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자 되는 인위적으로 될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남은자로 태어나는 겁니다. 즉 불가능성 입니다.

왜? 인간은 선악을 아는 신이 되었기에 남은자 조차도 선악으로 해석해서 행위 문제로 즉 자기 숙제로 보기 때문입니다.
창조주의 숙제로 때려죽어도 못 봅니다. 그래서 불가능성 입니다. 피조물이 더이상 아니기에 독립하고파 하는 겁니다.

날짜, 보낸사람, 받는사람, 내용

2009-05-29 19:29:21,

지난번에 다니엘의 대해 쪽지 보냈었는데 혹시 못 보셨나요?

답변 :

2번 씩이나 답변 보냈는데 에러가 계속 인가 보네요 그렇다면 비공개 요청 했지만 공개를 헤버리겠습니다.

별로 비공개할 이유가 없고 그런 내용도 없는것 같아서 이번만 그렇게 하고 나중에는 메일을 알려주시면 메일로 답변 드리지요.

다음에는 제 메일로 질문 보내주세요. 미리 메일 주소 알려주시고요. crosslamb@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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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자란 무능자 처음자리입니다.   2009년 5월 26일 화요일 오후 1:38:12


예를들어 피조물은 창조주의 창조함에 무능 했습니다. 도움도 안되고 제일 나중에 창조 되었기에 철저한 창조의 소외 입니다. 그래서 모든 창조완료의 결과만으로 누리는 제일 나중의 존재가 안식의 존재인데 이 안식이 선악때문에 깨집니다.

반면에 가짜 신이 된 인간은 항상 이 창조에 간섭하고파 합니다. 깨뜨릴려고 합니다. 그래서 명령어라는 올무에 다 걸려듭니다. 욕심 때문에 말이죠. 죄가 너를 다스릴려고 하는 구나 (창 4:7,)  이 죄의 소원에 걸려들어서 더더룩 명령어를 지킬려고 하고 신이 된 자신을 확인하고픈 완벽증 영웅증 높고 크고자 하는 병적 증세에서 벗어날 길이 없는 겁니다. 명령어를 지킬려는 이유가 바로 사랑 때문이 아니라. 부자청년처럼 구원 즉 사적인 구원의 결백증에 빠진 겁니다. 그래서 버리라고 한 겁니다. 가짜 신이 된 인간이 무슨 수로 버릴까요? 즉 못 버린다 라는 뜻입니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주를 삼키게 되는 겁니다.

남은자 되자라는 말이 속임수로 안 들리고 왜 탐욕으로 안 보이고, 마치 신앙으로 들릴까요?
같은 종교적인 탐욕이 있기에 종교꾼들이 도화선을 건들어 주었기에 다수를 보고 같이 동참하겠끔 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한 몸 되자 기도하자 찬양하자 예배하자 교회되자 모든 것을 행함의 차원으로 대화하는 자는 신됨을 감추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신의 반대인 피조물인 자는 한 몸 되자에 소외된 자 입니다. 그렇기에 한 몸으로 처음부터 태어났음을 누리는 자입니다.
찬양하자 라는 것에 소외된 자가 유일한  피조물입니다. 그렇기에 처음부터 찬양자로 태어난 겁니다.

찬양하는자와 찬양자와의 차이점?

이것이 바로 가인의 제사와 아벨의 제사의 차이 입니다. 더 나은 제사란 처음부터 순종자인 순응자 피조물인 자와
신이 되어서 신 다움(원인 있는 결과)을 기여이 발설할려는 행하는 자 와의 차이점 입니다.

이것 마저 즉 피조물 마저 피조물 되자 라고 우겨본들 선악을 아는 하나님과 같이 된 인간은 절대로 피조물이 될 수 없습니다.


날짜, 보낸사람, 받는사람, 내용

2009-05-26 00:54:51,

둘로스님 이 글은 어떤곳이든 공개하지 말고 개인적으로 쪽지로 주면 감사하겠습니다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의 은사로 유일하게 진짜로 남은자가 다니엘이다

성령이 충만하고 영적인 실력이 실생활에서 충분히 인정받는 사람이 남은 사람이다 남은 자의 표상이 다니엘이다  어떠한 상황속에서도 하나님을 가까이 하려는 신앙의 지조를 가졌으며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며 신앙적인 사람이었는가를 볼수 있다.

답변 : 신앙의 지조? 그것이 사람 조져 버리는 겁니다. 개혁 운동 무슨 무슨 운동을 펼치는 자들의 말로는 노무현과 같습니다. 자해죠주님이 열심히 깔아 놓은 악마의 부패 집단을 노무현이가 정의의 이름으로 교체시키겠다니?

