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헬이 자식이 없음으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

(마 2:18, 개역)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렘 31:15, 개역)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


어제 이상규 집사님의 글을 읽고
두 죽음을 생각 했다.

하나의 죽음은 국가 영웅의 죽음이요
또 하나의 죽음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의 죽음이다.

그 글을 읽고 늘 생각 속에 맴돌던 라헬의 위로 거절과 부모의 역할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았다.

성경에서 말하는 부모란 선지자다
그 선지자는 항상 광야의 경험자로써 자식을 광야로 인도하는 자 이다.
광야의 경험이 없는 자식에게 광야를 체험한 부모로써 그 광야라는 잃어버린 자리인 처음자리를 증거하는 것이다.
즉 처음자리 첫사랑으로 인도하는 자 이다.
잃어버린 경험을 알도록 하기 위함 이다.(누가복음의 핵심)(사도행전은 그 잃어버린 자리를 되돌리는 성령의 활동상)

만약 부모가 그 선지자 노릇인 처음자리 되돌리기(세례)는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그 자식을 통해서 처음자리 되돌리는 그 거룩의 일은 멈추질 않고 진행이 된다. 이것이 창조요 믿음의 세계이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아브라함이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통해서 믿음의 자리인 창조의 자리 처음의 자리로 되돌아 가야만 했다. 그래서 그 아브라함을 처음자리로 되돌리는 제물이 될 자가 바로 하늘에서 난 자인 이삭이다.

비록 역사 속에서는 자식의 모양으로, 나이가 어린자로 나타났을지 몰라도
이삭은 아브라함을 건지는 구원자이다.
아브라함은 이삭이라는 제물을 바침으로써 상한심령과 광야라는 처음자리를 체험케 된다.
그 상한심령 곧 아버지가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미래의 예수님이 제물되시고 하나님이 직접 제사장 되시는
그 상한심령을 예수님의 마음을 미리 앞당겨서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삭은 제물이 됨으로써 아브라함을 건지는 선지자 노릇을 하게 된다.

비로소 아브라함을 이 타인의 제물 됨 때문에 믿음의 조상이 된다.

아브라함 자체 속에서는 믿음이 발생할 수 없음을 나타낸다. (단절이요 삭제요 지워버림이요 처음자리 되돌림당함이다.)

즉 아브라함은 이 모든 벌어진 상황을 미래가 덮쳐짐으로써 미래의 예수님 죽음을 보게 된 것이다. 창조주를 보게 된 것이다. 창세전의 이 십자가의 피 흘림만을 위해서 모든 만물이 태어났고 이 십자가만을 증거하기 위함인 것을 ...

창조주 예수님이 아브라함의 처음자리를 예비 해 주신 것을 여호와 이레로 알게된 것이다.

그래서 부모란 항상 광야로 되돌리는 자이다.
근본의 자리를 알려주고
인간의 원천자리를
먼저 광야 곧 인생을 경험한 자로써 인간의 근본자리를 알려주는 선지자이다.

이 세상 어떤 교육도 교육기관도 사회도 어떤 위인도 교육자도
인간의 근본자리를 알려주는 자가 없다.

오로지 선지자 뿐이다. 즉 인간이 아니라. 성령 외에는 알려주실 이가 없다.

그 성령을 통해서 부모는 성령을 입어 광야를 외칠 수 있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불가능한 교육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모가 자식을 가르칠 때 반 죽도록 패도 된다고 했다.
왜냐 반 죽도록 패도 죽지 않기 때문이다.

도리어 정작 죽어 마땅한 삭제의 광야 자리를 증거하는 것이 목적이지 팬다는 것은 광야라는 자기 삭제인데 패도 자기를 삭제할려는 의도가 없을 때는 패도 소용이 없으니 팰 필요가 없다.

자기를 삭제 당하는 것이 더욱더 공포로 다가오게 되니 자아를 더욱더 생생히 생존할려는 모습만 남발할 뿐이다.

