 겁니다. 어떤 활동을 펼치는데요? 바로 사람들의 천국관을 헤집고 다니시면서 모조리 다 부숴놓는 그런 천국으로서의 활동을 뿜어내는 천국입니다.

즉 천국은 지금 예수님께서 하나의 완전품으로 다 만들어놓고서는 사람들 앞에서 세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활동 그 자체를 천국의 실상으로 받아줄 수 있느냐를 묻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7:20-21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천국은 현재 인간들 속에 들어와 있습니다. 물론 그들이 예상치도 못하는 참으로 약하고 쓸모없고 불편하고 귀찮기만 한 천국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씨뿌리는 비유를 통해서 왜 그 귀한 씨가 허비될 수 밖에 없었는가를 알려줍니다.

즉 씨를 인간 세상의 죄악으로 인해 허비되고 손해보는 것을 감수할 수 밖에 없는 점을 보여주면서 등장하는 천국의 비밀에 대해 소개하시는 겁니다. 천국이 마치 이 땅에서 철저하게 유린당하는 모습으로 등장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들이 적극적으로 천국을 탈환하기 위하여 악마로부터 사주를 받고 있다는 그 현실성 때문입니다. 즉 이 세상은 적극적으로 예수님이 소개하는 천국 활동을 저지하고 있는 세력에 의해서 장악당하고 있는 형편인데 예수님의 비유는 이 세상 형편을 정죄하는 양상으로 우리 인간에게 접근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씨를 뿌리는 농부에게 있어 최종 목표는 엄청난 수확입니다. 그런데 그 수확에 있어 땅의 그 어떠한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달성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세상관에 대해서 인간들은 어떤 식으로 대처하려고 합니까?

인간들은 스스로의 귀와 눈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즉 악마의 시험과 유혹을 스스로 감시해 대처하고 천국의 씨앗을 안 빼앗기려고 하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어떠한 고난과 어려움도 스스로의 인내성으로 극복하려고 합니다. 또한 세상의 그 많은 유혹도 스스로의 절제력으로 뿌리 칠 수 있다고 장담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천국의 비밀에 의해서 제거당하고 빼앗기게 될 수 밖에 없는 엉터리 믿음입니다. 천국의 활약상은 곧 예수님 혼자만의 활약상입니다. 그동안 인간들은 자기 나름대로 엉터리 천국과 구원노력에 열중하게 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인간들의 헛된 노고에 대해서 사정없이 정죄하고 있습니다.

이 이사야 예언의 성취는 예수님 손으로 처리되어야 합니다. 그들을 정죄할 수 있는 근거로서 예수님은 자신의 비유를 들고 나왔고, 그것이 시발이 되어 결국에는 예수님의 자신의 목숨이 십자가에서 없어지는 경우로서 이 세상의 부질없음을 고발하려 합니다.

바로 이러한 활동 전체가 곧 천국이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오늘 본문 16-17절에 보면, "그러나 너희 눈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무엇을 보고자했으며 무엇을 듣고자 했습니까? 그것은 모든 사람들의 구원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하나님의 참된 천국 활동을 보고자 했고 듣고자 했습니다. 인간들의 그동안 모든 수고를 무용지물을 만들어 버리는 그런 관점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아무런 보상도 없이, 아무런 희생도 없이 순전히 천국 자체의 활동으로 인해 천국이 드러나고 나타내는 그 현장을 보고자 했으며 듣고자 한 것입니다. 이 이사야 예언의 말씀은, '어떤 인간이 구원받느냐'에 초점을 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어떤 식으로 구원하느냐?'에 초점이 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이러 이러한 인간들이 구원된다'는 식으로 나오면, 너도 나도 그 인간 흉내내기에 분주할 것입니다. 구원이란 우리 쪽에서 출발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닙니다.

순전히 예수님의 허락만이 가능한 사항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허락'이 유효하려면 인간들 쪽에서 시도하는 모든 노력과 노고를 하나님께서 나서서 무(無로) 돌리고 차단시킬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우리 인간이 죽든지 살든지 상관두지 않고 그저 옥토에 뿌리진 씨앗처럼 거대한 결실을 맺는 그러한 옥토의 위력을 볼 날을 선지자는 애타게 고대했습니다. 누가 옥토인지 아닌지를 천국의 씨가 떨어져 봐야 아는 것입니다. 동시에 누가 옥토가 아닌지도 씨를 던져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모든 이에게 천국의 비밀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넘어질 자는 넘어지고 반항하고 대들자는 대들어라는 말입니다. 바로 이러한 현상 자체가 곧 천국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겁니다.

마태복음 13:24-30 가라지 비유)

13:24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13:25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13:26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13:27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13:28 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13:29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13:30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숫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우리는 우리 개인적인 일에만 열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열심히 살면 그런데로 괜찮은 인간이라고 자부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체를 다 내다 보십니다. 우주의 온 구석 구석을 다 보십니다.

그렇게 보면서, '천국' 이야기를 하십니다. 우리 개인들 입장에서 천국을 보면, 내가 그냥 그곳에 들어가기만 하면 성공이다고 보겠지만 예수님 입장에서 보면, 천국의 완성을 방해하고 공격하는 세력까지로도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8절에 보면, '원수'라는 용어가 등장하는 겁니다. 따라서 이 '천국의 원수'를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 있으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천국이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게 됩니다. 자칫하면 개인적인 천국이 될 공산이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고 가는 모습을 보고서 어떤 여자가 울었습니다. 예수님에게 동정을 한 것입니다. 즉 '자신의 처지는 아직 괜찮은데 거기에 비해 예수님의 처지는 형편없이 되어버렸다'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도리어 그 여인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네 자식을 위하여 울어라"고 말입니다. 즉 지금 우리는 우리 처지를 제대로 모르는채 천국을 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천국을 제대로 알려면 왜 예수님께서 가라지 이야기를 꼭 하셔야만 하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지난 시간에 저는 중요한 말을 했습니다. "천국은 고정적이지 않고 움직이고 활동하고 있는 중이다"고 말입니다. 사람들의 생리란, 좋은 것은 고정시켜서 그냥 따먹는 식으로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마치 감나무에서 다 익은 감을 따기만 하듯이 말입니다. 천국도 그런 식으로 고정화시켜서 들어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사고방식이 천국의 원수가 갖고 있는 천국관입니다. 천국은 어디 있습니까? 천국은 성령 안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은 어디있습니까? 성령은 바람같아서 어디 지정한 장소를 점유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타났다가도 없어지고, 없어졌다가도 다시 나타나는 것이 성령입니다.

그렇다면 아예 없는 것입니까? 없는 것이 아니라 있기는 있는데 우발적으로 나타날 때만 등장되는 겁니다. 그 예가 베드로전서 4:12-14에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 성령이 계시기는 계시지요? 그런데 그 성령께서 등장할 때 어떤 현상을 동반하고 나타난단 말입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고난받고 욕 얻어 먹는 형식으로 등장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가 성립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 이름으로 욕을 받는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마태복음 5:10-12에 보면,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진정한 '의(義)'는 오직 예수님과 동일한데 그 예수님의 의 때문에 수모를 당하면 도리어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말입니다. 같은 천국 백성인 선지자들도 동일한 경우를 당했다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가라지가 어떤 속성을 지녔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짐작하게 될 것 입니다. 부지런히 움직이고 변화하는 바람같은 성령 안에서만 천국이 들어있고, 그 천국이 이 현상 세계에 비칠 때는, 예수님의 의만을 믿기에 고난이 되는 형식으로 나온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가라지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확실하게 고정적인 것을 추구하겠지요?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천국을 마치 교회처럼 고정적인 것으로 오인하게 되면 아나니아와 삽비라 꼴이 됩니다.

사도행전 5장에 보면, 이 두 사람은 부부로서, 헌금의 반을 속이고 교회에 낸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은 사이좋게(?) 한 날에 죽고 말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성령이라는 어른신네가 그곳에 계신다는 사실을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천국이란 성령 안에 있다고 했지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눈에는 그저 고정적인 교회 조직책만 보인 것입니다. 그래서 속일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만약 교회를 세우면 가라지 같은 교회를 세우게 되고, 곧 천국의 정신과 정반대되는 천국관을 소개할 사람입니다. 만약 오늘 본문을 교회 중심으로 해석하면 이렇게 됩니다. "교회는 곧 천국이기에 만약 교회 운명과 그 방침에 대드는 자가 있으면 곧 가라지이다"고 말입니다.

교회의 순수와 거룩을 유지하기 위해 권위있게 치리를 하게 되는데, 이 치리하는 작업을 개시하면 반드시 권력의 중심축이 등장하기 마련입니다. 여기서 그들이 생각하는 이런 '가라지' 개념은 성령 안에 있는 천국과 전혀 다릅니다.

예를 들어, 스데반 집사님과 같이 "예수님의 의만을 우리가 믿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되면 이 사람은 그 교회에서 권위에 도전하는 가라지로 판정을 받게 되어 버립니다. 즉 "우리 당회에서 결정한대로 입 다물라. 네가 그렇게 주장하면 같은 교회 내에서 말씀에 권위를 가진 자가 둘이 생겨버린다. 따라서 그렇게 되면 교회 질서가 문란해지고 사람들의 심령을 당회에서 싸잡을 수 없어 운영하기 곤란하다."고 나옵니다.

교회 내의 권위와 권력을 목사 중심으로 하기 위해 치리라는 것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겁니다. 과연 이런 곳이 천국일까요? 누가 가라지냐 하는 기준은 에베소서 4:5-6절을 통해서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즉 이미 진정한 교회는 하나되고 말았습니다. 문제는 누구 중심으로 하나인가가 하는 점입니다.

고린도전서 1:12-13절에 보면, "이는 다름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눈에 보이는 그 어떤 사도나 전도자에게 세례를 받았든지 간에 십자가 지신 분은 오직 한 분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하나'라는 말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예를 들면, '부부는 한 몸이다'라는 말은 다 압니다. 하지만 그러니까 계속해서 한 몸되기 위해 애쓰지 아니하면 한 몸이 깨어진다는 말입니까? 절대로 그런 뜻이 아닙니다.

부부가 한 몸이라는 것은 실천에 관한 문제나 행함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믿음에 관한 문제입니다. 즉 아내가 남편보고 하는 말이 "여보, 우리가 한 몸되기 위해서 그동안 얼마나 애를 써왔는데 그래 당신은 날 실망시키냐? 우리 헤어져!"라고 나오는 식의 한 몸은 아닙니다.

'한 몸'되기 애쓴 것과 '한 몸'이다고 믿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만큼 다른 내용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만약 15년째 한 몸으로 잘 살아왔다가 자부하더라도 내일 또 무슨 한 몸이 깨어지는 사태가 일어날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때 가서 갈라서 버리면 지금까지 15년째 한 몸으로 살아온 것은 사실은 한 몸이 아니라 그저 한 몸처럼 유지되어 왔던 거지요. 한 몸됨이 깨어지는 요인이 발생되기 전까지에 유효한 관계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한 몸'이란 그런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사에서 그 어떤 일이 발생되고, 우리 자신들에게 어떤 상황이 일어나도 상관없이 십자가 지신 분은 오직 한 분, 예수님 뿐이기에 그 분으로 인해 이미 우리 '한 몸'인 것을 믿는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천국은 성령 안에 있는데, 그 성령 안에 있는 천국은, 오직 한 분 중심으로 이미 확정된 천국이요 알곡들입니다.

따라서 가라지란 딴 게 아니라, 오직 예수님만 쳐다보며 사는 자들이 아니라 천국과 예수님을 빙자해서 특정 조직체나 단체를 하나로 만들고 그것을 정화하고, 질서잡으려고 노력하는 모든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즉 믿음의 단체가 아니라 행함의 단체가 가라지입니다.

만약 천국갈 때에, 하나님께서 물으시기를, "너 누구 때문에 천국에 왔느냐?" 할 때, "좋은 목사님 만나서 천국왔다"고 해서는 아니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옆에 온 사람이 우기기를 "네만 좋은 목사 만나느냐? 우리 목사님도 얼마나 좋은데"라고 나올 것이 뻔합니다.

바로 이런 자들이 가라지입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 때문에 한 형제임을 인식하는 올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13:18-23 네 종류의 밭 비유)

13:18-23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리운 자요 /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합격이란 참 좋은 경우를 말합니다. 대학 입시에 합격하는 것도 좋지만 더 중요한 합격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천국에 대한 합격입니다. 천국의 합격자는 어떻게해서 배출될까요?

우선 천국이 어떠하길래 모든 인간이 다 천국에 합격자가 될 수 없는가 하는 점부터 알아두셔야 합니다. 천국은 유대 나라가 먼저 학수고대한 내용입니다. 그들은 옛날 다윗의 영화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 왕과 같은 위대한 왕을 보내셔서 이 세상에서 진정한 하나님 나라가 건설되리라는 희망과 소망을 그들은 한시도 포기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진정한 뜻을 분명히 모르기에 그저 하나님께서 계속적으로 선지자들을 보내주시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그런데 광야에서 웬 선지자가 나타났습니다. 그 선지자의 외치는 내용은 이것이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마태복음 3:2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정말 수많은 사람들이 공포심인지 아니면 기대감인지 모르지만 세례 요한의 말에 일단 동의하고 나섰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심판 때를 대비해서 미리 죄까지 씻는 의식인 물세례를 선지자 세례 요한의 손에 맡겨서 받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오신다는 메시야의 몰골은 그들을 실망시키기에 넉넉했습니다. 그에게는 아무 것도 없었던 것입니다. 자기 백성에게 줄 선물 보따리도 없었습니다.

그저 "나만 믿으라, 나만 따라오너라"라는 투였습니다. 물론 병고치고 귀신을 쫓아낸다는 소문의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만 그러나 그런 스캔들을 이르킨 자가 한 둘이 아니기에 과연 참된 선지나냐 메시야냐 하는 바는 율법에 정통한 성직자들의 유권해석에 달린 일이었습니다.

백성들의 권위는 역시 여전히 유대 성직자 그룹에다 두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내린 평가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실제적으로 유대 성직자의 말을 듣지 않으면 배겨나지 못하게 되어 있는 것이 그 당시 험악한 분위기였습니다.

여지간 하면 예수라는 작자도 고집 그만 부리고 성직자들과 타협의 손을 잡아주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과연 예수님께서 그런 의사가 있었을까요?

여기에 대해 예수님은 씨뿌리는 비유로 나섭니다. '당신네들은 마귀 자손이요"라고 노골적으로 말하는 그 이상의 내용을 본 비유는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구약에서 약속되어진 구원될 자는 오직 '남은 자'에 국한된다는 이 원리를 예수님을 유감없이 그 시대에 적용시키고자 하시는 겁니다.

'남은 자'란 이사야에 노골적으로 등장하는 개념으로서, 대부분이 구원의 자리에 탈락되어지는 현상을 두고 말합니다. 즉 천국문에서 서성이며 천국문이 열리기를 학수고대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열려진 천국문에 도리어 깔려서 멸망당하는 경우을 전제로 할 때만 비로소 '남은 자'라는 그룹이 형성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남은 자'란 심판이 맹렬하게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도저히 생겨날 수 없는 집단입니다. 세례요한 천국을 운운할 때도 필히 심판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당시 성직자들을 보고 세례 요한이 하는 말이, "너희들이 천국 가느니 차라리 길에 돌멩이가 천국간다"는 폭언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세례 요한은 길에 아무렇게나 무심하게 존재하는 돌멩이를 통해서 현재 성직자들의 구원탈락을 설명했는데 이것은 다소나마 성직자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기미가 엿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심한 발언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경우, 네 종류의 밭의 비유를 들어서 설명하시므로서, 애초에 구원될 그 어떤 기미조차 허락된 적이 없음을 강하게 시시하시는 겁니다. 씨 뿌리는 비유에는, 그 씨를 받는 4 종류의 밭은 참으로 무심하게 그냥 존재해 있을 뿐입니다. 적극적 나설 하등의 여지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밭은, 자신이 어떤 밭의 속성을 지니고 있는지도 본인에게도 은폐되어 있는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이제 천국의 씨앗이 떨어져봐야 자신이 어떤 종류의 속성이 지녔는지가 밝혀지게 됩니다. 이것이 밭의 특징입니다.

밭은 떨어진 씨에 의해서 그 결과를 그냥 보여주고 증거할 뿐입니다. 그런데 그 밭의 성질을 설명하는 예수님의 소개에 보면, 분명 밭은 나름대로 몸부림치고 애쓰고 노력하는 기색이 역역한 인간의 본능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즉 뭔가 이들은 누구로부터 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첫째 밭은, 악한 자가 방문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악한 자가 왜 이들을 찾아옵니까? 그들은 그들의 마음에 뿌려진 것의 가치를 악한 자가 제대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요, 그들에게 뿌려진 것이 악한 자의 운명을 절단낼 힘이 있음을 알기 때문에 사전에 제거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방문한 유형의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비록 악한 자의 방문을 그들이 짐작들을 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들은 누구입니까? 바로 '밭'입니다. 밭은 타인에 의해서 유린 당하면 당하는대로 바라볼 수 밖에 없는 무능력한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둘째의 유형도 마찬가지입니다. 돌밭에 씨가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는 잠시 즐거웠으나 난데없이 그에게 환란과 핍박이 덮쳐지는 입장에 놓이게 되었고, 그 환란을 이겨낼 만한 자력이 발동될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 그런 유형의 사람들을 말합니다.

왜 미리 환란이 쳐들어 온다든지 아니면, 아예 충분하게 즐거움의 시간을 가져서 그 즐거움을 나름대로 축적하려는 노력이 감행하려는 그런 시간적 여유도 없이 환란이 오느냐 이 말입니다. 그것은 기어이 그 자를 탈락시키겠다는 하나님의 굽힐 수 없는 애씀이 있었기에 생겨난 일입니다.

그렇다면 애초부터 잠시라도 말씀으로 인한 즐거움을 주지를 말든지 해야지만 왜 맛만 잠시 보이시고 잘라내기는 단호하게 잘라내시는 겁니까? 그것은 천국의 씨란 인간들의 관리 수완의 대상이 아님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주변에 참으로 이런 분들 많이 생겨납니다. 복음에 대해 반응이 갖게 되면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들뜨게 만들지요, "됐구나 천국 고기 한 마리 낚았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난데없이 본인이 감당 못할 환란과 핍박의 태풍과 지진이 덮쳐버리면, 언제 말씀이 남아 있었던가 하는 양으로 바짝 말라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 분들을 주위에 보시거든 주께서 천국에 안넣어 주시려고 일부로 그런 일들을 실시했다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 유형은,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입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버려서 결실치 못하는 유형이라고 예수님은 평가내리십니다. 환란과 핍박과는 반대성향을 지닌 방해물이지요. 일단 기분좋은 방해물입니다.

말씀을 듣고 갖는 것보다 더 기분좋은 내용물이기에 '유혹'이라는 말이 성립되는 겁니다. 이 유혹은 스스로 자신을 살려내어 보려는 것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산다는 것 자체를 유혹으로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당연한 태도처럼 인식들 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큰 오산이십니다. 그런데 왜 살아야 합니까? 왜 꼭 살아남아야 하느냐 이 말입니다. 이유도 없이, 목적도 없이 왜 살아남아야 합니까? 사람에게는 누구나 살아야 한다는 본능이 우선입니다.

존재가 무엇이며 하나님이 무엇이며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서 궁금해 하는 것은 거친 인생살이를 하면서 그저 일순간 스쳐지나가는 기분 전환용에 불과합니다. 한 예를 들면, 살기에 바쁜 일과 속에서 야외로 드리이브하는 와중에 순간 청초롭게 피어있는 들국화를 보았다고 칩시다.

참 아름답지요. 그 청순한 아름다움에 흠뻑취하고 싶지요. 새로운 신선한 세계에 몰입하고 싶은 유혹도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서 바이어로부터 물건 주문 전화를 받는다면 황급히 차를 다시 도시쪽으로 몰게 됩니다. 아름답다고 여기고 꺾어놓은 들국화도 2Km도 못가서 창문 내리고 갈가에 내버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사는 것보다 더 시급하고 다급하고 심각스러운 문제가 또 없기 때문입니다. 종교도 좋고, 교회도 좋고 아름답지만 그런 것들은 인생이 한가로울 때나 찾는 멋진 장식거리에 불과합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현재 내가 살아있다는 이것이요, 살아있기에 또 살아야 한다는 절갑함 뿐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을 이기고 천국에 합격한 사람이 나올 수 있을까요? 절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 이외는 말입니다.

특히 젊은 분들에게 있어 인생 자체를 포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아직 인생의 맛도 못하고 꽃봉오리도 채 피지 못했는데 죽는 이야기를 하게 되면 "그런 말씀 마세요"라고 나옵니다. 물론 연세많은 신 노인분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이제 죽을 마당에 도달해서, 산다는 거 자체가 귀찮고 번거럽고, 시시하고, 부담이 되기에, 임종시에 자녀를 앉혀놓고 쉽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애들아. 너희들이 신앙생활 잘해라"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듣는 젊은 자식들은 은근히 불쾌하지요. "당신께서는 인생의 쓴맛, 단맛 다 보았지만 아직 저희들은 제대로 맛도 못보았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어쨌든 생활에 대한 염려와 재물에 대한 유혹으로 인해 정작 결실을 맺어야 될 씨는 그 밭에서는 죽어가게 됩니다. 외부에서 결실을 못맺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본인의 독한 생존 의지가 주어진 천국의 씨도 없어버리고 그 길도 지워버리고 뭉개버리는 결과를 낳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의 어느 누가 악마를 이기고, 환란과 핍박을 이기고, 재물의 유혹도 마다하고 생존에 개의치 않고 살아갈 수 있는 능력자가 누가 있습니까? 바로 여기에 '남은 자'의 비밀이 나타나는 겁니다.

'남은 자'란 심판이 치열하게 벌어지는 현장에서만 나타나는 겁니다. 악마로 하여금 말씀을 빼앗게 하고, 환란이 들이닥치게 하고, 생활고로 인한 걱정과 돈의 유혹으로 심판을 감행하는 겁니다. 따라서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자력으로 이런 것을 이길 위인이 없음을 확실히 해두는 겁니다.

남은 자란, '자기 행함'으로 구원되는 자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바로 은혜로 구원받을 자들입니다. 밭은 그 특성상 자력으로 자신의 성질과 속성을 수정할 수 없는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씨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나타내느냐를 보고 "자신이 옥토이구나" 라고 파악할 뿐입니다.

이 말은 곧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남게 되는 '남은 자' 가 따로 있다는 것이 이 비유를 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로마서 11:5-7에 보면,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 그런즉 어떠하뇨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제 이 말씀으로 심판 작업에 나서십니다. 이것이 곧 움직이는 천국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마태복음 13:31-32 겨자씨 비유)


13:31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13:32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어떤 사람이 현실관을 알려면, 그 사람이 어떤 일이 일어날 때 즐거워하며, 또 어떤 일이 일어날 때 슬퍼하느냐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신의 존재까지 인정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하나님관은 자신의 현실관을 충족시키는 그런 하나님관이 되기 마련입니다.

즉 "하나님, ......"라고 부를 때는, 반드시 뒤에 요구하는 바가 따라 붙게 마련입니다. 그 요구사항은 곧 자신이 생각해 놓은 현실관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성경은 우리 눈 앞에 있는 겁니까?

