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제사장의 한계 (모세의 탈락과 멜기세덱 반차)
    

유다혈통을 선택하신 이유
 
2009-10-12 17:49:21  이름 : 이성희


예수님의 혈통이
르우벤도 아니고 요셉도 아닌
유다의 혈통을 통해서 오신 이유가 있을 까요??

단순히 하나님의 계획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혹시나 성경적으로 어떤 구체적인 언급이 있는지요??

전 못찾겠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의 생각은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건강하세요...^^


이근호  09-10-13 08:22  
 
멜기세덱과 관련있습니다. 유다와 레위 지파가 12지파에서 주도권을 갖게 된다는 예언을 품고 야곱(=이스라엘)은 죽게 됩니다. 그 뒤에 나오는 모세(=레위지파)와 그 집단은 이 예언의 위력을 보여주는 역할 때문에 지구상에 등장해야 했습니다. 레위지파가 이스라엘을 거룩되게 움직이게 하는 엔진 부분(=제사기능)을 맡게 되었는데 이는 과연 '인간이 과연 율법을 준수할 수 있을까?'를 약속의 땅(=가나안)을 통해 실시하므로서 '약속의 땅'이 내뿜는 원래의 약속(=언약)이 역사 위에 범람하는 계기가 됩니다. 레위지파의 실패는 곧 '아무도 인간의 능력으로 약속의 땅에서 살만한 가치가 없음'이 부각됩니다. 인간의 실패는 곧 하나님의 성공입니다. 이 성공을 이 땅에 보여주는 것이 다윗 언약의 취지며 이 다윗언약에 준해서 하나님은 인간의 혈통의 흐름을 타고 '다윗의 자손'이라는 이름이 메시아가 등장합니다. 이는 하늘의 혈통인 멜기세덱이라는 전선이 땅에 축쳐저서 이 땅에서 감전사고(십자가)를 이르키는 식으로 '약속의 땅=천국'을 성취하시려는 겁니다. 이로서 아담에 속한 인간 중에서 미리 감전사한 자들만이 약속의 위력을 경험한 다윗 계열의 '약속된 반열'에 해당되는 자들입니다.
 

        
그러면 모세의 탈락 ? 

2009-10-13 08:59:22   이름 : 우리교회

 
그렇다면 모세의 광야에서의 탈락도 같은 의미인가요?

율법의 대표자 로써 모세가 화를 냄이 마치 율법을 지키면 지킬수록 완악해지는 인간의 본성을 모세를 통해서 표출시킨것입니까?
물론 모세의 역할은 여호수아가 계속 하지만 말입니다.

모세(레위지파)는 율법의 성향을 그대로 보여주고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죄사함을 받는 것은 다윗이 율법에 범죄함을 통하여서 보여주는 겁니까?

모세에 대한 탈락이 결국 멜기세덱을 보여주기 위한 것인지 궁금하네요?


이근호  09-10-13 09:48 
  
그렇습니다. 우리의 어머니는 하늘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예루살렘(=다윗의 성)이라고 말하지요.(갈 4:26-27)
 

신앙생활이 어려운가?

2009-10-13 09:45:29  이름 : 이근호


성경이 어려운가? 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이해하기가 어려운가 아니면 실천하기가 어려운가? 한 예를 들어보면, 주기도문에 이런 말씀이 나온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마 6:11) 일단 어렵다는 쪽의 견해를 들어본다.


1. 어렵다는 견해

사람들의 상식에는 일용할 양식은 본인의 노동 여하에 따라서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으로 안다. 그렇다면 일용할 양식에 대한 바탕은, 본인이 얼마나 노동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 성경에서 “일하기 싫거든 먹지로 말라”(살후 3:10)고 되어 있다. 이는 일용할 양식을 얻어 위해 돈이 필요하고 돈을 벌기 위해 노동을 해야 된다는 말로 이해된다.

그런데 문제는, 돈을 벌 수 있는 조건은 성도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 어두운 세상 쪽에서 결정한다는데 있다. 즉 ‘내가 하고 싶은 살면 돈이 들어온다’가 아니라 ‘이 세상에 제시하는 돈 버는 조건에 부합될 경우에만 돈이 들어온다’이다. 예술 한답시고, 전업 화가, 전업 시인,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서면 거의 백수가 되는 길이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세상이 요구하는 ‘돈 버는 조건’을 고집스럽게 거부하고서 들어선 길이 바로 예술가의 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같은 예술가라도 어느 누가 돈을 많이 벌었다는 소리를 들으면 ‘세상과 타협했다’는 비난도 같이 듣기 마련이다.

