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탄의 가시를 빼달라고 3번씩이나 기도하신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

오늘날 교회가 거짓인 이유는

발가벗김 당하는 수치를 구경꺼리 됨을 스스로 제거하고자
사탄의 가시를 빼버렸다고 자랑을 펼치는 설교와 간증으로
교회에 가증한 것을 세워버렸기 때문이다.

이제 산으로 도망치는 것만이 유일한 살 길이다.

발가벗겨짐? 수치? 미끼? 미말의 구경꺼리?
근처는커녕 정반대인 하루라도 육의 자랑이 피어나지 않으면 왕따 시키는 곳이 되고 말았다. 그 왕따도 천박한 왕따 하지 말고 고급스러운 성화 라는 기준의 왕따로서 더욱더 법적으로 정당성을 추구하면서 말이다. 아예 대 놓고 거리가 멀게, 간격을 극과 극으로 내달리고 있다.

바로 이런 인간이 세워진 이상, 교회에 인간이 자리를 차지한 이상 교회는 별 볼일 없는 것이다.

(마 24:9, 개역)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마 24:10, 개역)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마 24:11, 개역)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마 24:12, 개역)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마 24:13, 개역)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마 24:14, 개역)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마 24:15, 개역)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마 24:16, 개역)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마 24:17, 개역)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질러 내려 가지 말며』
(마 24:18, 개역)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질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마 24:19, 개역)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마 24:20, 개역)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마 24:21, 개역)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마 24:22, 개역)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

즉 성도의 구원을 교회 속에 사탄의 가시를 푹 찔러 넣으심으로써 이루시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종교꾼들인 성화론자들은 [아니되옵니다.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라고 교회 만큼은 사탄의 가시를 모조리 다 빼버리겠다고 장담하고 나서면서 개혁을 외친다.

무슨 무슨 운동, 펼치는 놈들 치고 정의 개혁 처음에 다 부르짖지만 나중에는 더욱더 일곱귀신 들어간 자들 뿐인 것을 보게 된다.

교회를 앞장 세워서 개혁, 거룩, 성화, 운동, 결과적으로 보면 그 놈들이 더욱더 악마였던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그들과 사도 바울과의 차이를 보면
사도 바울은 사탄의 가시를 빼달라고 기도해도
도리어 그 사탄의 가시 앞에서 무능함을 수긍하게 된다.

사탄의 가시가 능력이 아니라.
사탄의 가시를 푹 깊숙이 찔러 넣으신 하나님의 뜻인 무능하고 약하게 만드심이
바로 강하게 하시는 새언약 새창조 새피조물의 완성됨의 누림이기 때문이다.

(고후 12:7, 개역)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후 12:8, 개역)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고후 12:9, 개역)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고후 12:10, 개역)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고후 12:11, 개역) 『내가 어리석은 자가 되었으나 너희에게 억지로 시킨 것이니 내가 너희에게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도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니나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하니라』
(고후 12:12, 개역) 『사도의 표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사도 됨의 묵시적인 인물이 된 것이 도리어 매 맞고 무시당하고 죽을뻔 한 것이 무슨 자랑이라고 그것이 사도의 표 라고 하니 정말로 발가벗겨져도 군더더기 하나 걸치지 않도록 벗겨짐을 누린 것이다.

사탄의 가시는 부재로써 동원된 것이었던 것이었다.

사탄의 가시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 보다 더 무서운 것을 빼달라고 예수님은
피 땀을 흘리시면서 까지 이 잔을 옮겨 달라고 세 번 씩이나 기도 하신다.

제발 제발 제발

그의 외침의 절규는 십자가 상에서도 울부짖는다

왜 나를 버리시옵니까

왜 나를 어찌하여 버리십니까

아버지 아버지 제발 저를 버리지 말아 주옵소서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그리고 십자가의 못은 결국 빠지지 않았다.

비켜 갈 수가 없었던 철저한 무능 곧 발가벗겨짐 이다.

그 칼과 망치는 철저하게 그 울부짖고 부르짖고 기도하던 외침을 외면한 채
더욱더 깊숙이 파고들고 파고들었다.

어떤 누구도 그냥 죽음이 아닌? 사단의 가시를 빼달라고 절규하는 기도로 죽는자 있던가?
아니 도리어 사단의 가시를 빼겠다, 빼었노라 고 자기 몸을 내던지는 죽음만 찾아 다닌다.

아니 누가? 하나님의 버림으로써 죽음을 맞이 하는자가 있던가? 다 자연의 원리라고 마치 자기가 신으로써 신의 세계로 귀의하는냥 상전 노릇을 하고 있는 죽음만 운운한다.