성경 안에는 천국에 대해서 제대로 아시는 분의 생각이 들어 있습니다. 또한 그분이 제시하는 이 세상에 대한 현실관이 담겨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과 인간들의 현실관의 상호 충돌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개개인의 잘못된 현실관에 대해서 그 개인의 자질이나 인품가지고 지적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보니, 인간들이라는 자들은 태어 날 때부터 잘못된 현실관을 드러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즉 인간이라면 당연히 엉터리 현실관을 소지하고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따라서 인간이라면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의 현실관을 버리고 예수님을 현실관을 참 현실을 받아드릴 능력을 가진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은 인류에게 위기의 종말입니다. 그것도 전혀 해결책이 없는 종말입니다. 처음부터 인간이란 끝장나 버린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위기의 인간 세계에 천국이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무시당할 만한 모습으로 등장됩니다.

예수님은 천국에 대한 시리즈에서 이번에는 씨로 나갑니다. 처음에는 씨 뿌리는 농부에 비유하더니만, 그 다음에는 밭의 상태를 가지고 천국에 비유하셨고, 이제는 씨에 대해서 비유하셨습니다. 그런데 세 가지 경우 모두다 그 자체로서 순결 한 것이 아니라 항상 뭔가 악한 것이 섞여 들어와 있는 상태에서 천국을 설명하고 계십니다.

이 섞임으로 인해 천국을 만드시는 주인공에 대한 오해와 곡해가 이 세상에 퍼지게 됩니다. 즉 쉽게 결판내지 않느냐 하는 것이지요. 마태복음 11장에 보면 세례 요한도 이런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오실 메시야가 과연 당신 맞습니까?"

이 질문은 오늘날 우리들도 마음속으로 늘 하게 됩니다. 즉 "과연 예수 믿는다고해서 하늘로부터 특별 대우를 받기는 받을까? 혹시 아무 것도 아닌데 혼자서 엉뚱한 착각 속에 빠져 있는게 아닐까?"라고 말입니다. 일반 교인들이 제일 빠지기 쉬운 혼란이 이런 것들입니다.

왜 예수 안믿는 자들이 세상 일이 술술 잘 풀리는가 하는 겁니다. 시편 73:1-11에 보면,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실족할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뻔 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 살찜으로 저희 눈이 솟아나며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지나며 저희는 능욕하며 악하게 압제하여 말하며 거만히 말하며 저희 입은 하늘에 두고 저희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그러므로 그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극히 높은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하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1절과 11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극히 높은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하도다"입니다. 분명히 신자는 하나님께서 선을 베푸신다는 점을 믿습니다.

그런데 그 선이라는 것이 2절부터 10절까지의 요소는 아니라는 겁니다. 물론 전에는 선이라는 것이 2절부터 10절까지의 내용인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11절을 보고서 참된 선이란 11절과 같은 불신의 고백이 나오지 않는 바로 그점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실 사람이 하나님의 섬기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인데 세상이 타락하고 난 뒤에는 도리어 이런 당연함이 비난받을 짓이 되고 만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상태에 이르면서도 인간들은 세상에 대해서 여전히 불만이 많아서 얼른 멋진 새 세상에 펼쳐지기를 고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물론 그들이 생각하는 '천국'이라는 것이지요. 바로 참된 천국의 주인공 되시는 분은 이 땅에서 이 거짓된 천국관으로 인해 괴로움을 당하는 겁니다. 한쪽으로는 왜 당장 하늘에서 불심판이 내려떨어지지 않느냐고 다구치고 다른 한쪽에서는 자신들의 행함으로 천국을 달성할 수 있는 희망과 가능성을 내비치고 있는 상황입니다.

자...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누가복음 9:53-55에 보면,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고로 저희가 받아 들이지 아니하는지라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가로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분명히 예수님께서 불의 심판주요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게 하실 능력도 계신 분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천국은 그렇게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천국이 바로 불의 심판으로 시작해서 끝난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분명 천국에 대해서 잘못알고 계신 분들입니다. 불심판보다 더 무서운 것이 세상을 심판하는 과정을 통해서 천국을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무서운 불심판을 내리시기 전에 왜 사람들은 불심판을 받아 마땅한가를 뚜렷이 하시는 작업부터 시작을 하시는 겁니다. 사람이란 남이 하는 것은 조그만한 실수도 참지 못하면서도 자신에 대해서 잘도 용납합니다.

죄를 지었을 때는 전혀 아픔을 느끼지 못하다가 그 죄에 대한 벌이라고 여기면 갑자기 대단히 억울하다는 핑계를 댑니다. 강도가 강도짓해도 수십가지의 구실과 변명을 당장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남들보다 못배워서 뭐가 죄인줄 몰랐다든지 혹은,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정상적인 방법으로 살 도리가 없었다든지, 주위 사람들이 자신이 무시해서 사회에 대한 복수심으로 무작위적으로 행동했다든지 하면서 온갖 변명을 늘어놓게 됩니다.

하지만 실제로 하늘에서 불 심판이 떨어질 때에 이 핑계, 저 핑계 다 소용없이 마땅히 불심판 받아도 싸다는 근거를 마련하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그냥 평범하면서도 열심히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남에게 나쁜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자에게 하늘에서 불심판 떨어졌을 때, 그 사람은 혹시 하나님께 항의하거나 핑계를 늘어놓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요? 이럴 경우에 아예 핑계치도 못할 방법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마태복음 11:5-6입니다.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즉 예수님께서는 무상으로 은혜를 주시는 분인 것을 믿는 자에게만 기사회생하듯이 천국에 들어가는 방식입니다. 즉 소경되었다가 눈 뜬 사람에게 다음과 물어보세요. 뭐라도 답변할까요? "당신은 어떻게해서 눈을 뜨게 되었습니까?" 그 사람은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을 겁니다. "제가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 예수님께서 찾아와서 해 놓은 작업입니다."

그런데 이 고백을 듣는 사람은 불심판 이상으로 큰 낙심을 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서 나올 대책은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죠. 이것은 개별적인 자질 문제가 아니라 아담 노선 안에 들어있기에 당연히 나올 수 밖에 없는 속성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간이 과연 누구이며 왜 그런 존재로서 살아가야 하는가를 보여줍니다. 이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인간은 거기서 자신이 죄인임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죄인임을 안다고해서 구원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인간쪽에서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천국쪽에서 다가옵니다. 천국에 흡수, 통합되는 양식으로 구원이 되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그런데 그렇게 다가오시는 천국의 모습이 인간들의 눈에서 참으로 무시할만하고 시시하게 보이는 양상으로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마치 겨자씨가 떨어진 사건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작은 겨자씨 안에 온 우주를 덮을 만큼 커대란 천국이 들어있다는 겁니다. 에베소서 1:18-20절에 보면,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 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즉 지극히 작은 겨자씨 안에는 온 우주보다 더 큰 '지극히 크신 천국'이 들어 있는 현실로서 우리에게 다가왔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과연 지금도 그러합니까?

이사야 50:5-6에 보면,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열으셨으므로 내가 거역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천국이란 누군가의 의로운 행위나 행함이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대신 행동자'로서 등장하신 분의 수난으로 인해 천국이 완성이 되었기에 이 천국에 포함된 오늘날 성도들도 이와같은 수모를 같이 당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에도 천국은 여전히 겨자씨입니다. 이러한 성도의 수모는, 인간의 그 어떤 행함의 가치를 일체 인정하지 않는데서 비롯됩니다. 하지만 장차 천국의 영광된 상태에 다가오고 이 세상이 불로 파멸되고 나면, 천국이 바로 온 우주보다 더 크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13:33-35 누룩 비유)

13:33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13:34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13:35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천국은 가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예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뭘해도 죄이기 때문입니다. 죄인되는 인간이 구상하는 천국은 처음부터 천국이 아니라 가짜입니다. 가짜 천국이 늘 등장하는 이유는, 인간이 자기 쪽에서부터 천국을 출발시키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천국은 '감추인 대상'이 아니라 '공개-공개'로 계속 이어질 나라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35절에 보면, '감추인 것을 드러내는' 식으로 천국이 나타난다는 겁니다. 흔히들,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그런데 인간들은 누구나 '예수님'에 대한 나름대로 선입견을 갖고 이 선입견을 가지고 자기만큼은 '들을 귀'를 가졌노라고 누구나 자신만만해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셔도 그 내용은 자기에게 정확하게 이해된다는 식으로 해석하게 마련입니다. 즉 본래의 예수님의 뜻은 사라지고 자신이 납득하는 식으로 이해 해 놓고서는, "나는 들을 귀가 있으니 이렇게 예수님 말씀이 잘도 들리는구나"라고 오해할 소지가 넉넉히 있다는 말입니다.

과연 이 주장이 옳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감추인 것을 드러내는 것'조차도 순전히 예수님만이 수행해야 될 업무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즉 예수님의 '드러내심'으로 인해, 소위 인간들이 '드러냄'의 능력은 무용지물이라는 것으로 확실해져 버립니다.

인간들도 조금만 꼬투리만 있어도 그것을 '하나님의 드러냄의 흔적'이라고 여기고, 그것을 근거로하여 천국에까지 이르고자 합니다. 바로 이러한 선입견이 뭐가 문제가 되는 겁니까? 제가 누가복음 5장에 나오는 베드로와 예수님의 첫만남의 경우의 예를 들겠습니다.

베드로는 밤새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등장하셨습니다.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했습니다. 물론 베드로도 그 전에 여러번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졌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던지는 것은 순전히 예수님 말씀에 의지해서 던지는 겁니다. 그랬더니만 배가 잠길 만큼 많은 양의 고기가 잡혔습니다.

이런 상황을 접하고 난 뒤에 베드로가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주여, 저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자, 어떻게 베드로는 한 무더기 쌓여있는 고기 더미를 바라보면서 자신의 죄인됨에 관심이 생길 수가 있었던 말입니까?

고기하고 죄하고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이 고기 잡힘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의 죄인됨까지 연장되어 꽂히는 겁니다. 오늘 본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서, '여자가 밀가루 반죽에다 이스트를 집어 넣었구나'를 먼저 생각하지 누가 "주여 나를 떠나소서. 저는 죄인입니다'라는 마음이 들겠냐 말입니다. 베드로의 경우, 고기와 자기 죄인됨이 무관한 것처럼 보이듯이, 오늘 본문을 대하는 우리도 이 본문과 우리의 죄인됨이 무관한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알 고 있는 천국은 엉터리이고, 참된 천국은 감추어진 형태로 활동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이와 비슷한 경우가 사도행전 9장에도 니옵니다. 사울이라는 사람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에 대해서 명확하게 알고 있다고 자부했던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입니다. 바리새인이라면 예수님도 인정해 주었듯이 인간으로서 행할 수 있는 최고 경지의 종교 행위를 보이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최고라고 하니 자신이 보일 수 있는 종교 순수성은 어떤 잘못도 없다고 장담할 만 합니다.

그런데 그랬던 그가 다메섹을 내려가면서 하늘에 계시는 그 누군가를 만나는 되는데 그 만나는 그 순간 그는 모든 것이 거꾸로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즉 참 하나님을 뵙게 되었습니다. 그 참 하나님께서 자신을 소개하는데 그것이 너무나 경악스럽게도, 자신이 핍박했던 나사렛 예수님이었습니다.

너무나도 잘못되게 하나님을 알고 있었던 자신과 참 하나님과의 만남은 곧 죽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잘못되게 아는 자가 하나님을 대면하는 경우 즉사한다는 것은, 레위기 10장에도 나옵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일반 백성들보기에 참으로 거룩한 일에 종사하는 사명자로 보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쓰레기 같은 자신들은 죽여도 설마 저토록 숭고한 일을 감당하는 사람은 아까워서도 함부로 죽이지 않을 것이라고 짐작들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답과 아비후는 향로를 바치다가 그 향로불에서 폭발한 진노의 불에 의해서 그 자리에서 즉사했습니다.

왜 하나님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하고 하나님과 가까이 했느냐는 겁니다. 민수기 16장에 봐도, 레위지파에 속하는 고라자손들이 모세와 아론에게 반항하기를, 왜 거룩한 제사장 직무를 너희들이 독점하고 있느냐 하고 대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향로불에서 쏟아진 진노의 불에 의해서 250명이 현장에서 즉사했습니다.

이처럼 사람을 죽이시는 그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즉 "천국이란 어떤 여자가 밀가룩 반죽에 섞어넣은 누룩과 같다"고 했을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이 고백해야 마땅합니다. "주여, 저를 죽이옵소서.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느낌이 오는 것이 아니라 "아, 천국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소개하시는구나 이 참에 잘 들어 놓았다가 나도 천국에 가야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바로 이런 생각이 죄악된 생각이라는 겁니다.

베드로의 고기 잡음이나 사도 바울의 다메섹 만남이나 고라자손들의 횡사나, 나답과 아비후 제사장의 즉사들은 모두, 하나님의 일은 반드시 사람의 죽음을 유발시키면서 진행됨을 보이는 증거들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마땅히 죽을 죄인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왜 천국은 감추진 모습으로 등장됩니까? 그것은 죄악된 인간들이 하나님의 공개성을 빌미로 해서 가짜 천국과 가짜 하나님을 제조해 내는 범죄를 저지를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6:25-26에 보면,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전부터 감취었다가 이제는 나타내신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런 말씀을 하시는 그 바탕에서, 자신의 죽음경험이 깔려 있습니다. 자신이 죄인으로서 마땅히 죽어야 하지만 천국에 대한 달성은 자신 소관이 아니라 순전히 예수님 소관이라는 겁니다.

즉 사도 바울과 다른 사람들의 차이점은, 모든 인간들은 자신이 살아있는 존재임을 기정사실로 여기고 그 위에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시작하고 펼쳐 나가려고 합니다. 이런 사고방식이 곧 죄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의 만남을 통해서 이 사실을 알았고,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예수님은 사도 바울에게 , "왜 너는 마땅히 죽어야 되는가?"를 최초로 알려주신 분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천국 비유를 통해서 이런 취지로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살기 위해서, 혹은 천국가기 위하여 말씀을 대하는 그 자체가 죄이기에 시도를 피해서 숨어있는 모습으로 천국이 나타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즉 예수님의 모든 활동이란, 반드시 인간의 죄를 들추어내는 양상으로 진행된다는 것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을 긍정하는 식으로 일을 하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감추인 것을 드러내는 그 작업은 순전히 예수님 혼자서 담당하시는 유일한 담당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우리가 가고 싶어 가지는 것이 아니라, 감춰진 것을 드러내시는 예수님의 소원 안에 베드로나 사도 바울이나 오늘날 우리 성도들이 특정인들이 반드시 구원되어야 될 요건이 들어 있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게 됩니다.

즉 천국은 우리 소원이라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자신의 소원이요, 자신의 일이기 때문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 증거가 바로 우리 안에 주님의 사랑이 들어 있다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13: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즉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점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안에 들어있는 예수님의 사랑을 위해 예수님은 일 하십니다. 그 가운데서 우리는 이미 죽은자로 계속 들추어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누룩과 부풀어오르는 밀가죽 반죽의 관계와 같습니다. 아무 것도 손에 잡히는 것도 없고, 밀가룩 반죽이 따로 손 쓸 빌미도 전혀 없는 상태에서 밀가루 반죽은 계속 부풀어집니다.

결코 밀가루 반죽의 공로가 아닙니다. 단지 밀가루 반죽은 누룩의 능력을 외부로 발산시킬 뿐이지요. 이런 자가 성도입니다.




마태복음 13:36-43 가라지 비유)

13:36 이에 예수께서 무리를 떠나사 집에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소서
13:37 대답하여 가라사대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13:38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13:39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때는 세상 끝이요 추숫군은 천사들이니
13:40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것 같이 세상끝에도 그러하리라
13:41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13:42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13:43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창세기 1장에 보면, 천지 창조에 관한 하나님의 능력이 나와 있습니다. 정말이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계속해 뭔가 있게 하셨습니다. 이 능력은 도무지 인간들이 행할 수 없는 겁니다.

그런데 과연 인간들이 이런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갖고 있습니까? 형식적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감탄과 공경을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대자연을 꾸며주신 것에 대해서는 감사합니다. 박수를 보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우리 인간에게 이러쿵 저러쿵 간섭하지 마시오. 우리는 당신의 로봇이 아닙니다. 우리는 기계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자존심이 있다구요"라는 투로 나옵니다.

인생의 어느 한 시점에서 그런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 땅에 태어날부터 그런 심성을 가지고 태어난 것입니다. 마치 어린 아이가 부모에 대해서 고마움과 사랑은 이해한다고 하면서, 단지 부모라는 이유 때문에 자식의 인생에 관여하는 것을 자식된 자가 용납하지 않고 거부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인간들이 왜 이런 현상을 보이는 것입니까? 그것은 자기 존재의 자기는 어쨌든 자신이 가져야 한다고 생각으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무엘하 22:2-3절을 봅시다.

다윗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오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 나를 흉악에서 구원하셨도다"

여기서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라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그것은 다윗은 비로소 자신의 존재의 자리는 더 이상 자기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는 겁니다. 여호와 하나님에게 자기 존재의 자리를 박탈 당한 것입니다.

다윗이 일부로 스스로 자신을 갱신하기 위하여 노력해서 이런 현상이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본의 아니게 끊임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일들을 계속 부여받게 됩니다. 마치 자기에게로 쏟아지는 화살처럼 말입니다.

그럴 때마다 다윗은 자기 딴에 분주하고 그 모든 하나님의 숙제들을 처리한다고 했지만 항상 드러나는 것은 자신의 불실함과 죄악들입니다. 즉 자신의 본질이었습니다. 그 본질은 다윗에게는 절망적이었습니다.

즉 아무리해도 자신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의 능력이 다소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아예 애초부터 하나님에게 죄인이기 때문인 것을 알았습니다. 이제 그는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서 다윗이 알았던 것은, 여호와께서 친히 자신의 반석이고 요새시오, 구원자이심으로 이미 등단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로서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성도는 구원된다는 사실을 그는 고백합니다. 제사나 번제나 화목제 드림으로 구원되는게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못난 다윗을 구원하시는 이 능력은 어디서 온 능력입니까? 바로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 능력이 창조할 그 당시에만 적용되고 지금은 중단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창조의 능력은 지금도 계속됩니다.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데서 살리시는 능력은 지금도 여전하십니다. 이 능력 말고 구원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을 대하면서 사람들은 흔히 생각하기를, '천국의 아들'은 마땅히 자신이며, 자기처럼 믿지 않는다든지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은 모두 가라지인 것처럼 여기기 쉽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딱 자신을 지칭해서 쓰여진 말씀으로 간주하고 싶어합니다.

이것은 개인 뿐만 아니라 교회차원에서도, 교단이나 종교 차원에서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 교인들은 전부다 '천국의 아들'들이요, 불교 신자들은 가라지라고 해석하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 나오는 사람은 천국의 아들들이요, 다른 교회 다니는 사람은 모두 악마가 뿌려놓은 가라지로 해석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해석 자체가 아직도 여전히 '자기 존재 바탕'을 계속 자신이 가져야 한다고 여기는 사람입니다. 즉 여호와가 자신의 반석이 아니라 자신이 자기의 반석이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창조의 능력을 발휘하시는 분입니다. 이 예수님에 의해서 자기 존재의 자리를 압수당한 자만이 천국의 아들입니다. 그렇지 않고, 자기 자리가 사라질까봐 안절부절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예수님이 찾아들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스스로 자신을 구원하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온갖 신학적 지식과, 성경 지식으로 자기 머리 위에 뒤집어 씌우면서 해결하려고 하고 자기 운명을 결정지우려고 합니다. 인간이 뭔가 미래에 대해서 기대를 하게 되면 그 때까지 아직 기간이 남아 있는 지금부터 초조하고 걱정하고 염려하게 됩니다.

내일 일을 기약하면 오늘부터 걱정이 늘어지게 됩니다. '내일 그 일이 안 이루어질까봐' 말입니다. 그러나 인생이란 무엇입니까? 저는 리모콘에 의해 순간적으로 눈 앞에서 사라지는 T.V 드라마로 간주합니다. 드라마에 심취해 있을 때는 마치 현실처럼 배우들과 같이 울기도하고 같이 웃기도 합니다.

그러나 잠이 와서 막상 그 리모콘에 손가락을 눌리는 순간 그 허구적 상황은 어디론가 없어져 버립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허구였던 것입니다. 실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네 인생이라는 것도 모두들 자기 존재 바탕 위주로 생각하기 때문에 나름대로 드라마를 연출하고 제작하고 있습니다. 자기 본위로 자기 위주로 만드는 그 드라마 안에서 같이 울고 같이 웃기도 하지만 어느날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의 리모콘을 눌려는 순간, 그 모든 허구는 허구로서 막을 닫고 남은 것은, 하나님의 창조성이라는 실제 뿐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이 나오는 천국의 아들이라든지, 가라지라는 대상은 순전히 예수님의 손에 달린 것이지 일방적으로 '우리 자신이라고' 우길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어떤 식으로 달성하십니까?

오늘 본문 말씀은 대단히 간단합니다. 즉 예수님 본인이 뿌려놓은 '의(義)의 씨앗'을 스스로 되찾아가는 식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의의 씨앗을 세상을 뿌려놓으니 옆에 있는 악한 천사도 자신의 씨앗을 세상에 뿌려놓은 겁니다.

그러니까 누가 의의 씨앗이고 악의 씨앗인지는 지상의 인간들은 알 길이 없는 거지요. 이제 남은 것은 예수님의 활동 여부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활동은 오로지 창조 능력에 준해서 이루어집니다. 없는데서 있게하고, 죽은 데서 살리는 능력으로만 구원하십니다. 이 말은 곧 인간의 행함이 전혀 필요치 않다는 말입니다. 전혀 소용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저 자신의 숙제를 자신이 행하시는 것 뿐입니다. 그 숙제가 무엇일까요? 고린도후서 5:21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자, 이 말씀을 누가 손수 이루어내시는 겁니까? 우리 인간들이 스스로 구원받기 위해 이 말씀을 실천에 옮겨야 된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순전히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따라서 이런 하나님의 일로 말미암아 나타난 결과가 무엇인고 하니, '오로지 예수님의 공로로만 구원됨!'이라는 놀라운 고백입니다.

이 고백은, 모든 가라지와 악마의 유혹을 뚫은 가운데 나온 고백입니다. 그리고 내가 나 존재의 반석이요 요새이며 구원자라는 너무나도 당연한 상식을 뒤엎고 나오는 하나님의 창조 능력의 실천력 행사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작업이 세상에 드러날 때는 반드시 '잃었다가 다시 얻은' 형식으로만 이루어진다고 하십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세 개의 비유가 나옵니다. 하나는 양 100 마리가 있었는데 목자는 그 중에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에게만 관심을 두고 있었다는 비유입니다.

그 다음 비유는, 어떤 처녀가 동전을 잃어버렸는데, 단지 잃어버렸다는 사실 때문에 밤 새도록 찾으려고 했고 과연 찾아서 다음 날 친구들과 잔치를 벌렸다는 비유입니다.

마지막 비유는 탕자의 비유입니다. 아버지의 관심사는, 늘 아버지 곁에 있어 아에 '잃어버렸음'이 성립할 수도 없는 아드렝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잃어버렸던 그 탕자가 되돌아 오기만을 고대하는 비유입니다.

이 세 가지 비유가 의미하는 것은, 스스로 천국의 아들이 되고 싶다고해서 하나님께서 거기에 호응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기 존재만 최종 고수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신은 당연히 지옥가야만 하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받은 업무를 수행하는 결과로서 천지창조의 능력을 발휘하여서 구원된 자만이 천국의 아들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 능력은 이미 믿고 난 뒤에서 영원토록 지속될 능력입니다. 일단 구원받았다고 그 다음 부터는 그 사람 행위의 소관으로 전환되는 것이 아닙니다.

시작도 창조능력이요 끝도 창조능력입니다.