자기 삭제만이 유일한 안식 쉬게 하는 온유인데 거꾸로 해석을 하니 패도 소용이 없다.
더욱더 자기 욕심에 자기를 못 살게 구는 [매 없음-사생아가 아닌 증거인데도, 광야없음, 광야 안 돌아감, 처음자리 따위는 없음, 첫사랑은 없음, 창조는 없음, 용서 긍휼 불쌓히 여김은 없음, 대신 피 흘림은 없음, 십자가 따위는 없음] 으로 일관하고 오로지 자기 구원을 자기가 사적으로 자기를 구원시킬려는 자기 출발을 (의문의 증서, 이미와 아직의 미완료) 멈추지 않고 제자리 뛰기로 몸부림을 친다. 자기 외에는 믿음이 외부에서 선물로 주어지질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지자는 광야로 되돌리는 역할자로써 돌이키지 않는 백성의 가시 노릇을 할 수 밖에 없다.

(마 13:57, 개역)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약속의 사람 곧 믿음의 사람은 계시전달자요 그 계시전달자를 중심으로해서 구원이 곧 피흘림의 제물되신 용서가 펼쳐진다.

여기서 정작 계시전달자는 구원자라는 영웅이 아니라 도리어 용서받은자로써 본인이 정작 계시 곧 묵시전달자로써 역사가 삭제당한 모습으로써 증인으로 동원되는 소모품이 된다. 미끼가 된다.

묵시전달자(부모)가 나는 이렇게 처음자리(광야)에서 이렇게 삭제 당했습니다. 라는 내용물을 들고서 증거하는 것이다.

그 증거물이 너무나 아이러니 하게도 지팡이다.

곧 없음 이다. 광야를 증거하는데 있어서 증거물처럼 보이거나 만질수 있거나 체험할수 있는 것이 아닌

그저 아무도 귀히 여기지 않는 말씀 그 말씀만을 증거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믿을만한 것을 던져주고 믿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믿음이 일체 불가능한 것으로써 믿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광야의 내용물이다.

광야는 지팡이 곧 꼬챙이를 따르자 라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꼬챙이가 아니라.
무가치하다는 것이다. 자기 혼자만의 무가치하게 여긴 것이 아닌
모든 인간이 저것이 뭐 날 구원한다고 라고 전체 인간이 예민하게 저거는 죽어도 아니야 했던 그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주춧돌이 되는 그 버린돌이 광야의 내용물이다.

야곱이 허리가 튼실 할때는 지팡이를 쳐다도 안보는 눈길 조차 주지도 않던 것이였다.
그런데 허리가 박살 아니 삭제 당한 이후로는 지팡이 없이는 단 한 발걸음도 옮길수 없는
그야 말로 자기가 무시한 그 무시덩어리 지팡이를
도리어 지팡이 만을 의지하는 인생을 살도록 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광야다.

누가 광야를 내 생명이요 내 목숨처럼 귀히 여기겠는가?
쳐다도 보지도 않고 에덴동산과 같은 애굽만의 생활방식이 푹 젖어 살면서 길들여졌다.

그런데 그 힘의 원천이요 육의 통로요 육의 수평 확장의 원천인 그 수치 곧 비거룩의 확대인 환도뼈를 아작 박살을 낸 이후에는 고자가 되고나니

광야가 비로소 자신의 처음자리인 에덴동산이요 천국임을 누리는 존재가 된 것이 바로 이스라엘이다.

맞다 이스라엘의 처음자리는 광야다.

즉 할례 다. (아브라함 언약, 믿음의 출발)

즉 발가벗김의 자리이다. 꼬추 끝을 짤라 버려서 수치를 제거하는 자리. 무화과 나뭇잎으로 가리운 그 위선을 홀라당 벗겨버리는, 구경꺼리가 된 자리가 이스라엘의 처음자리이다.

