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 사랑과 복수심


인간의 믿음, 소망, 사랑은 예수님에 대한 복수심일 뿐이다.


성경에 나타난 인물 중에 1급 살인자들이 있는데
바로 모세, 다윗, 사도바울이다.

아브라함은 아니다. 율법 이전이다.

그들의 특징은 곧 철저하게 율법과 연관된 인물들이다는 것이다.

동시에 율법의 틀에서 벗어난 율법 외에 한 의와 연관된 인물들이다.

그래서 다윗은 비로소 아브라함을 새롭게 보게 된다.
율법의 실천 시선이 아닌 피(십자가)의 시선으로 봄으로써 말이다.

(롬 4:4, 개역)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롬 4:5, 개역)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롬 4:6, 개역)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롬 4:7, 개역)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롬 4:8, 개역)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롬 4:25, 개역)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즉 인간이 율법을 지키거나 곧 말씀의 명령어를 지키거나
행한다는 것은 타인을 값없이 사랑하라 라는 남을 살리는 율법의 취지와 정반대인
타인의 생명을 취하고서도 그런 자기를 안 알아준다는 복수심으로 인한 안색의 변함
곧 죄의 소원의 결정판을 보여주는 모습이다는 것이다.

인간의 믿음과 사랑과 행함 곧 말씀 명령어를 지킨다는 것은 타인에 대한 복수심이요
타인을 자기 발 아래 곧 자신의 선한 행동 실천에 굴복 시키고자 하는 정복욕구일 뿐이다.

심지어 한 율법사가 예수님 마저 자기 발 아래 굴복시키고자 크고 큰 계명이 무엇이냐 라고 묻는다.

(눅 10:25, 개역)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눅 10:26,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눅 10:27, 개역)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눅 10:28,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눅 10:29, 개역)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눅 10:36, 개역)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그것은 곧 모든 인간들을 대표해서 예수님을 자기 발 아래 두고자 하는 십자가 처형의 정당성을 예수님에게 퍼붓고자 하는 출발점인 셈이다.

율법을 제대로 지킬려며는 자기 혼자만의 행함이 아닌 타인 곧 이웃이 설정 되어 있어야 한다. 그 이웃이란 곧 처음자리를 보여준다.

그런데 그 이웃에 대한 행함이 처음자리로써가 아닌 자신의 공적을 쌓아야 타인에게 의미가 있게 됨으로써 자신의 공적과 동행이 되도록 되어 있다.

그런에 예수님은 느닷없이 그 이웃에 대해서 말하기 전에
진짜 처음자리의 의미를 보여주는 강도를 먼저 설정하신다.

결국 율법이란 이웃에 대한 사랑을 말함에 이전에
강도 라는 어두움의 존재를 먼저 들추어내는 데 예수님의 이웃 사랑 실천 곧 율법완성에 취지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 자신이 그런 강도들의 실체를 드러내기 위해서
강도의 모습으로써 강도의 실체를 드러낸다는 그 역설과 모순 속에서 어리석은 지혜를 펼치실때에

진짜 강도들(강도의 굴혈의 무리들)이 예수님을 강도 잡듯이 덤비게 된다.

(마 21:13, 개역)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마 26:55, 개역) 『그 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막 11:17, 개역)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막 14:48, 개역)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눅 19:46, 개역)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눅 22:52, 개역) 『예수께서 그 잡으러 온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군관들과 장로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느냐』

(요 10:8, 개역)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요 18:40, 개역) 『저희가 또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러라』

(마 27:38, 개역) 『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마 27:44, 개역)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성경은 참으로 놀랍게도 거룩에 대한 이야기가 없고
모조리 강도 이야기 뿐이다.

누가 진짜 강도냐를 밝혀 내기 위해서 예수님은 강도로 도적으로 오셨다.

(마 12:29, 개역)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막 3:27, 개역)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늑탈치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뭔가를 빼앗기 위한 목적이다.

빼앗음이라는 (구약에서는 전쟁) (신약에서는 십자가로써 모든 인간의 의와 생명을 못 박음)
의미가 없다면 그것은 거짓이다.

거룩이라는 의미를 빼앗음이라는 의미로써 증거하신다.

인간의 살인의지를 들추어내지 못한다면 가짜 예수님이다.

모세 율법의 대표자로써 1급 살인자
다윗 이스라엘의 왕이 된 대표자로써 1급 살인자
바울 구약 율법의 완벽히 행한 대표자로서의 1급 살인자

예수님의 어리석은 지혜란 말로만 어리석다는 정도가 아니라 상상을 못할 정도로
아무도 건널 수 없는 식으로써 단절의 단절로써 다가온 지혜이다.

즉 오로지 가해자와 피해자 로써의 관계로만 한 몸을 형성하겠다는
그리스도의 몸을 증거하시는데 있어서

다름아닌 바울을 내세우시는 것이다.

가장 그리스도의 몸의 박해자인 바울이

그리스도의 몸의 진위를 가장 적나라하게 그 진가를 밝혀 준다.


결론적으로 다시 언급해 보면

인간의 믿음 사랑 명령어 지킴은 곧 예수님에 대한 살인이요 이웃에 대한 살인이다.

영원히 자기 코에 끼이도록 하수노릇 하게 만드는 짖이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인간의 거짓 저울 거짓 줄자 거짓 추를 들추어내고자
그런 인간들이 상상도 못할

오로지 강도와 이웃의 관계  살인자와 피해자의 관계

로써만 율법을 완성 하셨다.

바로 이런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로써 말씀을 믿지 않거나
행하지 않거나 실천하지 않는 것은

타인에 대한 살인이요 복수심일 뿐이다.

이런 자가 용서 받을 정도이면 그야 말로 이웃 사랑이 아닌가?

십자가란 인간의 믿음의 법칙 마저도 비켜간다.

도리어 인간의 믿음은 타인을 사랑하겠다는 취지로 다가오는 타인 살인이요, 예수님에 대한 철저한 복수심이다.
(처음부터 거짓이여 거짓만을 발설하고서도 거짓인줄 모를 정도로 자기도취적이다. 마약이다.)

인간의 출발과의 차이나는 예수님 쪽에서의 출발인 믿음이야 말로 이웃 같지도 않은 십자가의 원수를

자기 몸 처럼 아끼지 않고 자기 목숨 버려 사랑하신 것이다.

Posted by 김 대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