 



마태복음 13:44 보물 비유)

13: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과학이란 그 출발점에 대해서 만큼은 인간들 사이를 차별하지 않습니다. 그저 자신의 능력껏 솜씨를 부리기 따라서 본인의 가치가 결정된다고 봅니다. 만약 출발점부터 차별을 두게되면 많은 사람들은 불공평함을 보고 그런 세계를 거부할 것이 뻔합니다.

이처럼 인간들의 세계란 능력에 의해 자기 장래를 결정되는 세계입니다. 만약 이런 사고방식을 그대로 지닌 채 성경을 보게 되면 구원받는 문제나 천국 가는 것도 자신의 능력 발휘에 달렸다고 보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성령이라는 열쇠 없이는 전혀 그 비밀을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무시하고 성경을 보게 되면 여기서 인간적인 생각, 제멋대로 해석해 버리게 됩니다.

예를 들면 오늘 본문을 보고서도, 자신을 보물 찾아낸 농부로 착각하게 마련입니다. "하나님, 남들이 못 찾아내는 보물을 저는 찾아내었습니다. 제가 바로 천국이라는 보물로 찾아낸 당사자입니다.'라는 의식을 갖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이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제각기 갖고 있는 보물이라는 것은 자신의 최후 행복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무수한 사람들에게 떡과 물고기를 제공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큰 횡재라도 한 듯이 예수님을 따라오게 되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누구라도 아버지께서 내게 오게 하여주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로 올 수가 없다"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인간들이 동일한 출발선상에서 출발해 능력 있는 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식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모든 인간들의 '천국 가기'는 기껏 하늘에 향한 침 뱉기에 해당하는 바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은 하늘을 향해 남들보다 높이 침을 뱉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떨어지는 속도를 더욱 강해질 것입니다. 결국 떨어지는 장소는 침을 뱉은 자기 얼굴입니다. 딴 곳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 자체 내에 차별에 대해서 미리 언급하십니다. "아버지가 내게 넘겨준 자가 아니면 아무도 구원될 수 없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자신이 하시는 모든 일은,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주신 자를 하나도 잃어버림이 없이 끝까지 책임지고 마지막까지 살려내시는 그것이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생각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천국 비유에도 충분히 반영되어져 있습니다. 사람들은 제각기 나름대로 보물 관이 있습니다. 그리고 보물관 속에 자신의 전부를 담아 넣게 됩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아무리 사이가 나빴던 관계라도 너무나도 섭섭하기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사라지신 아버지에게는, 자식의 과거 추억과 기억과 정성이 다 실려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죽으심은 곧 자신의 과거의 사라짐이요 곧 자신의 죽음처럼 느껴지기 마련입니다.

이처럼 인간들이 내세우는 보물이란 곧 자기 자신의 전부가 들어있기에 사람들마다 보물이 다 다르게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그 보물을 가지고 뭘 얻으려고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행복'입니다. 최종적으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보물입니다.

그래서 교회 다니기, 예수 믿기, 하나님 믿기... 뭘 해도 그 안에는 자신의 행복추구가 목적으로 담겨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지 않는 자들의 세계에서도 행복에 대한 나름대로의 교훈이나 비법 같은 것을 많이들 연구해 두고 있습니다.

즉 사물 자체에 행복이 없다는 겁니다. 문제는 마음가짐에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어느 큰 상인의 부인이 허영심이 많았습니다. 남편은 먼 나라로 무역하면서 수출입 과정을 통해 막대한 이윤을 챙겼습니다. 부인은 남편으로부터 온갖 희귀한 외국 보물들을 수집해 왔습니다.

하지만 인간이란 뭐든지 오래 보면 식상하기 마련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도 가까이 있으면 시들하기 마련입니다. 좋고 나쁨이 그 사물에서 나온다고 여기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 사물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에 의해서 좋다, 나쁘다가 형성되는 겁니다.

먼 하늘 높이 날아다니는 파랑새가 고아 보여도 막상 손아귀 안에 잡아놓고 보면 독한 냄새나 풍기는 그런 일상적인 새 한 마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느 누가 말하기를 행복이라는 것도 그런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피부가 고운 미녀도 손바닥을 펴놓고 현미경 들이대고 보면, 땀샘과 털이 숭숭 있는 것이 확대되어 보일 것입니다. 본래의 가치가 사물 그 자체에게서 비롯되지 않습니다. 큰 상인의 부인은 또 먼 나라로 장사를 떠나는 남편을 향해,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을 사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과연 그 남편은 배 가득 귀한 보물을 싣고 왔습니다. 그것은 바로 밀이었습니다. 더 희귀한 보석이라고 사올 줄 기대했던 아내는 화가 나서 그 밀을 넓은 갯벌에 다 내다 버리기를 하인들에게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난 어느 날 남편은 먼바다에 나가 풍랑을 만나 배도 파산하고 죽고 말았습니다. 남편의 사업에 막대한 투자를 했던 투자자들이 그 남편의 모든 재산을 다 가지고 말았습니다. 물론 아내의 보석까지도 채권자 손으로 다 넘어갔습니다. 남은 것은 거지꼴이 된 육신뿐이었습니다.

배가 곯아서 눈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던 그 여자는 갯벌에 나가 헤매다가 눈에 뭔가 확 들어오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밀이었습니다. 비로소 그 여인은 밀이 왜 보물인지를 알았습니다. 똑같은 밀이지만, 그것을 소유의 입장에서 보물이냐 아니냐를 결정 지울 것이 아니라 과연 우리 몸에 필수적인가 아닌가를 두고 생각했어야 했습니다.

자... 이제 여러분의 마음이 행복해졌습니까? 이제 마음이 낮아졌으니 그만큼 정말로 무엇이 귀한 보물인지 눈에 들어왔습니까? 하지만 이런 식의 마음 훈련이나 정신 차리기로서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 예수님이 소개하는 보물의 진수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보물의 진수는 무엇일까요? 에베소서 3:9-11절을 보겠습니다.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두 가지 단어를 서로 이어서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는 '비밀'이라는 단어요, 다른 하나는 '예정'이라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보물은 이 세상에 그 어떤 인간에게도 들통난 적이 없습니다. 철저하게 감추어진 것입니다. 마치 밭 속에 들어 있는 보물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의 보물이란 바로, '예정해 놓으심' 그 자체입니다. 우리들은 피조물이기에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무엇을 계획했으며 무엇을 예정하신 지 도무지 알 길이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은 처음부터 보물에 대해서 어디까지나 자기 행복과 연관된 것으로 간주하지 달리 생각할 줄 모르는 그런 한계에 갇혀 있는 신세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오시지 않으면 예수님의 뜻을 전혀 알 길이 없을 정도로 우리들은 무지합니다. 이점은 제자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고 부활되기 전까지는, 예수님께서 하신 다음의 말씀, 즉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만에 다시 짓겠다"가 무슨 말인지 도무지 몰랐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감추인 채로 제시하신 보물이란, 곧 '인간의 그 어떤 행위와 상관없이 이미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뜻에 의해 구원됨', 바로 이 자체입니다. 즉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예정하심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바로 이러한 진리는 모든 인간들을 넘어뜨리게 만드는 걸림돌 역할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들은 자신의 행복을 위한 자기의 행동에 토대를 두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산성설교 중 하나인 마태복음 7:6에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여기서 보물이란 거룩과 통합니다. 어느 인간이 자기 행복보다 거룩을 우선시 하는 사람이 누구 있겠습니까? 인간들의 이런 결정적 무지성이 드러난 것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거기에 예수님은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은 돌' 취급을 받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버려진 돌'을 가지고 비로소 천국을 개시하셨습니다. 따라서 그 버려진 돌 앞에서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의 공로를 거론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철저하게 예정된 뜻에 따라서만 일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구원이란 바로 예수님께서 몸소 실천하신 일의 과정에서 주어지는 열매들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 있어 보물을 보고 좋아하시는 농부는 예수님뿐입니다. 우리는 평생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만 앞장세우고 자랑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13:45-46 진주장사 비유)

13:45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13:46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천국에 들어가는 데 있어 '내가 죽는다'는 그 사실만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죽을 즈음에 그 이후의 세계를 염두에 두고서 나름대로 마음을 정돈한다고 해서 천국에 다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의 방식은 천국에서 제시된 바에 준해서 결정됩니다.

그 원칙은 구약에서 이미 주어져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이 그러합니다. 인간적인 편리라는 면에서 볼 때 사실 광야 생활이란 쓸데없는 중간 지대인 것처럼 보입니다. 애굽이라는 나라와 젖과 꿀이 흐른다는 약속의 땅과 직접 연결시키는 것이 훨씬 간편한 구원 구도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구원 욕심의 발로입니다. 실제로 하나님 쪽에서 제시한 구원의 경과는 광야 생활이 필수적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이란 시간적인 경과를 통해 자동적으로 골인 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라 그 전에 변화가 주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변화는 마음의 변화, 곧 신앙심이 생겨야 한다는 겁니다. 마음의 변화에 대해서 하나님은 광야 생활 안에서 진행시키십니다. 즉 애굽에 살면서 간직했던 기존 마음가짐이란 이런 겁니다. "죽은 다음에는 좋은 세계에서 살아야지"입니다.

사실 이 마음은 인간이면 누구나 갖고 있는 마음가짐입니다. 도무지 예외랄 것이 없어 보입니다. 죽어서 자진해서 최악의 세월을 보내겠다고 솔직하게 마음먹는 사람은 없습니다. 따라서 장래의 좋은 복을 추구하는 본능, 그 자체가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여겨지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마음가짐을 유지한 채 험난한 광야 지역을 통과하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불평을 하나님에게 퍼붓지 않을 수 없게 만듭니다. "좋은 세상에 가서 한 번 살아보려고 하는데 왜 하나님은 우리를 이 광야에서 죽게 하십니까? 좋은 세상 구경도 못해보게 합니까?"라는 식의 불만이 터져 나오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뭐가 문제입니까? 마음가짐에 어떤 잘못이 있었던 것입니까? 그것은 천국에 살 사람들의 마음가짐을 미리 가지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참으로 천국에서 가지고 살아야 될 마음가짐이라면 이 광야 속에서도 동일한 마음가짐으로 하나님과 동행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갈렙과 여호수아처럼 말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천국에서 통하는 마음가짐이란, 자신의 생존 위주의 가짐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고마움으로 한결같은 마음가짐입니다. 이 마음가짐이 아직 죽지 않고 이 시점에서도 동일하게 갖고 있는 사람에 한해서만 구원될 수 있는 겁니다.

젊을 때 온갖 세상 즐거움을 추구하다가 연세가 많아져서 어슬렁어슬렁 교회에 발길을 옮겨놓는다고 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마음가짐이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최종적 욕망이란 천국에로의 염원과 그곳에 골인하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쪽에서 이 욕망을 일체 인정하지 않고 거절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보석 장사치의 이야기를 놓고서 인간이 보통 해석하는 것과 예수님이 해석하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다른 예수님의 말씀도 그러하지만 특히 예수님의 비유에 대해서는 확연하게 인간들이 엉뚱하게 해석하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자신의 천국의 내막을 감추는 방식으로 비유를 들어 사용하시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제가 인간의 마지막 욕망은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는데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광야 지역이 왜 있는지는 안중에는 없고 바로 이 애굽에서 약속의 땅에 곧바로 연결 지으려고 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마음으로서 오늘 본문을 해석하면 어떻게 될까요? 이렇게 됩니다. '어떤 보석장사치가 있었는데, 마침 우연히 천하 제일의 보석을 발견하고서는 그것이 자신에게 얼마나 큰 이득이 줄 것인가를 짐작하기 때문에 그 장사치는 과감하게 자기 전 재산을 다 팔아 천국을 소유하게 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구원될 사람은 천국이 얼마나 좋고 크고 이 세상보다 월등하게 좋은 세계인지를 충분히 알아서 현재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재산을 교회에 다 바쳐서 비록 남들에게는 손해보는 듯이 보이지만 실은 천하 만국보다 더 확실한 것을 얻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진정 똑똑하고 지혜로운 참된 성도이다'라고 해석할 것입니다.

바로 이 해석이 엉터리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예수님 빼놓고 예수님이 소개하는 천국을 최고의 보석으로 알아보는 인물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의 야심이란 진정 좋은 것이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투자해서라도 그것을 구입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여전히 자신의 죽음을 자기 손으로 해결해 보겠다는 의욕이 들끓고 있습니다. 이것은 천국을 미끼로 한 환상에 불과합니다. 어떤 바닷가에 사는 노 어부 부부가 있었는데 하루는 이상한 고기를 낚아 올렸습니다. 물고기가 하는 말이 나를 살려두면 소원을 한 가지 들어주겠다고 했습니다.

마침 집에 물이 새는 물동이를 갖고 있었던 노부부는 다른 것을 요구하지 않고 깨끗한 물동이만 요구했습니다. 물고기는 흔쾌히 그 소원을 들어주었습니다. 하지만 노부부의 욕망은 한도 끝도 없이 상승되기 시작했습니다. 필요할 때마다 계속 물고기를 불러내어서 소원을 강요했습니다.

하지만 물고기는 마지막을 입을 닫아버리고 노부부가 집에 와보니 그동안의 부귀영화는 다 없어지고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참 모습은 그냥 죽는 겁니다. 그리고 그 뒤로는 불길이 맹렬한 지옥 불에 들어가는 코스뿐입니다.

이것에서 더 지나치게 욕심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원래 우리는 이렇게 되어야 할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 속에서 죽음이 끌어당기는 힘이 너무 강력하기에 우리들은 잠시 천국에 대한 꿈을 꾸는 겁니다.

인생이란, 죽음이 부풀어 오른 것을 욕망의 대상으로 삼은 것에 불과합니다. 결국에는 고무풍선에 바람 빠지는 날에는 원래대로 죽음에 합류해야만 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렇다면 천국의 달성은 누구 소관입니까? 순전히 예수님 소관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손에서 천국을 만들어 내십니다. 어떻게 만드십니까? 이 점에 대해서 구약 사무엘하 6장을 통해 알아봅시다. 거기에 보면 4명의 사람이 나옵니다. 한 사람은 웃사요 다른 한 사람은 오벧에돔이요, 다른 한 사람은 다윗이요, 다른 한 사람은 다윗의 처인 왕비 미갈입니다.

웃사라는 사람은 손에다 언약궤를 실어가면서 자기 딴에 하나님께 잘해 보겠다는 뜻에서 언약궤가 떨어지는 것을 방비하고자 손을 대었다고, 감히 하나님의 언약궤를 만졌다는 죄명으로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에벧오돔이라는 사람은, 감히 그 무시무시한 언약궤를 집에 모셨더니 그 오벧에돔의 집에 복이 떨어졌습니다. 이 얼마나 신기하기 이상한 일입니다. 만지면 저주받고 모시면 복받는 언약궤의 조화가 말입니다.

이것은 그 어떤 누구도 하나님의 언약궤 소유용으로 삼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즉 자신이 살기 위해 용도로 하나님의 자비나 사랑을 소유할 수는 없는 겁니다. 오로지 하나님께서 친히 주시는 바를 은혜로 덧입을 뿐임을 아는 자에게는 복이 주어진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은혜를 받은 자의 모습은 어떠해야 합니까? 다윗은 언약궤가 시온성에 들어오는 것이 너무 좋아서 온 백성이 보는 앞에서 옷을 벗어가면서 춤을 추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왕의 처인 미갈은 그 모습을 대단히 못마땅해했습니다. 왕의 체면과 체통을 망치는 짓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에게 잔소리를 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말합니다. "내가 이보다 더한 천한 짓을 한다할지라도 하나님의 언약궤의 취지를 다 보여줄 수 없을 정도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왕의 가족이라는 직위를 수호하는데 관심이 있는 왕비는 평생에 아기를 낳지 못하는 저주받는 왕비가 되었습니다.

즉 성도에게 주실 은혜의 원천은 인간 쪽에 준비하거나 마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하나님이 거저 주시면 거저 누릴 수밖에 없는 대상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태양을 만들 수 없는 이치와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보석 장사치는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참으로 아무 것도 볼품 없고 무가치한 자를 예수님께서 귀하게 보시고, 자신의 모든 것, 즉 귀한 목숨을 대속물로 내놓아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시선에서 이 본문을 보셔야 합니다. 인간의 구원 야심으로 긍정하는 쪽에서 이 본문을 해석하면 안됩니다. 그것은 죽음의 또 다른 힘일 뿐입니다. 언약궤의 취지를 달성하시는 분은 예수님뿐입니다. 오벧에돔의 집에 복을 내리시듯이 오늘은 우리에게 천국 영생의

복음 십자가로부터 주시는 겁니다.



 



마태복음 13:47-50 그물 비유)

마 13:47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마 13:48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 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
마 13:49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마 13:50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누구로부터 심판을 받고 검사를 받는 것은 대단히 기분 상하는 일입니다. 우리들에게 아예 자신을 점검할 그 어떤 장치가 없다면 우리의 가치성에 대해서 외부 용역에 맡길 수도 있습니다.

허나 그게 아니라 우리 속에 양심이라는 것이 살아 작동하고 있고, 옳고 그름에 대해서 나름대로 정상적인 판단력을 갖추었다고 자부하는 판에 또 외부에서 심판을 감행하겠다고 나선다면 인간의 고유 가치성과 자립성이 침해받기 때문에 상당히 성질 건드리는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꼭 창조주께서 꼭 심판을 감행하겠다고 나선다면 그 심판 기준이라도 미리 알아내어서 그것을 준수함으로서 스스로 알아 자기 행동을 조절하는 사람에게는 심판을 면제시켜 주는 방도를 고안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큰 잘못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항상 세월에 떠내려가는 인간입니다. 자기 딴에 잘했다고 장담해도 돌아보면, 그것은 그 당시 그 환경에 적응해서 살아남기 위한 수작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즉 자기 의를 세우기 위한 노고에 불과합니다.

자기 의에 대한 집착은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도 굽힐 줄을 모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인간은 너무나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죄가 없는 자가 저 간음한 여인에게 돌을 던지라"고 말입니다.

즉 "과연 너희들이 간음한 여인에게 돌 던질 자격이 없을 정도로 하나님보시기에 형편없는 인간인 줄을 알고있냐?"라고 묻으시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가르쳐 '죄인 중의 괴수라'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남을 정죄할 고유의 행함이 자기가 만들어낼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즉 자신에게는 남을 정죄 할 자기만의 의가 없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것을 모르고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않고 열심히 자기 의를 내세웠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처럼 시시각각으로 자기 의를 방어하기 위한 변명과 핑계로 일관하면서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노라고 자부하고 나섭니다.

오늘날 인간들이 행하는 모든 일들이 전부 자기 의를 위한 시도들입니다. 군대 조직에서 하급자를 괴롭히는 사고방식이나 생활 공동체에서 기존 주민들이 새로 이사온 사람을 괴롭히는 것도 모두 자기 의를 따로 장만해 보려는 시도에 불과합니다.

특히 교회에는 이 점이 더욱 노골적입니다. 교인들은 자기 의를 구축하기 위해서 자기가 행한 사항을 목사가 일일이 지시해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물론 그 목사의 말을 듣는 것은 목사나 하나님을 사랑해서가 아닙니다.

신의 대리자라는 목사의 말에 최선을 다해 순종함으로서 자신의 의를 따로 간직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즉 목사 말을 잘 들었으니 그 순종에서 의가 나올 것이고 그 의에 대해서 하늘의 축복을 쏟아 부어달라는 의도가 깔려 있는 겁니다.

목사는 목사대로 교인들에 지시를 하고 명령을 함으로써 명령하는 당사자의 의로움을 과시하고 그 반대급부로 그 교회에서 봉급받는 생활자로서 나름대로 정당함을 확보하고자 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살아남기 위한 적응'에 불과합니다.

바로 이런 조직체일수록 회칙과 규칙은 강화되어서 만약에 그 규칙에 어긋나는 자는 그 집단 안에서 죄인 취급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있어 천국의 주인공은 그렇게 심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일단 모든 인간들을 한 그물 안에 모아들이시는 분입니다. 이렇게 해서 절에 다니든 알라신을 믿든 예수님을 믿지 않든 상관없이 모든 인간은 한 사람도 예수님의 손안에서 빠져나갈 수 없음을 분명히 하십니다.

이것부터 인간들은 아예 처음부터 심판의 대상에서 제외되는 자는 없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모든 움직임 하나 하나가 전체 심판을 위한 환경이라는 점입니다. 무심코 일어나는 일 하나하나도 전부 전체 심판으로 향하는 과정으로서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일으킨 일들입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들이, 자기가 자신를 심판하는 구실마저 박탈당하는 셈이 됩니다. 즉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다 하나님의 심판을 겨냥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마치 자기가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 될 환경인양 오해하기 십상입니다.

즉 "하나님 아버지, 이런 환경 속에서 하나님 말씀대로 제대로 지켜보려고 열심히 노력했는데 힘에 붙이네요"라고 변명을 널어놓게 됩니다. 사실은 이렇게 고백해서는 안될 것이 인간입니다.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 이런 환경 속에도 주님의 심판성을 잊지 않게 해주시니 너무나 감사합니다"라고 말입니다. 모든 역사가 이처럼 하나님의 심판의 구실이 된다는 점을 아시고 요한복음 3:16을 봐야합니다.

거기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서 말씀하시는 '세상'이란 인간들이 임의대로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세상입니다.

그 세상이 어떤 세상입니다. 요한복음 3:18절에 보니 당연히 심판받아야 될 세상입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독생자를 믿지 않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봐서 이미 이 세상은 벌써 저주 안에 놓여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세상 관을 오늘날 인간들이 지니고 있을까요? 아까도 언급했듯이,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도 자기의 가치를 놓치지 않기 위해 나름대로 의를 만들어나는 방식을 가동하기 일 수입니다.

이렇게 성실하게 하나님 말씀을 지키려고 노력했기에 분명하게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후한 점수를 줄 것이라고 기대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선택된 자를 향한 하나님의 선택하심을 보이시는데 주안점을 둔 심판을 하시게 됩니다.

즉 은혜로 선택된 자만 필히 구원되고 나머지는 구원이 되지 못함을 보이시는 그런 심판을 감행할 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말씀으로 잘 살겠다는 자는 지옥을 가게 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됨을 믿는 자만 구원되는 결론으로 심판이 감행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과연 누가 심판하느냐 하는 점입니다. 즉 모든 사람을 한 그물 안에 거두시는 분께서 심판하실 때, 의인과 죄인을 가르는 심판의 기준은 오직 예수님이 자신이 원하는 자만 건진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 그 어떤 위인도 하나님에게 만족할 만한 의를 생산해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에게는 심판 안 받을 자격도 없을 뿐더러 심판 주이신 예수님의 의향에 구원해 달라고 압력을 가할 권리조차도 없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에게 이런 절대적인 권한이 전부 일임되어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그분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3:25-26에 보면,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즉 의롭다, 의롭지 않다 의 결정은 인간이 자기 행위를 내세워서 검사 받는 식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로 결정되는 겁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자기 기준을 갖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갖고 있는 기준으로 인해 예수님의 기준과 대 충돌을 일으켰습니다. 인간들이 자기 의의 기준을 따로 갖고자 하는 것은 이 사회에서 인정받고 싶은 욕구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서로가 서로에게 인정받고자 벌리는 생존 경쟁 장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경쟁에 의해서 누가 희생을 당했느냐 하면 심판 주되시는 예수님마저 희생되어야만 했습니다. 그 정도로 이 세상은 살벌하고 모든 것이 자기 위주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면서도 그 은혜로 분에 차지 않아서 거기에다 또 자신의 선행을 추구해 보려고 합니다.

