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 구원운동에 목숨 건 바리새인과 가룟유다

날짜, 보낸사람, 받는사람, 내용

2009-05-30 13:12:02,

[다니엘에게는 교회에 관한 개념이 전혀 없었다. 아브라함과 다윗과 다른 선지자들처럼, 그는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취어온 교회의 비밀을 보지 못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첫번째 나타나심과 두번째 나타나심 사이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구속에 기초하여 기묘하고도 비밀한 일을 하시는 기간이 있으리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이 역사는 그분의 구속된 사람들을 거듭나게 하고, 그런 다음 그들을 거룩하게 하고, 새롭게 하고, 변화시키며,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형상과 같아지게 하는 것이다. 다니엘의 이상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

9 답변 : 먼저 아래 질문들 의 답변 1부터 보세요. 먼저 적은 내용이고
답변 9는 제일 나중에 보시면 될 듯 제일 나중에 적은 거라서

종교라는 마약의 특징은 항상 일치성 추구입니다.
그래서 마약 먹으면 인간들이 신이 된 것처럼 착각하고 마약 떨어지면 다시 초라한 인간으로 와야 하니까 눈이 밝아져 마약만 더욱더 찾는 겁니다.신에 대한 갈증 그것이 마치 뱀파이어의 피에 대한 굶주림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도리어 신이 된 인간의 자리 버리고
피조물의 자리로 돌아가는 겁니다. (회개 돌이킴)

회개하라고 하니까 또 회개를 지켰으니까 신과 일치했다고 역시 신의 자리 포기 못하겠다고 하는 겁니다. 그것이 자기를 포기 못하겠다는 없는 자아를 끝까지 챙기겠다는 시험든 채 좀비처럼 그냥 시간 때우면서 죽었으면서도 살았다고 우기는 것 뿐입니다.

묵시를 던져줘도 그 묵시를 통해서 또 신과의 일치성 항상 신이 되고자 하는 것에 항상 의미를 둡니다. 도리어 피조물의 자리로 되돌려 놓는 성령의 일만이 피조물과 차이나는 주님을 경배 하고 엎드립니다.경배하고 엎드리고픈 생각은 추호도 없으면서, 마약 먹고 초월의 세계를 맛보고자 하는 자는 이미 중독상태이니 그 인간 가망 없는 겁니다.

정치에 맛 본 자와 같고, 신(왕)의 자리를 맛 본 자와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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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이 내용이 있는 한국복음서원에서의 글을 검색해서 찾았는데요
결론은 시간과 공간적인 의미를 다니엘이 몰랐다 라고 하는데

시간과 공간적인 의미를 몰라도 된다는 의미를 야들은 거꾸로 알고 있네요.

▒▒▒ 바른 신앙, 풍성한 삶을 가꾸어 드리는 한국복음서원 ▒▒▒

생명의 양식 / 6월 15일


http://www.kgbr.co.kr/manna_life.php?mode=view&year=2007&month=6&day=15

그래서 교회 개념이 없다는 개념을 교회론이 없다는 차원에서 다니엘이 교회의 비밀을 모른다고 취급했군요 야들이 정신을 못차리고 있네요. 오히려 진짜 성전을 봤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교회를 그림자로 취급해서 누락 시켜 버립니다. 즉 교회란 누락 되기 위해서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겁니다. 누락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누락, 자기부인, 자아상실, 자아삭제, 처음자리, 남은자, 잉여품, 전리품, 소멸, 분리. 자기부정, 십자가, 잃어버림, 어린아이. 등등의 의미를 전혀 모르는 놈들이군요. 오히려 반대로 알고 있네요.

참고로 성전 누락을 다룬 설교를 들어보세요.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마가복음-2008/63강-막13장1-2(성전소멸)-mar090524.mp3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마가복음-2008/63강-막13장1-2(성전소멸)-mar090524.wmv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마가복음-2008/63강-막13장1-2(성전소멸)-mar090524.hwp

그림자를 실체로 봐야 한다고 우기는 셈이죠. 그래서 야들이 말하는 비밀이란 교회를 두고 말하지 참성전 되신 예수님을 비밀로 말하지 않네요 즉 가시적인 교회가 비밀이다 라는 교회론을 주장하네요. 악마들인 이단이네요. 유대인의 마귀가 심은 성전 개념이랑 같네요. 그래서 성전 사수 한다고 예수님을 죽여버리는 겁니다. 성전모독 죄로 말이죠. 속임수를 펼치고 있군요.

교회를 묵시로 안 보고, 역사로 보겠다는 취지입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는 인간들에게 취사선택 되는 문제에 빠집니다. 타락 할 수도 있고, 타락 방지 할 수도 있고, 그래서 늘 이미와 아직의 긴장 상태라고 늘 미완료 적으로 표현합니다. 인간의 숙제인냥?