이로서 이 세상에서 돈을 벌어서 일용할 양식을 취득하려면 세상에 부합되는 인간상으로 다듬어져야 하고 늘 조립되어야 하는 것이다. 돈 버는 지장되고 장애가 되는 요인들을 하나 둘씩 삭제시켜 나갈 때만 돈이 들어온다. 무작정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내가 열심히 한다고 돈이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돈이 안 들어오면 일용할 양식도 뭐도 없다.

그렇다면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거나 기댈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겸하여 연구해서 그 말씀에 맞추어 살아야 기도하는 것도 효험이 있을 것인데, 이렇게 되면 말씀을 소홀히 할 수 없게 되고 늘 말씀과 가까이 해야 하는 말이 된다. 그런데 이 ‘말씀 가까이’ 생활태도는 이 어두운 세상에서 요구하는 ‘돈 버는 요건’에 해당되지를 않는다. 오히려 방해가 된다. 즉 세상에서 수상하게 보게 된다. 맡은 업무에는 충실하지 않고 개인적인 종교 활동에 광신도처럼 빠져있다는 오해를 들을 가능성이 많다. 이 세상은 결코 ‘기도하고 말씀을 가까이하면 돈 줄게’가 통하는 세상이 아니다. 이런 세상을 만들려면 따로 폐쇄적인 ‘신앙공동체’를 만들어서 같은 의식이 있는 자들끼리만 따로 모여, 모든 사유재산과 가정까지 이 집단의 유지를 위헌 다 던져 넣어야 한다. 그래서 자립적인 생존 방법을 따로 구상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그냥 일반 세상 속의 사람으로 살려면 신앙이 있어도 없는 듯이 해야 한다. 쉬는 날이면 무조건 직장 선배가 요구하는 대로 친목을 도모하는 일에 참석을 해야 한다. 거기서 직장해서 돌아가는 일의 성격과 정보와 흐름을 익힌다. 일의 흐름을 파악해놓아야 직장 일에 손발이 맞는다. 직장인이란 마치 부속품 하나하나와 같아서 자신이 맡은 업무에 차질이 생기면 본의 아니게 타인에게 피해를 주게 된다. 그 타인들에게는 각자 딸린 식솔들이 집에서 살림한다.

따라서 직장업무에 서툴면 결국은 주위 동료들의 가족들까지 마음에 상처를 주고 생계까지 위협하게 된다. 돈이 되는 일을 따내면 그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해 직장인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야 한다. 통일교든, 여호와 증인이든, 불교신자든, 무교자들, 기독교교인이 되었던 그런 것은 따지지도 묻지도 말아야 한다. 업무의 달인이 되는 것이 최고다. 중요한 것은 따 낸 업무를 원활하게 수행해서 주문자나 소비자를 만족시킬 때, 그 다음 생계를 위해 주문을 받을 수 있는 신용도가 증강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인생을 사는 것이다. 주위에서 “너 필요 없어”라고 내칠 때까지…

따라서 하나님을 버리지 아니하면 일용할 양식이고 뭐고 없는 판에, 일용할 양식을 하나님보고 달라고 기도하라니 참으로 이것이 무슨 뜻인지 난감하기 짝이 없다.


2. 쉽다는 견해

‘일용한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주위 모든 상황이 나에게 돈이 들어오게 하는 일들로 배당이 되고 배치되고 할당되게 해달라는 기도를 뜻한다. 만약에 이런 기도에 소홀이 하면 주변 일들이 꼬여서 나에게 돈이 들어오기는커녕 현재 있는 돈까지 마저 빠져나가는 수가 생긴다. 이것은 평소에 하나님께서만 나에게 ‘생존의 조건’을 지켜줄 수 있다는 신앙이 없기에 교만스러운 생활을 한 참혹한 결과다. 즉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평소에 기도하지 않는 교만이 자신의 생계까지 위험한 지경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따라서 “오늘도 좋은 일(=돈이 생기는 일)만 생기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는 것이 신앙인으로 뭐가 어려운가? 세상만사가 하나님 손에 달렸음을 믿는다면, 그 앞에서 겸손히 살면 하나님께서 일용할 양식 정도는 얼마든지 제공해주신다.