곧 세례다. 이 세례를 성령 시대에는 마음껏 훌라당 발가벗겨 버리는 종말을 펼치시겠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광야 곧 죽음 속에서 태어난 존재들이다. 그래서 죽음 조차도 묻지 않는 모래 속에서 태어난 자들이다.
물 속에서 태어난 존재다. 그래서 물 속에서도 죽지 않는다. 불 속에서 태어난 자들이다. 불 속에서 죽지 않는다. 칼(전쟁) 속에서 태어난 존재들이다. 그래서 칼에 의해서도 죽지 않는 자들이다. 그들의 처음자리가 바로 묵시 이기 때문이다. 역사가 아니기에 어떤 역사도 이스라엘(교회)를 해석할 길이 없다. 미래에서 땡기고 창세전에도 예정되었기에 해석 불가인 수수께끼 비밀의 존재이다.)

성전을 허물어 버려서 홀라당 발가벗겨 버린다.
그림자를 벗겨버리고 실상을 뒷걸음질 하여서 입혀 주신다.
여기에 그 뒷걸음질 해서 덮어주는 긍휼을 부각 시키고자
반드시 함과 가나안 같은 진노의 그릇들이 강퍅함으로써 동원되는 것이다. (무지개 언약)

자 그렇다면 왜 라헬은 부모로써 자식의 죽음으로 위로 받기를 거절 했으며
왜 이 구약의 예언이(예레미야31장) 이루어졌다고 기록하고 있는가?

아기 예수님이 죽이고자 얼떨결에 2살 즈음의 아기들이 죽임을 당하는 마치 모세의 이야기의 원판이 실행되고 있는 것이다.

아기 모세 이야기가 원판이 아니라. 그것은 그림자이고, 실상은 아기 예수님이다.

자 그렇기에 역사적으로만 알고 있던 그 당시의 아기 엄마들은 성경이야기로만 취급했던 그저 역사 이야기가

실상으로 자기들에게서 벌어지고 단지 자기와 상관이 없는 아기 예수님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영의 세계의 마귀들의 활약상을 그저 애굽군사로만 취급했던 그 역사적인 해석을
삭제 당함으로써 실제로 벌어지는 보이지 않는 악마 군대의 실상을
자기의 귀하디 귀한 자기 자식의 죽음을 통해서 보게 되는 것이다.

과거 역사의 아기 모세 때의 두 살 아기들의 죽음을 그저 안 되었구나 쯧쯧쯧 엄마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 라고 아무리 그 엄마 마음과 일치시킬려고 해고 그저 남의 이야기 밖에 될 수밖에 없는 미완료성을

주님은 역사를 삭제 시켜 버리고 그 모세 때의 상황을 실제 상황으로써 실상으로 펼쳐버리게 되니 그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가 될 줄 꿈에도 몰랐고 일방적으로 묵시가 쳐들어와서 당하게 되니 역사적인 시각은 모조리 삭제 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묵시가 쳐들어와서 역사를 삭제 시킴으로써 묵시의 세계에 되돌아 오게 하시는 것이다. 묵시가 부모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자기 자식이라는 역사적 존재를 삭제 당함으로써 묵시의 눈에 눈 띄게 하시는 실로암 소경을 고치듯이 말이다. 바리새인들이 말로만 본다고 우겼지만 정작 소경이였고, 주여 보기를 원합니다 라고 소경임을 아는 자가 빛의 세계와 어두움의 세계의 차이를 증거하게 되는 유일한 선지자가 되도록 하신 것이다. 처음자리로 돌아가자 라고 부모가 되는 것이다.
실로암 소경의 부모도 못 본 처음자리의 세계를 보여주는 정작 소경이 소경부모의 부모 노릇을 하도록 말이다.

그래서 묵시적인 사건이 역사 속에 비집고 쑤셔 들어올때에
그 흡집난 구멍 뚫혀진 자리의 흔적으로써 아기엄마들은 애곡하게 된다.

