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탈스럽고 까다로운 소모품들


기계가 다루기 어렵고 동작하기 어려우면 소모품의 기능은 상실된 채로
도리어 종이 상전 노릇하는 격이 된다.

(갈 5:1, 개역)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행 15:10, 개역)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신 25:4, 개역) 『곡식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지니라』

(고전 9:9, 개역) 『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딤전 5:18, 개역)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사 47:6, 개역) 『전에 내가 내 백성을 노함으로 내 기업을 욕되게 하여 그들을 네 손에 붙였거늘 네가 그들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고 늙은이에게 네 멍에를 심히 무겁게 메우며』

(겔 30:18, 개역) 『내가 애굽 멍에를 꺾으며 그 교만한 권세를 그 가운데서 그치게 할 때에 드합느헤스에서는 날이 어둡겠고 그 성읍에는 구름이 덮일 것이며 그 딸들은 포로 될 것이라』

(나 1:13, 개역) 『이제 네게 지운 그의 멍에를 내가 깨뜨리고 너의 결박을 끊으리라』


피조물은 피조물 다워야 한다.

하나님과 같이 된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들은 피조물의 자리인 처음자리를 발로 차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피조물이 아니며 그들에게서는 순종이라는 것을 일체 기대할 수가 없다.

좀비 들에게 명령한다든가? 기대를 거는 것은 어리석은 짖을 것이다.

종은 종 다워야 하듯이, 종이 종의 위치에서 벗어난 것이 도리어 주인을 무시하고 주인을 공격하는 위치에 선 것이다.

그래서 피조물이 아닌 가짜 인간들은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다.

너무나 까탈스럽게 신 보다 더 신 노릇을 하고 있다.

여기에 처음자리로 되돌려 놓는 존재들은 선지자들이 등장하는데
이 선지자들에게 종의 멍에를 씌우지 말라고 하신다.

도리어 선지자들이 가장 소모품의 역할을 보여줌에 있어서
더욱더 망을 씌우는 입장일 텐데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들이 선지자들에게 망을 씌우는 입장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이 선지자들은 죽이시기로 작정 하셨기 때문에

여기에 인간들 마저 덩달아 망을 씌울 입장이 못된다는 것이다.

(고전 4:9, 개역)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구경거리가 된 마당에 인간들은 더욱더 그들에게 멍에를 씌우는 입장으로써
세상이 악하다 라는 그 악의 진면목을 드러내도록 되어 있다.

도리어 인간들이 종들을 부려먹는 동시에
자신들의 정치적인 죄악성은 그야말로 양파껍데기 처럼 까탈스럽게 벗겨도 벗겨도
벗겨지지 않는 까다로운 신이 되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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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다가 중간에 목사님에게 물어 보니, 혹시나 싶어서 또 막힌 부분을 물어보니,

위의 생각들이 틀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주객이 뒤 바뀐 것이다.

은사가 먼저이고 멍에를 전체에 적용 시킨다는 것은

결국은 정작 우발성을 인위적으로 다시 바꿀려는 인간의 열심을

당사자 성령님이 지우지 않는 이상은 인간 열심의 행적, 육의 자랑이 되기에

성령님이 등장하느냐에게는 인간의 개입성이 불가하기 때문이다.

이 불가능성? 무슨 수로 해석 하랴?

인간은 자기 손에 잡으면 결국 배설물로 자기 의를 자랑하는 누룩화 시키는데?

정치판으로?


http://media.woorich.net/passofday/passofday090524.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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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형상이란? 인자의 영, 인자의 형상. 새피조물

신이 임하는 장소

2009년 5월 24일                            본문 말씀: 사무엘상 19:18-24

(삼상 19:18, 개역) 『다윗이 도피하여 라마로 가서 사무엘에게로 나아가서 사울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다 고하였고 다윗과 사무엘이 나욧으로 가서 거하였더라』

(삼상 19:19, 개역) 『혹이 사울에게 고하여 가로되 다윗이 라마 나욧에 있더이다 하매』

(삼상 19:20, 개역) 『사울이 다윗을 잡으려 사자들을 보내었더니 그들이 선지자 무리의 예언하는 것과 사무엘이 그들의 수령으로 선 것을 볼 때에 하나님의 신이 사울의 사자들에게 임하매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

(삼상 19:21, 개역) 『혹이 그것을 사울에게 고하매 사울이 다른 사자들을 보내었더니 그들도 예언을 한고로 사울이 세번째 다시 사자들을 보내었더니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

(삼상 19:22, 개역) 『이에 사울도 라마로 가서 세구에 있는 큰 우물에 이르러 물어 가로되 사무엘과 다윗이 어디 있느냐 혹이 가로되 라마 나욧에 있나이다』