3. 불가능하다는 견해

‘불가능하다’는 말은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아예 없다’는 말이 아니라 ‘신앙생활의 주체가 인간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만약에 신앙생활의 주체가 인간이라면, 인간은 뭐든지 자기 쪽으로 사유화시키고 소유화시키고 끌어당겨 ‘나만의 것’으로 전환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그 인간은 그 자신을 잊지도 못할뿐더러(고후 12:2) 자기 행함을 의지하고(엡 2:9/롬 9:320) 자기 의를 내세우게 되고(롬 10:2) 자기를 미워하지를 못하고(요 12:25) 자기 영광을 고려하게 되고(요 12:43) 결국 섬김의 대상이 되고(롬 16:18) 자기 부인이 안 되니(마 16:24) 결국 십자가의 원수(빌 3:18)가 되어 살게 된다.

이들은 자기 소유의 신앙이 따로 있어 자기만이 즐길 수 있는 요건이 성립된다고 말한다. 즉 신앙이 있어야 그 신앙을 매개로 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좋은 것들을 풍성이 누릴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개혁주의 신학을 외치는 자들의 주장이다. 쉽게 ‘내 것’이 있음으로 인하여 즐겁고 행복한데 하나님이 ‘내 것’으로 주시겠다는 것까지 마다해서 신앙생활을 핍폐스럽게 할 필요가 뭐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들은 신앙의 용도가 자기만의 것이 생겼음으로 인해 자족하는 삶이라고 보고 있다. 과연 그럴까? 마가복음 16:14-15에 보면,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사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되어 있다.

즉 신앙의 용도는 오로지 ‘나만의 소유’로 전환된 것을 자랑하라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예수님의 것이 될 수밖에 없는 그 예수님의 행하심과 누구심을 증거하는데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성도의 신앙 안에서 지속적으로 ‘나만의 것’과 ‘예수님의 소유된 것’ 사이에 투쟁이 일어나게 된다. 즉 십자가의 능력이 ‘나만의 것’을 고집하는 이 정과 욕심을 늘 못 박게 되는 성령의 역사(役事)가 가동된다.(갈 5:24-25)

성도는 이로서 십자가 복음의 자체적인 능력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법이 없게 된다. 복음 전파와 무관련한 일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이라고 규정될 수가 없고, 성도의 신앙 없이 성도에게 일어나는 ‘하나님의 일’도 없다. 이로서 성도는 계속해서 ‘예수님의 것, 예수님의 소유로서 살아가게 된다.(고전 6:18-20/3:23)

즉 “어떻게 하면 내가 밥 먹고 살 수 있겠습니까?”가 아니라 “왜 저는 예수님의 것으로 살아가고 있는 중입니까?”가 관권이다. 이렇게 되면 ‘일용할 양식’이란 말씀, 즉 복음을 위한 ‘일용할 양식’이 된다. 즉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비로소 살 수 있는 것이다. 떡을 얻기 위해 떡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위하여 떡이 주어질 때, 그 떡은 단순한 떡이 아니라 복음 안에서 말씀이 된다.

돈도 이와 마찬가지다. 돈을 얻기 위해 돈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살아있음을 증거하기 위해 돈이 주어진 것이다. 그래서 성도는 자신을 위해 쓰는 돈도 복음을 위해 쓰이는 돈이 된다.

이러한 경우는 불가능한데 그 이유가 우리 내부에서 계속해서 ‘나만의 것’으로 고정되고 싶어 하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이 이생의 자랑거리가 들 끊고 있다. 인간은 매일 화산 위에 거주한다. 왜냐하면 그 정과 욕심은 지옥의 불이 되어 내부에서 타오르기 때문이다. 이것을 성령께서는 십자가의 위력으로 복음 증거로 돌린다.

따라서 성도의 삶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엄연히 존재한다.