믿음으로는 구원은 되겠지만 이 세상에서 복 받는 것은 자신의 선행에 대한 보상이 주어진다는 겁니다. 바로 이런 자들이 심판 주되시는 예수님을 몇 번이고 죽일 위인들입니다. 그런 위인들이 모여 교회를 만들고, 교단을 세우고 궁극적으로 기독교라는 종교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진정 심판을 제대로 안다면, 이런 심성으로 십자가만 바라 봐야 합니다. 자기 기준에 의해서 자신을 정죄하지 말고, 타인의 기준에 준해서 남에게 정죄 당하지도 말고 목사로부터도 정죄 당하지도 말고 오직 십자가만 바라보면서 거기서 제시한 기준과 은혜를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13:51-52 새것과 옛것 비유)


13:51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하시니 대답하되 그러하오이다
13:52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구약에서 제일 우선적으로 중요시하는 것은, 참된 신을 분간해서 믿어야 된다는 겁니다. 여호와 외에 다른 신을 섬기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나 여호와가 되었든 다른 신이 되었든 아예 신에 대해서 관심조차 없는 현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소의 귀에 경 읽기' 같은 소리입니다.

지금은 사람들에게 있어 참된 신과 가짜 신의 구분조차 하지 않고, 신 전체와 자기 자신을 놓고서 대결구조로 고정시켜 말았습니다. 신에 대해서 노골적으로 저항하겠다는 겁니다. 웃통 벗고 본격적으로 신과 시합에 나서겠다는 겁니다.

신이 대단한지 아니면 자기 자신이 대단한지를 견주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의 이러한 속성은 본인조차도 어쩔 수 없이 감당할 수 없는 본성입니다. 이 본성은 인류의 조상 대대로 물러 받은 겁니다.

한 쉬운 예로 제가 이 물 컵 하나만 가지고 여러분 한 분 한 분에게 차례 차례로 전달을 시켰다고 칩시다. 도중에 제가 막 컵을 전달받은 사람에게 가서 그 컵을 확 빼앗으면서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 컵은 나의 것이 그 컵에 담긴 내용물도 원래 내 것이다"고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각자각자 자기 나름대로의 본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시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모두 다 여러분 것이 아니라 아담으로부터 전달받은 속성이요 본성들입니다. 따라서 여러분 선에 감당할 수 있고 조절할 수 있는 대상으로서 넘어서 버립니다.

즉 아무리해도 우리 자신들의 노력으로 우리 자신의 본성을 억제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원래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조상 대대로부터 물러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물러 받은 본성이 우리로 하여금 전력을 다 기울여서 하나님에게 대들게 합니다.

"하나님도 소용없고, 예수도 소용없다. 신을 믿지 말라, 예수도 믿지 말라. 믿을 것은 우리들 자신뿐이다!"라고 과감하고 이 강단에서 외치고 싶을 것입니다. 맞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애를 쓴다 할지라도 우리 자신의 성질조차 우리가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는 입장에 있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예수님 십자가 현장에서 넉넉하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려 끔찍한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그 시점에, 십자가 밑에서는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의 옷을 차지하기 위해서 가위, 바위, 보를 하고 있었습니다.

즉 "십자가 지는 위인아, 너는 너고, 나는 나다"는 겁니다. 십자가 진 당신과 옷을 갖고 싶어하는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는 거지요. 오늘날 현대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노골적으로 십자가를 땅에 팽개치고 지근지근 밟는다고 해서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 아니라, "너는 십자가 져라. 나는 돈이나 벌어 보련다"라고 나서는 그 행세가 곧 로마군병들과 같은 의식입니다.

옛날, "다른 신을 섬겨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신 그 하나님께서는 실제로 이 땅에 오실 때는 초라하고 비천하고 비참한 몰골로 나타나셨습니다. 사람들이 누구나 예상한 호화 찬란한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이 아닙니다.

왜 예수님은 이처럼 비참하게 나타나셨는가요? 그것은 그 어느 인간도 자기 문제를 자기가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 저로서는 저의 성격이나 본성조차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 감당 못하겠습니다."라고 자포자기 할 때, 저 만치서 마중 나오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십자가 나무 위에서 줄줄 피를 흘리는 모습입니다.

"내가 너를 위해 대신 의미를 아느냐?" 하시면서 말입니다. 바로 이 하나님이 바로 구약에서 '다른 신을 섬겨서는 아니 된다'고 당부하신 그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 51절에 보면,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라고 물으시는 대목이 나옵니다.

마치 마태복음 13장을 다 읽어 가는 우리보고 시험을 치시는 취지로 물으시는 겁니다. 즉 예수님의 비유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 정리했느냐 하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님의 비유를 보면서 무엇을 느꼈습니까?

마태복음 13:41-42에 보면, "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지막 심판이 있다는 점에 치중할 것이 아니라 이 심판을 누가 주도하느냐를 생각해 봐야합니다. 그 분은 바로 '인자'라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깨달을 수가 있단 말입니까?

그것은, 옛날 여호와 하나님께서 당부하신 바를 생각해야 합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당부하시면서 여호와 하나님이 하신 이 모든 일에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고마워하고, 감사하고 죽도록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그 여호와의 자리에서 일하시는 분은 바로 '인자'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일에 대해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고마워하고, 감사하고, 죽도록 그 분을 사랑하면서 자진해서 그 분과 한편 되기를 즐거워 할 때, 비로소 이런 사람에 한해서 '깨달았음'이라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즉 세상을 주도하는 인간은 다른 인간이나 자기 자신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뿐이라는 점을 도리어 즐거워하고 반기는 상태에 들어가게 된 것을 '깨달았음'이라고 말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런 마음가짐의 깨달음을 가진 자는 반드시 어떤 결과가 일어난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새것'과 '옛것'을 구분하는 눈이 있다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옛것은 무엇이며 새것은 무엇입니까? 새 것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들의 생리입니다. 새것도 없이 흥미 거리가 없으면 못 견디어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런 와중에서 인간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과연 진정한 사랑일까요? 아닙니다. 사무엘하 13:14-15에 보면, "암논이 그 말을 듣지 아니하고 다말보다 힘이 세므로 억지로 동침하니라 그리하고 암논이 저를 심히 미워하니 이제 미워하는 미움이 이왕 연애하던 연애보다 더한지라 곧 저에게 이르되 일어나 가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암논은 다말을 너무너무 사모해서 저 연인을 사랑한다고 믿었지만 막상 일이 저지르고 난 뒤에는 오히려 전에 사랑했던 정도보다 더 강하게 사랑했던 여자를 미워하게 된 것입니다. 왜 갑자가 극도의 사랑이 극도의 미움으로 변했을까요?

그것은 사랑이 변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랑 뒤에는 새로운 것이 사라지면 곧장 허탈감에 사로잡혀 사랑의 진면목이 유감 없이 드러나는 겁니다. 즉 "사랑한다"는 말 뒤쪽에는 조건 맞지 아니하면 "나는 너를 극도로 미워 할 꺼야"를 깔고 함께 제시되는 겁니다.

이처럼 인간이란 새롭지 않으면 살아 갈 맛을 못 느끼고 있습니다. 인생을 충분히 살았고, 그리고 인간 세계의 지혜에 대해서 통달한 솔로몬이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전도서 1:8-11에 보면,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 하는도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 찌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 오래 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이전 세대를 기억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가 기억함이 없으리라"라고 했습니다.

즉 '만물의 피곤함'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겁니다. 이미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통째로 '옛 것'에 속한 것이라는 규정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옛날 아담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우리 조상 아담은 하나님으로부터 그 자체로 거부당한 자입니다. 그래서 에덴 동산에서 추방되어야만 되었던 사람입니다.

그로 인해 그 후손인 우리들 모두가 에덴동산과 상관없는 채 이 세상을 떠돌면서 살다가 결국에는 한 줌의 흙으로 되돌아가 가야 할 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체가 새로움이 아니기에 역시 우리 안에서 나올 것도 새로울 것이라고는 없는 겁니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새로운 '새로움'으로 등장하신 겁니다.

인간들이 행하는 모든 옳고, 그름도 취사 선택 자체를 하나님은 거부합니다. 그 대신 금붕어처럼 날마다 예수님의 용서하심을 사랑을 먹고 또 먹고살기를 원합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모든 행위의 배후에는 인간의 의(義)가 쟁반처럼 동반해서 등장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의(義)만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새로운 것입니다.




마태복음 18장 무자비한 종 비유)


정의 사회 구현은 절대로 안됩니다. 단체란 기계입니다. 부속품이 기계 전체를 부정한다? 있을 수 없습니다. 일개미는 오로지 여왕개미를 위해서 살아야지 개미의 개체적 의미를 위해서 살아가면 그 개미 집단에서 따돌림 받고 제거됩니다.

그런데 이 가인의 사회만이 어쩔 수 없이 유일한 현실에 불과하다는 것에만 그친다면 그 결과는 복수와 복수의 피 튀김 밖에 없습니다. 네가 죽인 내 아버지, 내가 너를 죽이고 너의 자식이 또 나를 죽이려고 덤벼들면서 복수의 고리는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나는 사회의 요직에 있기에 나를 공격하는 것은 이 사회적으로 손실이다. 따라서 나를 공격하는 자는 정의의 처벌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을 너 나 할 것이 다 갖게 마련입니다.

이것이 바로 모두 다 갖는 가인의 얼굴입니다. 모두 다 절대 신입니다. 오늘날 현대인의 초상입니다. 잠시라도 이 절대성을 맛보기 위해 그들은 밀실은 선호합니다. P. C 방, 소주방, 채팅 방, 게임방, 비디오 방, 화상 방, 노래방, 룸살롱 같은 곳을 찾게 됩니다.

그러면 성도는 이 가인 사회 한 복판에서 어떻게 살란 말입니까? 감사하게도 마태복음 18: 21-22절이 있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찌니라"라고 나옵니다.

이것은 자아의 '중심 이동'에 관한 문제입니다. 나는 남을 용서할 위치에 있다는 말이 아니라, 너나 나나 다 같은 용서받을 입장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 드리면, 바로 이어 나오는 예수님의 비유가 바로 핵심입니다.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한대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같이 하시리라"

일만 달란트는 요즘은 돈으로 약 300억 원이 됩니다. 거기에 비해서 백 데나리온은 요즈음 돈으로 약 5백 만 원쯤 됩니다.

임금의 신하는 임금으로부터 약 300억을 탕감 받아 좋아하면서 실제로 그는 자기에게 5백 만원 빚진 자에는 탕감 없이 잔인하게 빚을 다 받아내고자 했습니다.

일종의 복수이지요. 이 소식을 듣고 빚을 탕감해준 임금님이 그 배은망덕한 신하를 어떻게 조치하겠습니까?

아마 능지처참시킬 겁니다. 은혜를 은혜로 갚지 않으면 이런 결과가 일어난다는 것이 천국을 소개하면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지난 시간에 보면, 라멕의 선조 가인은, 비록 살인죄를 지었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죽임을 당하지 않는 은총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하나님을 은혜를 담고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 후손은 이 은혜를 망각하고 남에게 복수 일변도로 나간다 말입니까? 성경은 현실입니다. 복수와 복수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죄까지 예수님 덕분에 용서받았습니다.

따라서 정말 자기 주제를 파악하는 자는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물론 무조건 용서하자는 말입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말씀을 뜻을 아는 자에게는 용서가 되어야 합니다. 유명한 주기도문입니다. 여기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는 자의 중심이동을 할 줄 알아야합니다. 용서하는 위치에서가 아니라 용서받을 위치로 내려가는 중심 이동 말입니다.


* 로마서 5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죄인들과 비교하시면서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원수 된 자, 경건치 않은 자, 죄인 된 자를 왜 이야기하는가? 그들은 전혀 구원에 도움이 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자기가 어떻게 마음을 좀 착하게 먹고 잘 하면 하나님의 구원에 좀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하는 것은, 그것이 바로 가장 십자가의 원수 된 사고방식이라는 것이다.

* 어떻게 저런 인간이 구원을 받겠느냐고 생각하는 그런 인간이, 십자가의 강도나 거지 나사로 같은 말이다. 그런 인간에게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가 더 크게 임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가장 많이 드러내니까 말이다.

* 그래서 마태복음 18장에 다음과 같은 비유가 있는 것이다.

(마 18:23)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마 18:24)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마 18: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대
(마 18:26)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마 18: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마 18:28)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마 18:29)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마 18: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마 18:31)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마 18:32)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마 18: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마 18: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마 18:35)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 이렇게 성경은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과 죄인 된 우리들을 비교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비록 원수 된 자, 경건치 않은 자, 죄인 된 자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인 공짜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이렇게 하지 않고, 자기가 기도원에 가서 40일 금식기도해서 되었다고 한다면, 그것이 무슨 기독교인가? 갓바위이지 말이다.

* 이렇게 말하면 너무나 수동적이 아니냐고 말할지 몰라도, 그러나 은혜를 받은 사람은 활동적이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교인들에게 무엇을 하라고 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면, 은혜를 받은 대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교회의 주인이 예수님이지 결코 목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닌가? - 하라고 시켜도 안 한다고?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 이 본문을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자기 신학의 중심으로 삼았는데, 물론 동의한다는 것이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확증' 이라는 말에 자기의 모든 것을 다 걸었다는 것이다. 더 이상은 없다는 것이다. 자기의 몸을 내어놓았는데, 더 이상 뭐가 있겠는가? 모든 것을 다 주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다음에 주님께서는 '네 몸을 나에게 다오' 라고 한다는 것이다.

* 그런데 지금 한국교회는 어떠한가? 이러한 예수님의 몸을 군화발로 짓밟고서 '돈을 달라', '건강을 달라', '교회를 성장시켜달라' 라고 하는 것이다. 몸을 주었으면 모든 것을 다 주었다는 것인데 말이다. 이것이 과연 교회라고 할 수 있는가?






포도원 품꾼비유 (마태복음 20:1-16)


지금 율법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두 언약이 가는 방향이 정반대입니다. 율법은 우리 좋으라고 내려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자기 피를 부각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두 언약이 한쪽은 약속에 속한 사람과 한쪽은 율법에 속한 사람으로 죽 갈라서 그 양쪽이 전혀 섞이지 않도록 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의 공로를 높이는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은 없어요.

한쪽은 죄를 대신 담당해준 사람들 쪽과, 한쪽은 대신 담당해주지 않은 쪽으로 완전히 결별을 시켜 줘야 예수님의 사랑이 부각되거든요. 저주라는 밑바닥을 통해서 사랑은 사랑답게 더욱 부각되어서 사랑만 증거된다는 뜻입니다. “너희들이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고 내가 너희들을 사랑했다”(요일 4:10)는 것이 드러나려면 일체 우리 쪽에서는 사랑한 적이 없음이 드러나야 할 것이 아닙니까?

“목사님! 목사님 말씀대로 율법으로는 구원 안 되고 예수 피로만 구원되니 예수 피만 알면 되겠네요. 그러면 성경책을 덮어 버릴까요?” 예수님의 피, 언약은 저주라는 밑바닥을 통하는 식으로 드러나요.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악의 뿌리다” 이것은 지독하게 들어야 합니다. 아까 말한 신명기에 나온 것처럼 “자기가 낳은 아기를 배고파서 먹는다”는 저주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받아야 될 저주입니다.

그런데 그런 저주를 우리가 안 받잖아요. 십자가의 은혜로서 약속된 사람으로서 지금 그런 혜택을 입고 있죠. 저주를 저주답게 깔아줘야 세세하게 모든 것이 다 사랑이 되죠. 지금 마시는 오미자차 한잔까지도 전부 다 사랑으로 다가오는 겁니다. 사람 사이란 과거에 잘해줄 때, 그 때 뿐입니다. 다 잊어버리죠. ‘사랑한다’는 천마디를 해도 ‘밉다’는 말 한마디에 그 천마디가 다 무효로 돌아가요. 그 정도로 인간은 자기중심입니다.

계란차가 와서 “계란이 왔어요”라고 방송하는 것처럼 아침부터 밤까지 “사랑이 왔어요”라고 방송하듯이 해도 “네가 실망스럽다”는 한마디에 “사랑(계란)이 왔어요”를 백날 떠들어 봐야 소용이 없어요. 그것 회복하는데 두 달이 걸립니다. 사람은 남자든 여자든 한번 삐지면 감당을 못합니다. 그런 것까지 이미 주님의 약속 안에 있는 겁니다.

아브라함이라는 뜻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 약속을 약속답게 하기 위해서는 아브라함이 이스마엘, 육적인 아들을 낳아야 됩니다. 그 때부터 언약이 둘로 갈라졌습니다. 하나는 육적인 율법에 속한 언약이 있고 또 하나는 어머니가 하늘에 있는 약속의 계통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육적인 것은 왜 생겨났는가? 약속이 약속답게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율법에 속한 사람이 나타나야 비로소 어머니가 하신 역할이 얼마나 위대한 역할인지가 드러나게 되는 겁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 좋으라고 한 것이 아니고, 하여튼 하나님이 이렇게 일을 하신다는 말입니다. 날 때부터 악한 자를 무지개언약으로 사랑해 주셔서 우리를 가지고 화투패 다루듯이 다루시는데 약속이 약속답게 되도록 예수 그리스도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 모든 이름으로 무릎으로 꿇고 주의 이름만 높이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나타내기 위해서 주께서는 여러 가지 사건을 주십니다. 율법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우리에게 이런 일들을 일으키는 겁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밑바닥에 하나님의 저주를 깔고 앉아서 ‘우리는 약속으로 구원받은 사람이기에 모든 공로는 주께만 돌아가는 것이 분명하다’고 되는 겁니다. 끝으로 하나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포도원 비유라는 것이 있거든요. 천국은 이와 같다는 것을 알려주는 비유입니다. 포도원에 일하러 나올 때 제일 일찍 나온 사람들은 오전 9시에 나오고 그 다음에 12시에 나온 사람들도 있고, 오후 3시, 오후 5시에 나온 사람들까지 있어요.

퇴근 시간은 여섯시입니다. 제일 마지막에 온 사람은 1시간 일했고 제일 마지막에 온 사람은 8시간 일했습니다. 식당에서 아줌마들이 일한다고 칩시다. 오전 9시부터 나와서 온갖 일 다 한 아줌마들도 있고 오후 5시에 와서 1시간만 달랑 일하고 퇴근하는 아줌마들도 있습니다. 퇴근할 때 일당 5만원씩을 나눠줍니다.

마지막에 일하러 온 사람이 돈봉투를 열어 보고 “야! 나 5만원 벌었다”고 좋아할 때, 일찍부터 나와서 일한 사람들은 그것을 보면서 흐뭇한 상상을 하겠지요. ‘1시간당 5만원이니까 8시간이면 40만원이겠구나.’ 그러면서 봉투를 열어보니 5만원이 나왔어요. 그 식당 뒤집어 집니다. 그 식당 그릇 다 깨지는 날입니다.

그때 주인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당신들은 놀고 있던 사람들이다. 날 때부터 악한 자였잖아. 천국이 언약의 세계라는 것을 왜 몰라?” 나의 세계, 나의 노동의 세계가 되어야 할 이유가 없잖아요. 우리는 백날 노동해 봐야 말씀을 못 지키기 때문에 남들이 다 가져갑니다.

“나, 노동 했습니다. 대가를 주세요.”
“남이 다 가져갔다.”

이런 것 경험 해 보면 기가 막힙니다. 자기가 정혼했는데 다른 사람이 가져가 버린다면 얼마나 놀라겠어요. 신랑은 입장에서 신부를 기다리고 있는데, 화장하고 있는 신부를 다른 남자가 데려가 버린다면 얼마나 황당한 일입니까? 그 때 “저주야, 저주! 너는 저주 받아야 마땅해”라고 한다면 기가 막히죠. “맞습니다. 난 저주받아 마땅하고 당연합니다”라고 할 인간은 없습니다. “에라이! 너죽고 나죽자”고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 정도로 우리는 죽을 때까지 나의 생각을 포기 못하는 인간입니다. 그럴 때마다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말씀을 지키지 못하고 죽어 마땅한데 십자가 피, 머리부터 온몸을 적시고 있는 그 피가 내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흘린 피인줄 아시기 바랍니다.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




마태복음 20:1-6 포도원 품꾼 비유)


20:1 천국은 마치 품군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20:2 저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군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20:3 또 제 삼시에 나가보니 장터에 놀고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20:4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저희가 가고
20:5 제 육시와 제 구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20:6 제 십일시에도 나가 보니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20:7 가로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섰느뇨 가로되 우리를 품군으로 쓰는이가 없음이니이다 가로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20:8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군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20:9 제 십일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20:10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저희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20:11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가로되
20:12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20:13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20:14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20:15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20: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예수님의 천국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우리 인간들이 천국에 꼭 가고 싶어하는 마음이 들어있어 그 선입견이 바른 천국관을 핍박을 하게 됩니다. '천국은 좋은 데다. 지옥은 나쁜데다'라는 인식이 먼저 사람들의 머리 안에 결정되어 있기에 사람들에게 좋지 않는 천국을 이야기하면 그만 거부반응부터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비해 하나님의 천국은 일단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는 이유부터 설명하게 됩니다. 왜 사람들이 천국을 가지 못하는가? 그것은 진짜 천국이 이 땅에 왔으되 사람들이 그 분을 심하고 박해하고 추방시키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예수님이 소개하는 천국을 가짜로 보고, 자신이 마음 속에 품고 있는 '좋은 천국'을 참된 천국으로 간주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16절에 나와있듯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라는 원칙이 양보없이 적용되면서 이루어지는 것이 참 천국입니다. 즉 천국을 안다고 여기는 자는 지옥하고, 자신이 지옥가야 마땅하다고 여기고 예수님을 생각하는 자들은 천국을 가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원칙의 핵심이 15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의 천국 만들기는 사람들의 기존 주장하는 원칙과 완전히 차이납니다. 결코 동의해주지 않습니다.

인간들은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다시 돌라가려고 한다면 죽습니다. 어쩔 수 없이 이 세상에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놓고서도 마치 이 세상이 참된 세상의 전부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와 거지의 만남에서 다 깨어집니다. 거지 나사로가 자신이 죽고 싶다고 죽게 된 것이 아니라 천사와 와서 데려가니 죽음이 찾아온 것입니다. "이 땅에서 그만 살아야 한다"는 조치입니다. 도착해보니 천국이었습니다. 마치 그동안 에녹을 동행하시는 하나님께서 에녹을 데려가니 에녹이 천국의 삶이 시작된 것과 같습니다.

부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파티 여는 것이 지겨워서 스스로 죽을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냥 지옥의 능력이 당기니까 죽을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에게 있어 가난과 부자란 그냥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알맹이는 따로 있습니다.

그 알맹이는 변함이 없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확정적입니다. 변동될 수가 없습니다. 지옥의 안타까운 점은 '한 번 지옥은 영원한 지옥이다'는 점입니다. 그 안에서 어떻게 수를 쓸 수 없다는 점이 너무나도 절망적입니다.

그렇다면 왜 같은 인간이 서로 다른가요? 그것은 오늘 본문 말씀 15절의 이야기한 바대로, 하나님의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마음대로 하시는 겁니다. 이점에 동의하고 찬동하고 동조하는 자들이 바로 천국가게 되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러한 원칙에 불만을 갖게 될 것입니다.

인간들이 자신들이 천국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욕망을 마음껏 채울 수 있는 본인만의 절대적 세계를 마치 천국이라고 간주하며 살아갑니다. 이러한 속셈이 예수님께서 소개하는 천국관 앞에서 들통납니다.