그러나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완료된 교회입니다. 타락 자체가 있을 수 없기에 개혁 또한 쓰잘데가 없습니다. 개혁 주장하는 놈들 다 이단입니다. 지옥도 죽음의 권세도 넉넉히 이기는 승리의 새언약 완료로 새피조물인 교회를 저거들 멋대로 비밀을 풀었다고 우기네요 ㅋ ㅋ ㅋ

마치 수수께끼 비밀인 사랑이 세상에 흔하디 흔하게 퍼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속에서 진짜 사랑을 알기 위해서 속임수 사랑에 다 당해봐야 합니다.

인간의 사랑이 얼마나 거짓임을 아는 자들이 바로 잃어버린 자기 양입니다.

그리고 그 흔하디 흔한 사랑 속에서 진짜 사랑의 차이를 명확하게 아는 자를 교회라고 합니다.

실로암 소경이 바로 흔하디 흔한 대제사장 율법사 서기관 바리새인 등등의 사랑의 실천 대가들 속에서 진짜 비밀을 만났습니다.

실로암 소경만 압니다. 눈뜬 자들은 아무도 모릅니다.

저놈들 다 가짜 라고, 즉 부재성으로 알게 된 겁니다. 눈 있는 자와 눈 없는 자의 대조로써

졸지에 사랑의 진위를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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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30 13:15:51,

제가 저런 내용을 인터넷에서 봤는데 교회란 것이 육체성전(개인구원)  말고 공동체적인 성전도 주님이 계획한것인가요 공동체 적인 구원이 아니라면 주님의 말씀은 의미없는건가요

개인구원을 이루는것은 의미 없는것이고 공동체 적인 구원을 이루어야 계시록에서 말한 그런 성전이 되는것인가요

1 답변 :

바리새인과 가룟유다의 메시아 관은 항상 이스라엘 중심입니다. 즉 공동체 집단 중심입니다. 바로 이것이 가짜 이스라엘 집단입니다.다니엘서의 성전 개념은 공간과 시간 개념인 역사적 개념이 깨어지고 묵시적 개념으로써 다니엘 자체가 다니엘 인간 자체가 즉 인자 가 성전이 됨을 말하기에 돌아가질 않습니다(다윗언약). 그 인자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오시는 분이 바로 새언약의 예수님임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자 그렇다면 상대적인 비언약은 무엇일까요? 다니엘의 다윗언약 중심의 비언약은 바로 한 이레가 다니엘 본인에게 덮쳐진 미래의 의(참성전)가 아니라. 인간들 자신들의 의로 한 이레를 갖추고자 하는 인위적인 거룩한 성전 곧 역사적인 성전을 고집하는데 있습니다. 집단 이스라엘 공동체를 형성하는 그림자에 매달리게 되는 겁니다. 즉 아무리 다니엘 흉내 내어도 소용 없었던 겁니다. 해석불가입니다.

마침 새언약 예수님 당시에 가짜 성전과 참 성전과의 충돌이 있습니다. 바리새인의 성전개념과 메시아 개념이 예수님의 성전 개념과 메시아 개념과 충돌이 됩니다.

바리새인 곧 유대인 전부(가룟 유다 포함해서)의 대표자의 사고방식은 거룩한 성전과 자신들과의 일치성입니다. 그래서 성전을 자기 목숨 보다 더 사랑했습니다. 그런 사명을 부어준 메시아를 쫏은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인간을 상대하지 않고 오로지 마귀를 상대를 합니다. 마귀의 3가지 시험을 통해서 인간에게 씌여진 그런 가짜 성전과 가짜 메시아관이 다 들통 납니다.

그러니 바리새인이나 가룟유다나 심지어 제자들이나 모두다 다 엉터리였다는 겁니다.

그것을 이제 어두움으로 규정을 하고 자신의 빛 되심을 그런 어두움과의 차이성을 통해서 알려주시는 겁니다.

모두 다 어두움 인데 그 속에서 긍휼히 여길자 긍휼히 여기고 이것이 바로 새신부 창조입니다.

또 그 속에서 강퍅케 할 자 강퍅케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새언약에서 새로 등장하는 지옥의 백성들입니다. 즉 새언약 이전의 옛언약에서는 지옥 백성들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지옥이 없었거든요,

예수님이 지옥을 만드시고 완성하심은 곧 그 지옥 속에 들어갈 지옥 백성들 마저 새롭게 창조하시는 겁니다.

인간들이 여기에 반발하는 이유는 창조를 사적인 창조로 해석하다 보니 지옥갈 것인데 왜 창조하느냐 라고 따집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천국 백성과의 차이성을 드러내기위해서 반드시 지옥백성을 천국백성을 위해서 만드신 겁니다. 넌 사랑 받은자야 라는 것을 바로 저 미움 받은자 와의 차이성으로써 확정 하시는 겁니다.