한나의 기도와 마리아의 기도가 그 애곡처럼
이제 묵시의 전달자 부모로써 광야를 요청한다. 영적인 전쟁을 요청한다.
감히 어디에 거짓부렁이가 설치냐고 거짓것들은 다 물러가게 해 달라고 거룩의 전쟁을 요청한다. 브로큰애로우 (폭격요청)

역사가 삭제 되지 않는 자리에서는 그 애곡은 나타날수가 없다.
오직 광야라는 묵시만이 그 피흘림의 자리에서만이 기도라는 부르짖임이 발생한다.

라헬은 그저 자기의 조그마한 영역에서
그저 자기 언니 레아와의 싸움인 누가 누가 남편의 사랑의 결실인 아이 놓기 싸움에서 이기느냐 라는 그 좁은 역사 영역의 시각을 못 벗어나고 죽었다.

그렇다고 라헬의 오해가 오해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야곱은 라헬 뿐이였고, 죽어서도 라헬 뿐이였다.
졌다고 생각한 것을 야곱이라는 처음자리에서 태어난 이스라엘이 믿음으로 승화 시키는 것이다.

누가 봐도 아기 예수님은 죽은자 취급하고자 모든 아기들을 죽였다. 그러나 죽지 않았다.
그 죽음 속에서 살아 났다. 모래 속에서 태어났다. 물 속에 태어났고, 불태움 속에서 태어난 다말과 같고, 무덤 속에서 일어난 더 이상 무덤이 없는 분이시다.

라헬의 사적인 의견인 역사적인 개인 해석은 삭제당해야만 했다.
그것을 야곱이 삭제 한다.

여자의 본능은 아기 낳기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고 남편에게 사랑받는 것에서 실패한 여자는 죽은 여자와 같다고 그 열매인 자식도 마찬가지 이다고, 그래서 아줌마가 되면 억척스럽게 그 순정파 여자인 그 아리따움이 사라지고, 보호본능 유발케 하는 아가씨 시절의 내숭은 다 사라지고, 그저 이기기 위해서 뭐든지 빼앗는 야곱보다 더 야곱적인 약탈자로 변모하게 된다. 여인천하 라는 정치물을 보면 오로지 자기자식을 우상의 자리인 왕 자리에 놓이게 할려고 그 자리에서 절대로 얕잡아 못보도록 권력에 권력을 다 끌어모아서 그래도 불안해서 모든 반대세력을 다 척결하는 가장 신랄한 즉흥적 처세술만이 자기 자식 살리는 유일한 길만을 추구하듯이

마귀의 2번째 시험인 그저 사랑받을 수 있는 길이라면 무슨 짖이든 마다 하지 않는 그 본능을 노리고 시험하는 기적 보여 달라 성전에서 뛰어 내려라 라는 너가 과연 편애 받은 아들인지 약속의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약속의 아들인지 보여달라 라는 그 본능에 사로잡힌

모든 여성의 이 본능에 (실제로 라헬의 자식은 레아의 자식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는 버림받는 자가 된다. 이것은 여자는 우찌 직감적으로 알았을까잉. 그래서 힘과 권력의 세계 속에 만약 들어가게 되는 그 중심인 태풍의 눈에 놓여지게 되면 여성은 이유없이 본능에 충실하게 된다. 무조건 자식에 올인하게 된다. 왜? 그 자식을 모두다 죽일려고 달려드는 힘의 세계로 해석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돈 권력 힘에 더욱더 눈 뜨게 된다. 그런 자신이 벗었다는 그 눈 뜸과 수치를 남자라는 존재는 머리로써 광야로 처음자리로 인도해야만 한다. 그것도 아무 무능하기 짝이 없는 지팡이 하나로 증거해야 한다. 오늘날 부모들은 무능하기 짝이 없는 아무것도 눈에 차지 않는 오직 말씀 하나로 자식에게 광야라는 처음자리로 인도하는 부모 노릇을 마치 예수님이 자기 백성 단 하나도 영접하지 않는 그 광야 속에서 인도하셨듯이 말이다.)

