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53. 인간의 눈물 vs 예수님의 눈물 (눅 19:28-48)

인간의 거짓된 눈물을 모두다 빼앗는 예수님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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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19:28, 개역)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눅 19:29, 개역) 『감람원이라는 산의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왔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눅 19:30, 개역)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눅 19:31, 개역)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이렇게 말하되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눅 19:32, 개역)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
(눅 19:33, 개역) 『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눅 19:34, 개역)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눅 19:35, 개역)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눅 19:36, 개역) 『가실 때에 저희가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눅 19:37, 개역) 『이미 감람 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 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눅 19:38, 개역)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눅 19:39, 개역)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눅 19:40, 개역)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

(눅 19:41, 개역)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눅 19:42, 개역)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눅 19:43, 개역)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눅 19:44, 개역)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눅 19:45, 개역)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며』
(눅 19:46, 개역)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눅 19:47, 개역)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두목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눅 19:48, 개역)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침을 찾지 못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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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 하시는 하나님

2009년 5월 27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3:19-22

(렘 3:19, 개정) 『내가 말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든지 너를 자녀들 중에 두며 허다한 나라들 중에 아름다운 기업인 이 귀한 땅을 네게 주리라 하였고 내가 다시 말하기를 너희가 나를 나의 아버지라 하고 나를 떠나지 말 것이니라 하였노라』

(렘 3:20, 개정) 『그런데 이스라엘 족속아 마치 아내가 그의 남편을 속이고 떠나감 같이 너희가 확실히 나를 속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 3:21, 개정) 『소리가 헐벗은 산 위에서 들리니 곧 이스라엘 자손이 애곡하며 간구하는 것이라 그들이 그들의 길을 굽게 하며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렸음이로다』

(렘 3:22, 개정)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내가 너희의 배역함을 고치리라 하시니라 보소서 우리가 주께 왔사오니 주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이심이니이다』

오늘날 사람들과는 달리, 혹은 이방민족과는 달리, 유대인들에게 있어 하나님과의 결속이란 상상 그 이상입니다. 현대인들에게 있어 하나님이란, 자신이 불러줄 때만 만나고 그렇지 아니하면 따로따로 거주하는 그런 신 개념입니다. 시도 때도 없이 늘 따라붙고, 늘 함께 움직이고 같이 움직이는 개념으로서 떨어져 지낼 수도 없는 그런 하나님관을 원치 않는 형편이지요.

하지만 그렇게 되어버리면, 오늘 본문의 말씀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향해 “아내‘라고 부릅니다. ’아내‘란 단순히 ’여인‘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자는 무수히 많아도 아내는 오직 한 사람 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그냥 평범한 인간으로 보시지 않고 자신을 남편으로 드러내기 위한 ’아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인간으로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오늘 본문 말씀을 이해하려면 하나님께서 왜 그런 호칭을 사용해야만 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저 하나님을 저 하늘 멀리 거주하시는 분으로 안다면, ‘아버지’라든지 ‘아내’라는 용어를 사용하시는 취지를 모르는 게 됩니다. 왜 사람들의 삶이 힘드는 겁니까? 그것은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해독이 안되서 그러합니다.

왜 해독이 안되는 겁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고,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을 떠날 수 없이 붙어 다니신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항상 우리는 독립적으로 자기 생을 꾸려나가려고 하다보니 하나님의 말씀이 해독이 되지를 않는 겁니다.

그냥 우리가 인간으로서 신으로부터 감찰과 감시의 대상으로 함께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럴 경우에는 비록 함께 한다고 해봤자, 여전히 우리의 마음을 콩밭에 가있고 독립심만 마음 속에 가득차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버지’ 혹은 ‘아내’라고 불러주실 때는 우리 인간들이 생각하는 그런 동행 관계말고 다른 식으로 바라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이 어떻게 이런 하나님의 심정을 헤아릴 수가 있겠습니까? 사실을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져 있습니다. 그 대목은 이러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족속아 마치 아내가 그의 남편을 속이고 떠나감 같이 너희가 확실히 나를 속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 말씀을 보면, 인간이 감히 하나님을 속이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사실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사람들에게는 납득하기 힘들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의 눈동자란 마치 하늘에 카메라가 달린 것처럼 땅 위에 있는 모든 인간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고 있는 분이라는 정도는 충분히 알기에 감히 하나님을 속인다는 것을 생각지도 못할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나를 속였다”는 겁니다. 어떤 경우가 이런 경우에 해당되는 겁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남편’과 ‘아버지’라는 호칭을 사용하실 때의 진정한 심정은 바로 ‘이러이러한 마음이 하나님마저 속이는 것이 됨’을 수긍할 때에 납득이 되는 심정입니다.