그렇기에 다니엘은 역사 중심의 성전관에서 모조리 묵시적인 성전관으로 다 교체당하는 묵시적인 시각을 역사의 부정을 통해서 알게 됩니다.

참 그리고 계시록의 성전은 어린양이 참 성전 되심을 말하는 예수님 자신이 성전임을 말하는데 무슨 인간이 이룰수 있는 성전으로 보시면 안 됩니다. 이상적인 교회도 아닙니다. 예수님 자체가 성전이고 즉 거룩이고 실체이고 인간은 그림자입니다.

(계 21:22, 개역) 『성 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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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30 13:17:37,

니고데모 같은 경우는 개인구원을 이우었지만 공동체 구원이 안 되었고 수가성 여인은 개인 구원뿐만 아니라 공동체 구원을 이루었기에 주님이 기뻐하시는 자녀가 됐다고 볼수 있는건가요

2 답변 :

위에서 언급했듯이 다니엘이 알게된 그 묵시를 바리새인들이 반드시 따라 합니다. 묵시를 따라하면 묵시일까요? 아니면 마찬가지로 역사일까요? 따라해본들 역시나 자기를 위한 해석만을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전과 자신들을 더욱더 일치성을 추구하는 인위적인 조작과 위선을 더욱더 박차를 가하게 됩니다.

그래서 공동체 구원이라는 일치성이나 그들이 말하는 개인구원이란 모조리 다 조작된 겁니다.

가룟유다가 공동체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 까지 판 자입니다.

왜냐하면 가룟유다 자신이 생각한 공동체 구원에 예수님 조차도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이야 뭐 두말할 것 없지요. 가장 격분한 것이 성전을 그것도 공동체 성전을 헐겠다고 하고 그 대안은 겨우 예수님의 보잘 것 없는 몸뚱아리가 참성전이라고 하니

누가 사조직 구원을 말하는 것 같고 누가 엉터리 공동체 구원을 말하는 것 같나요?

당연히 예수님이지요.

그래서 바른 개인구원과 공동체 구원을 허물어 버리는 그 예수님을 위험 인물 1호 로써 처형해야만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개인구원이나 공동체 구원은 없습니다. 개인구원은 더더욱 말도 안되는 헛소리 이구요

공동체 구원은 딸랑 단 한 명의 사마리아 문둥병자를 통해서 이루십니다.

철저한 무능자 곧 미련하고 어리석고 죽은자와 방불한 죽은태 없는 자를 통해서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만들겠다는 겁니다.

이것은 숫자의 다수의 이미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자체만이 옳다 라는 뜻입니다.

즉 인간이 말씀과 자신을 일치할려는 시도 곧 실천, 말씀 명령어 행하기 라는 그 일치성을 모조리 속일려는 마귀짓으로 규정하겠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친히 직접 말씀과 일치하시는 그 순종을 통해서 인간의 순종이 다 거짓임을 밝혀내시는 겁니다.

그래서 공동체 구원을 이루시는데 그 대상이 바로 비밀로써 은폐된 자기의 숨겨놓은 신부입니다. 신부란 은밀성이 있습니다. 수수께끼입니다. 교회를 어떤 역사도 해석할 길이 없는 비밀입니다. 마치 아벨을 어떤 것으로도 해석 불가이듯이 아벨의 죽음 조차도 비밀로써 작용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사랑하는데 신부라는데 왜 죽도록 내버려 두느냐 라고 비밀을 해석할 길이 없어서 따집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내 신부이니까 죽은 것이 아니라 산 것이다 라고 하는 겁니다. 아무리 봐도 죽었다 라고 해석하는 자들에게 살았다고 해석을 하니 그것 조차도 비밀 곧 해석 불가입니다. 나사로의 사건을 통해서 모두다 죽었다 라는 해석을 뒤짚어 엎는 살았다 라는 해석은 예수님만이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마르다와 마리아 에게 나사로를 볼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거쳐서 나사로를 보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을 거쳐서 나사로 오빠를 보며는 죽은 것이 아니라 산 자 라는 것을 말이죠.

그래서 믿으라고 죽지 않았다는 것을 믿으라고 다시 살려내시는 겁니다.

남들은 다시 살려 내어도 안 믿지만 여동생들에게 특별 힌트를 준 겁니다.

그만큼 특별 힌트를 준 것은 그들 또한 자력으로 해석할 길이 없었기에 힘들어서
예수님이 배려하신 겁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첫 번째 눈물입니다.

워낙 예수님이 길이요 생명이요 부활이라는 것을 믿는다 라고 말만 하면서
죽어도 못믿는 것에 쪽팔려서 민망스럽고 쭈굴스러워서 눈물 흘리신 겁니다.

