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략물인 신부

날짜, 보낸사람, 받는사람, 내용
2009-05-06 19:32:31,

주님이 무엇을 해 줄것인가생각하지 말라 주님이 우리에게 바톤을 넘겼기에 주님의 말씀으로 우리가 살아내야 하는 시대이다 그것이 주님과 함께 하는 신부의 시대이고 예수그리스도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세계 약전이 되어진 시대이다

답변 :

맞습니다. 개혁주의란 그 말 외에는 할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유대교 또한 그런 결론 외에는 달리 답을 낼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라. 이것 보다 더 정답이 어디 있을까요? 없습니다. 다른 답이 없거든요.

문제는 예수님입니다. 그런 삶을 살고 있는 자들에게 (누가 봐도 정답인데) 정면 도전하십니다. 흩어버리시지요. 마치 인간들이 그럴싸 한 바벨탑을 쌓은 것을 흩어버리듯이 말이죠.

율법이라는 의문 속에 다 가두었는데 과연 그리스도인의 삶을 산다? 말도 안되는 소리죠.

그래서 예수님 자신은 항상 마귀라는 존재를 인간들이 설정한 마귀가 아니라 (이겨야 할 대상) 예수님 자신이 이겨야 할 대상으로써 설정하십니다.

거기에 대해서 그동안 마귀와 싸우고 있다고 자족하던 자들의 반발성이 크게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도둑이라고 표현 했습니다.

그리고 주인을 마귀로 그리고 가구를 자신이 늑탈하는 탈취물 곧 전리품으로써 설정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가구가 두 고래 싸움에 어느쪽이든 싸움의 전리품이라는 잉여로 설정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의 독립체로써 인격체로써 봐 달라고 하는 시건방진 생각을 한다는 점입니다.

바로 그러한 점이 성화론과 개혁주의 등 기독교 전체 역사를 다 장악한 모습입니다. 그래놓고서는 뭐라고 사기를 치는가 하며는 바로 그런 정신상태로 하나님을 찾고 포착하는 학문과 교리를 형성하였다고 자랑을 하는 겁니다.

결국 거꾸로 된 거죠. 하나님 곧 예수님이 가구가 된 셈입니다.

예수님이 오심은 바로 인간 속에 그런 하나님이 가짜임을 밝혀 내는데 있습니다.

모든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은 가짜입니다. (광야란 바로 인간 자기투사한 하나님의 형상을 깨는 장소 입니다. 가짜 예수형상, 인간이 원하는 우상화된 예수를 깨는 장소가 광야죠, 광야에서는 사적인 구원 개인적인 삶 개인종말 개인선택 따위란 없습니다. 일괄적으로 죽음 심판 저주 속으로 몰아가는 장소 입니다. 그것을 신부 곧 광야교회라고 합니다.)

인간은 그리스도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종교의 삶을 살고파 한다는 점입니다. 그것을 욕심이라고 하고 그 욕심이란 바로 다른 남편(우상)을 사귀고 싶어 한다는 점에서 기독교 전체 역사를 거짓 포장해 왔던 겁니다.

그들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삶이란 자기는 후패하고 예수님은 흥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윤택케하는 보람되는 일을 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는데 있어서 모든 종교와 동일하고 특히 유대교와 동일합니다. 이미 유대교에서 다 써먹은 사기를 또 다시 쳐도 먹혀드는 이유는 욕심 곧 다른 낭군을 찾는 마음은 동일하다는 겁니다. 우상이지요. 자기라는 우상

그리고 좀 솔직해 지면 좋습니다. 과연 그들 말 대로 그리스도의 삶을 산 자가 단 한 명이라도 있는지 말이죠. 예수님과 비교해 보면 완전 정반대의 삶 뿐인데 과연 누가 그런 삶을 살았는지 제가 그런 소리 20년 넘게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람 단 한 사람도 못 봤거든요. 과연 그렇게 말로만 하지 말고 누가 그런 삶을 살았는지 한번 말해 보라는 거죠.

그저 사적인 착함과 선한행동만을 추구하는 자들이 거의 마약 수준에 있습니다.
부자청년처럼 확 벗겨버리면 차라리 구원이라도 될 줄 압니까?

아마 그렇게 쌓은 선행 가난한 자들에게 다 주라고 하면 근심하고 등 돌리겠지요. 자기 남편 찾으러 간 겁니다.

그러나 지금은 더 불쌍한 시대입니다. 아무도 그 가면을 벗겨줄 자가 없는 시대이거든요.

주님은 우리에게 바톤을 넘긴적이 없습니다.

그 사람 성령론이 개판이라는 증거입니다.

성령이란 아예 우리에게 기대라는 안하기 때문에 성령이 활동하도록 약속한 성령을 주시는 겁니다. 즉 바톤이 넘어갈까봐 막으시는 분이 성령입니다. 그들의 성령론은 악령론이다는 증거죠. 그런 소리 다른 종교에서도 많이들 하지요. 뻔한 거짓말에 종교는 다 속일 수밖에 없죠.

예수 그리스도 안 이라고 했을때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 밖이 뭔가 라는 것에 그 차이성이 드러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밖이란 빼앗김이 없는 시대요 상황입니다.

그리스도 안이라는 빼앗김을 당하는 입장에서 빼내는 사건들이 늘 낯설게 찾아오는 상황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 밖이란 빼앗김이 없기에 대신 뭔가를 채워넣는 방식입니다. 삶을 살아서 채워넣고 사실은 자기 종교적 욕심을 채워넣고 삶이라고 우길 뿐이지요. 뭔가를 남의 시선을 의식해서 나오는 것이 바로 위선적인 거죠. 그래서 그리스도의 삶을 살자고 말해야 남들에게 공인되는 겁니다. 다수를 항상 의식하지요. 그렇기에 빼앗긴다는 자체가 없는 세계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이란 빼앗김을 통해서 이 세상의 가면을 한꺼플 한꺼플 벗겨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 세상 속에 나 라는 허상 또한 벗겨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알고보니 약속은 없고 행함과 실적과 공적으로써 남을 의식하는 모습만을 보게 되는 겁니다.