아니 누가 맡기는 죽음을 당하는자 있던가?
모두다 자기가 자기를 자해하는 사적인 개인 죽음만 추구할 뿐이다.

(눅 23:46, 개역)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

부정한 짐승을 깨끗하게 하기 위한 제물 되는 제사장 아버지 손에 부탁하는 맡기는 죽음이 아니라, 다시는 일어나고 싶지도 않고 더러운 죄를 씻고 싶지도 않는 그저 자기 더러움 그 어두움 악마의 소굴의 침침한 암흑 속으로 땅 꺼지듯이 내던져지듯이 떨어질 뿐이다.

그러나 천사가 괜히 날개가 있는 것이 아니다.

마귀와 어리석은 인간들이 아무리 부엉이 바위 보다 더 높은 성전 꼭대기 위에서 떨어뜨려도 하늘에서 온 자를 날개가 있냐 없냐를 확인하겠다고 하는 발상 자체가
얼마나 악마적인가? 날개를 보여줘도 안 믿을 것이 뻔한 인간인데
구지 떨어뜨리는 시험을 통해서만 믿겠다고 원인 있는 결과의 조건을 채우겠다는 그 자체가
우상을 원했던 것이다.

그 우상이 원하는 것에 반대의 길로만 가신 것이다.

날개 짤라버리고 하늘 영광 버리고
저들과 똑같은 죄인의 모습으로 와서
사단의 가시에 푹 찔린 채로
배고프심 그대로
질고를 아심 그대로
싫어버린바 되심 그대로
고운 모양 풍채 없는 모습 그대로

그야말로 광야 모습 그대로

그 모습 그대로 와도 못 알아 보는

부정한 인간을 깨끗하게 하실 가까이 와서 우리와 같은 모습이 되셨는데
도리어 이 놈 오히려 잘 되었다. 내 손에 죽어봐라 라고 모두들 사냥개 마냥
너의 피와 살이 구원한다면서? 라고
주님의 살과 피를 마음대로 갈기갈기 찢고 피 범벅 되도록 땅에 흥건히 뿌려진다.

바로 이것이 모든 인간의 껍데기를 발가벗기는 것이다.

흡혈귀는 교회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더욱 더 그들의 아지트 본부로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흡혈귀 임을 들추어내신 예수님의 무능하심

그 무능하심의 십자가가 아니고서는 인간이 흡혈귀임을 알 길이 없다.

더욱더 거룩 뒤에 숨어있는 교회 속의 흡혈귀들을
예수님은 까발리신다.

더욱더 무능한 모습으로써 말이다.

젖먹이를 괜히 건드렸다가 자신의 정체만이 들통날 뿐이다.

그래서 더더욱 광명한 천사 노릇을 하는 것이다. 모든 의심(다우트)을 묻은채로 말이다.
의문의 증폭을 다 묻어둔채로써 답도 없는 그 의문을 붙잡은 채로 그저 사탄의 가시를 뺀 것으로 자랑만 하다가 자기 몸을 지옥에 내 던진다.

그러나 주님은 끝까지 무능한 광야의 모습으로써 죄악의 실상을 끝까지 추적하여 까발려서 불기둥으로써 태우고 물기둥으로써 씻어서 처음에는 좋은줄 알고 달고 좋다고서 하고서는 그것이 무엇인줄 몰라서 도리어 자기 몸에 박한 식물인줄 알고 가시 빼 달라고 아무리 요청해도 소용 없었듯이 육과 죄악의 실상 하나 하나를 발가벗김으로써 피와 결합시키시는 것이다.

그 원망의 죄악을 담은 증거궤 위에 뿌려지는 부정한 자를 깨끗하게 하시는 그 피가 무엇인지

더 이상의 의문이 아닌 명확하고 확정적이고 완료적인 그 피 앞에

직접 뛰어들어서 제물 되심으로써 친히 제물의 피를 흘리시는 그 확정적인 피 앞에
모든 허상들인 껍데기는 거짓이고 이 피 만이 옳았다고

비로소 피조물에게서만 나오는 처음 고백인 십자가의 피 만이 옳았다고
그 피 앞에 껍데기 위선적인 거룩은 틀렸고 선악의 법은 거짓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십자가의 그 부정적이고 실족케 하는 그 걸림돌인 버림받은 발가벗겨진 돌이
사실은 흡혈귀인 우리가 당했어야 함이였는데 죽기를 무서워서 두려워서 남에게 법적 죽음인 살인형을 온갖 누명으로 뒤짚어 씌었다는 것을 말이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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