너는 울지 말라고 내가 대신 다 쪽팔리게 울었으니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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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30 13:21:16,

니고데모에겐 영적예배에 대해서 안 가르쳐 주었지만 수가성 여인에겐 영적예배까지 가르쳐 준것은 주님이 취해야 할 자녀였기에 그런것인가요

3 답변 :

니고데모와 나다나엘을 대조 하면 쉽습니다. 물론 니고데모와 수가성 여인과의 차이도 마찬가지 입니다.
(수가성 여인 이야기인 요 4장의 이야기에서의 영적 예배란 예수님 자신이 친히 하시는 제사 입니다. 그것이 곧 참이스라엘 나다나엘의 처음자리의 모습과 동일합니다. 우리를 늘 처음자리로 되돌려 놓는 것이 예수님이 친히 제물 되시는 제사가 영적예배 입니다. 그렇다면 반드시 이 영적예배를 반드시 육적 예배로 추구하는 자들인 그 반대의 집단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요 4장에서 세례를 베푼다는 소식에 위기의식을 느끼는 바리새인 집단이요. 니고데모가 밤중에 몰래 와서 어떻게 하면 영적 예배를 우리가 행할 수 있냐 라고 인간 숙제로 보고 있는 질문 입니다. 예수님이 친히 드리는 제사를 인간 쪽에서는 해석할 길이 없고 겨우 흉내내는 제사가 가인의 제사 곧 불가능한 더 나은 제사를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따로 자기가 드린 예배를 형성할려는 자들인 겁니다. 그 차이를 수가성 여인이 보여주는 겁니다. 죄 사하는 것은 인간들의 예배가 아니라. 예수님이 친히 제물 되심 밖에는 없는 겁니다. 그것이 영적 예배 입니다.)

마치 사울과 다윗의 차이는 없습니다. 인간 쪽에서 무엇을 행한 원인 있는 결과에서는 없습니다.

오로지 원인 없는 결과에서만 그 차이가 드러납니다.

간단 합니다. 그들 자체내에서는 없는데.

창세전에 사울은 미워하기로 되어 있고 다윗은 무슨 잘못을 해도 사랑받기로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적용해 봅시다.

니고데모는 무슨 짓을 해도 미워하기도 작정 되어 있고,
수가성 여인이나 나다나엘은 무슨 짓을 해도 사랑받기로 작정 되어 있다는 겁니다.

왜 그런데 라고 따지신다면 그 원인 없는 결과가 합당합니다 라고 시간의 흐름의 반대인 거꾸로에서 밝혀지는 겁니다.

아 맞군요 창세전에 예정 하신 그 뜻이 맞았군요 라고 말이죠.

그래서 에서가 왜 탈락 당하는 창세전의 결정인가?
어허 장자권을 소홀히 여겼네?
맞네 맞어 예정된 말씀이 맞어 라고 우리는 확인하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에서가 자신의 개인의 행동 유무에 따라서 죄가 되는게 아니죠
예정에 따라서 죄가 되도록 발설이 되는 겁니다.

반대로 야곱은 그 장자권을 마치 도둑처럼 빼앗는 입장입니다.
왜 도둑인가? 왜 부정적인가? 바로 역사가 해석 못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역사란 항상 원인 있는 결과로써 선악이라는 법적인 신됨을 발효하기 때문에 그 신됨을 깨뜨리는 방식이 숨겨진 가짜 신됨을 들추어내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도적처럼 오셔서 주인을 결박하고서 그 가구물건을 빼앗는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즉 전리품인 이 잉여품은 빼앗고픈 질투성을 함유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예수님의 형상이라고 합니다.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내 뼈 중에 뼈요 내 살 중에 살이라

어 그런데 엉뚱한 놈의 손에 있기에 그것을 빼앗는 방식의 부정적인 의미로써
신부의 가치를 더욱더 승화 시키는 겁니다.

마치 긍휼의 의미 곧 불쌓히 여기시는 그 사랑을 부각 시키기 위해서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아브라함이 반드시 끄집어 내어야만 하는
질투의 전쟁을 치루어서라도 반드시 건져내어야만 하는 질투성을 유발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 예로 호세아 선지자는 고멜이라는 창녀를 하나님이 시키는대로 결혼을 해서
창녀 같은 이스라엘이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라는 하나님 자신의 사랑을 드러내기 위해서
호세아는 창녀와 결혼을 해야만 하고 또 아무리 고멜이 도망쳐도 반드시 돌이키는 그 사랑을 통해서 긍휼과 동시에 이스라엘의 죄악 까지 낱낱이 다 쳐들어가서 구석 구석 찾아 들어가 수셔서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지독한 사랑 죽음보다 강한 질투의 사랑을 드러내시는 겁니다.

