햋볕 정책

성령은 발가벗길려고 하는데, 인간은 더욱더 성화(위선)를 끼여입을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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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25 07:56:27,

모든 일은 주님이 허락해야 된다는 말은 이미 완료이기에 우리가 주님의 말씀데로 나아가기만 하면 된다로 보는데 이것도 성화인가요

답변 :

예정론자들이 예정을 증거하면서도 결국은 그 예정을 증거한 자기를 인정해 달라는 식으로 자세를 취하게 됩니다. 그것이 사람을 삼키는 식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교회 안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세우겠다는 취지죠. 말빨 먹히도록 하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면 종말인줄 알아라 라고 하신 겁니다.

(막 13:14, 개역)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즉 종말이란 성령께서 이런 상황을 하늘의 계획에 따라 땅에 구체화 시키는 겁니다.

거기에 마귀 잡는 문어잡이통발이 역할을 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두 영의 세계의 차이성을 드러내는데 동원되는 것이 교회입니다. 교회 지 혼자 사적인 구원 개인 구원 챙기는 곳이 아닙니다. 반드시 두 언약의 차이성을 드러내는 것이 교회입니다. 인간의 행실로 세상 사람과의 차이를 드러내자 라는 기존교회의 주장을 거짓입니다. 육의 차이가 아니라. 하늘의 보이지 않는 두 언약의 차이입니다. 이 불가능한 일에 교회가 동원 되는 겁니다.

그 목사는 그런 영의 일에 관심도 없을뿐더러 관심 가질리도 없습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교회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교회가 의미있는냥 가치를 둘 때 그 가치를 둘려는 그 자가 교회에서 자신을 세우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 놈을 잡기 위한 통발이가 바로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반드시 인간이 정치성(인간 왕)을 숨긴채로 반드시 인간이 세움을 받는 인간 자체가 우상화 되는 양상이 벌어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구약 이스라엘도 그랬듯이 지금 현재에도 교회에서 인간 목사가 우상화 되고 추앙화 되는 일은 비일비재 하지요. 눈에 띄이는 놈들만이 아니라, 섬긴다는 둥 하는 바리새인 적인 자들 까지 말입니다.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바리새인이라는 가장 개혁적인 사람들과 대립을 이루는 이유는 그들 바리새인들이 기존의 율법사 대제사장 등등 과 차별성이 아주 강했습니다. 더욱더 개혁적이고 더욱더 대중적인 입지를 부패세력의 비판과 차이로써 아주 획기적인 자들이였듯이 말이죠. (마치 노무현 처럼)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는 이미 완료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교회 속에서 미끼 역할을 하는 겁니다.완료로써 죽어도 상관 없는 [지워져도 상관 없는] 자로써 가짜 교회를 잡는 일에 동원됩니다. 미끼로써 말이죠. 소모품으로써 말이죠. 두 언약처럼 (자유하는 여자, 계집 종 그리고 그들의 자식)

바리새인을 잡기 위해서 현장에서 잡힌 간음하다 잡힌 여자가
도리어 미끼로써 예수님이 바리새인을 잡기 위한 자로써 사용한 겁니다.
(한 쪽은 족보가 끊기는 아벨족보 역할을 반드시 해야 하고 - 죽었더라 족보
또 한 쪽은 반드시 족보 속에서 나 말씀 때문에 잘 난 인간이지 라는 - 살았더라 족보인 가인의 족보 노릇을 반드시 해야 합니다. 가인이 하나님이 주신 이마표로써 성을 쌓고 영웅을 배출 시켰듯이 말이죠. 그들을 부재성으로 사용하시는 겁니다. 그래야 언약의 차이성이 드러나지요. 마귀 없이는 일이 안됩니다. 빛은 어두움을 통해서 그 차이성을 드러냅니다.)

성화란 계시를 반드시 육의 일로 육의 자랑으로 자기 의 자랑 즉 누룩화 시키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가시화

그러나 믿음이란 가시화가 아니라 도리어 불가시화 됩니다. 그래서 항상 부정적으로 보입니다. 가시적인 것이 인간에게는 긍정적으로만 받아들여질 수 밖에 없는 선악의 판단이 가능한데 불가시화 된다면 해석할 길이 없기에 짜증을 낼 수 밖에 없습니다.