(삼상 19:23, 개역) 『사울이 라마 나욧으로 가니라 하나님의 신이 그에게도 임하시니 그가 라마 나욧에 이르기까지 행하며 예언을 하였으며』

(삼상 19:24, 개역) 『그가 또 그 옷을 벗고 사무엘 앞에서 예언을 하며 종일 종야에 벌거벗은 몸으로 누웠었더라 그러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 하니라』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망친 그 장소에는 사무엘이 있었습니다. 또한 사무엘과 함께 있는 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선지자 무리입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신이 임하여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무엘 집단에 다윗이 합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한 이질적인 무리가 그 곳에 당도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다윗을 잡으려 온 사울의 사자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나름대로 해야 국가적으로 엄정하고도 신속하게 처리할 행정적 법 집행이 있었습니다. 사울왕을 명령대로 집행을 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있어 국가란 종교보다 더 높은 힘을 지니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나라가 있고 종교가 있는 겁니다. 나라가 없으면 종교도 없습니다. 그들 눈에 종교 노름 따위는 그저 오락일 뿐이었습니다. 시간보내기 주관적인 자아도취 행사에 불과하다고 간주될 뿐입니다.

객관적인 법집행을 가로 막을 그 어떤 영적 기적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고 다윗을 잡으려 온 것입니다. 그들 눈에는 다윗이란 그저 지명 수배자일 뿐입니다. 우주의 비밀과도 연관없이 보이고 더구나 자신의 존재와도 연관없어 보입니다. 종교라고 해서 법 집행에 예외가 있을 수 없습니다. 쉽게 말해서 이 세상에 그 어느 것도 칼보다 더 위대한 것은 없다고 믿는 겁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주관적인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로서 법 집행은 허구에 해당되는 일임이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사울의 사자들은 가상과 허상을 거꾸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현실과 비현실을 거꾸로 알고 있었습니다. 사무엘과 함께 있던 선지자 무리들이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현실에 대한 궁극적 힘이 쏟아지는 원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들이 구상하고 있는 세계에 대한 주도권이 바로 하나님의 신에 의해서 주어지는 예언의 말씀에 있었던 것입니다. 사울의 사자들이 하나님의 신을 받아 예언자의 무리에 합세되므로서 그들의 사울의 종이 아니라 일시적으로나마 하나님의 종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현실이요 실제 세계입니다. 세상에서는 신의 영역마저 인간들의 지성 속으로 포함시켜 붙잡아 버리려고 시도합니다. 그래서 인간만이 최종적으로 군림자로 행세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모든 시도나 행동이 바로 인간 나라의 절대성에 있습니다. 이는 곧 자아를 신격화 시키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다시 과거로 돌아가 보면 창세기 2장에서의 인간은 벌거벗었습니다. 그리고 벌거벗었음에 대해서 하나님은 문제 삼지를 않았습니다. 도리어 옷 입고 나타난 창세지 3장의 경우가 이미 인간이 비정상적 상태로 있음으로 정착됩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에 보면, 사울왕이 벌거벗고 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지난 간 과거를 되돌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령께서는 지속적으로 과거 미래를 가지지 않고 하나님의 세계를 보여주십니다.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분명히 거기에는 옆에 강도 두 명만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성령 안에 있으니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 못박혀 있는 현실을 접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이런 세계는 자신이 자신을 통제할 필요가 없고 하나님에 의해서 통제받게 되면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들은 그들이 믿고 싶은 세상과는 전혀 다른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모두 다윗 때문입니다. 다윗을 따라오다 보니까 이런 낯선 세계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다윗은 단순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예언을 품고 있을 뿐만아니라 하나님의 예언이 겨냥하는 중심 인물이었습니다. 즉 사울의 신하들은 다윗을 통해서 이 세상의 중심점에 접촉한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의미가 쏟아지는 그 진앙지에 그들이 들어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언의 세계에서 모든 인간은 무장해제 당합니다. 벌거벗게 됩니다. 곧 신 앞에서는 자신의 본질이 드러내게 됩니다.

사람들은 과거의 기억 속에서 지금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데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것만을 골로서 지금의 자신으로 삼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는 그것이 용납될 수 없습니다. 죄는 죄대로 어두움은 어두움 그대로 다 드러나게 됩니다. 요한복음 3:20-21에 보면,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들이 자체적으로 꾸려고 나가는 인생이란 것은 하나님의 신 앞에서는 다 소용없는 몸부림에 해당됩니다. 그냥 어두움은 어두움으로 드러날 뿐이요, 빛에 속한 사람은 빛에 속한 사실이 드러날 뿐입니다. 마태복음 26:52에 보면, 베드로가 칼을 쓰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당부하십니다. “칼을 도로 집어넣어라. 칼로 쓰는 자는 칼로 망하느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의 존재 의미는 죄의 실상을 드러내는 것 뿐입니다. 광야의 시절로 돌아가면 거기에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 하에 움직였던 때였습니다. 인간의 수단이 소용없는 세계, 자기 계획을 인정받지도 못하는 영역, 그 영역을 지금 하나님께서는 예언대로 다윗을 통해서 실시하시려고 한 겁니다.