니고데모(가룟유다)에게는 그 질투의 사랑이 예수님에게서 발현이 되지 않고
나다나엘(베드로)에게는 그 질투의 사랑이 예수님에게서 발현이 됩니다.

그렇기에 미움을 해석할 길이 없고,
편애를 해석할 길이 없음을, 그냥 그대로 말씀을 순하게 받아들일 생각은 없고

기여이 자기 쪽에서 출발(해석)하겠다는 발상이 바로 가짜 성전과 가짜 메시아를 통해서 실현이 되는 겁니다. 결국 인간은 자기 혼자만의 발상인줄 알았는데 그것이 심겨진 마귀의 생각인줄 죽었다 깨어나도 모르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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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30 13:28:07,

주님이 말하는 교회는 성화구원이 아니라 주님의 뜻으로 주님이 세워갈 사람을 말하는것이며 또 개인뿐만 아니라 그 개인이 모이는 공동체 적인것도 포함되는것인가요 그 공동체적인것이 모일려면 건물은 필요한것이고 그래서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지는것이 건물 교회가 되는것인가요 사역자들은 그 개인이 중요한것이 아니라 건물을 지킬려고 하니까 문제가 되는것인가요

4 답변 :

그래서 믿음이 없다는 겁니다.

방금 이 질문의 취지가 기여이 가시적인 사람을 다루어서 어떻게 해보겠다는 취지입니다.

목사가 믿음이 없는 이유는 자기가 말씀을 안 믿으니까 반드시 가시적인 교회에 가시적인 인간들만 보이기에 그 가시적인 인간만을 어떻게 다루어 볼까 하는 궁리만을 하는 겁니다.

왜냐 목사 조차도 가시적인 직업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처음자리로 돌아가 봅시다(사실 개혁이라는 말이 처음자리로 돌아가기 라는 뜻이라고 하더군요, 말 뿐이죠. 무슨 수로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 나옵니까? 라는 니고데모들 뿐입니다.)

처음자리에는 목사라는 자리도 없었습니다. 에덴동산에는 말이죠. 거기에는 가시적인 교회도 필요 없었습니다.

이것을 성령의 시대 종말의 시대에 구체화 됩니다.

(행 17:22, 개역)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행 17:23, 개역)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행 17:24, 개역)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행 17:25, 개역)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행 17:26, 개역)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행 17:27, 개역)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행 17:28, 개역)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행 17:29, 개역)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행 17:30, 개역)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행 17:31, 개역)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예수님이 주 되심의 시대에는 누가 나서서 예수님의 주 되심을 우리가 달성하자 라는 말로 이루어 질 필요 조차 없을 정도로 이미 완료입니다.

그런 빌미로 초대교회에 교회가 제대로 세워졌다고 우깁니다.

아닙니다, 정작 사람의 손으로 지은 곳에 있으실 필요가 없다고 하십니다.

왜냐? 그 일치성을 핑개로 결국 하는 짓꺼리들이 종교성이 많은 우상숭배자와 다를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즉 성령의 종말 시대에는 곧 상대적인 비언약들은 인간 자체가 우상인 시대입니다.

요즘 시대에 누가 돌 조각 나무조각 부처상을 우상 이라고 합니까?
그것을 만든자가 우상이요. 하청 받아서 조각한 사람만 우상이 아니라. 만들라고 지시한 자나. 수요 공급의 원리에 의해서 결국 인간과 인간의 교통이요 인간이 신과의 일치를 추구하는 심지어 어린아이가 TV 만화를 보면서 철인로봇과 슈퍼맨 영웅 등등을 자신과 동일시 하는 그 일치성이 모두다 우상만이 교통하고 우상(돈)으로써만 소통하는 우상에게만 의미를 두는 그 인간 자체가 우상인 겁니다.

똑같이 기독교도 그 일치성을 추구하는 우상짖만 골라서 성화를 하는 겁니다.

성도란 차이성입니다. 하나님을 증거하는데 있어서 차이나는 피조물의 자리가 성도입니다. 사울과 다윗의 차이는 바로 신(우상)과 피조물(성도)의 차이입니다.

신 흉내 내는 놈들은 다 우상이요 마귀자식입니다.

그래서 자고치 말라고 사탄의 가시를 푹 찔러 깊숙이 빼주질 않는 겁니다.

다윗은 사울 마저도 안고 여호와를 증거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리야는 다윗마저도 안고 여호와를 증거했듯이 말이죠.

예수님은 다 양같이 각기 제 갈길로만 가는 제자들을 안고 새언약을 이루시는 겁니다.

일부러 악마들과 사탄의 가시들과 우리를 미워하는 자들을 깔아 놓으시는 이유는
약할 때 강함 되시는 주님만 크신 분이라는 것을 바라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런 사랑만을 사랑이라고 하고 인간이 출발하는 사랑은 타인의 정복욕 밖에 되지 않습니다.