왜 내 제사는 안 받고 아벨 제사는 받는가? 에 대해서 언약이 불가시적으로 미래에서 아벨에게 덮쳐버리니 아벨의 제사는 원인 없는 결과로써 제사를 받고
그것을 가인 쪽에서는 불가능하기에 가능한 것만 고집할 수 밖에 없어서
불가시적인 제사 곧 더 나은 제사에 대해서 안색이 변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성화가 말이 안되는 이유는 반드시 믿음을 가시화 시켜서 남에게 인정 받겠다는 알리바이 형성입니다. 그래야 불안하지 않고 안정을 가질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도리어 불가시화 되는 신앙 곧 납득이 되지 않고 이해가 불가능하고 불가능한 실천 따위는 공격을 받을 수 밖에 없기에 자기 스스로도 거부하겠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개인 구원 사적인 종말운동 사조직 묵시 하나님 나라 운동을 펼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것을 예수님은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길거리에서 기도하고
긴 옷을 입어서 외형적인 거룩성을 갖출려고 노력한다는 겁니다.

(눅 20:46, 쉬운) 『"율법학자를 주의하여라. 이들은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좋아하며 시장에서 인사받는 것과 회당과 잔치에서 윗자리를 좋아한다.』

즉 상대적으로 무시 받는 것이 두려워서 행한다는 겁니다. 말씀 지킨다는 것입니다. 죽음이 두려워서 말씀 속의 문자로 기록된 사랑하라를 지킨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다 보니 정작 누구와 충돌하게 되는고 하니예수님이 오기 전 까지는 모두에게 존중 받다가
예수님이 더 나은 사랑을 행사하니까? 비로소 강퍅을 드러냅니다.

아니 새로 심겨지는 겁니다. 예수님이 왜 더 나은 사랑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그 당시 가장 사랑 실천의 대가들과의 차이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들은 더욱더 사랑을 실천해야만 하는 겁니다. 그래야 강퍅이 강퍅 답고 어두움이 어두움 답게 비로소 은폐된 속성들이 들추어지는 겁니다.

외형적으로만 판단 할 수 밖에 없는 우리의 어두운 눈은 예수님이 오기 전 까지는 다 속을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 성령님이 임하지 않으면 기존 교회에 다 속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들의 외형성을 판단할수 있는 그 판단 조차도 그들의 선악의 판단 수준과 같은 기준이기에 영의 기준은 십자가 피 기준은 어떤 누구도 포착 할 수 없기에 속는게 당연합니다.

성화가 그래서 반드시 퍼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비밀을 공개해야 장사가 되고 불가능을 가능케 해야 장사가 되고 기적을 대중화 되어야 장사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믿음을 대중화 했던 바리새인에게 악한 세대가 기적을 요구함으로써 그 차이로 무능한 기적인 요나의 표적만을 보이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십자가란 반드시 악마가 관영하고 인간들의 외형적인 껍데기를 고급스럽게 갖추어야만 버림받는 모습으로써 등장합니다.그래서 성화는 원인 없는 결과인 우발적인 말씀(묵시)를, 영의 일을,

반드시 원인 있는 결과 즉 인간의 일함으로써 말씀이 말씀 답게 인간의 순종을 가미시키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필연적인 선민사상이 도리어 악마집단성인줄 몰랐던 겁니다.

주님이 그런 인간의 거짓을 허용하시는 이유는 그들의 거짓이 완벽하게 성화하면 성화할수록 인간의 순종이란 행함이란 예수님의 순종과 행함과의 얼마나 극적인 차이성이 있는 불순물 뿐인 배설물 덩어리인가를 밝히기 위함입니다.

이것마저도 수긍못하고 기여이 깨끗한 행실이 나올 수 있다고 장담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치 베드로가 절대로 예수님을 버리지 않겠다는 장담을 하듯이 말입니다.

그거 꺽으시고 벌거벗겨야 그리스도의 형상이 뭔지 압니다.

그리스도의 형상 마저도 인간의 행함의 선악 법칙으로 죄악의 형상으로
광명한 천사 형상으로 만들려는 신의 창조를 흉내낼 정도이니 할 말 없지요.

마무리하면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않던 주님이 누구인지 조차도 몰랐던 자가 구원이 됩니다. 원인 없는 결과요 우발적이며 이것을 가시적인 학문이나 신앙으로 포착 불가입니다.

이 불가능성이

기존의 가능성을 곧 주의 이름을 불러야만 구원된다는 기존 이스라엘과의 차이성으로써

대조가 됩니다.