 

강구만  09-10-13 12:50  
 
사람이 평생동안 열심히 자신을 위해 살아온걸 죄라고 하고, 그 죄의 대가, 수고비로 받는 것이 사망이라고 합니다. 사실 죄짓는 일 밖엔 할수있는게 없지요 인간이란게. 반면에 이런 인생들 중에 공짜로(수고비가 아닌) 하나님의 선물을 받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아무 한 일 없이,공로없이, 경건하지도 않는데 하나님이 선물을 주시는데 그선물이 영생이라는 겁니다. (롬6:23)  이런 불공평한 처사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모든게 나에게서 출발하는 사람에겐 지옥에서 조차 이빨 갈 일 아닙니까? 그런데 그 선물 주신 이유, 조건이 한가지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안 입니다. 예수님의 것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확정된 사람 입니다. 먼저 계신 예수님과 아버지의 약속대로 대신 죽으심에 선택된 성도(고후5:15) 예수님과 함께 같이 죽은자 입니다. 모든 사람의 입을 막게 하는 십자가에서 피흘리신 분의 '선택' 입니다. 과연 이러하다면 예수님의 것이 된 성도에게 스스로 신앙할 행위도, 분담할 하나님의 일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선물'로 영생을 주신분이 인생에 기대할 것이 있겠습니까? 다만 이땅에서 예수님이 사시는 인생만 있습니다. '사람도 아니요''돈 도 아니요''교회도 아니요' '신학도 아니요''세상도 아니요'"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 주님 이십니다"라고 증언하는 고난만 있습니다. 본의 아니게 은혜로 사는 인생, 힘이 될만한 것은 다 빼앗긴 인생, 세상에서는 생존 부적격자요, 날마다 죽음에 넘기우는 하나님의 생활 보호 대상자 입니다. 날마다 감사가 있는 진짜 축복 입니다. (한국말이 어려워서 그런지 대충 읽던 말씀이 가끔은 펼쳐지고 열려져서 보여질때가 있네요.아부지 밖엔 기댈데가 없을때 아주 가끔씩)
 

이근호  09-10-13 13:29  
 
할당된 삶의 자리가 나의 자리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선하신 예수님의 자리인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기름이 되어 물 속에 사는 신세가 됩니다.
 

이미아  09-10-13 15:26 
  
"불가능성" 이 말씀보다 성도를 자유롭게 하는 말씀도 없다.
그 어떤 태교보다도 복음의 설교를 듣는 것 만큼 좋은 태교도 없다는 명언을 남긴
선덕여왕 화이팅!!!
 

이선덕  09-10-13 15:46    

예수님과의 관계가 자기와는 상관없는  삶인줄 알고 살아왔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자신의 욕망대로 살아왔다 누군가가 예수님 얘기만 하면 고개를 돌리고 싶었다  그런데 이럴수가... 십자가 능력이 덮치게 되니 주님께서 받으신 저주가 자신의 죄땜에, 허물땜에 받으셨다는걸 그현장에서 알게 하신다 주님은 엄연히 살아계셨다는 것을...이사야 (53장)의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진것이다  빼도 박도 못한다 허구가 아니었다 그 현장만이 현실이구 나머지는 다 가짜였다  그동안 자신이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왔음을...주님과 아무상관 없는 자가 아니었다 자신이 바로 가해자였구 주님이 억울한 피해자였다 그토록 싫어버린바 되었던 주님이 진정 생명의 은인이었음을.... 저주받아 마땅한 죄인의 입에서 나올고백은 나의 나된것은 전적인 하나님 은혜라 (고전 15:10)사도바울의 고백이 자신의 고백이 될줄이야 꿈에서 조차 상상도 못한 일이다  거기에 자신의 공로는 일적 허용이 안된다  주께로 왔다가 주께로 돌아가는 통로속에 성도는 그저 도구로 쓰여질 뿐이다 주님의 일하심이 참으로 빈틈이 없다 

신앙생활? 자신이 하는것이 아니다 날마다 주님의 주시는 은혜대로 그저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어려울것도 쉬울것도 없다  자신이 주체가 아니기에... 그저 살려주는 은혜대로 십자가만 증거되길...

늦었지만 위에 댓글을 단
미아 언니 결혼축하해 ~~미아 언니두 힘내!
 

이근호  09-10-13 16:07    

이선덕 성도님의 고백의 값어치는 온 우주보다 크다. 하나님의 예술 작품이니까. 왜 우리교회에서는 이런 고백이 안 나올까!
 