일치성으로써 살인의지를 불태우는 겁니다.

개인구원도 허상이요
인간들이 말하는 공동체적 집다 구원도 장사수단입니다.

다 그림자를 가지고서 장난치는 겁니다.

실체가 왔으면 그런 그림자들에게 휘둘릴 필요가 없습니다.

실체만 있으면 족하거든요. 구원도 예수님을 말하기 위한 예수님만 구원이면 됐고
성전도 예수님이 참성전이면 된 겁니다. 이 땅의 깨끗한 교회 기대할 필요도 없습니다.
집단 구원도 예수님을 말하기 위한 예수님의 일을 두고 말하는데
인간은 사조직 교회에서 말하는 집단 구원에 빠져서 헛 충성으로 헛 댓가를 바라는 겁니다.

(사울은 오로지 이스라엘 국가 걱정 뿐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에만 관심 있습니다. 사울이 모세 당시의 모세처럼 흉내내면서 국가 걱정해 본들 그것은 이미 과거언약입니다. 다윗은 가시화된 이스라엘 국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주의 이름에만 관심 있습니다. 왜 이름인가? 여호와의 이름만이 인간의 이름인 다윗을 삭제하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다윗을 삭제하는 이름이기 때문에 다윗은 여호와의 이름만 관심 있습니다. 이런 사고방식으로 블레셋 장군 골리앗을 이긴 겁니다.
그러나 사울은 가시화된 이스라엘 국가 체제에만 관심을 둠으로써 자신이 삭제가 아니라 도리어 또렷이 일체성으로써 국가 확장을 통해서 자기 확장을 꿈꾸는 겁니다. 목사들이 이것을 노리는 겁니다.

여호와 이름과 인간 이름 삭제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사무엘상-2008/036강-삼상17장45-47(다윗과골리앗과사울)-1sa090322.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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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차이가 나중에 두 계열 선지자의 차이점입니다. 거짓선지자와 참선지자입니다.
그렇다면 거짓선지자는 애국자입니다. 참선지자는 눈에 보이는 국가를 날려버리니까 매국노입니다.

거짓선지자는 오로지 국가 걱정 뿐입니다.
참선지자는 이미 완료된 하나님 앞에서 가시화 된 이스라엘 국가 체제 조차도 날려 버리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미 실체가 완료 되었으니 그림자는 삭제하자 라고 말이죠.

니고데모와 나다나엘의 차이점도 동일하고

가룟유다와 베드로 와의 차이점도 예수님에 의해서 차이가 나게 됩니다.

베드로야 너가 사랑하고 선택하는 그 사랑 지워버리고 삭제 하렴
내가 너를 사랑 하마 라고 3번씩 묻는 겁니다.다윗은 여호와만이 크게 보이는 자는 자신을 상실한채 자기가 삭제 되어도 상관 없을 정도로 강한 주님을 보는데, 그래서 골리앗은 쥐 뿔도 아니게 보이는데 더 나은 분 더 크신 분이 있으니까 보이니까 믿음의 눈으로

반대로 자기를 이스라엘 국가체제와 동일시 하여 확장을 꾀하는 사울은 눈에 보이는 골리앗을 넘지 못하는 겁니다. 힘은 힘을 못이김으로써 더더욱 자신을 또렷하게 남아 있을 뿐이니 그런 자기자신이 싫어서 자살을 하는 겁니다. 노무현이나 사울처럼 다 개혁이라는 핑개로 인생을 속고 속이는 겁니다. 무가치한 인생인 안개를 왜 속고 속이나요? 안개일 뿐인데, 속는 놈이나 속이는 놈이나 둘 다 한 통속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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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30 13:31:33,

건물성전은 주님의 그 다음 후손들을 위해 필요한것이지 그것이 아니라면 무의미 하다고 하더군요


5 답변 :

다윗이 성전을 짖고자 할때에 하나님이 반대 했습니다. 그러나 기여이 짖고파 해서 허락 하십니다. 그 허락은 그 성전을 통해서 악마의 중심 활동이 되게 하십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와 보라 라고 예수님 자신이 참성전 되심 앞에서 얼마나 악마가 자신들의 손으로 세운 성전을 사수하기 위해서 참성전 되시는 예수님을 거부하는지 악마의 실상을 통해서 빛과 어두움의 차이는 이렇게 쉽게 알려주고 보여줄테니 와 보라 라고 하시는 겁니다.

누가 봐도 저절로 감탄사가 날 정도로 그 차이는 극명합니다.
누가 봐도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다 라고 외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활동입니다. 인간은 백날해도 천천이요 예수님은 무조건 만만임을 예루살렘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통해서 알게 됩니다. 바로 십자가 사건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벌어진 겁니다.결국 다윗에게 허락한 성전은 다윗 가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가시적인 건물 성전으로 보고 그 성전을 중심으로써 피비릿내나는 권력다툼이 여인천하 라는 드라마처럼 벌어지는 겁니다. 허깨비를 놓고 서로 싸우는 겁니다. 웃끼는 개그입니다.