정작 죽으라고 주의 이름 불렀던 자는 버림 받고
주가 누구인지 조차 몰랐던 자들은 구원을 얻었습니다.

자 이렇게 되니? 또 원인 없는 결과를 또 원인 있는 결과인 조건으로 해석하여서 즉 가능성으로 해석하여서

아 그럼 나도 주의 이름 안 불러도 구원 되겠네? 라고 사적인 구원으로 챙겨버리게 됩니다. 마치 부자가 근심케 하여 등돌려 보내버리게 되니, 베드로가 자기는 다 버렸다고 또 자기를 구원의 영역에 인위적으로 개입시켜서 묵시를 해석하겠다는 취지처럼 말이죠.

그래서 의도적으로 누가복음은 다 이방인이 아니라 한 과부 이고 한 문둥병자이고 한 명만 구원 이라고 알려주는 식입니다. 즉 여기에 모든 인간들의 본색이 드러내도록 하는 식입니다. 그 따위 구원 싫다 라고 자기만의 방식의 구원을 추구하겠다고 그것이 종교이며 그것이 바로 가증한 우상이며 그것이 성화입니다.

마치 다수를 생각하는 듯이 보이겠지만 이것이 사적인 구원이고 (이기주의=인간이 신의 공평성을 해석했다고 우김 공의성을 실현)
그러나 그 반대로 단 한 명의 과부 단 한명의 문둥병자 만이 구원이 바로 집단 이스라엘의 구원이라고 단체 구원이라고 합니다.아브라함 한 명 속에 무수한 별과 무수한 바다의 모래와 같다고 하듯이

그래서 너희들이 아브라함 자손이라고? 우끼지 마라 돌들을 통해서 아브라함 자손 만들겠다고
인위적이고 가시적인 아브라함 자손 이루는데 열심을 하루 아침에 공든 탑 무너뜨렸을때에 비로소 악마성이 그 살인의지가 발현되는 겁니다.

성령의 임재설 내재설 운운하던 놈들이 결국은 마귀성을 드러내듯이 말이죠,

성화를 운운하던 놈들이 결국은 남을 미워하는 자는 살인자다 라는 그 미움을 주님이 직접 심어버리시는 겁니다.

자기는 실컷 남들이 하나도 도와주지 않는 가운데
혼자서 열심히 성화 했는데

정작 주님은 악마성을 집어 넣어버리시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남들을 의식해서 자기를 가리우는 거룩이라는 이름의 포장 무화과나뭇잎입니다.

정작 성령의 성화는 발가벗겨서 구경꺼리
또는 미말에 둔 찌기
또는 미끼

로써 사용하시는 겁니다.

인간들의 성화와 성령의 성화가 이렇게 정반대입니다.

예레미야는 성령의 일을 거부하고파서 도망쳐도 소용없었습니다. 즉 수용불가 정도로 싫은 겁니다.

요나도 도망쳤습니다. 수용하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일을 수용하고 싶다고 나서는 자가 과연 진심일까요?

발가벗기시는데?


그래서 인간들의 정치술이 성령의 발가벗기시는(광야) 성화를 거부하고서
타협책으로 자기들의 성화로 나오겠다는 발상으로써 종교를 세우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의 반복입니다. 인간 왕을 세우겠다는 취지처럼 말이죠.

다윗이라는 발가벗어도 상관 없는 인물이 아닌 (은폐된 묵시적인 인물)
반드시 자기들 손에 흠없는 사울을 세우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이 의도적으로 그들의 가장 거룩한 골라 골라서 세운 인물을 아무리 거룩 갖추어도 일부러 악령을 심어버리는 겁니다.

인간 쪽에서 갖추어서 들이대는 인물을 거부하겠다는 겁니다.
반대로 다윗은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죽어야만 하는 직사게 고난 받아야하는 싫어버린바 된 왕이 되어야 합니다. 빨가벗김 당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형상입니다.

(마 21:42,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마 21:43, 개역)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마 21:44, 개역)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성령이 발가벗기면 벗길수록(무능,어린아이,남은자,약함) vs 인간들이 무엇을 자꾸 끼여 입는가 가 밝혀집니다. 우상 입니다. 허망한 것이고, 역사와 장로의 전통과 온갖 좋다 싶은것 다 끼여 억지로 자기 것인냥 우깁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거짓임이 드러나는데도 불구하고 말이죠.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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