그러니까 천국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절대자가 되어 누리면서 형성된 그 세계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곳은 사실 이미 이 땅에서 오래전부터 개시되어 왔습니다. 지금 현재 인간들이 시도하고 노력하고 있는 이 땅의 세계가 그런 곳입니다.

인간은 사나 죽으나 천국과는 상관없는 존재입니다. 살아있는 것이 천국 밖이라면 죽어서도 천국 밖입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복음이라는 바구니에 담기지 아니하는 이상 그 사람은 어디서는 홀로 있으면 곧 그곳이 지옥입니다. 가게를 열든지, 시집을 가서 새로운 가정을 꾸미든지, 개척 교회를 하든지 홀로 있으면 그곳은 지옥 그 자체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도저히 구원될 자격도 없는 자를 구원하시려고 하십니다. 이 점을 알기 위해 도대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놀고 있는 자'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포도원하고 아무런 상관도 없는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불러 줄 때까지 우리들도 천국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천국과 상관없다는 말은 예수님과 상관없다는 말입니다. 인간들은 원래부터 노는 것을 정상적인 삶으로 보고 있습니다. 동물원의 사자나 원숭이를 보세요. 하루 종일 노는 것을 일과로 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무슨 재주라고 시킬려면 그 피해보상만큼 맛나는 먹이로 보상을 해주어야 합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노는 것을 기본으로 합니다. 무슨 노동이라고 할라치면 노는 시간을 침범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피해보상 형식으로 품삯을 요구하게 됩니다. "왜 잠자는 사자의 코 털을 뽑느냐. 그러니까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겁니다.

이처럼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놀기 위하여 사는 존재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무리 가운데서 난데없이 평소에 상관없이 지내던 그 '포도원'에 '일꾼'이 되어라 는 호출서가 떨어지게 됩니다. 처음 주인쪽에서 노임을 계산 할 때는 일꾼들은 잠시 착각하게 됩니다. "아, 나의 이 괜찮은 노동력을 주인 쪽에서 돈주고 사려고 하는구나"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인식으로 인해 나중에 포도원 내부에서 반발이 일어나게 됩니다. 즉 우리들의 잘못된 천국관으로 인해 예수님의 천국관이 수난을 당하고 욕을 얻는 먹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것이 적절치 않는 조치로 간주되어 버립니다.

일찍 온 일꾼들이나 늦게 온 일꾼들이 모두 동일하게 품삯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 인간들의 노동 정도에 따라 제공되는 품삯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처음부터 포도원과 상관없는 놀고 있었던 자들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주인님은 일부러 품삯을 주는 광경을 처음 오는 일꾼들을 볼 수 있게 제일 나중 온 사람부터 주었습니다. 제일 나중에 불러온 일꾼들은 아마 "고맙습니다."를 연발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더 이상의 불평이 없었을 것입니다. 1 시간 일하고도 하루 종일 일한 전체 품삯을 다 받았으니 말입니다.

자신이 받은 것은 자신의 노동의 열매가 아니라 은총의 열매임을 그들을 알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품삯 주기가 먼저온 자들로 인해 비난을 받는 빌미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실 하나님 보시기에는 인간이란 당연히 천국과 무관한 노는 자들일 뿐입니다. 그런 인간들에게 주인님의 자유로운 은혜로 인하여 품삯을 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구원이란 우리들의 능력이나 자질이나 노동력의 대가이 아니라 주인님이 '찾아주심' 그 자체입니다. 주님의 찾아내시고 불러내신 그 은혜가 곧 구원이 되는 능력으로 작용할 뿐입니다. 다른 것이 일체 여기에 끼어들지 못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주님의 은혜는 인간의 고유 능력을 공격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은혜는 그냥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공격하면서 다가오는 겁니다. 잘못된 천국관을 지니고 있으면 안된다는 겁니다.

인간들은 자신의 노동력의 가치를 바탕으로 그 위의 자신의 정체성을 수립합니다. 그런데 그 바탕이 되는 노동력의 가치가 무용지물이 되면 그 위에 건립한 자아상도 같이 와르르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천국의 찾아오심입니다.

인간은 자신을 쳐다보면 모든 은혜의 아름다움이 일시에 무너집니다. 모든 것이 불평이요 불만입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스스로 자기를 살려내려고 자기를 쳐다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자신을 쳐다보지 마시고 십자가의 공로를 쳐다 보며 삽시다.

 



마태복음 21:42-46 건축자의 버린 돌 비유)


21:4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21: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21:44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21:45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줄 알고
21:46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이는 저희가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었더라


하나님은 지금도 쉴새없이 움직이십니다. 그 움직임의 여파로 오늘날 우리들이 이렇게 모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들의 움직임만이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활동은 아예 없다고 여깁니다. 만약 사람의 움직임으로 자신을 천국에 가고자 한다면 언제 가는 지쳐버립니다. "야 나도 여기간이 하나님께 충성을 하려고 애셨지만 이제는 나도 할 만큼 했는데 그만 포기해야겠다"고 중단해버리고 맙니다. 즉 자신이 시작한 일이 아니면 이 세상에서 의미 있는 일은 아예 없다고 여깁니다.

우리들은 원하든 원치 않든 하나님은 이 땅에서 출몰하셨습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에게 요청해서 내려오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 쪽에서 자진해서 움직이신 것입니다. 이렇게되면 구원되고 안되고는 인간 손에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활발하게 움직이시는 하나님 손에서 결정됩니다. 즉 인간이 작업에 들어가서 구원을 따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활동을 그저 순하고 꿀꺽 삼키면 되는 겁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여러분이 대단히 쉽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아, 그저 예수님이 주시는 바를 받아들이면 되는구나"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예수님 하시는 말씀을 수용할 마음 준비만 하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시는 그 말씀이 우리가 납득하기 위해 예상해놓은 그런 말씀이 아니라는 점이 실제적인 난제로 등장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드릴 마음이 있지만 도무지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이 그러합니다. 42절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라고 되어 있습니다.

왜 성전을 짓다가 불필요하다고 여겨지는 '버린돌'이 하나님의 구원을 위한 새로운 성전의 머릿돌이 되는 겁니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결코 인간과 결탁하고 인간과 동업하는 식으로 천국을 이루어나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말해주는 겁니다. 즉 인간이 신을 향해 벌려놓은 그 모든 작업이 결국 하나님 자체와 전혀 무관한 엉뚱한 짓을 했고 더나아가서 도리어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적대적 행위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순하게 삼키고 싶어도 그 예수님 말씀 속에는 우리가 쉽게 삼키는 것이 아니라 도로 토해놓고 싶고 안듣고 싶고, 거부하고 싶은 요소가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도 이 점을 미리 하시고, '사람들 눈에 기이하다'고 하셨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말씀이 쉽게 납득이 되는 말씀이 아니라 참으로 기이하게 들리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발언이 얼마나 기이한지. 예수님 말씀으로 인해 교회가 개혁하자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교회는 부숴져야 한다는 겁니다. 옛날부터 인간들은 신전을 세우기를 원했습니다. 가인의 제사가 그런 겁니다.

하나님을 자기 손과 정성에 의해서 붙잡아두겠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바쁜 일이 있더라도 자신이 예배하는 장소에는 꼭 방문해서 자신과 만날 수 밖에 그런 지점과 공간을 인간들의 손으로 만들어 내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성전이요 교회라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 의해서 붙잡히시는 하나님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그런 인간들의 행위를 다 깨어버리고 부셔버리는 공격적으로 나서십니다. 44절에 보면,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버린돌'로 취급당한 예수님은 그냥 가만있을 돌이 아닙니다. 신전을 지어놓고 신을 부르는 모든 인간의 행위를 찾아다니면서 다 때려부수는 그런 목적으로 활동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과연 이런 예수님의 발언을 우리가 순하게 인정하고 자신의 뜻으로 꿀꺽 삼킬 수 있습니까?

인간의 종교심은 원초적 본능에 해당됩니다. 자기 쪽에서 뭔가 신에게 소홀히 했다고 싶으면 괜히 선한 일이라도 하나라도 더 하고 싶은 것입니다. 신에게 보다 정성을 쏟고 신의 입맛에 맞는 생활을 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그런 행위들이 모두 도리어 자진해서 우리 곁에 오신 예수님 활동과는 정반대의 취지를 나타낸다는 겁니다. 즉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을 자신의 구원 소원이나 복을 받기 위한 용도로 이용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인간들의 그런 성향으로 인해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버림돌'로 돌아다니고 활동할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버림받은 돌이 깨고 깨트린다는 것에 대한 진정한 해석은 무엇입니까? 이 점에 대해서는 우리가 사도 바울의 해석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사도의 해석은 그 개인의 해석이 아니라 곧 주님의 해석입니다.

따라서 그 분이 한 해석과 다른 해석을 내놓은 것은 곧 다른 복음을 신봉하는 것이 되어서 저주를 받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대한 해석은 로마서 9:30-33에 나와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자신의 행위로서 십자가 앞에 나고자 하는 자들은 십자가가 가만두지 않고 그 사람을 저주해 버린다는 말입니다. 구원받은 이방인들은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으니 십자가의 용서를 순하게 꿀꺽 삼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자존심이나 위신이나 종교적인 성과나 업적 같은 것을 내세울게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의의입니다. 십자가가 눈 앞에 보이는 사람은 그 십자가에 오직 예수님만이 올라 가신 것을 압니다.

오늘날 교회나 기독교는 '그리스도 없는 교단'으로 변모해 갑니다. 교회가 있는 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의해서 단호하게 깨진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21:33-41 패역한 농부 비유)


21:33 다시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거기 즙 짜는 구유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21:34 실과 때가 가까우매 그 실과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21:35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21:36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저희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21:37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가로되 저희가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21:38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하고
21:39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어좇아 죽였느니라
21:40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이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뇨
21:41 저희가 말하되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때에 실과를 바칠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찌니이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양심이라는 게 있습니다. 양심이 하는 일은 선과 악을 구별해서 악은 하지 않게 방지하고 선을 적극적으로 행하게 하는 동기를 부여하는 겁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신의 양심의 기능을 단단히 믿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성경은 멀리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양심이란 자신의 신체적인 피곤도나 기분 따라 변동되기 일쑤입니다. 그리고 성격 따라 살아온 가정 환경과 사회 분위기에 따라 선과 악은 수시로 변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사람들마다 다 들 기준이 다릅니다. 그래서 성경이 있는 겁니다.

성경은 일시적인 기분 따라 적용되는 글들이 아닙니다. 마지막 때 하나님께서 인간을 심판하시는 기준으로 미리 와 있는 겁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평소에 성경을 보지 않으려합니다. 그것은 이미 자신 속에 양심이 있기에 그 양심의 지시대로 살아가는 것으로 '바른 인생' 되기에 모자람이 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41절을 보면, "저희가 말하되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때에 실과를 바칠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찌니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개의 단어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는 '악'이라는 단어요 다른 단어는 '세'라는 단어입니다.

사람이 악하다는 것은 자체적으로 악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포도원'의 존재에 준해서 그 '포도원'과의 관련성에서 악하냐 악하지 않느냐가 판정되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런 성경의 취지를 모르고, 자기 속에 있다는 그 양심에 준해서 살면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도 돌파할 수 있으리라고 여기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네 인생이라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그저 '세'를 준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신의 인생의 주인장은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즉 남이 준 인생에서 집세나 내는 처지에 있다고 믿고 싶지가 않은 겁니다.

즉 남의 집에 세들어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소유의 집을 본인이 갖고 있다고 식으로 인생을 설계하고 싶은 겁니다. 인간의 소유란 인간의 노동에서 비롯됩니다. 인간이 노동을 하게 되면 그것으로서 자의식이 강해집니다. 즉 "내가 이런 일을 할 적격자야. 나는 이 일을 하기 위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았어"라고 말입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적으로 그 노동의 댓가는 자연적으로 자기 자신이 되는 겁니다. 여기서 '소유권'이 발생됩니다. 그리고 그 소유권은 곧 하나의 '인격'으로 전환됩니다. 즉 이 사회에서 내가 사람답게 대우받을 수 있는 토대가 바로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가졌는가'와 직결되는 겁니다.

이러한 인식은 한 개인만 갖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자생적으로 지니고 태어납니다. 그래서 이 사회는 '누가 많이 가졌느냐'의 경쟁장이 됩니다. 그것으로 사람의 가치가 결정되는 세계입니다.

도대체 이 포도원을 주신 하나님의 취지에 대해서 전혀 몰라도 되고 오직 자신의 노동의 댓가만 자신이 획득해 나가면 그만이라는 겁니다. 즉 자기의 주인은 어디까지 자기를 위해서 노력해 온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가득차 있는 겁니다.

그런데 바로 인식이 포도원 주인되시는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것이 됩니다. 아무리 개인적인 양심을 운운해도 그 양심이란 어디까지나 인생을 주인이라고 우기는 본인을 위한 것이기에 그 양심조차 악과 공범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 세상에 누가 태어나면서부터 '내 인생은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인생밖에 없다'고 믿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이 인간 사회는 각자 가진 재산과 권세와 능력을 따져서 사람의 등위를 결정하는 사회입니다. 따라서 사고 방식 자체가 '자기 부인'이 아니라 도리어 '자기 긍정'으로 치닫게 되어 있습니다.

"하면 된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못할 것이 없다". "안된다, 안된다 하지 말고 된다 된다 하면 못해낼 일이 없다" 하든지, "당신 속에 있는 잠들고 있는 신의 능력을 깨우면 당신을 위대한 사람으로 번하게 될 것이다"라는 주문이라든지 온갖 종류의 긍정적 사고방식으로 뒤덮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사람의 끝은 바로 하나님의 대한 적개심과 불평의 본색을 노출케 된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자기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원하고 노력한 만큼 결과가 시원치 않다는 것을 늘 느끼게 마련이고, 그 책임은 자신에게 과중하고 징벌을 내리시는 하나님의 실수에 있다고 결론내리기 때문입니다.

바로 포도원 주인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이 점을 잘 아시기에 이 교만한 마음을 지적하기 위해 숱하게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었습니다. 오늘 본문 34-36절에 보면, "실과 때가 가까우매 그 실과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저희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사상과 정반대되는 사람이 찾아오면 아무리 신이 보낸 자라고 할지라도 구박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 위주의 인생관을 펼치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자연적으로 하나님의 중심을 말씀하는 하나님의 종과 수시로 충돌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나중에서 그 종들은 때리고, 죽이고, 돌을 들고 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더 많은 종들을 보내시는 겁니다.

여러분, 예수님이란 과연 누구십니까?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앞선 종들의 박해와 죽음과 핍박의 연장선에서 출몰하신 분입니다. 히브리서 1:1-2에 보면,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아들'이란 최종적으로 우리 앞에서 등장하신 분입니다. 더 이상 봐줄 수 없다는 최후 통첩 같은 취지로 나타나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 안에는,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당하기만 한 모든 선지자들의 고통과 괴로움이 종합적으로 담겨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바로 지난 모든 선지자들의 아품이 다 우리들의 태고난 고집과 죄성으로 일어난 결과임을 고백하는 입장에서 영접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이용해서 복이라도 따내겠다는 심보는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짓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예수님을 원하십니까? 그동안 인간들은 악마를 모델로해서 예수를 신봉해 왔습니다. 즉 예수님 앞에서 내숭이나 떨고 재롱이나 부리고, 가진 기능과 종교적 기술을 발휘하면 복주는 그런 예수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 예수님으로 인하여 도리어 진짜 예수님이 또 상처받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교회를 볼 때에 기능이 발휘되는 현장으로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회개입니다. 즉 "예수님, 저 때문에 죽으셨지요?"라고 말입니다.




마태복음 22:1-14 혼인잔치 비유)


22:1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가라사대
22: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22:3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22:4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22:5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22:6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22:7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22:8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예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22:9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대
22: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 오니 혼인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22:11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쌔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22:12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22: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22: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기독교의 핵심을 축약하면 이겁니다. "오직 예수님의 은혜로만 구원"입니다. 뻔한 이야기처럼 들릴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비유 이야기는 제법 길고 복잡합니다. 과연 이 본문에서 어떻게 "오직 은혜로만"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진멸을 부르는 혼인잔치'를 통해서 설명해 나가십니다. 즉 하늘 나라의 혼인 잔치는 하나님의 노하심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진노하심을 바탕으로해야 비로소 '은혜'가 은혜답게 비쳐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노동에 의해서 움직이는 세계입니다. 상호 맞을 리가 없지요. 여기에서 하나님의 노가 폭발하는 겁니다.

인간은 노동은 인간의 주체성을 외부로 발산하므로서 펼쳐집니다. 노동의 생산물과 그 주인은 따로 분리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생산물에는 생산자의 지혜와 계획과 노력이 담겨서 무에서 유로 창조되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생산물을 제거한다는 것은 마치 그 사람 본인의 신체를 베어 버린 것과 같은 겁니다.

부모 앞에서 자식을 고생시키고 구박하고 빼앗는 것은 부모 자신에 대한 학대입니다. 그래서 부모들을 될 수 있는 한 자기 자식을 군에 보내지 않으려고 합니다. 힘들어 키워놓은 자식 대신 차라리 자기가 대신 군대 복무하고 싶어할 지경입니다.

이처럼 인간들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에 관심을 갖고 평생을 채웁니다. 높은 산에 등산하는 사람은, 자신이 그 산 정상을 정복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점검하고 싶어 그 산에 도전합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그 일을 하면서, '내가 누구인가'를 생각지 않습니다.

'나중에 나의 육체를 누가 거두어 가지'를 생각지 않습니다. '나는 어떤 삶을 살기를 누구로부터 요청받는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지, '나는 이러이러한 것을 해내는 놀라운 인간이다'라는 점에 사는 재미를 거는 자들입니다.

이처럼 인간들은 모든 행위 결정과 판단은 자기 몸과 자기 세계의 확대와 관련 있습니다. 자기 세계를 확신시키는 동기를 가지고 움직인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이러한 작업을 방해하는 자가 등장한다면 인간들은 어떻게 대처하겠습니까?

참으로 단호하게 대처합니다. 신이 되었던 구세주가 되었든 일단 자기 것을 훼손하고 파괴하고 손을 타면 주저 없이 결별해 버립니다. 오늘 본문에서 임금님의 혼인잔치 통보는 여지없이 인간들이 개별적으로 벌리는 일이 충돌을 일으킵니다.

임금님이 의도적으로 그것을 유도합니다. 과연 '너가 지금 벌리는 일과 내가 주최한 내 아들 혼인 잔치 중 무엇이 더 중요한 일인가'라는 늘 묻는 식으로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매우 소중히 여기는 인간의 소유물을 건드려 시비 거는 식으로 전개됩니다.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14:16-20에 보면, 더 많은 핑계가 나옵니다. '나는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장가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임금하고의 갈등이 더 크게 번져서 종들을 사람들이 죽이는 일까지 벌어집니다. 혼인잔치에 오지 않겠다는 정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진짜 천국의 종들을 대단히 핍박하게 됩니다. 이 모든 일은 인간들이 자기 노동으로 해내는 모든 가치보다 더 우월한 가치로 그들에게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이 소식을 들은 인간들은 대단히 기분 나빠하지요. 왜냐하면 자기 자신의 소유물 보다 더 큰 가치가 있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보다 더 큰 가치가 있다는 소리인데 이는 인간의 자아절대성을 모독하는 발언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즉 신이라면 인간의 가치를 인정해주고 인간을 기분 좋게 해줄 때 비로소 그 신과 거래할 용의가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이슬람 종교의 특색을 유심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슬람의 알라신은 인간들의 무조건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신입니다. 알라신을 변호하기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바쳐야 하면 그렇지 않는 신자는 신자라고 취급을 하지 않겠다고 나옵니다.

자 그렇다면 인간은 기분 나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신 안에서 자신이 신처럼 합류될 수 있는 멋진 기회를 맞이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왜냐하면 '복종'이라는 규칙과 방법론에 따르기만 하면 이 세상의 '신의 사람'이 될 수 있기에 이는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 경지에 도달한 상황이 되는 겁니다.

즉 '복종'이라는 가능성이 곧 인간은 자신의 영원한 본존을 위한 가치 있는 노동이 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식으로 천국을 소개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들이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식으로 초청하는 겁니다. 초청을 거절할 수밖에 없게끔 하는 그런 초청으로서 인간에게 꽂아넣습니다.

즉 인간을 죄인으로 몰아갑니다. 회복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도저히 초청에 응할 수 없는 상황을 포착해놓고서 거기에다 초청을 해버리고서는 하시는 말씀이 "거 봐 내 초청에 불응했잖아"하고 나옵니다. 세상에 자기 결혼식을 앞두고 남의 결혼식에 축하하려 법이 어디있습니까? 참으로 터무니없는 억지 초청이지요. 아무리 무서운 임금이래도 말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임금이 궁극적으로 두 가지 면으로서 인간 세계를 다루고 계심을 알리고 싶은 겁니다. 그것은 평소에 인간들이 임금님에 대해서 자기보다 더 중요시 여기지 않고 있음을 분명히 들추어내겠다는 겁니다. 즉 어떤 인간도 직업의 다양함이나 노동의 종류와 상관없이 인간이 어느 분야에 종사하든지 간에 그 인간은 하나님은 우섭게 여긴다는 겁니다.

그래서 마지막 징벌을 하기 전에 그 구실을 만드는 기능이 바로 천국이 활동하는 기능 중의 하나입니다. "천국보다 너희 이 세상을 더 좋아하다니 나쁜 자들!"라는 평가를 내리면서 진멸하시겠다는 겁니다.

이 기능은 아무런 노동도 없이 강제로 붙잡혀 온 사람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왜 건방지게 지정된 예복을 입지 않아서. 임금의 말이 말 같이 않아?'하면서 그들도 진멸해버립니다.

이러한 기능을 배경으로 깔려야, 비로소 혼인 잔치에 정상적으로 참석하여 하나님의 천국을 축하는 자들에게는 이 모든 혜택이 그저 임금님의 은혜에서 나옴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혼인 잔치 비유는, 천국에 들어갈 자들로 하여금 모든 것이 그저 은혜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리고자 하는 비유입니다.

이것이 선택해 주신 은혜입니다. 갈라디아서 3:27-28에 보면,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만들어진 옷 앞에서는 '인생 성공', '인생 실패'도 무의미합니다. 차별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야말로 태초부터 선택받은 자의 운명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마태복음 24:32-35 무화과나무 비유)

질문)

마 24:32-36의 무화과나무 비유에 대해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너무나 비유가 아닌 비유해석들이 너무 많은 것 같아서
이 참에 한번 정리를 해 두는 것이 좋을 듯해서
부탁 드립니다.

답변)


무화과 나무 비유는,
이 세대에서 일어나는 흔한 현상을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등장은
이 세대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오는 세대에 속합니다.

무화과 나무의 실체는
바짝 마른 나무 가지가 아닙니다.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가 나는 것이
진정 여름 한철에 볼 수 있는
무화과 나무의 진면목입니다.

따라서 지금 이 세대에서는
예수님의 위광이 초라하지만
오는 세대에서는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자태와 위력으로
등장된다는 겁니다.




열처녀 비유 (마태복음 25:1-13)


◈ 열 처녀 비유 - 구원은 본인 행실이 아니라, 기름을 준비하라는 주님의 요건 !!

마태복음 15장에 이런 비유가 나옵니다. 열 명의 사람이 있는데, 열 명 다 처녀입니다. 이들 중에서 이혼한 사람이 있다거나, 동거녀가 있는 것도 아니고 모두가 다 처녀라는 말입니다. 다만 여유 분의 기름을 준비했다는 것과 준비하지 못했다는 것의 차이가 있지요.