다윗 가문을 세우겠다는 취지는 그 속에서 진짜 참 성전이 나타나고 그 참성전 하나만 옳고 거룩하다면 다 거룩한 것으로 취급하겠다는 다윗언약의 취지 때문입니다.

즉 왕 하나 거룩하면 백성들 허물 조차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겠다는 겁니다.

그것이 다윗이 아니라 다윗의 자손이고
다윗은 비로소 우리야 사건 밧세바 사건 이름 없는 아이 사건 꺽으신 뼈 상한심령 사건인 십자가 사건을 율법체제와의 차이를 통해서 알게 됩니다. 롬 4장

그래서 다윗이 다윗의 자손에게 주 라고 표현한 겁니다.
그 주 만이 거룩하고 옳았다 라고 하는 겁니다. 다윗이 본 그 주가 예수님인데
예수님을 보는 시각과 해석에 의해서
가짜 백성과 진짜 백성이 두 패로 나누어 지게 됩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않던 자도 주의 백성이 되고
주의 이름을 백날 평생 목숨걸고 불렀던 자는 주가 무슨 의미인줄 몰라서 거짓백성이 되는
팔을 어긋맞게 되는 사건이 벌어지는 곳이 예루살렘이요 십자가가 꼿히는 곳입니다.

즉 모든 세상을 십자가가 일일이 다 꼿겠다는 겁니다. 수시고 돌아다니겠다는 취지입니다.

주의 이름이 벌리는 십자가 전쟁을 통해서 비로소 자기 이름이 삭제 당한 것을 기뻐하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은 자이고

주의 이름이 벌리는 십자가 전쟁을 해석을 못하는 자 곧 자기 이름을 더욱더 거룩을 이용해서 확장 시킬려는 자는 강퍅케 만들겠다는 주의 이름의 활동이 구체화 되는 곳입니다.

건물 성전만 무의미 한게 아니라. 인간이 교회의 의미를 포착하고 신학화 교리화 하는 것 조차 무의미 하며 인간 자체가 교회라고 일치화 시키는 것 조차도 무의미 합니다.

교회는 오직 머리만 있으면 족합니다. 실체만으로 족합니다. 나머지는 모두 다 그림자입니다. 그림자 붙잡고 옳냐 틀렸냐 아무리 따져 본들 소용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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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30 13:35:05,

교회의 비밀이란게 무엇인가요

그리스도이고 주님의 말씀 아닌가요

6 답변 :

교회의 비밀은 교회 자체적인 것에서는 없습니다.
교회는 신부라는 의미에서 은밀성이 있습니다.

그 은밀성은 신랑 때문입니다.

신랑이 자기 신부를 자랑할 때 아무도 이 신부에 대해서 해석할 길이 없는 신부입니다.
다시 말하면 신부 자체에서는 신부의 조건이 하나도 없습니다.

오로지 신랑의 피 발림 뿐입니다. 그래서 비밀입니다.

이 비밀을 해독 하고자 덤벼든 세력이 바로 마귀 곧 타락한 천사 집단들입니다.

그래서 신부 자체 로써는 신부됨의 자격이 없음을 알고 늘 송사를 합니다.

그러나 그 자체가 더욱더 신랑의 질투를 부추깁니다.

마귀는 신부를 늘 공격하고 송사하고 법에 넘기우고
신랑은 그런 마귀의 열심을 보기좋게 웃사꺼리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신부는 마귀 세력에 의해서 늘 구경꺼리요 발가벗겨질 미움의 대상이요 싫어버린바 되지만

그런 어두운 자들의 활동과 정반대 되시는 모든 허물을 뒷걸음질 하여서 덮어주시는 지독한 사랑 뿐인 신랑의 사랑을 드러내기 위해서 신부는 존재하는 겁니다.

마치 창조주와 피조물와 관계성입니다.

이 관계성을 즉 신랑과 신부 된 한 몸의 관계성을 천사들도 흠모하고 부러워 한다고 합니다.

졸지에 예수님 때문에 교회는 비밀인 수수께끼가 된 겁니다. 즉 사랑이 된 겁니다.