야곱은 진 것이 아니다 라고 그 사랑을 끝까지 보여주게 된다.
그 사랑이 뭔가? 약속이다. 이 약속을 전수 하는 것이다.이 처음자리를 전수하기 위해 부모와 남편과 자식이 있는 것이다. 삭제 시키기 위해서, 광야 라는 처음자리로 되돌리기 위해서
인간이 있기도 전인 상채로 회수 하기 위해서 말이다.

에게 에게 에게 그게 무슨 사랑이냐? 삭제와 철거와 심판과 소멸과 누락이 무슨 사랑이냐? 라고 철저하게 무능하게 보이는 무가치한 그 지팡이 이야기를 하는게 무슨 사랑이냐 라고 비아냥 거릴 수밖에 없지만

약속의 말씀만이 인간이 있기도 전에 창조주의 계획으로써 이미 완료된채로 사랑을 누리도록 펼치셨다는 그 마음이 옳았다는 것이다.

재산으로 확정 시키는 사랑도 아니고,
힘으로도 권세로도 책임 지는 사랑도 아닌.

오히려 누가 봐도 그것이 무슨 책임이고 사랑이냐 라는 그 무능하고 가치 없는
거들도 보도 않는 창조 때의 그 처음자리인 십자가가 사랑이다 라고 알려주는 것이 남자의 역할이요 부모의 역할이요 머리의 역할이다.

그리고 야곱은 죽었다가 살아난 죽음이 묻지 않는 요셉을 통해서 그 약속이 미래로서 완료된 채로 왔음을 보게 된다. 그 처음자리 광야가 곧 십자가가 옳았군요 라고 [없음]으로, [버린 돌]로 취급당했던 그 사랑이 진짜 참 사랑임을 목격하는 자로써 남편인 야곱은 라헬의 오해의 매듭을 풀게 한다. 그리고 라헬은 이스라엘이 본처이듯, 라헬이 본처임을 보여주는 철저하게 무능자의 자리에 놓여진 없음의 자리, 광야의 자리가 승리의 자리요 완료의 자리임을 보여준다. 죽은자 같으나 산자요, (고후 4:8, 개역)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고후 4:9, 개역)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고후 4:10, 개역)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후 4:11, 개역)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고후 4:12, 개역)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고후 4:13, 개역) 『기록한 바 내가 믿는 고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는 고로 또한 말하노라』

(고후 4:14, 개역)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니』
(고후 4:15, 개역) 『모든 것을 너희를 위하여 하는 것은 은혜가 많은 사람의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고후 4:16, 개역)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고후 4:17, 개역)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고후 4:18, 개역)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야곱은 그 투기에 그 속임수에 뛰어든다. 죄에 대한 전쟁에 질투로써 뛰어들게 된다.
마치 젖먹이를 통하여 전쟁을 하는 방식이다.

(시 8:2, 개역)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
(창 30:1, 개역)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 형을 투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나로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이것을 전수 하기 위해서 부모와 자식(남자와 여자, 남편과 아내)이라는 구조가 있고 그 구조는 부모가 있기도 전인 창세전의 처음자리 십자가 계획, 자식이 있기도 전인 창세전의 처음자리를 말하기 위한 누락이 될 것들이다. 이것 때문에 이스라엘로 세워진 것이고 없음에서 태어난 자들이다. 피조물이다.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의 언약 때문에 이 처음자리를 위해서 누락되고 삭제되어야할 실상을 드러내는 그림자로 작용하는 것이다.참이스라엘 참아내 참신부 참성전은 십자가의 처음자리를 증거하는 자이다. 십자가에서 삭제 되고 다시 십자가에서 새창조되는, 십자가 라는 광야 자리에서 누락당하는 십자가의 고통을 처음자리를 지워버림당하는 그 발가벗겨진 첫사랑을
뒷걸음질 하여서 그녀의 허물을 다 덮어주고도 남는 넉넉한 사랑으로 이미 완료된 사랑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래서 언니 레아가 이미 완료 된 것처럼 여겨지는 그 삭제당함 부끄러운 발가벗겨짐으로 철저하게 미완료 취급당한 여자로서의 무가치화 당하는 수모와 불임여성으로써의 여자 취급 못받는, 피조물 취급 못받는, 인간 취급 못 받는, 이스라엘 취급 못받는, 성도, 교회 취급 못 받는 그 여인이, 광야 취급 당한 그 십자가 저주를 짊어진 삭제된 자가
(비천한 여인의 대표, 예수님 족보 속의 다섯 여인 ~~~ 에게서, 그리고 한나의 기도 마리아의 기도가 바로 상대적인 세력에 의해 부르짖음(무능함을 호소하는 불쌍히 여겨달라는 기도)로 인해서 숨겨진 악의 세력을 들추어내는데 미끼로 작용이 된다.)