그것이 세상을 장악한 주인으로 인해 벌어졌음을 보게 되는 거죠.

그 속에서 외부에서 들어온 의가

주인을 결박하고 가구를 탈취하는 전쟁의 방식을 통해서 전리품으로 잉여로써 챙겨

빼앗아 왔다는 것을

그 빼앗음의 의미를 되새기고자 광야교회에서 뺑뺑이 돌리는데 있어서

아무도 그 광야의 의미를 모르기에 청함을 60만 가정이 받았으나 택함을 받은 가정은 갈렙 뿐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수성을 깬다는 것은 곧 자기를 버리는 모습이니

결국 60만 가정처럼 광야교회를 싫어하고 자기가 전에 살던 착하게 열심히 일하던 약속 밖의 세상으로 되돌아 간 겁니다.

이 역사적인 상황은 구약 이스라엘 전체의 모습이고 심지어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에게 그 버릇 여전히 어딜 가질 않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사기치는 방법으로써 제일 잘 먹히는 소리가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자 라는 성화야 말로 가장 그들의 최종 신학이라고 저들 스스로가 외칠정도이니

주님이 마귀를 제대로 심으신 것 맞죠?

(정말로 예수님을 사랑해서 그리스도의 삶을 운명을 따르고자 함이 아니라, 남의 시선을 의식해서 남의 시선에 어긋나지 않는 것으로 예수님의 삶 중에서 할 수 있는 것만 골라서 취사선택하여서 흉내내는 겁니다. 예수님의 운명이 자기 운명이 되는 것은 곧 자기 운명이 다  사라지는 그런 곤란한 행동은 감히 못하고( 부자청년) 자기가 믿을만 한 것만 골라서 믿는 거죠. 그것을 성경에서는 창녀 라고 합니다. 어제 수교설교에서 취사선택하는 그 모습이 바로 가인에게 죄의 소원이 심겨지는 모습과 동일하다고 합니다. 인간은 우상에게서 벗어나질 못합니다. 성령이 그래서 간섭하는 이유입니다.)

창녀란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예레미야-2009/009강-렘3장1-5(더러운땅)-jer090506.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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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교회란 항상 첫사랑(처음자리)으로 되돌려놓는 것 (선지자의 사명이요 성령의 일, 은사)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예레미야-2009/008강-렘2장30-35(못된처녀)-jer090429.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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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이 오겠지요 

2009-05-07 10:07:51 조회 : 19  이름 : 서정진
 
그날이 오겠지요

바른말하면 미움받는 이날이 지나면 그날이 오겠지요
당신만을 위해 살면 미움받는 이날 이날이 지나면 그날이 오겠지요
생명 전하면 죽음 주는 이날 이날이 지나면 그날이 오겠지요
당신만을 생각하면 미움받는 이날 이날이 지나면 그날이 오겠지요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면 보이는 것으로 핍박하는 이날 이날이 지나면 그날이 오겠지요
보이지 않는 당신 마음으로 바라보면 천대하는 이날 이날이 지나면 그날이 오겠지요

그날이 오겠지요
믿음으로 바라본 그날 눈앞에 펼쳐지는 그날 그날이 오겠지요
당신과 이제 미움받지 않고 동행하는 그날 그날은 곧 오겠지요
그날을 기다리니 이날이 꿈만 같군요
꿈같은 이날 날 힘들게하니 그날이 날 위로하는군요
이날의 나는 연약하나 당신 바라보니 참 위로가 있군요 참 기쁨이 있군요
당신때문에 욕듣고 당신때문에 미움받고 당신때문에 핍박받으니
오늘도 그날이 한없이 기다려집니다.

그날이 오겠지요 참으로 그날은 오겠지요


강구만  09-05-07 10:33    
그날은 이미 왔습니다. 그분으로 인해 미움받고, 욕듣고, 그분께만 위로받기 원하는 이들에게만 보이는 그날은 우리안에 이미 전개되어 있습니다. 또한 영원히 감추인채로 ...
 
서정진  09-05-07 11:09    
에베소서에서와 같이 이미 온 그날을 기다립니다.
님의 글이 미쳐 생각지 못한것까지 알게하니 고맙습니다.
 
서정진  09-05-07 11:12    
이렇게 글을 올림은 부족한 저를 더 말씀으로 지적받고 인도받기 위함이니 많은 답글 부탁드립니다.
 
김대식   09-05-07 12:09    
완료로써 완성되었기에 미움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증식 증폭으로써 다가 올수 밖에 없고, 당연히 위로 곧 긍휼 또한 완료로써 그 사하심이 이루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흰 눈 보다 더 희게 용서의 크심을 보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그 어떤 세계에서도 볼수 없는 피제사의 세계 입니다. 처음부터 에서는 미움받기로 작정되어 있고, 야곱은 사랑하기로 작정된 것을 구체화 하고 증식시키는 때가 종말이겠지요. 두 부류의 명확한 선을 긋는 갈라짐의 때 입니다. 그 사이를 건널수 없는 것처럼 그 차이성은 극과 극이겠지요. 그것을 확인하는 때입니다. 말씀대로 기록한대로 예언하신대로 .......

(눅 16:25, 개정)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눅 16:26, 개정)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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