그런데 기름 준비한 그것을 다섯 처녀가 기름 준비할 때 신랑이 와 버려요. 미처 기름 준비 못한 사람들이 기름을 사러간 사이에 말입니다. 그들이 사서 돌아올 때 신랑이 온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한 명도 도착하기 전에 신랑이 왔어요. 왜 그렇습니까? 다섯 처녀?혼인잔치에 참석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말입니다.

여기에서 기름이 등장한 것은 사실 핑계에(?) 불과합니다. 애초에 다섯 명만 들어가도록 되어 있어요. 그래서 그들이 구원을 받은 것은 본인의 행실이 아니라, 기름을 준비하라는 주님의 요건 때문에 천당에 가고 지옥에 가는 것이지, 그 사람의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예수를 믿으면 구원시켜 줄게" 라고 요한복음 3장에서 말했잖아요. 그러면 날 때부터 불교 집안에 태어나서, 학교도 불교 재단학교에 다니고 그러다가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조차 없었잖아요. 이것은 마치 주일학교 학생의 질문처럼, "조선시대에는 목사도 없었고, 선교사도 안 왔고, 교회도 없었는데 어떻게 됩니까?" 하는 것과 같은 말이지요.

이것은 일부러 천국에 못 오도록 가로막는, 즉 사랑을 못 받도록 하는 그러한 작업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기어이 지옥에 갈 사람을 지옥으로 보내는 하나님의 솜씨에 대해서 찬양해야 되지요. "야, 주님 참 끈질기다. 역시 하나님의 능력은 대단해!" 라고 찬미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제가 이런 소리해서 얼마나 욕을 많이 들어먹는지 모르는데, 하지만 성경을 한 번 찾아봅시다. 누구 말이 맞는지 말입니다. 시편 69편 27, 28절입니다.

(시 69:27) 저희 죄악에 죄악을 더 정하사 주의 의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소서
(시 69:28) 저희를 생명책에서 도말하사 의인과 함께 기록되게 마소서

이 말씀은, "죄를 짓게 해서라도 기어이 의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신다" 라는 것이지요. 신약시대에는 이러한 역할을 누가 합니까? 구약의 여호와가 하시는 일을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하시지요. 구약에 나오는 모든 말씀을, 빈틈없이 신약에서 예수님께서 성취해 내시는 그런 자리에 지금 주님이 주로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예수'가 아니고, '주 예수' 라는 것입니다. '주 예수' 라는 말은, 구약 성경에 있는 모든 말씀을 다 성취해서 오직 사랑을 입은 자에게만 천국을 허락하시는 그런 분이란 말이고, 이런 주님의 활동 때문에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 열 처녀의 비유 - 공평의 원리는 없다 !!

사실 조금 전에 말한 열 처녀의 비유에 있어서 공평의 원리는 없습니다. 인간 측에서 보자면 전혀 공평하지 않지요? 그리고 디모데전서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만민이 구원되기를 원한다고 했는데, 이 말씀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딤전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무슨 뜻입니까? 구원을 얻기 위한 어떠한 장벽도 하나님은 일체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구원을 결정할 때 인간들이 "너는 이런 죄를 지었으니 구원을 못 받아, 너는 이런 삶을 살았으니 반드시 구원받게 되어 있어" 라는, 이런 것들은 하나님 앞에 안 통한다는 말입니다.

구원의 조건에 그 사람이 유리하든 불리하든 상관없이 하나님이 그 모든 장벽을 허시고 자신이 원하는 자는 다 구원해 내시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편을 가르고 하는 것이 하나님께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기름을 준비할 때, 기름을 준비하라는 소식이 다 같이 들었잖아요. 그것을 보고 공평하다고 생각하시는데, 과연 맞습니까?

제가 여러분에게 "꽃 한 송이씩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라고 말했다면, 어떤 사람은 금방 가서 꽃을 준비한 사람이 있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급한 일 먼저하고 나중에 준비하려고 한 사람도 있고, 아예 잊어버린 사람도 있겠지요. 우리 같으면 모든 사람이 꽃이 있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면 다 꽃을 준비해 오도록 기다리겠지요.

그런데 다섯 처녀들은 미처 기름 준비가 늦었지만, 그래도 준비를 했는데 혼은 잔치 집 대문은 닫혔고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열어주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기름을 준비하라는 취지는 무엇입니까? "내가 원하는 사람만 부르겠다" 라는 뜻입니다. 뭐가 어렵습니까?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이렇게 쉬운 이야기가 왜 납득이 안 되고 이상하게 들리는가 하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방법과 우리가 평소에 생각했던 구원방식이 너무나 차이가 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려운 것이 아니고 다르기에 생소하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 14-30 달란트 비유

달란트 비유를 통해서 본 주인의식
박윤진

흔히 주인의식이라고 하면, 내가 이 물건, 이 사회, 이 국가의 주인이기 때문에 보다 책임있게 행동하려는 정신 자세를 말합니다. 내가 주인이기 때문에 보다 적극적으로 내 소유물의 질적, 양적 성장을 위해 자연스럽게 매진하도록 유도하기 위한 체면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주인의식은 위에서 말씀드린 개념과는 다릅니다.

나를 종으로 여기는 마음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내게는 주인이 따로 계신다는 의식입니다. 종으로서 주인의 마음을 헤아리는 마음입니다. 나는 누군가에게 소속되어 있는 자라는 것을 잊지 않고 나를 소속시켜주신 그 분을 항상 염두하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쉽지 않습니다. 내가 주인이 아니라 종이며 나를 종으로 삼으신 분이 엄연히 따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 그래서 나는 그 주인의 영광을 위해서 창조된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항상 깨닫기를 소원하는 것은 마치 돼지가 먹을 것 앞에서 절제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오히려 아담된 속성은 어떻해서든 주인의 영광마저 빼앗아 자신의 소유물로 챙기려고 합니다. 도적 심보가 항상 주인의식을 추월합니다.

우리가 아주 잘 알고 있는 천국 비유 중 하나인 달란트 비유는 진정한 종이 누구인가를 심도있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종이란 주인 의식에 사로 잡혀 있는 자입니다. 자신의 소유물은 전혀 없습니다. 자신의 노동가치도 최종적으로 주인의 것으로 환원됩니다. 주인이 현재 자신의 눈에 보이든지 보이지 않던지 여전히 자신의 신분이 종이라는 것에 분노하거나 탈출을 시도하지 않으며 다만 관심이 있는 것은 주인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드리는 것 뿐인 자입니다. 이런 자들이 이미 놓여진 곳이 바로 천국인 것입니다.

주인이 종들과 함께 있을 때, 겉으로 보기에는 모두 종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인이 멀리 여행을 떠나 주인이 종들의 눈에 보이지 않을 때, 마치 주인이 없어진 것과 같은 배경을 깔면 누가 진짜 종이며 누가 가짜 종인지를 확연히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재물의 소유과 연결시키면 종을 지배하고 있는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 얼굴을 알아 볼 수 있습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주인은 멀리 타국으로 여행을 떠납니다. 그리고 종들에게 5, 2, 1 달란트를 각각 나누어 줍니다. 이 때, 평소 종들이 주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5, 2달란트를 받은 종들은 장사를 함으로써 2배의 소득을 얻게 됩니다. 주인이 계시지 않지만 이 두 종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주인과의 관계인 것입니다. 주인을 어떻게 하면 흡족하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는 것이 내가 소속되어 있는 주인에게 가장 좋은 방법일까를 고민하고 고민했을 것입니다. 즉, 이들은 여전히 주인과 함께 있는 자들이며 천국에 있는 자들입니다.

열심히 벌면 성과급으로 나에게 얼마가 떨어질 것이라는 계산은 없습니다. 반대로 금전적 손실이 주인과 나와의 관계를 끊을 수 없음도 잘 알고 있습니다. 실로 이 종들은 주인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단정할 수 있는 근거는 그들이 장사를 했다는 것입니다. 장사라는 것은 돈을 벌 수도 있지만 잃을 가능성도 큰 게임입니다.

만일 이 충성된 종들이 자신의 행동여하에 따라서, 그러니까 돈을 많이 벌면 주인과의 관계가 더욱 견고해 지고, 돈을 잃게되면 주종관계가 단절된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쉽게 장사에 나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들이 주인의 부재 중에도 여전히 주인과 함께 있는 것과 같이 달란트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던 것은 주인과 따로 떨어진 독립된 나라는 것을 의식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인의 돈을 활용해서 두 배의 이익을 얻는 경우와 반대로 돈을 잃게 되는 경우는 모두 나를 중심으로 생각한 결과입니다.

이렇게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나에게 유리하면 성공, 나에게 불리하면 실패라고 단정하게 되며 이 성공과 실패라는 잣대를 가지고 다른 종과의 경쟁에 나서면서 자연스럽게 우열을 가리는 것입니다. 우열을 가리면서 챙기는 것은 여전히 잘난 나, 혹은 못난 나가 되겠지요.

그러나 주인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생각한다면 다른 종과의 경쟁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경쟁의 결과물인 우열은 나를 중심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종이라면 그렇습니다. 종의 모든 결과물은 모두 주인에게 귀속되기 때문에 1등 종과 2등 종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종의 개념입니다. 단지 주인만 드러나면 되는 것입니다. 주인이 있을 때와 없을 때가 그들에게는 아무런 차이도 만들지 못하며 장사에서의 개인적 성취정도 역시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실상은 주인이 종들에게 한 명령자체가 이들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주인과 분리되어 있는 독립된 나는 잊고 주인이 하신 명령에 의해서 완전히 사로잡힐 수 있을까요? 이러한 질문은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주인과 종으로써 관계를 맺게 된 이들은 상호 자유로운 의사결정에 의해서 어떤 계약을 맺음으로 성립된 관계가 아닙니다. 종이란 이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주인때문에 종이 된 것이지 종이 원해서 주인을 선택하고 그 사람의 종으로 자처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종이라는 말에 담겨진 의미입니다. 정리하면, 종이 어떠함이 종됨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어떠하심에 따라 종이 결정되기 때문에 종 쪽에서 어떻게 해야 참 종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처음부터 성립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초점은 과연 주인이 어떤 분이가에 모아지게 되어있습니다.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 종의 모든 것은 아무 의미가 없음이 밝혀 졌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주인이 어떠하신 분인가를 알면 그 천국에 살게되는 종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지금 달란트 비유는 천국이 어떤 곳인지를 알려주기 위한 비유이고 천국의 주인은 예수님이신데 그 분께서는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 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종으로서 사신 분이시며 이러한 순종의 결과물로 결코 종이 될 수 없는 악한 그들이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된 것입니다. 즉, 지금 5, 2 달란트를 받은 종들은 자신의 주인이 종을 위해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 그리고 죽음조차 이길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는 종인 것입니다. 나의 실패와 성공으로 쌓아올린 주종관계는 조작된 허위의 것임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주인께서 모든 것을 알아서 하시기 때문에 그냥 그 분의 말씀에 순종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즉, 나를 중심으로 파생되는 이익과 손실은 종들에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반면, 한 달란트를 받아 그것을 땅에 숨긴 종은 여전히 나를 중심으로 한 성공과 실패를 저울질 하는 종입니다. 그래서 5, 2달란트를 받은 다른 종들과 자신이 받아 줜 1달란트를 비교했을 수도 있습니다. 본문에서 가장 뚜렷한 것은 이 종이 평소 주인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가 입니다. 종이라고 자처하면서도 정작 그 주종관계를 이루고 계신 주인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 달란트를 땅에 묻은 종은 주인을 이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주인님, 저는 주인님이 굳은 분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시고 씨 뿌리지 않은 곳에서도 곡식을 모으시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저는 두려운 나머지 나가서 주인님의 돈을 땅에 감춰 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여기 주인님의 것이 있습니다.’

자신의 주인을 굳은 사람으로 알고 있는 사람, 주인의 것과 자신의 것이 분리되어 있는 사람, 그래서 자신의 종됨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이 최대한 노력해야 하는 사람, 이 사람이 바로 게으르고 악한 종입니다. 자신의 주인이 누구인지 전혀 모르는 체로 자신의 것을 보호하는 데에만 급급한 사람이 바로 주인이 보기에 악한 종입니다. 이 종의 진짜 주인은 자기 욕심이며 이것이 장성하여 죄가 되고 결국 사망을 낳게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천국의 주인입니다. 그것이 맞다면 예수가 어떻게 천국을 이루셨는가에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가 밝히 우리 눈에 보임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얼마나 오해하고 있습니까? 그래서 내가 종이라고 우기고 싶어서 내민 노력봉사와 금전상납이 얼마나 뿌리깊게 한국교회에서 횡행하고 있습니까? 진정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굳은 자로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잘난 1등 종이 된 나를 위해 매진하고 있지 않습니까?

나를 위해 죽음까지도 마다 하지 않으신 주인이 따로 계십니다. 그 분때문에 우리가 종이 되었습니다. 그 분이 지금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주인이 된 것은 아닙니다. 그 분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런 주인의식이 바로 천국입니다. 당신은 어디에 소속된 종입니까?






마가복음 12장 악한 종 비유)


* 여기서 마가복음 12장을 한번 보자.

(막 12:1) 예수께서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즙 짜는 구유 자리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막 12:2) 때가 이르매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내니
(막 12:3) 저희가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막 12:4)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거늘
(막 12:5) 또 다른 종을 보내니 저희가 그를 죽이고 또 그외 많은 종들도 혹은 때리고 혹은 죽인지라
(막 12:6) 오히려 한 사람이 있으니 곧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가로되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 인생은 저주받은 인생이다 !!

* 이것은 무엇을 보여주는고 하니, 아들을 공경하지 않으면 저주받은 인생이라는 것이다. 북한에 소를 천 마리나 보내주어도 말이다. 여기 6절에서, '최후로 이를 보내며' 라는 말이 나오는데, 아들을 공경하지 않으면 심판이라는 것이다. 여기 '최후' 라는 말은 하늘 보좌에서 결정했다는 것이다.

*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최후는 최후가 아니고, 하나님의 관심사는 '아들공경' 뿐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 아들을 공경을 하지 않는 자들이 맞이하는 그것이 바로 '최후' 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하늘 보좌를 강조하는 것은, 앞으로 진행되는 요한 계시록의 해석을 이 하늘 보좌에다 한번 맞추겠다는 것이고 말이다.

* 여기에서 요한복음 3장을 한번 보자.

(요 3:35)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
(요 3: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 5:23)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 요한 계시록은 아들을 죽인데 대한 복수의 책이다 !!

* 여기서 강조하는 것이 무엇인가? 아들이라는 것이다. 다른 것에다 관심을 두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요한복음은 아들이라고 되어있지만, 요한 계시록에서는 '보좌' 이고 '책' 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 책을 펼치니까, 아들을 찔러 죽인 그 대가가 역사적으로 증거되는 것이 요한 계시록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요한 계시록은 아들을 죽인데 대한 복수의 책이라는 것이다.

* 여기에서 우리는 원초적인, 이것을 '시원(始原)적인' 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계획이 다 드러난다는 것이다. 생명 책에 기록된 자는 구원을 받지만, 나머지는 끝까지 반발하다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런 구원과 심판의 서로 다른 궤도가 뚜렷하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 바로 이런 일을 하기 위해서 보좌가 등장했기 때문에, 하늘보좌는 바로 '심판의 자리' 라는 것이다. 이 보좌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 24장로와 4생물인데, 4생물은 심판의 기능을 하고, 24장로들은 이러한 무서운 구사일생으로 구원받은 그 기쁨으로 말미암아 너무나 통쾌하고 상쾌함으로 말미암아 생명의 면류관마저도 반납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늘나라에서 그렇게 큰 평안과 큰 기쁨이, 이 지상에서의 아픔이 큰 대조를 이루며 나타난다는 것이다.

* 그런데 사도요한이 걱정이 되어서 이 책을 펴느냐고 하니까, 24장로들이 하는 말이, '걱정하지 마라. 결국 이를 다윗의 뿌리가 할 것이다' 라는 것이다. 이 다윗의 뿌리는 우리가 알다시피 이사야 11장에 나온다는 것이다.

(사 11: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사 11:2)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사 11:3)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 눈에 보이는대로 심판치 아니하며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아니하며
(사 11:4) 공의로 빈핍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사 11:5) 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몸의 띠를 삼으리라

* 이새의 줄기에서 왜 한 싹이 왜 나는가? 심판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들이 하나님께서 선택한 이새의 뿌리를 무시하였다는 것이다. 이새의 줄기에서, 다윗의 뿌리에서 나타난 사람들을 심판한다는 것이다. 요즘은 어린아이들도 자기 마음대로 '예수, 예수' 라고 하지만, 그러나 그분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분인가?




누가복음 10장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


예수님의 선한일이란, ‘부자냐 가난하냐’, 그 문제가 아니고 ‘얼마나 착하냐, 안착하냐’, 그 문제도 아니고, ‘네가 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 그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다. 세상은 이미 끝날 세상이고 정죄 받아야 할 세상이니까 정죄 받는 세상과 함께 멸망 받지 말고 그 세상에서 너만은 빠져 나오거라,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방식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뭘 알아야 되겠어요? 세상이 왜 멸망당해야 되는가? 그것을 알아야 되겠지요. 내가 그토록 세상에서 성공하고 싶고 세상에서 크게 되고 싶은데, 그런데 예수님의 구원은 “네가 너희들만큼은 세상과 함께 멸망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너희들을 빼돌리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고 했으니까, 세상이 왜 멸망당해야 되느냐를 알아야 우리가 세상에 협조 안하고 세상과 함께 살지 않을 수 있잖아요.

‘아, 이래서 세상은 멸망 받았구나. 이래서 우리는 구원 받았구나’라고 하면서 구원되는 요소에 대해서는 감사하고 멸망되는 요소에 대해서는 거부할 것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세상이 왜 멸망당해야 되는가를 이야기해 봅시다. 두 번째 시간은 좀 어렵습니다. 선한일을 하려면 반드시 누가 옆에 있어야 됩니다. 혼자서 볼펜 돌리고 있다고 선한 일이 되지 않습니다. 옆 사람에게 볼펜이 필요할 때 그것을 줄 때 선한 일이 됩니다.

이렇게 선한 일이라는 것은,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이 있어야 되고 선한일을 받는 사람이 있을 때 그 사이에 뭐가 형성됩니까? 선한일이 되는 겁니다. 혼자서 도 닦는 것은 선한일이 될수 없지요.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드는데, 어린이 여러분들도 많이 들어 보셨지요?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나서 가진 것 다 빼앗기고 죽도로 얻어맞아서 피를 흘리고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건져주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도록 길바닥에 누워 있을 때 마침 그 길을 어떤 제사장이 가다가 그것을 보고 못본척 그냥 지나갔습니다. 두 번째 사람이 오길 래 강도만난 사람이 도움을 청했지만 그도 못본척 그냥 지나갔습니다.

세 번째 사람이 오는데 그 사람은 평소에 동네 사람들이 믿음 없다고 깔보는 사람이 왔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바로 유대인들이 아주 싫어하는 사마리아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이 강도만난 사람에게 다가와서 피가 난 상처를 닦아주면서 “어디 사십니까? 제가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은 살았습니다. 제 등에 업히세요.”

그렇게 해서 치료도 해주고 머물 곳을 마련해 주면서 “주인장! 이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다 해주세요. 제가 다 낼 것이고 만약에 이 돈으로 모자라면 내가 다시 와서 다 갚을테니 이 사람이 원하는 대로 다 해주세요” 하면서 자기 이름도 안 밝히고 그냥 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중에서 누가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겠습니까? 첫 번째 사람? 두 번째 사람? 아니지요? 세 번째 사람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할 때 혼자서 사랑, 사랑, 한다고 사랑이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야 되고, 그 다음에 중요합니다. 아무 영문도 이유도 없이 그냥 사랑 받아야 될 사람이 있어요.

만약에 제가 여기 앉아 있는데 아주 못생긴 사람이 와서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하면 제가 좋아하겠습니까? 못생겼는데. 화를 내면서 “내가 당신 같은 사람을 원했는가?”라고 하잖아요. 그러면 사랑이 형성 됩니까 안 됩니까? 안되지요. 사랑하고 하고 싶은 사람이 있더라도 사랑이 안 되잖아요. 그러면 언제 사랑이 형성됩니까? 누가 와도 나는 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라는 그런 지경 상태에 놓여 있어야 사랑이 형성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할 때 우리는 어떤 지경에 놓여 있어야 하느냐 하면, 내가 내 힘으로 아무것도 될 것이 없을 때, 그리고 세상과 더불어서 멸망당해도 싸다, 하는 그것이 확정되었을 때, 가족도 떠나고, 친구도 떠나고, 심지어 국가에서 일주일 안에 사형을 집행한다고 할 그런 순간, 모든 사람이 다 침 뱉고 돌아설 때에 그때 비로소 뭐가 됩니까?

그때 누군가 나를 구원하면 그때 비로소 나는 뭘 느끼느냐? 사랑이라는 것을 느끼죠. 그 사랑을 받은 사람은 누구지요? 십자가 옆에 달려 있던 누구입니까? 강도입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사형 집행되는 사형수였습니다. 그 사형수가 예수님보고 “나를 생각해 달라”고 하니까, 이제 사랑받을 대상이 나타났지요? 그때 예수님 하시는 말씀이, “네가 오늘밤 나와 함께 (어디에 있으리라?) 낙원에 있으리라.”

예수님은 ‘누가 사랑받을까’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사랑이 담기는 그것을 보고 좋아합니다. 자기 사랑이 사랑 값을 하면서, 사랑이 사랑의 행세를 하면서 그 속에 녹녹하게 담겨 있을 때 그것보다 이 세상에 더 중요한 인물이 없습니다. 강도가 되었든 창녀가 되었든 예수님의 자기의 사랑이 담겨 있는 사람은 천하보다 귀하고 “99마리의 양보다 한 마리 양이 더 귀하고 좋은 것”(마 18:12,13)입니다.

같이 집에서 농사짓던 부지런한 아들보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모든 유산을 다 탕진하고 몰골도 형편없고 몸에서 냄새는 풍기고, 슬리퍼 질질 끌면서 염치 불구하고 아버지 집에 와서 “아버지, 아들 대우 받으려고 온 것이 아니고 그저 종이나 시켜주시고 밥이나 먹여주면 감사합니다. 아버지, 절 받아 주시겠습니까?” 라고 나오는 그 집나간 그 아들에게 주님께서 “너 같은 인간에게 주려고 내가 금가락지 마련했고, 소를 잡았다”고 하십니다.

“제가 그럴 자격이 됩니까?” “네가 받을 수 있는 자격을 묻는 것이 아니고 내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된 것, 내 사랑이 네 속에 녹녹히 그냥 있다는 그 자체가 중요하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주특기나 재치나 재롱이나 이런 것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이 여전히 감하지 아니하고, 녹슬지 아니하고 생생하게 우리에게 담겨 있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뭘까요? 그 사랑이 한글자로 “피”입니다. 우리는 피가 필요하지 않다고 여깁니다. 피는 선지국할 때나 필요하다고 여깁니다. 피가 필요하냐, 필요없냐, 그런 것은 우리가 결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제가 첫째시간에 이야기 했습니다. 우리는 자기가 유리하냐, 불리하냐를 누가 판정한다고요? 내가 판정해서 내가 유리한 것만 골라서 선택합니다. 그게 아니고 정작 우리에게 뭐가 필요한지는 우리자신도 몰라요.

그러나 뭔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을 통해서 내가 저것 없이는 못사는 인간이라는 것을 비로소 아는 겁니다. 예수님의 피가 왔다는 것, 그것도 용서하는 피가 왔다는 것은 우리는 무슨 짓을 해도 용서 못 받는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입니다. 우리는 어떤 선한 일을 해도 그것이 나의 구원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아는 겁니다. 그것이 뭐냐?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갈 3:1)입니다.




