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 뿌리는 비유와 두 여자 언약 비유

(마 13장 / 갈 4:19-31, 갈 5장)


천국은 예수님의 완료를 다시 한번더 확증시켜주는 증거가 된다.

이 완료성이 증식으로써 명확하게 드러나면 날수록 어두움 또한 그 어두움의 실체가 명확해 진다.

그래서 이 완료란 인간에게서는 더 이상 완료가 아닌 인간 자신들의 숙제인냥 정복의 대상이 되고 만다. (다스리고 정복하고 충만하라 라는 말씀이 선악이 된다.)

마치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하나님과 같이 된 양상으로써
천국은 그런 선악을 아는 인간들에게 먹음직 보암직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야만 인식이 되는 소유물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예수님의 완료는 미흡하고 미완료적인 것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증거되고
그런 미완료와의 격리와 분리로써 증거 된다.

예수님의 완료를 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미완료를 대립시켜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 완료는 30배 60배 100배로 표현 되었다. 즉 열매다.

잉여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씨앗 그 자체의 능력으로
저절로 열매 맺게 된다.

그러나 미완료는 처음에는 열매 맺는 듯이 보이는 초기 현상들이 나타나지만
가시와 돌과 마귀가 끌어 당기는 배경의 환경으로 인해서 도저히 불가능한 열매임을 보여주게 된다. 아무리 해도 열매가 될 수 없는 죽은것들을 배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이 종말이다.

이 얼마나 어불성설인가? 철저한 모순이다. 같은 조건 같은 환경 같은 배경에서의 씨앗이 아니라. 이미 불공평하게 설정된 환경에서 [없는데 그 있는 것 까지 빼앗긴다]라는 말씀을 증명하는 방식으로, 도리어 씨앗이 뿌려지니 (천국 또는 언약 곧 말씀) 말씀이 그 땅의 실체를 밝혀내게 되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두 여자다.

이 두 여자라고 표현함으로써 일단 남성은 배제되었다. 즉 수고하는 해산을 못하는 자이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해산하는 고통의 의미를 아는 자가 여자에 해당된다.

자 그렇다면 애굽의 바로왕 계열은 배재 된다.

아니 이미 배재 되었음을 말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내부로 들어온다
더더욱 약속의 자녀를 낳은 하늘의 어머니를 말하기 위한 들러리 로써 맡은바 역할을 충실히 해 주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출애굽을 한 후에 두 여자라는 의미가 구체화 된다.

과연 누가 제대로 된 약속의 자녀를 배태하는 여자이고
종의 자녀를 배태하는 자인지

청함을 받은 자와 택함을 받은자가 이 약속을 말하기 위해서 동원되는 것이다.
 
이 두 언약의 비유는 십자가 마을에서 논쟁이 되었고 두 패로 나누어 지는 양상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갈라디아서 논쟁 = 두 믿음 이다. 인간 믿음도 가미냐? 주의 믿음으로 충분하냐?)

최근 우리교회에서도 벌어진 실제 상황이다.(두 십자가 논쟁 = 십자가를 믿는 인간 행함의 가미냐? 십자가 자체에서 행함이 나오느냐?)

이 두 사건에서 나타난 양상은 결국 한 목소리로 결론 내려진다.

인간 무시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데 어쪄랴? 복음은 인간 무시하면서 증거 된다. 그것이 바로 스캔들인 부정함이다.

반드시 부정함으로써만 증거하겠다는 것이 언약이다.

평상시 자신들이 복음을 안답시고 또 믿음을 행한답시고 마음껏 남을 무시할때는 언제이고
정작 복음이 그 당사자를 누락 시키게 되니 완악함이 드러나는 것이다.

차라리 믿지를 않았다면 행하지 않았다는 긍휼을 알았을 텐데
믿었다고 행했다고 자부하다 보니 복음의 거치는 돌에 걸려 들었다.
자신들이 거치는 돌이 뭔지도 모르면서 남에게 던졌다는 것이다.

즉 실상이다는 것이다.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창조다 곧 소멸로써 증거 된다. 고정됨이 없이 계속적으로 누락을 통해서 머리를 구체화 시킨다.

머리만 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모든 인간은 처음자리로써 탈락 당해도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 탈락에 대한 것이 머리를 예정함에 있어서 십자가 라는 자기부인의 예정을 드러내도록 되어 있는 사랑이다. 그런데 이 탈락에 대한 반발이 바로 완악함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십자가에 대한 우리 자신부터 시작해서 모든 인간들의 완악함을 매일 매일 보아 왔다. 또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왜 완악함이 십자가 앞에서 구체화 될까?