쉽게 말씀 드려서, 우리 인간들은 부모로부터 아담의 본성을 갖고 태어납니다. 중학교 때 되어 세례받고, 부모가 좋아하는 일이니까 교회 나가주고, 그리고 대학 들어가서 공부하고 취직하고 결혼하고 아파트 사서 안정된 생활하다가 교회에서 장가 들었다고 집사하라 하니 집사인 줄 알고, 나이 들어 장로해라고 하니 장로하고, 그럭그럭 나름대로 건전하고 성식하게 한평생을 보냈다면 이런 인생의 노정에서 어느 시점이 ‘나는 하나님의 아내요 하나님은 나에게 남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달리 말씀드려서, 도대체 우리가 어느 대목에서 ‘하나님마저 속이면서 산 경우’가 되는가 말입니다. 그런데 요한일서 1:7-10에 보면 참 희한한 말씀이 적혀 있습니다.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이 말씀은, 우리가 억지로라도 죄를 찾아내어 자백해야 구원받는다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우리 존재 자체가 예수님의 십자가 피 안에서 죄인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여기에 반발해서, 우리가 전적으로 죄인인 것을 거부한다면 이것이 곧 하나님을 거짓말하시는 분으로 만들어 버린 다는 겁니다. 즉 예수님께서 공연한 짓을 한 셈으로 돌려버리는 결과가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신과의 동행을 인정하면서도 어떻게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단 말입니까? 욥기 13:9에 보면, “하나님이 너희를 감찰하시면 좋겠느냐 너희가 사람을 속임 같이 그를 속이려느냐”고 되어 있습니다, 즉 지금 욥은 세 친구들보고 이야기하는 중입니다. 그들은 친구 사이였습니다. 그것도 아주 좋은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그들의 ‘친구 개념’에 욥이 합당했기에 좋은 관계를 그동안 유지해왔습니다.

그런데 막상 욥이 자식을 하루밤에 다 죽이고, 막대한 재산이 다 날아가고, 그것도 모자라도 욥의 몰골이 흉측하게 달라져버리는 모습을 보고 난 뒤, 기존의 ‘친구관’ 속에서 욥을 더 이상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즉 그들 친구의 견해로는 욥은 자기네들이 알고 있던 하나님관하고 전혀 다른 하나님을 알고 있었으며, 그로 인하여 욥이 자기 친구들을 비난하고 있다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욥이 대꾸하는 장면입니다. 욥은 친구들에게 말합니다. 너희들이 사람만 속이는 것이 하나님마저 속이며 산다고 말입니다. 이 뜻은 이러합니다. 하나님께서 친구들 면전에서 그들이 미처 예상 못한 사태를 일으키신 것입니다. 그렇게 되자 그들은 기존에 자신네들이 알고 있던 하나님과 신앙관에 한계가 드러나고 만 겁니다.

즉 욥의 친구들은 나름대로 하나님을 누구보다도 잘 섬긴다고 여기고, 욥도 자기네들과 더불어 하나님을 잘 섬겼기에 그동안 고난도 없이 복을 받아 잘 살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욥이 고난받고 복도 철거된 상태이니 자기네들이 알고 있는 신관념과 다르다고 함부로 평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와같이 인간이 하나님을 속인다는 말은, 예수님의 피 앞에서 자아의 죄와 현실을 바라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이런 배역한 백성을 돌이키는 방법은 무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상밖의 사태를 당하게 하셔서 자기 욕망에 준한 하나님 관념을 전면 수정시키는 방식을 동원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항상 우리 것이 우리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 소유인 것을 의심하지 말게 하옵소서, 하나님은 죽이거나 살리거나 하실 권한이 있음을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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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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