누가복음 14장 예복입지 않은 비유)


여호와깨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났다고 되어 있는데 아브라함이 보니 한 분이 아니라 세 분이 오시고 있었습니다. 한 분은 여호화 하나님이고 다른 두 분은 그 여호와를 보필하는 수행 천사일까요?

창세기 19:1에 보면, "날이 저물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았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리어 절하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세 분 중에서 두 분의 천사만이 소돔과 고모라도 내려가신 것입니다.

그러면 빠진 한 분은 천사의 역할을 하실 분이 아님을 알 수 있지요. 그런데 이런 특별한 분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실 때에, 아브라함을 직접 만나기 위해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것이 인간으로서는 황송스러운 일입니다. 아브라함도 얼마나 반갑고 고맙고 놀랬던지 세 분을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다해 드리려고 합니다.

먼 길을 여행하는 피곤한 여행자처럼 여기면서 친히 물을 떠서 발을 씻기려고 했고 천막 안으로 인도해서 편히 쉬게 하고 배불리 먹을 수 있도록 성대한 음식까지 즉석에서 준비합니다. 성심성의를 다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번에서 세분의 천사 입장을 우리가 가정해서 생각해보면, 천사 세분이 평범한 인간들의 나그네 모습으로 왔음에도 불구하고 낯선 자를 경계하지 않고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공손하게 대접하니 참으로 칭찬할만한 태도이지요. 따라서 많이들 얻어 잡수시고 많이들 축복해주리라 우리가 짐작할 것입니다.

참고로 떡을 만들어 드리는 세 스아라는 고운 가루 양은 요즈음 부피로 해서 24ℓ나 됩니다. 엄청난 양이지요. 뿐만아니라 세 분들이 고기 잡수시라고 송아지 한 마리를 다 잡습니다. 50인분은 충분히 더 될 수입니다. 한 사람이 넉넉하게 1㎏씩 잡수신다고 계산해 보세요.

아브라함은 겸손하게 말해서 '조금'이라고 말했지만 실상은 하나님과 인간과 함께 하는 성대한 잔치입니다. 과연 이 세분은 아브라함의 태도 여하에 따라 아브라함의 가정을 더욱 더 복을 주시려고 오신 분들일까요?

아닙니다. 그러면 왜 오셨습니까? 잡수실 것 실컷 잡수시고는 엉뚱하게도 자기들과 얼굴 맞대고 있는 아브라함에 대해서 언급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라가 어딨느냐?" 하시면서 사라를 찾습니다. 왜 그 현장에 없는 사라를 찾으실까요?

이 점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누가복음 14장의 한 대목을 거론하겠습니다. 15절-24절에 보면, "함께 먹는 사람 중에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니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잔치할 시간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가로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하나는 가로되 나는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종이 가로되 주인이여 명하신대로 하였으되 오히려 자리가 있나이다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이 본문에서 하나님과 인간과 함께 하는 장의 구성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함께만 있으만 기쁜 잔치가 성립합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기쁜 잔치에 같이 기뻐하는 심정으로 참석해야 될 자가 따로 있고 참석해서는 아니될 자가 따로 있습니다. 결코 숫자 한 사람이 아쉬워서가 아닙니다.

잔치의 의미를 모르는 자는 기어이 참석치 않게 하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좀 더 진전된 내용이 마태복음 22장에 나옵니다. 9절 -14절에 보면 누가복음이 없는 내용이 추가해서 나오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 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 오니 혼인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쌔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여기에 보면 잔치에 참석하도록 초청되었다고 해서 제대로 된 잔치 손님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청함'과 '택함'의 차이를 예수님은 분명히 하십니다. 단순히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으로 천국 잔치가 가능하다고 본다면 이 사람은 청함을 받은 자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도가 가슴에 담긴채 참석하는 자라면 그 사람은 '택함'을 받은 자입니다. 이런 취지에서 오늘 본문을 다시 봅시다. 세 분의 천사들은 아브라함에게 후한 대접이나 받으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나름대로 복안을 가지고 오신 분입니다.

그 복안이 무엇입니까? "사라가 어디 있느냐?"로 시작하십니다. 창세기 3장에서 보면, 하나님께서는 수풀 속에 숨어 있는 아담 부부에게 다음과 같이 먼저 말씀을 던지십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말입니다. 어디 있는지 몰라서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름대로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너를 찾아왔다는 겁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세 분에 있어 진정한 기쁨의 잔치는 아브라함의 접대나 사라의 음식 솜씨가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방적으로 통고하고, 예고하신 그 내용이 진정한 하나님과 인간과의 만남을 성사시킵니다.

실제로 천사는 말씀하시기를 "내년이 다시 올 터인데 오게 되면 그 때는 벌써 사라가 임신해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즉 이삭의 잉태는 결코 아브라함 개인의 소원 성취 차원 일어날 일도 아니라 분명히 하나님의 앞선 뜻이 있음을 알리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이삭을 잉태함이 예언의 마땅한 결과라면 앞으로의 모든 여호와의 예언도 빈말이 아니라 동일하게 성취될 내용을 지니고 있음을 분명히 하시겠다는 겁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천국의 본질은 인간의 숫자로 자동적으로 가능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하나님께서 탱크처럼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뜻에 의해서 성립된 잔치이어야 합니다.

흔히들, 교회 교인들은 모두 자신들이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다고 자부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간증이라는 것을 들어오면 자신들이 아쉬워서 애탈 때 그것을 채워주시는 식의 하나님으로 소개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나 그런 신앙은 옳지 못합니다. 전혀 하나님을 믿고 사랑할 마음도 안되고 도리어 하나님에 대해서 적대적 마음을 지니고 있었는데 하나님의 일방적인 밀어 닥치기 식의 능력으로 인해 비로소 예수님을 알고 하나님을 알게 된 신자라면, 예수님이 비유로 하신 말씀, 즉 예복 입지 않는 자를 마구 결박해서 지옥 어두운데로 데려가서 영원한 형벌을 충분히 실감 하고 있을 것입니다.

결코 자기 소원 성취의 하나님이 되어서는 아니됩니다. 하나님께서 잘 대접하니 하나님의 복주시더라는 식으로 나오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물으신 것이 "아브라함 착하다"가 아니라 "사라는 어디 있느냐"입니다. 사라에게 잉태하는 힘은 남편인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잘 모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아들 낳기 위해 천사를 초청하고 사전에 음식을 많이 준비한 것도 아니요 발 씻을 물까지 준비한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도 천사 세분씩이 무엇 때문에 자신을 한꺼번에 찾은지 전혀 감 잡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알게 되겠지요. 이것이 바로 진정한 하나님의 일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일에 참여되어 하나님의 일방적 뜻이 내장된 자만이 신자입니다.




누가복음 15장 잃어버린양 비유)


사람에게 있어 진정한 죄관념은 예수님과 더불어 있을 때만 밝혀집니다. 일찍이 다윗은 자신이 진정 죄가 무엇인지를 아는 상태에서 죄인됨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결코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모친의 죄 안에서 출생한 그 자체가 죄인 되게 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다윗 자신이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죄가 자신을 되레 죄인 되게 만드는 과정에 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죄의 권세는 나의 허락도 없이 들락달락 마구 나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흔히들 사회에서 ,‘정직하라 살라’라고 말을 하지만 이 세상에서 인간이라고 생긴 존재치고 매일같이 거짓말 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따라서 아무리 울고불고, 반성하고 자책해도, 되레 그것이 자신이 죄를 가리는 역할 밖에 못하는 겁니다.

도박판에서 돈을 따기 위해 수고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의 기술과 오기와 투지와 집착을 나의 기술과 오기와 투지와 집착으로 꺾어버렸다는데서 오는 순간적인 희열을 맛보기 위해 끝까지 올인합니다.

우상이란 바로 이런 겁니다. 우상이란 자기가 반성해서 끄집어낸 죄를 자신이 실시하는 있는 방법을 사용하는 우상입니다. 이런 우상 가지고서는 늘 새롭게 피어오르는 죄를 그때그때마다 대처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란 과거에 한 번 효과 본 그 방식에서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이로서 우상이란 이미 과거에 굳어져버린 것을 두고 말합니다.

인간의 반성 행위 다음에는 반드시 우상이 달라붙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해서 자체적으로 자신의 죄를 제거한 방식을 사용하게 되어있고, 그렇게 해서 스스로 의인으로 거듭 난 처럼 행세하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되면 교회 안에서 도박판이 벌어지는 겁니다. 나의 기도의 능력과 헌금과 신에 대한 충성도가 자기를 지켜주는 판돈이 됩니다.

이 판단에 의해서 상대방의 판돈의 기세를 꺾는데서 오는 쾌감을 즐기는 곳이 교회가 되고 맙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끊어지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만들고 이어놓은 사랑의 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란 우리 자신으로부터 출발래서 하늘까지 닿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우리 외부에 있습니다. 외부에서 쏟아부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받은 자는 자기 방어를 하지 않습니다. 이 사랑의 관계가 회개를 형성시킵니다. 이 회개에 대해서 적절한 예를 우리 주님께서 주셨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보면 ‘잃어버린 양’ 비유가 나옵니다. 목자 뒤에는 목자를 졸졸 따라다니는 99마리의 양이 나옵니다. 하지만 진정 하늘나라에 기쁨을 주는 양은 그 99마리의 양이 아닙니다. 되레 잃어버린 양 한 마리가 기쁨을 줍니다. 목자가 그 잃어버린 양이 무사히 찾아 귀환할 때에 너무너무 기뻐합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의 관계로만 이어져야 하는 것이 성도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불신자들은 이런 기쁨은 없습니다. 모든 것은 자기 힘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재앙이 쏟아지니,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강력하게 반발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들이 스스로 미처 발견해내지 못한 죄입니다.

우리 안에 이런 반발이 들어있습니다. 그래놓고서도 우리는 우리들의 반성력을 믿고 싶어합니다. 그래야 자신이 근사한 존재라고 스스로 인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스스로 매일같이 잃어버린 양임을 자인해야 합니다. 매일같이 건져주시고 또 건져 주시는 주님 앞에, 우리는 더 이상 자신의 행위에 의미를 두지 맙시다.




누가복음 15장 탕자비유)


하나님은 알기 쉬운 말로 자기 백성과의 관계를 소개하십니다. 젖먹이 아이와 그를 낳은 어머니의 관계랍니다. 젖먹이 어린아이는 비록 자기 엄마를 잊을지라도 성인인 어머니는 결코 자기 자식을 잊지 않습니다. 여기서 젖먹이 수준의 안목과 어머니 수준의 안목의 차이를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언제 젖먹이 같은 백성들이 하나님을 생각할까요? 13절 끝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 백성을 위로하였은즉 그 고난 당한 자를 긍휼히 여길 것이니라”. 즉 사람이란 고난 중에 있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알지 못합니다. 도리어 자립하려고 설치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긍휼, 즉 불쌍히 여겨달라기 보다는 자기 하는 일에 협조하라고 기도할 것이 뻔합니다. 만약에 자기 하는 일에 하나님께서 무응답이면, 인간들은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나는 하나님을 찾았지만 하나님은 매정하게도 나를 버렸다”고 말입니다. 이것은 성경 말씀하고는 다른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말씀이 어려워서 사람들이 성경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답변을 안 해주니 성경 말씀으로부터 눈을 돌려버리게 됩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그토록 아쉬워 하는 것을 주시지 않고 긍휼이나 ‘십자가 피의 복음’이니 하는 것으로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것은 근본적으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세상의 성격이 결국 우리로 하여금 죽음으로 몰아넣는 세상인 점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남들보다 더 죄를 지어서 죽는 것이 아니라 아예 이 세상 자체가 우리를 죽이는 세상이고 우리는 그 세상 안에서 출생했습니다.

어떤 분이 암에 걸러서 우리보다 조금 일찍 세상을 하직하신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신은 더 좋은 나라에 먼저 가서 편히 쉬게 되었는데 남아 있는 여러분들을 여전히 세상에 남아 있으면서 고생을 계속해야 하니 참 미안하고 죄송스럽습니다”라고 말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인간으로서 도저히 불가능한 일을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이 이 죽음의 세계에서 생명의 세계로 건져주기 위함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대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저 한평생 아무렇게 살다가 죽어서 눈 감으면 편안히 쉬면 그만이지”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십니다. 그 죽음의 세계라는 것이 단순히 눈 감은 깜깜한 세계 정도가 아니라 말로 표현이 다 안 될 정도의 고통의 세계라는 겁니다.

마가복음 9:43-45에 보면,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생 손, 생 발을 톱으로 슬근슬근 잘라낸다고 생각해보세요. 그 고통이 얼마나 심하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진심으로 우리에게 당부하십니다. 장차 인간들이 죽어서 들어가게 될 지옥은 이정도 고통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극심하게 고통스럽다는 겁니다. 따라서 차라리 범죄한 생 손과 범죄한 생 발을 톱으로 잘라내는 한이 있더라도 나머지 지체로서만으로 절대로 들어가서는 안될 곳이 지옥이라는 곳이라고 하셨습니다.

천국과 지옥을 만드신 예수님께서 친히 당부하시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참으로 우리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는 곳은 예수님 본인이 더 잘 아시기에 예수님은 우리가 요구하는 것을 주시지 않고 도리어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을 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불쌍히 여겨주심’입니다.

빌립보서 1:29에 보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아야 믿음이 생기게 되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단순히 믿음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 받는 것도 옵션처럼 따라 붙습니다.

왜 우리가 그냥 천국에 가면 되는데 고난이 따라와야 하는 것일까요?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떤 집의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당겨 챙기고서는 가출하고 말았습니다. 이제 그는 아버지없이 스스로 자립할 수 있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받은 유산을 몽땅 다 날려버리고 완전히 거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상거지꼴로 다시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런데 아무 것도 없을 것이라고 여긴 이 탕자는 실은 가출하고 난 뒤에 많은 것을 들고 들어온 셈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빈 호주머니’입니다.

그는 자아가 비워있는 공간을 듬뿍 갖고 온 것입니다. 자기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바로 ‘전혀 없음’이 많이 달고 그는 아버지 집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이제 탕자에게 남은 것은 그 비워있는 자리에 오로지 아버지 것으로만 가득가득 채워지는 시간만 남아 있습니다.

그가 자기 것이 있다고 할 때에는 결코 아버지 것이 들어올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것이 모두 상실했을 때, 비로소 아버지의 것이 들어오게 됩니다. 탕자는 자기 자신만을 생각할 때는 아버지를 잊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아버지는 아들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이 지옥같은 세상에서 탕자같은 우리를 예수님께서 건지시는데 왜 우리로 하여금 고난의 길을 가게 하시는 걸까요? 그것은 천국이란 오로지 주님의 것으로만 채워진 자에게 허락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인이 완전히 탕자임을 알게 된 자에게만 예수님의 것이 들어갈 여지가 생기는 겁니다.

아버지는 탕자를 위하여 소를 잡고, 가락지를 끼우고, 좋은 옷으로 입혔습니다. 만약에 이 복장을 하고 탕자가 이웃 어른들을 만나면 그 탕자는 만나는 사람마다 오직 아버지 자랑만 할 것입니다.

거기에 비해서 평생토록 아버지 곁에서 아버지를 지켜드렸다고 여긴 맏아들은 화가 잔뜩 나있습니다. 그는 자립형 인간입니다. 자기의 행함으로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칭찬받을 것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는 평소에 자기 생각만 한 것입니다. 이런 자에게는 고난을 모릅니다. 그저 자기를 위해 평생 고생만 했을 뿐입니다. 아버지의 기쁨이 되지 못하는 자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인간들이 이렇게 옳고 그름을 따지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당연하게 에덴동산에서 추방시킬 수 밖에 없었습니다. 감사하기 보다는 인간들이 나름대로 목적을 노리고 에덴동산에 산다는 것은 하늘 나라가 인간 나라가 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목적을 버려야 하는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천국가기’가 동원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는 태도일 뿐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탕자비유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원래 뜻이 무엇인가가 잘 나와 있습니다. 아버지는 그동안 늘 곁에 있어준 맏이에 대해서는 크게 생각해주지 않으면서 아버지 재산을 바깥으로 돌아다니면서 다 탕진한 그 아들에 대해서 지극히 사랑하십니다. 그 탕자가 돌아왔을때, 좋은 옷과, 가락지를 손수 끼어주시고, 소까지 잡아서 동네방내 잔치까지 베풉니다.

왜 그렇게 하실까요? 그것은 맏이하고는 달리 탕자는 아무 것도 자기 목적과 음흉함을 더 이상 내세울게 없기에 고스란히 아버지가 주신 사랑이 그 탕자의 심령에 안착할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대우받는 탕자에서는 결코 아버지 사랑이 흠집나거나 누수될 염려가 없습니다.

그래서 ‘많이 용서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최종적으로 사랑만이 남기를 원하십니다. 그 사랑의 관계 말고는 다른 관계로 구원하시지 않습니다. 흔히들 기도를 어떻게 하면 되냐고 묻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사도 바울의 기도를 소개합니다.

에베소서 3:14-15, 18-19에 보면,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인간은 누구나 타인을 대하면서 노림수를 갖고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성도에게는 이것은 자신의 본성이 되어서는 아니되고 도리어 주님의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충만함이 본성이 되어야 합니다.




불의한 청지기 비유(누가복음16:1-9)

성경에 나와 있는 나쁜 자들을 보게 되면 정말 자신을 지으신 자를 무시하고 막무가내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증오심을 절로 일어납니다. 하지만 어느새 점차 그들의 행동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가 되어가는 우리 자신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자신이 오로지 하나님만을 위해 살겠다고 나설 때,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를 하나님과 더불어 미워할 수가 있는데, 어느새 자신조차도 하나님을 멀리하게 되면, 도리어 하나님을 안 믿는 그들 편에 서 있고 싶은 충동을 갖게 됩니다.

동질감을 느낀다고나 할까요. 하나님을 멀리 할 수밖에 없는 자들끼리의 동질감을 공유하게 되는 겁니다. 즉 그동안 하나님 믿어보려고 최선을 다했지만 역시 하나님은 없더라는 겁니다. 하나님에 관해서 사용되는 각종에 용어들과 개념들을 남발해보지만 그것으로 인하여 신의 존재가 증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척하는 것도 세월지나면 따분하고 지겁기만 합니다. 차라리 속질하게 “신은 없었더라”라고 양심선언하고 나서는 편에 속시원할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마음이 실은 예수 잘믿는다고 여기는 각자의 마음 속에 다 들어있습니다. 지금 잘 믿는다고 자부하기에 하나님에 소홀히 하는 사람들을 보면 당연히 분개하겠지요. 그러나 어느새 자신이 전에 비난했던 자들보다 더 하나님과 멀어진 생활을 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치 튜브 가지고 해변 가까이 논다고 여기다가 한 눈 팔다보면 벌써 해변하고는 저만치 멀어져서 자기 힘으로 도저히 되돌아 올 수 없는 지경까지 가버리는 경우와 같습니다.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듣게 되는 말들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엄마가 지옥간다면 나도 엄마 따라 지옥갈거야”

글쎄요. 지옥 가는 것도 자기 마음대로 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지옥도 하나님의 허락과 능력으로만 갈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서 2장에 보면 엘리 제사장이 나옵니다. 이 집안은 저주받게 되어 있는 집안입니다. 저주받는 이유도 나와있습니다. 하나님보다 자식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랍니다.

그렇다면 자식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면 저주받지 않는다는 논리가 성립됩니다. 논리로만 그렇지 실제로는 어느 인간이 하나님을 자기 자식보다 더 사랑할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엘리 제사장이 하나님보다 자기 자식을 더 사랑하는 것을 우리는 충분히 이해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식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했다는 조건을 가지고 구원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자력으로 구원될 자가 없듯이 어느 누구도 자력으로 하나님을 자식보 더 사랑할 위인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엘리 제사장의 두 자식은 평소에 하나님이 어떻다는 것을 이론상 많이 듣고 자라났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이론을 앞장 세운다고 그 사람을 신자라고 간주해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단지 하나님은 하나님이 없는 자들이 자기 마음대로 본색이 드러나게 하시고야 마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삼위일체에 정통하고, 신학을 많이 안다고 해서 그것으로 인하여 ‘신자’라고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시기 않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힘으로 구원이 어떻게 성사됩니까? 성사될 수 없습니다. 성사가 불가능합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어린 사무엘을 보세요. 부모는 그를 던져 놔버렸습니다. 하나님께 맡기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무엘은 구원됩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방식을 원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행할 수 없는 방식을 사용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약속입니다. 즉 약속이란 사람들에 의해서 포착될 수 있는 그런 하나님의 방식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약속 성취의 주도권은 하나님이 쥐고 있지 인간이 개입할 수 없는 위치에 있습니다.

소위 불의한 청지기라는 비유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어떤 경리보는 직원이 장부를 제멋대로 조작해서 자신의 앞길을 여는 자금이 되고자 했습니다. 이것은 횡령이요 도덕질입니다. 누가 봐도 이 직원은 나쁜 자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하필이면 만인이 보이기 나쁜 자를 거론할까요?

그것은 소위 자기 능력으로 구원될 수 있겠다고 자부하는 소위 의로운 지혜자들을 부정해버리기 위해서입니다. 즉 하나님은 인간들이 주장하는 신에 관한 화려한 용어들이나 행위들을 피해서 숨어있는 약속의 능력으로만 구원하십니다. 인간들하고 구원에 대해 타협할 의사가 없으시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의 약속은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는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사람들이 관심두지 않고 무시하는 자리에 있습니다. 인간들이 열심히 해서 자기 자신을 꾸미고 자기 자신을 성숙케 하겠다고 노력하는 그 와중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은 묵묵히 제 모습을 갖추어나갑니다. 마태복음 13장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악마가 뿌리 가라지에 대해서 손대지 말고 그냥 두러라“라고 하신 말씀이 나옵니다.

이 세상은 가라지도 함께 자라납니다. 우리 인간들이 나서서 가라지를 아예 뿌리채 제거하려고 해서는 아니됩니다. 인간들은 마치 자신의 최고로 의로운 사람인 것 같지만 실은 숨어있는 하나님의 작업이 따로 있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의 12제자 앞에서 조그마한 어린 아이를 내세우시는 식이 예수님의 구원방식입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같이 하늘나라를 섬기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섬김을 받기 보다는 섬기는 자가 되어라 는 말씀은 인간들을 대단한 열성이나 속은 맹렬한 저항과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작업이 차질나는 경우는 없다는 말입니다. 엘리의 두 아들은 필연적으로 죽이기로 하나님께서 작정해 두신 바가 있습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훈계로 고쳐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 믿음없는 자는 그냥 믿음없는 자로 살아갈 뿐이요 그들의 눈에 띄지 않는 사무엘의 세계는 차질없이 등장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방식입니다. 악마의 일로 너무 불평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악마의 일꾼이 악마답게 하는 것도 다 하나님의 약속 속에 포함된 내용들입니다. 인력으로 존중할 수 없는 하나님을, 하나님의 약속의 능력에 의해서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만 아는 자들이 성도입니다




요한복음 9장의 소경된자를 고치시는 예수님 비유)


(요 1:12-13)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 혈통으로 나지 아니하며 - 혈통으로 나지 않은 것을 강조하는데, 그러면 혈통으로 나면 어떠한가? 그러나 예수님은 다윗의 혈통으로 나시지를 않았는가?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단군의 혈통으로 태어났다고들 하는데, 그러나 그렇더라도 그 위에다가 성령을 주시면 안 되는가? 그런데 왜 혈통으로 나지 아니했다고 강조를 하는가?

