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보다 더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것이 없다.

역사란 무엇일까?
그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들은 과연 옳은 것일까?

적어도 다수의 검증을 거쳤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면 다수의 검증을 거치면 다 옳을 것일까?

그 다수가 과연 객관성을 보장해 주는 것일까?
아니면 그 다수성이라는 것에 혹 하게 만드는 미혹성을 더 깊게 해 주는 것일까?

알고 보면 다수란 없다. 객관적인것도 없다.
하나 뿐이다.

실체는 하나 뿐이다.

예수님이냐 마귀냐 라는 문제이다.

예수님의 그림자가 길게 쭉 뻗은 것이 144000명이다. 결국 그리스도의 몸은 14만 4천이라는 다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 다. 사적인 숫자로써 14만 4천에 속할 수도 없고 그 14만 4천을 개인이 따 올수도 없다. 그 자체로 하나 다. 그림자의 한 부분을 따올수 없듯이, 몸을 따로 사적으로 어느 부분을 차지 할 수 없다. 구성 자체도 사적인 견해는 무시 당하기에 오히려 이 한 몸은 개인의 육인 몸을 무시하는 방식이다. 누락이다.
(14만 4천 주님의 자녀의 충만성 잉여성 남은자의 넉넉함 동서남북의 전쟁 군사의 배치)

마귀의 그림자 또한 길게 쭉은 뻗은 것이 666 이라는 짐승의 숫자이다. 짐승이란 객관성을 확보한 자들이다. 역사성을 종교화 했고, 다수화 했고, 정치화 한 실적의 산물이다. 어떤 누군가가 그 역사의 주관적 주장을 펼치면 그 역사성(시간과 공간)은 자신의 실체인 악마성을 주장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가인의 안색의 변함이다. 법(시간과 공간이 가미된)의 실천은 더더욱 완악함과 강퍅성을 추구한다.

마치 한참 피라미드라는 신의 성전을 짖는데 열심일때에 그 공간과 시간의 역사성은 강퍅함을 더해 간다. 헤롯성전이 화려하면 할수록 더 완악한 유대인의 모습이 가인의 안색변함으로 드러난다. 여기서 비로소 상대적인 제사인 아벨의 제사가 구체화 된다. 더 나은 제사이다. 또 솔로몬의 성전이 화려하면 할수록 비로소 인간의 모든 욕망이 그 성전에 집중되고 반드시 그 성전 속에 인간의 역사의 깃대를 꼿게 된다. 우상이 거룩한 곳에 자리를 차지하는 순간이다. 마치 바리새인이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자신의 십의 1조를 드리고 경건한 삶을 실천한 자신의 성화를 행하면 행할수록 그 행동들은 반드시 거룩한 시간인 이레와 거룩한 장소라는 성전에서 공로를 쌓아두기 마련인데 바로 여기서 인간의 역사(시간과 공간)은 구체화 된다. 결국 성전에서 비로소 악마의 그림자가 구체화 되고 그 그림자의 아비인 마귀가 성전을 통해서 드러난다.

성전이란 처음부터 없었던 빈터였다. 그런데 인간들은 그 빈터에 뭔가를 자꾸 꾸역 꾸역 채운다. 뭔가 거룩하고 깨끗하고 건전하고 아름답고 열심적인 노력인 행함을 채운다. 그런데 성전이란 처음부터 더 이상 채울 것이 없는 완료 그 자체였다. 그 완료인 기업무르는 모습을 고아 과부 나그네인 처음자리를 통해서 더욱더 증식케 한다. 그렇다면 성전이야 말로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머리 되신 기업무를자인 고엘을 보여주기 위해서 고아 과부 나그네의 처음자리를 늘 보여주도록 되어 있다. 완료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세리다. 죄인 중의 괴수 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런 묵시적인 시각이 아닌, 역사적인 시각에서 도리어 성전에서 탈락 시켜야만 하는 자가 매국노인 세리가 되기에 세리가 상대적인 자신의 의를 높이는데 더욱더 좋은 매개체로 보이는 것이다.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복으로 본 것이다. 역사적 시각이다. 얼마나 주관적이고 정치적이고 종교적이고 사적인 복인가? 그것이 저주였다.

그러나 성전의 머리가 찾는 머리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신의 몸은 가장 그리스도의 몸 다운 자들이 바로 세리와 같은 자이다.

(눅 18:9, 개역)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눅 18:10, 개역)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눅 18:11, 개역)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눅 18:12, 개역)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눅 18:13, 개역)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눅 18:14,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창녀와 세리가 먼저 천국에 간다. 그것도 가장 거룩한 성전 종사자들을 들으랍시고 거룩한 시간과 거룩한 공간과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자인 창녀와 세리를 가장 거룩한 공간인 성전과 거룩한 시간을 지키는 자들을 겨냥해서 외친다. 죽을려고 환장한 짓이다. 죽을려고? 시간이 사라지게 되고 몸이란 공간이 폐허가 되는 소리만 골라서 한 것이다. 도통 역사와 어울리지 않는 소리만 외친다. 시간과 공간이 있어야 되지 않는가? 왜 그런데 시간과 공간을 없애버리는 소리만 할 까? 종말이기 때문이다.

죽은 태 라는 공간 기업을 잇는 아버지와 아들의 연결 고리가 되는 시간인 족보가 없는 자가 도리어 종말에서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머리를 증거하기 위해 동원이 된다.

더더욱 가짜 머리와 가짜 몸의 차이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 상대적인 모습이다.

마치 전혀 메시아 같지도 않은 어느 누구도 알아 볼수 없는 역사에서 포착 할수 없는 모습인 이사야 53장의 모습인 메시아의 모습처럼

그 그리스도의 몸 조차도 도통 그리스도의 몸으로 여김을 받을 자가 될 수 없는 자들만 골라 골라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구성 된다. 모두가 반발 할 수 없는 자들인 창녀와 세리다.

(마 21:17, 개역) 『그들을 떠나 성 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시니라』
(마 21:18, 개역)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마 21:19, 개역)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얻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마 21:20, 개역)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가로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마 21:21,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
(마 21:22, 개역)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마 21:23, 개역)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가로되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
(마 21:24,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마 21:25, 개역) 『요한의 침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마 21:26, 개역)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 하여』
(마 21:27, 개역) 『예수께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마 21:28, 개역)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마 21:29, 개역)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마 21:30, 개역)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마 21:31, 개역)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마 21:32, 개역)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저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기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종시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종말과 역사의 대비된 모습으로써 차이성을 드러내는 존재가 그리스도의 몸 곧 머리를 증거하기 위해 늘 빈터의 모습으로 십자가가 잉태한 잉여물이다.


 

Posted by 김 대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