외부에서 주어진 믿음의 의 라는 선물로 인해

도리어 없는자 취급 당한 죽은자와 방불한 자가 일으켜 세움을 당하고
있다고 여겨서 산자 라고 우겼던 자는 다시는 못 일어 나도록 하신 것이다.

(무자한 여자가 아이를 많이 갖게 된다는 구절이 있음, 못 찾겠음.
그런데 실제로는 단 한 명 뿐인데 아브라함 아내 사라는 이삭 딸랑 한 명 뿐이고, 한 과부 한 문둥병자인데 그들을 이스라엘이라는 집단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것을 집단적인 이스라엘이라는 의미로 그 이스라엘이 복의 근원으로써 주변인을 심판과 긍휼의 기준이 되는 산자와 죽은자를 가르는 기준이 되는 것이다. 마치 아브라함이라는 복의 근원처럼, 이것이 움직이는 말씀을 담은 그릇이요 운동력이 있는 말씀 앞에서 모든 것들은 두 조각으로 쪼개지는 것이다.)

즉 라헬은 그녀가 오해한 것 조차 야곱은 덮어줌으로써 죽었어도 살아 있는 사랑이라는 말씀으로 인해 계시 곧 묵시의 도구로써 역사를 삭제 시키는데 라헬의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 그 모습 조차 말씀의 사건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다.

성도란 무슨 일을 하든 어디를 가든 묵시만을 드러내고, 그와 동시에 역사를 역사 이전의 처음자리인 묵시의 자리를 통해서 역사와 늘 충돌하도록 되어 있다.

죽음 조차도 사적인 죽음이 없고 철저하게 묵시를 드러내는 두 종류의 그릇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라헬의 죽음은 우리 모두의 인생을 묵시의 자리인 광야로 인도하고 있다.

역사 이전의 자리, 잉태라는 생산력을 가지기 전의 자리, 인간이라는 자아가 없었던 그 자리로 말이다. 라헬은 그래서 선지자로써 그 인생 하나 하나 조차도 묵시를 증거하는데에만 올인 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태어남과 죽으심과 결부 될 줄을 누가 알았으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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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잠깐 나눈 식사시간 동안의 대화를 글로써 적어 볼려고 하니
도리어 복잡하고 길게만 적게 되고 흐름이 끊겨지는 느낌이다.

논리적으로 적어보겠다는 심뽀가 더욱더 비논리가 되었다.

여기까지 그만 적고

나중에 다시 정리를 해보도록 하자

마침 이상규 집사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택배문제로 전화가 왔지만 대화는 어제 쓴 글 두 죽음에 대한 글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었다.

솔빈이 아빠가 큰 충격을 받아서 마침 궁금했었다.

다행이도 주님이 벌리신 사건임을 이제야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고 순하게 받아들인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 집사님과 위의 내용들을 말하면서 집사님의 글을 보고 느낌점과
인간 영웅의 죽음과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의 죽음을 통해서
다시금 묵시가 벌리는 그 처음자리 광야의 자리인 십자가에 대해서 감사함을 이상규 집사님과 함게 나눌수가 있었다. 말씀이 실제로 그 움직임이 다가왔을때에
우리의 모든 시선들이 말로만 피에 십자가에 눈이 가 있다고 말만 하지만
거기에 주님은 속지 않으시고 실상으로 모든 시선을 십자가의 피를 바라보도록 흥건히 우리의 전신을 피로 덮으신다.