민수기 11:28-29에 보면, “택한 자 중 한 사람 곧 모세를 섬기는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말하여 이르되 내 주 모세여 그들을 말리소서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두고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의 영을 그의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가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모든 인간은, 처음 인간이 어떤 자리였음을 보여주기 위하여 존재해야 합니다.

참된 신앙인은 다윗처럼 지속적으로 악마로부터 밀어붙임을 당해봐야 합니다. 인간들이 법을 내세우지만 그 배후에는 자신의 자존심과 절대오기가 버티고 있습니다.  자기가 구상한 세계가 허무하게 될까봐 겁내고 있는 겁니다. 사울이 위대한 선지자라고 언급되는 것은 실은 사울을 놀리고 모독하기 위한 백성들의 우스개 소리입니다.

누구보다도 영적 세계에 대해 반대편에 서 있다고 자처한 사울, 아니 결국 정반대 쪽에서 활동할 수 밖에 없는 운명에 놓인 사울이 막상 신의 영역에 들어서보니 ‘정반대’라는 그 가치마저 빛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처럼 다윗이나 사울이나 모두 하나님께서 세상을 장악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물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더 이상 우리 자신의 체면을 위한 인생을 살지 말게 하옵소서. 하나님 앞에서 늘 벌거벗은 채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으로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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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심판을(발가벗김, 부끄러움, 수치, 심판) 앞 당겨 받는자

= 말세에만 나타나는 교회라는 특수단체(종말의 영이 임한 자들, 남은자 , 처음자리 곧 광야로 되돌림 받은자 , 성령 세례)


말세의 징조

《이번 주 설교요지》 2009년 5 월 31일

〈 지난 주 설교 요약 〉

인간들은 자기 성전을 포기 못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우대하는 성전을 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은 분’입니다. 바로 이 새로운 성전이 천국입니다. 천사들이 나팔 불 때, 수직으로 올라가는 그 성전이 이 성전입니다. 이 성전 안에서 인간은 비로소 자신이 그리는 세상이 모두 자신의 상상에 의해서 조작된 한낱 꿈인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럴 경우에만 인간은 밑바닥까지 낮아질 수가 있습니다. 꿈에 불과한 세상에 겁내지 않게 됩니다.

〈 이번 주 설교 요약 〉

마가복음 13:3-8 말세의 징조

마지막 때의 징조란 곧 마지막 정리를 위한 ‘징후’입니다. ‘낌새’입니다. 변화의 조짐입니다. 정상적인 흐름이 아니라 파국으로 몰려서 결국 와해되는 수순을 밟아나가는 현상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입니다. 우연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필연적으로 반드시 일어날 수 밖에 없는, 누진된 원인으로 인하여 발생되는 결과입니다. 따라서 말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너무나도 정당하고 인간세계는 너무나도 매 맞을 짓을 해왔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창세기 19장에 보면, 소돔과 고모라 마을은 그 죄악이 하늘까지 도달하여 하나님께서 도저히 참지 못할 지경까지 이른 그 결과가 얼마나 참담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사람이 졸지에 소금 기둥으로 변하게 된 것은 엽기적이기까지 합니다. 의인 열 사람이 그 도시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1:20-24에 보면, 소돔과 고모라에 내린 재앙은 앞으로의 재앙에 비할 것도 못된다고 합니다. 즉 앞에서 큰 저주가 인류에게 남아있습니다. 모든 게 누진된 죄악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강퍅한 심령은 막무가내입니다. 자기를 부인할 줄을 모릅니다. 십자가를 읽어 내지를 못합니다. 말씀과 복음이 발에 짓밟히고, 외면당하고 복음을 외치는 자를 만나고 싶지 않는다면 멸망은 기정사실입니다. 말세의 징조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독한 분인가를 보여주는 징조입니다. 하나님은 일체 인간의 기도를 듣지 않습니다. 가증스럽게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귀를 닫고 눈을 닫아버리면 남은 것은 혹독한 파멸뿐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1:15에서 ‘귀 있는 자는…’ 식으로 말씀을 전개합니다. 즉 이 종말에 있어 전도자란 하나님의 귀와 하나님의 눈을 가진 자를 찾아다니는 자들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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