(요 7:7, 개역)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눅 6:22, 개역)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인자란 벌거벗기움 당한 형상입니다. 남은자입니다.

왜 악마의 가시를 박았는가? 악마가 없으면 성도가 천국으로 갈 길이 없습니다.그들의 손에 의해서만 죽어야 하고 그들은 항상 법적인 정당성으로 죽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선지자를 죽인 이스라엘이 항상 법적 정당성을 추구했듯이

이제는 다니엘을 죽인 조상의 뒤를 안 쫏겠다고 하고서는 여전히 남은자를 법적으로 형성할려는 인위성(원인 있는 결과)로 조작해 낼려고 하듯이 여전히 그 전철을 밟고 있는 겁니다.(정의 이름 개혁의 이름을 부르짖는 노무현처럼 말이죠, 자기 뜻대로 안 되는 뛰어내리는 거죠, 가룟 유다처럼)남은자란 인간의 인위적인 조작을 배격하기 위해서 오로지 성령의 작업으로만 실행이 됩니다. 그리고 선지자는 부자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 속에서)의 생각처럼 귀 구멍을 뚫어주는 역할을 하는 자가 아니라. 귀 구멍을 도리어 막는 역할을 하고 오로지 처음자리(남은자)인 예정 곧 창세전의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했다는 그 원인 없는 결과를 확인자는 영광을 누리는자입니다. 미래의 이스라엘의 완료를 보았기 때문에 현재의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을 누락이 되어야 함을 증거합니다. 결국 미움받는 자들입니다. 교회를 허물기 때문입니다.남은자를 인간의 숙제(행함)처럼 인위적으로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또 성령 충만이란 항상 육의 충만을 대비한 의미입니다. 성령충만 혼자 사적으로 취하는 것이 아니라. 육의 실상을 들추어내기 위해서 성령충만 받는 겁니다. 지 혼자 낼름 챙기는 사적인 소유의 성령충만이란 없습니다.

남은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큰길 넓은 길로 가는 자와의 차이를 드러내는 의미입니다.
좁은 길이란 없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남은자란 인간이 해석해 낼 재간이 없습니다. 다만 상대적인 차이성으로 알게 됩니다. 저런 저런 넓은 길로 가는 인간 밖에(이스라엘 자체가 남은자 의미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처음자리를 외면하기에 자꾸 높아질려고 하고 자기를 챙기는 구원에 우상에 종교에 빠졌기에 첫사랑을 차버리는 겁니다. 광야를 스스로 외면한 거죠) 없음을 통해서 남은자가 따로 7천명이나 있다는 겁니다. 숨겨진 비밀로 감추어졌지 인간이 공객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됩니다.즉 처음자리 외면하는 자가 없다면 남은자도 없겠지요.
땅에 속한 자가 만연해야지만(이마표 받아서 퍼져야만) 비로소 하늘의 속한 아브라함이 그 깔려진 배경을 통해서 차이성을 드러내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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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26 00:59:47,

성령충만함으로 되는건 절대 없다 그 직분 직위에 맞는 실력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어설픈 찬양은 안 받으신다 어린아이의 찬양은 받으시지만 실력없는 찬양은 안 받으신다 하나님은 원래 수준이 높으시기에 ...

실력적인 질의 문제이다 전문 사역자라면 성령충만은 기본이고 자기직분에 맞는 실력이 있어야 한다 교회안에는 진짜 전문가가 없다 왜 은혜로 하기에  은혜도 중요하지만 우리는 은혜를 오용했다 우리는 은혜를 받았다 하면서 아무런 실력도 없고 노력도 하지 않고 우리이 게으름을 합리화 하기 위해서 은혜를 사용한다

답변 :

올치 올치 드디어 마귀성을 드러내고 있네요
성령을 부으심으로만 하나님의 일이 됩니다.
실력이 아닙니다.

실력이 바로 성령을 거부하는 원인 있는 결과로 해석하는 거죠.

예로 사사들은 성령을 받았기에
어중이 떠중이 못난이 중에 못난이로써
발가벗겨짐으로써 주님의 일을 성취 합니다.

인간의 죄악을 자신이 대표적으로 보여주면서 허물을 벗김당하는 모습으로 말이죠.

그래서 죄인 중의 괴수만이 사사가 되는 겁니다.

교회 안에 전문가가 없어서 합리화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런 말로 게으름 피우지 말라는 말이 먹혀들도록 자신의 열심을 합리화 시키는 것이 더 문제입니다.