그것을 젖먹이가 도리어 부모 노릇으로 하면서 광야로 인도한다.
이삭이 제물이 됨으로써 아브라함은 예수님을 비로소 바라 봤듯이

참 제물 되시는 그 예수님의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이
모든 허물을 말갛게 씻기는 참안식임을

그 죽은 아이가 광야로 처음자리로 인도해야할 부모의 역할을
도리어 역으로 해 주었다는 그 감사한 일에

비로소 우리의 어두운 눈을 뜨게 하시는 그 사랑 앞에

주의 이름이 옳았음을 고백 할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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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두사람을 다시 만나는 방법? 

2009-05-31 21:59:43 이름 : 이상규        

전직 대통령과  5살된 질녀가 비슷한 시기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같은지역 화장장을 쓰게 되면서 밀려서,
문경에서 장례를치뤘습니다.

수년전 아버지의 죽음과 이번조카의 죽음을통하여,
죽음,복음이 실제상황임을 깨닫게 됩니다.

죄의삯은사망이요, 그후에는심판이 있다는 말씀이
실시간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깨닫게됨니다.

인생이란?안개요. 잠시있다가
떨어지는 이슬임을 절실히 느끼게됨니다.

집착하고,나를위한,몸을 건사하기위한 삶이... 전원이꺼지면 사라지는 가상현실뿐임을 고백하게됩니다.
그리고,
단장의아픔속에,
이렇게,슬프고 또,미치도록 그리운이유가 ,
6년동안 내자식이요,내것인줄알았던 내 죄때문임을고백합니다.

오히려,위에있는솔빈이가,,,,약한육신으로힘들어 하는우리를,,, 은혜밖으로,나갈까,
안타까워 할수도 있으니,

오히려 위로 받아야 할사람은,우리라고 이상하고 희한한소리들 서로 나눕니다.
이런 고백은 솔빈이가 살아난것 보다 더 큰
기적 입니다.

물론,저도 죄때문에 죽겠지요.
죽으면,누구와 함께 있을까요?
전직 대통령? 혹은 질녀 솔빈이?

나를 부인하고,행위가 아닌,십자가 은혜로 만 구원받았음을 끝까지고백케  해주셔서,
자비와 긍휼안에 잡아주시면 솔빈이와함께,,,,
대통령하면서,약자들과 민주화를위해살면서 살맛나는
나중심의 사람중심의 살맛나는 세상을 만들기위해 수고한 일들이,
예수님을 죽인 죄인줄 몰랐다면,
전직대통령을 만나겠지요.  그리고,,,,
솔빈이를만나서 "이게얼마 만이냐",고 반갑게 인사하면,
여기는 천년이 하루같고 하루가천년같은 곳이예요.
얼마만이냐는 인사는 여기서는 하는곳이아니예요
그냥 주님을 기뻐하고,감사하고 찬송하고 있었어요.라고 말하겠지요.

지금,
나만생각하는 ,,연약한육신속에
가끔씩,사랑과 은혜의 주님께기뻐하며 감사하는고백을 하게 하셔서,
천국생활을 이 땅에서 맛보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러고보니,좋은일슬픈일 모든 일들이 은혜뿐입니다.

맞습니다...하나님은 자기가 사랑하시는자에게는 모든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가십니다. 
(솔빈이를 그리워 부러워 하며.....)
 
이근호  09-06-01 08:34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전 3:4) 이것이 인생입니다. 실컷 우십시오. 울고 또 울고 뜨 울고 뚜 우십시오. 그리고 여유와 안심을 가지고 우십시오. 결국은 성도의 끝이란 웃고, 또 웃고 실컷 웃고, 또 감격해서 웃는 영원한 날들만 있을 뿐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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