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과 할례

할례 라는 의미는 남성의 생식기의 끝을 껍데기 제거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단순히 어떤 껍질 제거하는 표피라는 물질 의미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 개념으로 의미가 깊어지면은 육 전체가 하나의 표피 껍데기처럼
제거 되어야 할 대상이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주님은 거룩이라는 기준에 이것을 반드시 제거하겠다는 취지를 우리의 육체 속에 심으셨다.
단순한 육이 아니라 육의 통로 육의 전수 육의 잇기의 이어짐을 차단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육은 반드시 탈락 시키겠다는 뜻이다.

자 그렇다면 인간들은 저런 하나님의 마음을 듣고 육체의 할례 보다 마음의 할례의 의미를 자기 나름대로 했다고 우기면 이것은 육체의 할례 보다 더욱더 더 쉬운 일이 되고 마는 것이다. 누가 확인할 것인가?

바로 이것을 유발하는 것이 마음의 할례이다.

죄의 깊이는 죄의 깊이대로 다루면서 인간들 또한 죄의 깊이를 자신들의 숙제인냥 다루었다고 우기면 누가 확인할 것도 아니기에 언제든지 더 위선적으로 사기를 칠 수 있는 것이다.

자 문제는 이 할례 개념이
성전과 결부 되어 있다는 것이다.

성전은 하나님의 거룩한 장소로 여겨진다.
그런데 이 성전에서는 반드시 어떤 것이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사건들이 있는고 하니 바로
육의 탈락 이다.

육의 사고방식이 일체 허용되지 않고 제거 되는 장소 개념이다.

이것이 약속의 땅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비거룩적인 사고방식이 약속의 땅에 스며들었을때에
전체 이스라엘은 이 비거룩적인 요소를 제거하는데 전체가 동원되는 식이였다.

놀라운 것은 바로 그런 것 조차 껍데기 포장으로 가시적으로 인위적 행위를 해 놓고서는
비거룩을 제거 했다고 우기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다윗언약에서는 더욱더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도리어 역전이 되어서
거룩을 제거하는데 비거룩이 이스라엘 전체를 장악하는 상태에서 벌어지게 된다.

왜 주님은 이런 의미로써 성전을 활용하는 것일까?

성전 자체가 할례 의식에서의 육체의 생식기 끝처럼
표피 껍데기와 같이 탈락 되고 누락되고 제거되며 소멸 되어야 한다는 의미로써
도리어 저들의 강퍅성을 역이용해서 적용하시는 것이다.
왜 그럴까?

이스라엘 자체가 하나의 인자의 모습처럼 그들의 모양이(과거 역대기 수련회 강의처럼) 하나의 인체의 형상을 뛰고 있다.

즉 모든 인간의 육체성을 대변해 주고 있다.
거기에서 뭔가가 제거 되어야 한다는 것을 단순히 육체에서의 제거가 아니라.
역사 전체와 이스라엘 전체 즉 비언약의 혈통이든, 언약의 속성이든 이 전체가 한 덩어리가 되어서 그 속에서 주님이 제거하시는 그 원수의 통로를 죄의 원천을 직접 뛰어들어서 제거하신다는 점에서 인간들은 즉 이스라엘들은 자기 갈길대로 그리고 본능에 충실하면서 그 죄의 속성을 그대로 펼치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육체는 곧 성전을 대변하고 있고 아니 아니 성전은 곧 육체를 대변하고 있고
그 육체의 단절과 삭제와 탈락과 제거 속에서 새로 피어나는 새성전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이삭의 방식처럼 예수님이 새성전으로써 헌성전과의 차이성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할례는 이스라엘 속에서 단 한번도 지켜진 적이 없다.
그림자는 실체를 겨냥한 것이다. 그림자를 지킨 것이 지켰다고 쳐 줄수가 없다.
오로지 실체만이 율법 성취이다.

결국 할례는 예수님 자신이 모든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고자
먼저 본으로써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이다. 그리고 다시 사심 이다.
진짜 할례 했다고 우길수 있는 경우는
죽었다가 살아나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은 인간은 비거룩의 인간이요 아무리 이스라엘 속에 교회 속에 있어도 지옥이 땡기는 인간이다.

죽었다가 살아나는 경험

이것이 마음의 할례이다. 오직 십자가 뿐이다.
참 할례는 성전이 허물어 지고 참 성전을 보는 것이다.
참성전을 향하지 않는 자는 자기 손으로 세운 사조직이 된 성전인 마귀의 소굴 강도의 소굴과 한 통속인 자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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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죽는 자리가 곧 창조의 자리이다.
주께 돌아오라 주께 왔습니다 라는 그 자리는 곧 죽음의 자리이다. 그곳이 바로 창조의 자리요 처음자리이다.

한 알의 밀알이 떨어져 죽으면 그 죽음의 자리에서 생명이 비로소 드러난다. 창조다.
이런 방식의 창조 외에는 다른 창조가 없다. 잉여의 자리

두 종류의 청지기 충성된 종과 악한 종의 비유에서 (마 25장 종말의 비유 3가지 중)

마음의 할례의 의미를 아는 자는 성전의 자리가 곧 죽는 자리 자아 상실의 자리
잉여의 자리 창조의 자리 처음 자리를 아는 자이고
반대로 할례의 의미를 모르는 자는 자신의 껍데기로써 자신의 성전 됨을 우길 뿐이다.
잉여성을 모르기에 남은자 개념이 뭔지 모른다.
인위적인 남은자 개념으로써 자신을 자기가 선택하고 있다.

그러나 남은자 개념은 탈락 개념이요 삭제 개념이요 누락 개념이요 제거 개념 표피 끝을 짤라내는 육의 단절의 개념인 바로 이런 의미로써 성령의 일이 진행 되는 것이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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