게으름 조차도 원인 있는 결과로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게으름 조차도 원인 없는 결과로 해석하게 되면(물론 불가능하겠지만) 모든 것이 주님의 일하심이고 인간은 자기 변명 뿐임을 알게 됩니다. 즉 부지런함도 변명입니다.
탕자 비유의 맏아들이 부지런함이 법이 되었기에 게으른 동생을 허물 없이 받아준 아버지의 사랑에 반감을 가지듯이 말이죠. 가인의 후예들은 아무리 목사가 되어도 별수 없습니다. 성경을 해석 할 줄 모릅니다. 그런 게으름 뱅이가 교회가 가득하면 교회 안 되는 줄 믿고 있거든요 그러니 믿음이 없는 겁니다.

또 마르다가 많은 일로 예수님 대접하기 위해 분주한데
싸가지 없는 마리아는 예수님 무릎에 턱 고이고 앉아서 놀고나 자빠져 있는 겁니다.

그래서 마르다가 정의의 이름으로 야단을 치라고 예수님에게 버릇 고쳐달라고 하니
도리어 칭찬하고 좋은 것이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십니다.

게으름을 정당화 하란 말이 아니라, 또 원인 있는 결과로써 게으름을 보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앞에서는 이렇게 법이 적용이 되지 않는 발가벗은 상태 즉 처음상태 즉 남은자의 잉여성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마르다는 원인 있는 결과로 마리아의 게으름을 판단하고 자신의 행동을 보는 시각 또한 원인 있는 결과로 보는 겁니다. 그것이 죄입니다.

마르다가 부지런하게 예수님을 대접하고서 열심을 부린다면 마르다는 어 내가 왜 이러지? 안 하던 부지런을 떨고 있네? 세상에 이런 일도 있다니 라고 원인 없는 결과로 해석하지 못하기에 도리어 원인 있는 결과로 해석하기에 나는 뺑이 치는데 저 년 마리아는 뺑이 안 치냐고 책망해 달라고 하는 겁니다.

결국 마리아의 행동은 그 이전에 마르다가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각이 죄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동원되는 미끼였던 겁니다.

마리아가 아니였다면 마르다는 자신의 죄를 지적 받을 수가 없습니다.

자 이렇게 고정해 놓고 그 다음은 무조건 마르다의 행동을 틀렸고 무조건 마리아의 행동은 다 영적인 행동이다? 라고 고정화 시키면 안됩니다. 모조리 다 원인 없는 결과로써만 일을 하시는 것이 영입니다. 원인 있는 결과 로 볼 수 밖에 없는 우리의 성경 해석 자체가 죄악이다는 겁니다. 늘 자기를 염두하기 때문인거죠. 자기를 잊어버릴 정도로 발가벗겨진 처음의 모습으로(남은자 모습) 해석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우리의 죄악으로 고정된 마음을 할례 하시듯 세례하시듯 죽이시면서 육의 생각을 벗겨버리심으로써 영의 생각을 말씀으로 심으셔서 처음자리(남은자) 만이 어린아이처럼 주님의 말씀 속에서 뛰어 놀게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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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26 01:05:40,

은혜가 충만하다고 하는 교회안에 항상 부족함과 모자람과 실수가 반복이 있다 그러면서 자기네끼리는 잘했다고 한다 다니엘은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는 실력있는 사람이었다 총리로 준비가 되어 있었다 성경에서 말하는 충성은 존재적인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진 사람만 충성이라고 하는것이다 사람이 하나님 말씀데로 사느냐를 보는것이다 우리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게 하라는것이다 내 안에 심비의 말씀을 이루어지게 만들라는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삶의 모든 과정을 주신것이다그러면서 충성을 요구하신다

답변 : 그 목사 슬슬 맛이 가고 있군요.

총리란 대표성입니다. 즉 섬기는 자로써 대표성을 띱니다.

지나 개나 다 총리가 되면 섬기는 자만 있고 섬김을 받는 자는 없겠군요? 그게 낙원이라고 가르치는 유도적인 인위적 충성심 강요겠죠?

또 총리 수준의 섬김으로 자꾸 성화를 강조하게 되면 완벽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교회가 가장 나쁜 짓이 바로 그 짖입니다. 자꾸 완벽주의 성을 요구하다 보니 도리어 남은자가 아니라, 소외 당하는 인물들이 생겨 납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기인 이유가?
그 목사 너가 잠시 아주 잠시 목사 옷 벗고 한 번 총리가 되어 보라고 직접 본을 보여 달라고 해 보세요. 과거 총리가 아닌 현재 지금의 총리 한번 해 보라고 해 보세요. 전문가 되어 보라고 해 보세요. 평생을 걸어도 아마 못 될 겁니다.