* 우리가 혈통으로 나지 아니하면 예수님도 혈통으로 나지 아니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혈통으로 난다 안 난다는 것은, 존재론적으로 예수님을 [ 인간 + 하나님 ] 이라는 개념으로 적용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 예수님이 인간 혈통 안에서 무슨 일을 하셨느냐? 이 말은, 혈통으로 나지 않는 다른 방식으로 적용시킨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 인간 + 하나님 ] 이라는 존재론적인 방식은 예수님에게 해당이 안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인간인 동시에 하나님이다' 라고 하는 것은 성경하고는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 만약 그렇다면 예수님이 인간인 동시에 하나님이라면, 우리도 혈통으로 나지만 또 하나님으로 나야만 한다는 과정을 거쳐야만 하지를 않는가? 그러나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치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 '혈통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난 자' 라는 이야기는, 바로 '예수님이 인간이며 하나님이다' 라는 것을 언급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 혈통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난 자가 성도라면(요 1장), 예수님도 혈통으로 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로 난 자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로마서에 의하면 예수님은 다윗의 혈통으로 태어났다고 되어 있다는 것이다.

* 그렇다면 예수님의 다윗의 혈통으로 태어났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인성(人性)을 취하기 위함이 아니라, 인간 세계에 무엇을 하시기 위해서 다윗의 혈통으로 나셨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이 인간이 안 되면 뭔가 불완전하다는 것이고, 그것은 처음부터 성자에게는 무엇인가 불완전한 것이 존재하게 되고 만다는 것이다. 인간이 안 되면 성자로서의 미흡함이 있게 된다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 성경전체가 '성자의 존재를 어떻게 만드느냐' 라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을 하실 것이냐' 라는 것에 초점이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다윗 혈통으로 오신 것은, 인간 세계에 일을 하시기 위해서 오셨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빌립보서 2:5-11에 나와 있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함' 이라고 말이다.

(빌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 2: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빌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빌 2: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하시고
(빌 2: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 이것을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을 시켜보면,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난 뒤에 인간이냐 천사이냐' 하는 것과 관련이 있는데, 그러나 차영배 교수는 여기서 인간에게 두 인격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이다. 예수가 있고 또 우리가 있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다중 인격체로서 귀신에게나 적용되는 것이지, 인간에게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차 교수의 주장은 뭔가 본 의미에 대해서 초점을 잘 못 맞추고 있는 것이다.

* 혈통으로 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로 난 자라는 말을 요한복음 9장과 연관해서 살펴보면, 요한복음 9장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이 사람이 소경이 된 것은 누구 죄 때문입니까?' 라고 묻는 대목이 나오는데, 여기서 제자들은 소경을 죄와 연관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소경이 죄인繭窄? 소경이 아닌 사람은 의인이 되고 마는 것이다.

(요 9:1)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신지라
(요 9:2)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요 9: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요 9: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요 9: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요 9:6)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요 9:7)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 그러나 요한복음 9장에서, 예수님의 해결책은 '소경이 아닌 사람이 소경이고, 소경인 사람은 의인이다' 라고 하시는 것이다. 오히려 역전이 된다는 것이다. '사물을 본다고 하니 네가 바로 소경이다' 라고 하는 것이다. 그 사람이 소경이 된 것은 부모의 죄도 자기의 죄도 아니라는 하시는 말은, 그 소경에게는 전혀 죄가 없다는 말이 아니고, 기존의 우리가 알고 있는 죄와 의에 대한 관점으로서 인간을 파악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의 기존의 죄관과 기준점으로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는 것이다.

* 이 사람이 소경이 된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은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고 예수님 자신의 일인 것이다. 지금 소경 앞에 예수님 자신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소경은 예수님 자신의 반사체가 된다는 것이다. 지금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은 죄와 의에 대하여 잘못된 관점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요한복음에서는 어두움이라 하는데, 어두움 속에 있으니 몽땅 소경이라는 것이다.

* '몽땅 다 어두움이며 소경이다' 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소경 하나를 불렀다는 것이다. 그리고 소경의 눈에다가 진흙을 바름으로서 씻을 거리를 주었다는 것이다. 진흙을 바르기 전에는 씻을 거리가 없는 반면에, 진흙을 바른 후에는 씻을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 보내심을 받았다 - '실로암 못에 가서 씻는다' 라고 하는 것은, 즉 소경이 눈에 진흙을 바르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는다는 것은, '보내심을 받았다' 라고 하는 실로암이라는 못 가에 가서 씻는데, 이러한 모든 과정은 예수님의 모든 속성을 반사해 준다는 것이다.

* 소경을 고치신 이유 - 예수님의 존재를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왜 이 땅에 오셨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소경의 눈에 진흙을 바르고 실로암 못 가에 가서 씻는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씻어주기 위해서, 하늘에서 이 땅에 보내심을 입은 자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소경 하나를 불러서 이런 일을 시킨다는 것이다.

* 그런데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그들은 예수님을 외모로만 본다는 것이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라고 말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자꾸만 혈통적으로나, 존재론적으로만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너희들이 내가 행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이 나와 함께 있는 것을 보라" 라고 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의 외형이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이 행하신 것을 통해서 판단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행하신 것이 아주 놀라운 일을 행하는 것이 아니고, 기존의 우리가 생각하고 의식하고 있는 것을 뒤집는 일을 자꾸 반복하신다는 것이다.

* 우리가 살아가면서 명심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은 성경에서만 뒤집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 우리의 생각하는 것이나 예상치 않는 것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 속을 완전히 뒤집어 놓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선택행위를 이용하셔서 뒤집어 놓으신다는 것이다. 설교를 한번 잘했다 싶으면 그 다음 주일에 왕창 빠져 버리고, 죽을 쑤었다 싶으면 은혜 받았다고 고마워하고 말이다.

* 이 내용이 열왕기상에 나오는 것이다. 남쪽 유다나라가 전쟁을 할 때에 르보호함이 북쪽 이스라엘과 싸워서 이기고 난 후에, 까불다가 애굽과의 싸움에서 패하고 솔로몬 때의 보물을 다 빼앗겼다는 것이다. 후대에도 계속해서 겸손할 때는 전쟁에서 이기게 되어 있지만, 그러나 한 번 이기고 난 후에는 철저하게 망한다는 것이다. 남쪽이든 북쪽이든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 그러면 '계속 겸손하면 되지 않겠는가' 라고 하겠지만, 그러나 계속 겸손하다고 하는 것이 바로 교만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에게 있어서 겸손이라는 것은 없고, 나아가서 신앙생활은 절대로 못한다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비유연구)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는니라.”(갈 4:23)

법은 못 지키게 되어 있어요. 법을 지키려 하는 자체를 통해서 법에 종노릇 하는 인간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 자손 안에 법 말고, 곧 법을 지켜야 될 당사자인 육체 없이 하늘나라 백성이 된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약속에서 낳아진 자녀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약속과 육체로 대비시킵니다.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는니라.”(갈 4:23)

이것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두 종류로 나누었습니다. 한쪽은 약속에 속한 사람이 있고 한쪽은 육체에 속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을 뭘로 구분하는가? 어머니로 구분합니다. 여기서 사도바울이 놀라운 이야기를 합니다. 이삭의 어머니가 누구입니까? 분명히 사라입니다. 그런데 이삭의 어머니가 사라가 아니라고 합니다. 사라는 그냥 비유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실체는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실체는 어디에 있는가? 하늘에 있습니다. 사라는 비유인데 사라가 등장한 이유는 ‘하갈은 아니다’라는 이유 때문에 등장한 거예요. 이삭의 어머니도 아니면서 왜 사라는 등장해야 하는가? ‘적어도 하갈은 아니다’라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등장했다는 겁니다. 하갈은 철저하게 인간의 육체를 다 보여줍니다. 인간의 육체의 어머니가 자식을 낳을 수 있는 전부가 다 하갈에 속하는 겁니다. ‘여자가 애기를 낳았다’ 하면 전부가 다 하갈에 속했습니다.

그런데 사라는 아기를 낳을수가 없습니다. 아기를 낳을 수 없는 여자는 다 어디에 속합니까? 사라에 속합니다. 흔히들 말하는 불임여성들을 두고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아기를 낳을 수 없었는데 아기를 가진 사람이 사라에 속합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아기를 가질 수 없었는데 아기를 낳았다.’ 이게 말이 돼요? 하나님의 율법 성경은, 이렇게 ‘말이 안 되는 것’을 가지고 소위 ‘말이 되는 전체’를 다 저주해 버립니다.

소위 말이 된다는 그 자체를 전부다 영적이 아니고 세상 적이라고 다 매도해 버립니다. 인간의 존엄성? 인격? 품위? 체면? 그런 것은 사라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목사님! 그 이야기를 우리에게 믿으라고 하는 겁니까?”라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지금 사도바울이 사람을 개과천선한다든지 변화시키려는 목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길에 떨어진 100원짜리 동전을 주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누가 영적인가? ‘제발 영적인 사람이 되어 달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누가 영인가?’라는 겁니다. ‘개인적으로 잘해 봅시다’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처음부터 이야기를 제가 했습니다. “열심히 합시다. 잘해봅시다!”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누가 꽃봉오리인가? 애초부터 법 없이 생명을 얻은 사람이 누구냐?” 그 말입니다. “누가 자기 안에 예수 그리스도, 그 보배를 가진 자인가? 두꺼운 삽겹층을 뚫고 영적인 은총을 받은 사람이 누구인가?”

이 땅에서 태어난 모든 인간은 어떤 인간도 그 육체의 어머니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것은 육체에 속합니다. 육체에 속한 사람은 이미 어머니가 이 땅에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자력으로, 즉 육체의 능력으로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는 통로는 이미 없습니다. 도리어 자기가 지키고자 하는 법에 종이 됩니다.

제가 지금까지 철학을 공부하고 이런 저런 학문을 연구해 보니까 이것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자기가 만든 법의 노예가 된다.’ 자기가 만든 양심의 노예가 되어 버렸습니다. 주인 노릇을 하려고 그렇게 애써도 자기가 만든 법에 의해서 스스로 노예로 전락하면서 살아갑니다. 극복도 못하면서 극복하면서 산다는 티만 내는 가증스런 위선자들의 집합체가 인간입니다.

성경말씀 어느 것도 못 지킵니다. 10% 지키고 90% 못 지키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 구절도 못 지킵니다. 대전에서 있었던 지난 십자가마을 수련회에서 로마서강의를 하는 중에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것이 지나간 시절의 유머라 별로 웃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왜 소를 훔쳤는가?”
“저는 소를 훔친 것이 아니고 노끈(소에 매여 있는)만 훔쳤을 뿐입니다. 노끈만 훔쳤는데 큼직한 소가 붙어 왔습니다.”

이것이 지난 60년대의 개그인데 그때는 사람들이 많이 웃었습니다. 지금은 애들도 안 웃습니다. 율법 뒤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그냥 율법만 지키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안식일만 지키면 나머지 9개의 계명은 계속해서 차례차례 지킬 수 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한 계명 하나 하나에 거대한 율법전체가 다 끌려온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몰라요.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황사현상인데 어떻게 알겠습니까? 스스로 법을 만들고 그 법 못 지켰다고 퇴근할 때 마다 이슬(술)로 삽니다. 아침 되면 미안한 마음, 참회하는 마음으로 양심을 풀고 또 다시 법을 지키는 법의 노예입니다. 자기가 만든 법에 스스로 수렁에 빠지는 거예요. 이것은 자유가 아닙니다. 이 법에서 벗어나는 것을 가지고 ‘자유하는 여인’이라고 했습니다. 참, 재미있지요. 자식이 없다는 자체를 무엇으로 봅니까? 자유라고 합니다.

“기록된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갈 4:22,23)

자유가 무엇인가? 자기 육체로부터 자유할 때 자유입니다. ‘내 육체가 어떻게 되든지 나는 상관없다.’ 이것을 자유라고 봅니다. ‘나는 내 육체하고는 상관 안 해. 나는 내 육체하고는 거래 안 해. 나는 내 양심한테는 묻지도 않아. 나는 나하고 안 놀아.’ 이것이 참 중요한 겁니다. ‘나는 나하고 안 놀아. 왜? 나하고 거래하는 분이 따로 있기 때문에.’ 그게 하늘에 있는 어머니라고 했습니다.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갈 4:26)

진정한 자유자, 사라 같은 분(사라는 비유니까)에게서 태어난 사람만이 유일하게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사람이고 그 사람만이 천국에 갑니다. 다른 사람은 지옥 갑니다. 이것을 양보할 수 없습니다. 때려죽인다고 해도 양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육체를 따라 난 사람이 있고 하나는 그 어머니가 하늘에 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 어머니가 하늘에 있는 사람만이 천국가고 나머지는 다 지옥 갑니다.

“육체로 어떻게 종교적인 노력을 하자.” 그것은 다 소용없는 짓입니다. 이미 확정된 결과입니다. 사도바울은 지금 그것을 우리에게 통보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영적인 사람인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육이 뭔지를 아는 사람이 영적인 사람입니다. 왜? 자기를 둘러싼 그 두껍게 둘러친 오존층 같은 그 세상신(악마)의 모든 술책을 완전히 뚫어서 영이 들어왔고 그 뚫린 과정과 절차를 다 알기 때문에 무엇이 육인지를 아는 사람만이 영의 사람입니다.



계시록 19장 포도송이를 으깨서 포도즙을 내는 추수비유 = 이사야 63: 2-3

신랑과 신부의 만남으로서 더 이상 역사는 진척할 이유가 사라졌다고 말입니다. 그 신랑이 본 모습이 오늘 본문에 나와있습니다. 어떤 사나이가 나타났습니다. 신랑입니다. 신부될 자만 신랑을 알아봅니다. 이 신랑은 이미 일을 벌리고 계십니다. 무슨 일까요? 세상에서 쓸모없는 것들과 하나님께 대드는 자들을 정리하는 일을 벌리십니다. 심판이죠, 맹렬한 심판입니다. 용서없는 심판입니다. 가차없는 저주입니다.

신랑되척?분이 이토록 무서운 분일 줄을 신부되는 자들만은 알게 됩니다. 왜 이렇게 무서운 분으로 등장되는 걸까요? 그것은 이 세대가 참으로 악하고 음란한 세대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신랑되시는 분의 모습은 눈에서 불꽃이 튑니다. 입에서는 쉴새없이 칼날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 분의 하얀 옷은 온통 붉은 피 투성이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힘들게 심판을 수행하시다 보니 세상의 죄로 인해 묻은 겁니다. 이것을 마치 포도송이를 으깨서 포도즙을 내는 추수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63:2-3에 보면, 저주받은 백성들인 에돔 지역으로부터 어떤 분이 빠져나오고 계십니다.

그 분은 방금 에돔 지역에서 큰 일을 한바탕 치르고 나오시는 중이십니다. 어떤 일을 했을까요? “만민 중에 나와 함께한 자가 없이 내가 홀로 포도즙 틀을 밟았는데 내가 노함을 인하여 무리를 밟았고 분함을 인하여 짓밟았으므로 그들의 선혈이 내 옷에 뛰어 내 의복을 다 더럽혔음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선명하고 신선한 피들이 온통 심판주의 의복을 젖게 했습니다. 그만큼 열심히 심판하셨다는 말입니다. 왜 이 세상은 우리 신랑 되시는 예수님으로부터 이렇게 혹독하게 당해야만 합니까? 그것은 이 세상이 온통 아담의 자식들이기 때문입니다. 곧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 이미 절대신으로 행세하는 우상들의 세계가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면서 자기 자신을 절대신으로 신봉하게 됩니다. 아담으로부터 받은 사는 버릇이 이러합니다. 오로지 자기 자신 밖에 모릅니다. 뭘해도 자기를 신봉하기 위한 노동일 뿐입니다. 최종적 가치와 의미는 오직 자기에게만 두게 됩니다.

인간에게 있어 자아가 발생되는 것은 선악과를 따먹고 부터입니다. 그 전에는, 아담에게 여자가 생기자 “내 살 중의 살이요 내 뼈 중의 뼈다”라고 했습니다. 결코 여인을 타인으로 간주하지 않았습니다. 타인이 없다는 말은 곧 자아의식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아담이 변명하기를, 하나님이 주신 저 여자가 선악과를 따먹어라고 해서 따 먹었다고 말합니다.

타인의식이 생겨버린 것입니다. 객체가 생긴 겁니다. 이로 인해 주체의식이 발생되고 자아의식도 생겨났습니다. 한 번 생겨버린 자아는 결코 스스로의 힘으로 벗어나지 못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그 증거가 가인에게서 나타납니다. 가인은 자신의 제사를 하나님 받지 않고 타인이 동생의 제사를 하나님께서 받아버리자, 그 동생을 죽일 생각을 하게 됩니다. 즉 자아의 절대신됨을 방해하는 그 무엇이든 다 죽여버리려고 하게 됩니다.

이러한 습성이 우리들에게 고스라니 전수되었습니다. 우리들이 교회 나오고 기독교를 신봉하는 것은 실은 ‘나’라는 자아를 더욱더 단단히 섬기고자 하는 방식 가운데 하나일뿐입니다. 신의 힘까지 동원시켜 자기를 키워나가려고 하는 겁니다. 마치 애완용 고양이를 고이 키워내듯이 우리들은 자아를 고이 키워내려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살아계신 참된 신이 이것을 묵과하지 않았습니다. 심판 날을 준비하셨습니다. 사람에게 있어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일이요 그 뒤에는 심판이 있으라고 했습니다. 예를 들어 심판이 10개의 산 너머에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면 10개의 산을 넘어면서도 결코 그것에 신경쓰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코 앞에 우리의 인생을 턱하니 가로 막고 있는 산들이 놓여 있다할지라도 하나님의 심판을 미리 눈치 채 자라면 그런 산들로 인해 좌절하거나 초조해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예상한 바이며 그 어떤 산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심판 날짜를 취소시키지 못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서 29:15-16 토기장이 비유)


(사 29:15) 『화 있을진저 자기의 도모를 여호와께 깊이 숨기려하는 자여 그 일을 어두운데서 행하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보랴 누가 우리를 알랴 하니』
(사 29:16) 『너희의 패리함이 심하도다 토기장이를 어찌 진흙 같이 여기겠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자기를 지은 자에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하겠으며 빚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빚은 자에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총명이 없다 하겠느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항상 인간을 지워버리고 없애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이것은 인간을 미워하거나 싫어서가 아닙니다. 토기란 토기장이와 관계짓지 아니하면 엉터리 토기장이를 자꾸만 조작해내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이 스스로 자신을 토기라고 하더라도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해서 토기장이를 구상하게 됩니다.

그러니 그런 토기장이는 우상일 뿐입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미워하거나 없어지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자기를 버리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건지고 자신을 포함시켜서 하나님을 언급하고 싶어합니다. 이렇게 되면 자기 노력에 의해서 수행하는 신앙생활이 되고 맙니다.

예를 들면, 열심히 신앙일기를 쓴다든지, 신앙의 경력을 낱낱이 기억하고 있는 성향을 보입니다. 하지만 기억이나 추억이란 마치 먹다 남은 음식 찌꺼기와 같아서 자꾸만 추억을 찾는다는 것을 음식 쓰레기를 뒤적이는 것과 같습니다. 참된 신앙은 우리 인간 쪽에서 다듬거나 만들어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에 의하면, 예수님의 부활하심이란 곧 예수님의 계획과 목적만이 가치있고, 우리 인간들의 계획이나 목적인 아무런 의무가 없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즉 예수님의 부활이 없으면 우리가 믿는 믿음도 헛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어주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살아계신 예수님께서 뭔가를 계속해나가시는 것이 바로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안 믿어주면 우리의 신앙이 헛것이라는 말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벌리시는 신앙이 아니면 그 신앙은 헛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부활하셨다고 그 다음 차례로 우리가 부활되십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신앙일기 쓰면서 우리 생각이 가미되어 얻어진 신앙 계획이 아닙니다.

일방적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의 계획 안에 이미 담겨져 있는 바입니다. 그러다보니 주님의 부활하심으로, 달리 말해서 예수님의 현존하심으로 인하여 우리는 주님에 의해서 잊어버려야 될 처지에 놓여져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들은 예수님의 현존으로 인해 지워버림을 당하는 것을 대단히 싫어합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들은 어떤 식으로 살고자합니까? 우리 인간들은 스스로를 쪼개대며 삽니다. 옛날 이야기에, 두 마리 앵무새가 사이좋게 살다가 하나가 죽고 마니 하나가 맥이 빠졌습니다. 그래서 왕이 살아있는 앵무새 앞에다 거울을 갖다놓으니 그 앵무새는 잠시 자기 짝인 줄 알고 만족하다가 그만 그것이 자신이 거울에 되비친 모습인 줄 알고 미치듯이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부리로 찍어대다가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인간이란 스스로 자기 모습을 만족을 못하고 자신이 자기를 학대하듯이 찍어대다가 결국 죽고 마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의 형편에 분노를 느끼다가 결국 자살하듯이 인생을 끝냅니다. 이것은 곧 인간이 그 어떠한 경우에도 자기를 잊지 못하게 하는 방식으로 인생에 계획을 짜고 목적을 구성하게 되는 겁니다.

사람들은 신을 찾아도 일단 자신이 만족할 만한 신을 구상하게 됩니다. 이것은 곧 자신의 형상으로 신을 만드는 꼴이 됩니다. 자기가 생각해 놓은 자아상을 기초로 해서 신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주장하는 토기장이란 결국 스스로 토기라고 여기는 자기 토기됨에서 비롯된 토기장이에 불과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런 인간들의 도모에 대해서 하나님은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도모와 계획은 자아를 잃어버리게 하는 요소가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육적인 사람과 영적의 사람과의 차이점은, 자기 자신의 신앙적 도모나 계획에서부터 신앙이 생기는 것이 아니면 결코 생겨날 수 없다고 고백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즉 자신이 뭘해도 그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는 법은 없고, 오직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우리에게 신앙을 허락하신다는 점을 인정하는 사람이 바로 영적인 사람입니다. 이로 인하여 가짜 토기장이로서의 하나님과 참된 토기장이로서의 하나님이 구분됩니다. 참된 토기장이로서의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단지 하나님께서 여기 계시다는 것으로 인해 더 이상 그 어떤 염려나 걱정을 아예 할 필요조차 없음을 알게 됩니다.

즉 자신에게 무슨 심각한 일이나 중요한 사태라는 것이 아예 성립조차 되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가짜 토기장이로서 하나님을 만들어낸 자들은, 하나님이 하는 모든 것을 자기 자신의 실력을 인정하는 양상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참된 토기장이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무수한 기적과 말씀을 남겼지만 그 많은 자들이 자기를 포기하지 않은채 다른 메시야를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들은 참된 토기장이 되시는 분을 거역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단호하고 심판을 선언하고 나서십니다. 마태복음 11:20-22에 보면,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참으로 진짜 토기장이심을 보여주는 증거가 되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11:25-27에 나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이처럼 참된 토기장이는 철저하게 인간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고 그냥 자신의 계획과 목적에 준해서만 토기들을 만들어내십니다. 이것을 구원받지 못할 토기들은 알 리가 없는 겁니다. 그들은 토기장이께서 자신을 심판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본문에서 하나님은 새로운 토기 만들기에 나섭니다.

이것은 새로운 토기장이로 다가서는 것으로 시작이 됩니다. 그러다보니 참된 토기는 하나님으로부터 ‘난데없이 토기 되었음’을 고백하는 양상으로 드러납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그저 함께 계신 것으로 세상 모든 근심을 버린 자들입니다.


출처: 십자가 마을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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