많이 많이 많이 탕감 받은자가 많이 사랑하는 겁니다. 즉 사랑의 대상이 된 겁니다.
결코 사랑의 주체자가 아니다는 뜻입니다.
사랑의 대상이 됨으로써 비로써 사랑은 첫사랑으로 인해 매일 매일 자아를 지움당하고 잊혀져버리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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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30 13:56:04,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의 신부를 얻어서 그리스도의 군대를 이루었듯이 우리도 우리의 영적자녀를 낳아야 하고 신부를 얻어야 하고 군대를 이루어야 하나요 그것이 영적재산이라고 하는데 결국 주님안에서 사람과의 관계성을 이루지 못하고 홀로 구원되면 아무의미 없다는것을 말하는것인가요

7 답변 :

그래서 홀로 구원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자꾸 구원을 소유 개념으로 보기 때문이고 마치 영적인 일을 자꾸 가시적인 성과나 실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온 해석이 겨우 사울 짖만 하는 겁니다. 그것도 하나님 이름 빙자해서 자기확장입니다.

도리어 주님의 성령이 임하시면 자기는 삭제 당하고 자아상실이 됩니다.

자기를 의식하고 자기를 염두하고 하는 숙제는 다 가짜입니다.

그래서 그 가짜성을 더욱더 구체화 하기 위해서 성령을 주신 겁니다.

즉 인간에게 기대 안한다는 겁니다. 해 봤자 자기만 자랑하고 주님의 공로를 가로채기만 할 뿐인 자기 챙기는 시험에 빠진자이기에 마귀가 노리고 노리는 송사 당할 법에 넘기우는 자가 되는 겁니다. 문제는 예수님이 변호 하시지 않으신다는 겁니다. 여기에 때리는 놈 보다 말리는 놈이 더 미워서 예수님에 대한 적개심이 나오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변호하는 자기 편인줄 알았는데 변호를 하지 않으면 마귀의 송사에서 벗어날 길이 없지요.

예수님을 안 쳐다보고 끝까지 자기 숙제를 하겠다는 놈 말라고 변호 하나요?

성화가 악마적인 사고방식인 이유는 하는데 까지는 우리가 해야 하지 않느냐? 라는 예의 따위를 자꾸 쓸데 없이 가지고 그것이 완벽주의에 빠지면서 그것이 사울처럼 결벽증 환자가 되는 자기것이 허물어 지는것에 대한 정신분열이 일어나게 되는 겁니다.

처음부터 자기 것이 없답니다. 주신 것 뿐입니다. 주신 것 맛있게 먹기만 하면 됩니다.
줘도 못 먹는 놈들이 꼭 자기가 했다고 우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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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30 14:03:38,

주님이 함께 하는 큰 자가 되면 자연히 사람들은 그 쪽으로 모여들게 되어 있고 그 사람은 고을을 다스리는 자가 된다

8 답변 :

도리어 작은자가 되어 보세요.
(살짝 교통사고 당하셔서 다리 하나 없는 불구자만 되었다고 상상해 봅시다. 얼마나 끔찍 합니까?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도 오늘 귀히 귀히 귀하게 입혀 주십니다. 그렇다면 큰 자 안 된 것 조차도 감사한 줄로 알게 될 겁니다. 큰 자 될 필요도 없이 감사 속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약자든 강자든 못난이든 똑똑한 자든 주변에 쫙깔아놓고 우리에게 모두 주셨습니다. 사탄의 가시든, 뭐든지 말이죠. 죄를 알라고)

왜 주님이 작은자로 오셨는지 알게 됩니다.

작은자가 되면 예수님이 왜 미움 받았는지를 말입니다.
(괜히 예수님을 악하다 라고 증거하신게 아닙니다. 악마 세상 겨우 만들어 놓았는데?)왜 사람들이 예수님을 싫어하고 원치 않고 심지어 십자가에 못 밖았는지를 말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된 신이 된 악마라는 것을 멋들어지게 밝혀낸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큰 자가 되기를 원하고
세상이든 종교계이든 심지어 기독교 신앙계이든 큰 자가 되어서
기여이 자기의 영향력을 키우겠다는 정복력에 나서게 됩니다.

그것으로 허깨비 허상인 기독교가 탄생하는 겁니다.

그런 우상이 된 기독교가 나타나야

빛과의 차이성을 알게 됩니다.

방금 질문한 그 내용은 지금 기독교 방송 불교 방송 천주교 방송 틀면 매일 매일 시도때도 없이 나오는 마귀에게서 나오는 남을 밟고 삼켜서 성공하라는 처세술과 같은 겁니다.

안타깝게도 이것이 복음이다 라고 까지 주장하는 시대에 와 있습니다.
저런 처세술로 포장된 정치권력의 힘을 쫏는 것을 부끄러워 하는 것 조차도 모를 정도입니다.

빨리 도망 칩시다.

(마 20:17, 개역)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려 하실 때에 열 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마 20:18, 개역)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마 20:19, 개역)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박게 하리니 제 삼 일에 살아나리라』

(마 20:20, 개역)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마 20:21,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마 20:22,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마 20:23, 개역) 『가라사대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마 20:24, 개역)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마 20:25, 개역)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마 20:26, 개역)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마 20:27, 개역)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마 20:28, 개역)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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