어리석은 지혜 앞에서 자신의 무기력함을 인정하기 싫어서 이다. 그 자아가 바로 주님이 만든적이 없는 선악이라는 자아다.

선악이라는 자아는 가시밭과 돌밭과 길가에 찾아온 마귀를 이길 수 없다.
원래부터 이길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그것을 알려주는 것이 어리석은 지혜 이다.

그 어리석은 지혜가 마치 무능한 모습으로 불임여성으로 온다.
아들을 낳을 수 없는 불가능한 태이기에 죽어 저주 받은 태이다.
실패한 태이다.

그 실패한 태를 보고 자신의 건강한 태를 저주 받은 태라고 볼 수 있을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남의 이야기다. 그 남이 결국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죽은 태이다.

더더욱 그것을 확정 짖는 증식적인 행동이 십자가 앞에서의 완악함의 증폭이다.

십자가에 매 달아 죽이는 것이다.

이 육의 마음이 제대로 다말의 태에 걸려들었다. 부정한 물증을 제대로 다말은 자신의 태에 담아버렸다.

예수님도 그러했다.

3가지 거룩하고 깨끗하다는 법으로 예수님의 죄목을 삼아서 물증으로 삼았던 것이
도리어 예수님의 육체에 담게 될 원망이 되는 것이다.

그 죄 곧 원수성을 담아야 사랑이 구체화 된다.

왜 선악과를 따먹도록 내버려 두었냐 라고 원망들을 많이 한다.

그 원망을 예수님은 자신의 신체에 담아버린다.

그제서야 입이 다물어 지고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케 된다.

그 원망의 질문에 확실한 사랑의 증거를 물증을 보여 줬기 때문에 어떤 누구도 힐문할 수 없도록 말이다.

그렇다고 마귀가 포기 할수 없다 그가 맡은 바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십자가의 공로에 대한 공격으로 마귀는 감당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마치 일만 달란트 탕감 했음에 대한 명백한 사랑을 보여 줬음에도 불구하고
그 탕감받은 자가 그 용서를 완악함으로 자기 변호에 빠짐으로 인해서
그 용서가 얼마나 명확한 제대로 용서인가를 비유를 통해서 증거한다.

결국 긍휼을 입은 자와 진노를 입은 자를 가르겠다는 취지가 용서다.

또 반발 한다. 용서 라매? 사랑이라매? 왜 또 나누냐?
나누지 말아야지

이것이 바로 위에서 언급한 사건의 예로써 나타난 것이다.


씨뿌리는 비유 곧 두 여자 두 언약인 두 비유는

있는 자는 더 받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는 방식은 종말 곧 묵시의 비유이다.

천국이란 씨뿌리는 자의 비유처럼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난 약속의 자녀는 무조건 원인 없는 결과로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도록 되어 있는 약속으로 태어난 존재 이지만

계집종 하갈에게서 난 육의 사람은 아무리 심고 씨를 뿌려도 가시밭 돌짝 밭 길가에 뿌려진 씨앗과 같다는 것이다.
(그런 실체를 모른채 반대로 자신이 먼저 아들을 낳았다고 착각함으로써 반드시 핍박 하도록 되어 있다.
한 여자의 언약은 반드시 다른 여자의 언약을 핍박한다.)

자 중요한것은
그렇다면 약속의 씨앗은 어떻게 알수 있는가?

우리가 그 반대 편에 서서 그 3가지 물증을 약속의 씨앗이 친히 담당함으로써

우리를 인자라는 박스 곧 예수님의 몸에 담겨져서(법궤처럼) 십자가에 높이 달리는 부정함이 옳았다 라는 원수와 사랑의 사귐만으로 이루어지는 완료(잉여)를 믿는 것이다.

성령은 바로 이 일의 전담반으로써 인간에게 믿음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친히 실제상황으로 전쟁을 홀로 벌리신다.

육의 소욕과 영의 소욕의 치열한 전쟁터가 우리 자신이요(처소=마당) 그리고 그 확장이 이 땅이다. 우리를 그 전쟁의 터로 삼은 것이다. 매일 매일 죽음에 넘겨지는 전리품(잉여품)으로써 말이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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