결국 연자맷돌을 씌우는 겁니다.

다니엘이 총리가 된 것은 전문가 되라는 소리가 아니라. 그 총리 됨 조차도 말씀의 완료 앞에서 아무 의미 없는 누락 되어야 할 것임을 보여주는 겁니다.

마치 요셉이 총리가 되어서 많은 은혜를 애굽나라가 받았지만 요셉을 바로 그 다음 세대에서는 잊어버리듯이 바로 지워버리기 위한 목적인 삭제 누락 지움의 의미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직분 은사 모든 것이 고정화 되어서 계급이 됩니다.
미래가 땡기지 않는 자들의 특징이 과거의 누적된 실적의 공로로 계급화 하고 그 계급을 기념비화 한다는 점입니다. 고정화 시키고 원인 있는 결과로 나옵니다. 그래서 미끼를 던지면  그 미끼를 시기하는 미움이 바로 그 자리를 고정화 우상화 한 증거로서 나타나는 겁니다. 가인의 제사가 원인 있는 결과로써 고정화 되니까 아벨의 제사를 공격하듯이 말이죠.

엘리야가 850 대 1로 싸워 갈멜산에서 이겼는 것을 주님이 지워버리지 않으면 그 다음 일을 또 자기의 경험 속에서 해석 할려고 할 겁니다. 그러나 주님이 지워버림으로써 엘리야는 항상 처음 자리처럼 주 앞에서 발가벗어도 부끄러워 하지 않았던 에덴동산의 그 처음 모습처럼 되지 않고 자기를 쳐다보고 자기를 가리우는 선악법을 취하고 완벽주의로 빠지게 될 겁니다.

선지자란 처음자리 되돌려 놓기 위해 요단강 세례를 베풀기 위해 보냄을 받은자입니다.
소금은 광야 상태를 계속 유지시키는 자입니다.
제사장은 거룩을 계속 유지시키는 자입니다.
은사란 처음자리의 무능상태를 계속 유지시키기 위해 주시는 겁니다.기도란 나는 무능 합니다. 처음처럼 늘 계속 공급해 주시지 않으면 나는 또 과거의 믿음 어제의 믿음으로 우려먹는 위선자가 된다고 무능한자에게 불쌍한 자에게 주님의 뜻을 매일 매일 공급해 달라고 요청하는 기도입니다. 즉 받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무능 자체가 이미 받은 겁니다. 낮은자 긍휼히 여김을 받은 자가 세상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자기의 완벽 여부로 타인과 엉터리 저울로 재고 재고 재는 겁니다. 성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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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26 01:10:08,

죽도록 충성하라는것 말씀을 채우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앞에서 말씀을 이루는 일이다 말씀은 말씀으로 넘어야 한다 다니엘은 일에 있어서 충성했지만 돌아온 문제는 율법을 어떻게 할것인가이다 지킬것이냐 어길것이냐 죄종적인 시험의 검증이 자기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일것인가가 검증되는것이다 자기 목숨을 거는 검증의 문제 하나님 말씀앞에 자신을 드리고 이 과정을 드려야 한다 안 그러면 하나님 말씀이 손상을 받는다

답변 : 죽도록 도 해석 불가요 또 불가능한 행동이요
충성 또한 해석 불가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종교를 직업으로 삼는 자는 그것을 가능케 해야 자기 직업이 가치성이 되는 겁니다. 그렇기에 성경을 자기와 일치하지 못하면 그 직업이 무가치 하겠지요.

말씀은 말씀으로 성취되고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지, 행함으로 또는 인간의 개입으로 이룰 수 있는 말씀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과거도 실패했고, 그 과거의 의문을 다시 해답도 없는 의문을 계속 주장하는 것은 성경이 알려준 인간의 죄상을 자신들은 인정하지 않겠다는 가장 바리새적인 발상이 아닌지요?

남에게 목숨을 걸어라 하기 이전에
본인이 먼저 목숨 걸면 다 따라 하게 되어 있고 설사 하지 않더라도 주님께 맡기면 됩니다.

왜 그것을 못하느냐 하면 본인이 가장 믿음이 없기 때문에 남에게 강요하는 겁니다.

목숨 걸지도 않아놓고 목숨 걸었다고 우기는 거죠? 그래놓고 세뇌 시키는 겁니다.