 
이미아  09-10-13 17:07  
 
온 우주보다 큰 고백들로 말미암아 세상은 감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참으로 성도마저도 감당할 수 없으니 말입니다...십자가의 부활의 능력이 우리를 잡아 땡기고 있으니!!!
"돌로 치는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히11:37-38)
 
 
관리자  09-10-13 22:05   
 
꼭 씨 뿌리는 비유 를 보는듯 합니다. 부재성으로서 증거 되는 비유 말이죠.

개혁주의는 좋은 땅이 되자 라고 구호를 외쳐서 좋은 땅의 조건을 갖추어서 열매 맺자는 방식인데
(오히려 그런 사고방식이 가시떨기 길가 돌짝밭에 뿌려진 씨앗으로서 그 땅의 숨어있는 속성을 드러낸것이겠죠)

그러나 사실상 좋은 땅은 원인 없는 결과로서 무조건적인 일방적으로 열매 맺도록 되어 있는 처음부터의 빈터(머리를 보여주는 예루살렘 성 처럼)였음을 보여주는 겁니다.

광야(빈터)에서 바로 처음부터 좋은 땅(머리)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차이성)
의도적으로 가시밭과 돌짝밭과 길가의 속성을 지닌 사람들이 들러리로 동원되었어야만 한 겁니다.

(마 22:14, 개역)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마 15:13,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심은 것마다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마치 유다지파는 처음부터 좋은 땅임을 일방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멜기세덱 반차)
레위지파는 처음부터 저절로 맺을 수 없는 세가지 땅의 속성을 보여주듯이 (아론의 반차)

에루살렘 성이란 바로 이미 머리(하늘의 어머니)로써 결정난 좋은 땅인 저절로 열매를 일방적으로 30배 60배 100배의 잉여세계인 빈터인 십자가의 사랑이 완성되는 곳인데

인간들은 그 예루살렘 성을 도리어 자기의 선악으로 먹음직 보암직 지혜롭게 탐스러운 것들로만 가득 채우는 오늘날 교회에 집착하는 자들과 같은 모습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런 인간의 한계성을 이미 머리가 결정난 이상 그 빈터에 아무리 인간들이 덮썩 물고 까불어 대어도 탈락과 누락의 방식으로 좋은 땅임이 빈터로써 증명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바로 그런 복음의 일에 이미 머리가 결정된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예루살렘을 증명하는냥 씨뿌리는 비유를 증명하는냥 저절로 열매맺을 수 밖에 없는
원인 없는 결과의 우발성(은혜의 선물) 존재입니다.

계집종의 아들이 아닌, 자유자의 아들로써
아무리 잉태치 못하고 죽은 태와 같고 죽은자와 같을지라도 이미 머리가 결정된 무조건 열매맺을수 밖에 없는 약속의 세계이고

아무리 순풍 순풍 자손이 억수로 많아도 이미 죽은 육만 퍼트리는 가시밭 돌짝밭 길가에 뿌려진 씨앗 이었음이

바로 계집종의 육체를 따라 난 육의(남자) 통로가 아닌
자유하는 여자의 (할례) 자녀인 믿음의 자녀 곧 이삭과 같은 존재임으로 무조건 열매 맺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양식? 육의 퍼짐(증식)이냐 (육의 소욕)
      영(말씀)의 퍼짐이냐 (영의 소욕)

(갈 5:17, 개역)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두 여자 곧 두 언약처럼, 두 소욕의 세계를 증명하기 위해 동원되는
토기장이의 거치는 반석 인 십자가 창조 (참된 양식 주님의 살과 피) 완성에 있는 겁니다.

(롬 9:13, 개역)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롬 9:14, 개역)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롬 9:15, 개역)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롬 9:16, 개역)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롬 9:17, 개역)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롬 9:18, 개역)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롬 9:19, 개역)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롬 9:20, 개역)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롬 9:21, 개역)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롬 9:22, 개역)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롬 9:23, 개역)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롬 9:24, 개역)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롬 9:25, 개역)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롬 9:26, 개역)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9:27, 개역)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롬 9:28, 개역)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
(롬 9:29, 개역)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시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롬 9:30, 개역)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롬 9:31, 개역)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롬 9:32, 개역)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롬 9:33, 개역)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Posted by 김 대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