목사가 목숨 거는 모습은 설교를 통해서만 보면 됩니다. 행동이 아니라 그 입에서 나오는 복음으로 판단 하면 됩니다.

목사를 자기부인케 하는 복음이 덮치면 그 설교가 영의 일로만 나옵니다. 마치 마리아처럼
좋은 것을 빼앗기지 않겠지요. 그리고 동시에 미움 받게 됩니다. 교인들로부터 쫏겨남을 당하겠지요.

그러나 목사가 자기를 부인하는 복이 덮치지 않으면 설교 속에 자꾸 법을 강요하는 어떤 행동을 요구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미움을 유발하는 복음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큰 대로에서 시장 사람들에게 인사 받고 대접받고 긴 옷을 입어 거룩을 인위적으로 만들어서 땅에서 작은 천국 동네를 교회라는 동아리를 통해서 이루어 보겠다는 살기좋은 나라를 만들겠다는 취지겠죠. 맨입으로 안되니 그러니 열심을 내라고 충성을 요구하는 겁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돈과 정치와 결탁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들의 잉여는 곧 인간의 땀이요 돈이요 정치성(인정받는 것) 만이 교회를 유지할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러니 그런 허상을 예수님이 성전 깨어버리겠다고 하니까? 펄쩍 뛰면서 평생을 이루어 놓은 성과인 공든 탑인 인간의 손으로 세운 성전을 무너뜨리겠다는 자를 가만히 둘 수 없죠. 미울 수 밖에 없죠. 그 뒤를 과거에는 선지자들이 따랐고 , 사도들이 따랐고, 초대교회와 성도들이 따랐습니다.
원인 없는 결과의 목베인 영혼을 이 악마 집단이 된 교회에 계속 투입 시킵니다.
발가벗겨 보니 교회가 아니라 강도의 소굴 이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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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26 01:13:41,

말씀앞에서 죽을수 있다면 이것이 큰 영광이다 날마다의 순교가 어렵다

초보를 버리고 완전한데 나아가야 한다 히브리서 6장에 보면 장성하지 못한것은 다 타락이다  땅에 비를 내리면 흡수하여 합당한 열매를 맺지 않으면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불사른다고 했다 장성한 신앙을 가져야 한다

답변 :

적어도 그런 말을 할려면 바울처럼 복음 때문에 매맞은 흔적이 있어야 할 겁니다. 그리스도의 흔적 말입니다.

그 목사 윗통을 벗겨 보세요. 새하얗게 썬팅한 것 조차 없는 고난도 아닌 고생 조차도 한 흔적이 없습니다.

말씀으로 협박 공갈 사기 삥 뜯을 것이 아니라.
그 말씀 앞에 목사 너가 매일 죽는 모습을 보여달라고 하세요

남의 신앙 자꾸 간섭 한다는 자체가 사조직이 안 될까봐 두려워 한다는 증거죠.

맨날 합당한 열매로 사기를 치는데 왜 목사는 합당한 열매는 안 보이고
자기의 목사 됨이 안 먹혀 드느냐 라는 하소연을 교인들에게 퍼붓고 있는가 말입니다?

마치 광야에서 백성들이 하나님께 원망을 바로 퍼부을 수가 없었고
또 퍼붓는다는 자체가 하나님을 인정하는 꼴이 되니까
결국은 모세를 괴롭히듯이 말이죠.

즉 모세 같은 지도자처럼 괴롭힘을 당하는
자꾸 이해 납득 가능하고 실천 가능한 것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도저히 안 믿겨지는 것을 약속으로 내 걸었을 때에

도리어 모세는 무릎 꿇힘을 당하듯이

왜 그 목사는 모세를 무릎 꿇혀버리듯이

왜 교인들을 자기 개로 만들려고 무릎 꿇힐려고 하나요?
모세처럼 무능 할까봐 겁내니까 반대로 무릎 꿇히는 겁니다.

선지자는 무능자입니다. 전문가가 아닙니다.
선지자는 육적인 충성을 한 자가 아니라. 도리어 선지자 본인에게 누가 죽기까지 열심을 내었는지 저분을 보세요 라고 외치는 광야의 소리입니다.

즉 아무도 안 듣는 소리를 외치는 자입니다.


그런데 그 목사는 자꾸 사람 귀에 속 속 들어오는 납득이 되는 소리를 외치고 있으니
복음도 아니고 복음 아닌 것으로 채우고 있는 겁니다.

시간 아깝지 않나요?

쫏아내세요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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