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상에서의 두 강도의 논쟁


십자가에 세 사람이 달리는 사건을 성경은 성경 전체 구석 구석에 깔아놓는다.
모든 상황은 바로 이 상황으로써 구약이든 신약이든 어떤 곳이든 가리지 않고 막무가내로 이 상황으로 몰아 붙인다.

왜 그럴까?

가인과 아벨의 제사 사건도 결국 이 사건을 말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행하심이(예정된 계획인 십자가) 개입하게 되니
피로써 죽음으로써 사랑(긍휼)과 미움(강퍅)함이 나누어지게 된다.

십자가에 세 사람이 달렸다.

한 사람은 죄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달려 죽게 되었고
또 한 사람은 죄 없는 분의 오른 쪽에 그리고 또 한 사람은 죄 없는 분의 왼 쪽에서
처형 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중앙에 있는 사람으로 인해서 별볼일 없는 뻔한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이 갈리게 된다.

누가 뭐라 해도 양쪽 두 강도는 마땅히 정죄 받아야 할 자이다.

이견이 없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 이견이 없는 두 강도가 한 사람을 놓고 죽기 직전까지 논쟁이 벌어진다.

뭘 놓고 논쟁일까?

죽음의 갈림길 속에서도 반드시 해야할 논쟁이 무엇이길래?

그것은 바로 두 세계에 대한 논쟁이다.

두 세계는 당신의 나라로 표현 된다.

(눅 23:39, 개역)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눅 23:40, 개역)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눅 23:41, 개역)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눅 23:42, 개역)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눅 23:43,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한 쪽 행악자가 먼저 시비를 건다. 이 땅 나라의 대변자처럼 밑에서 화를 내는 완악한 자들과 똑같이 안색을 붉히면서 외친다.

너가 그리스도 라며? 구원자 라며? 이 상황이 짜증이 나지 않는가? 구원자 라면 구원자 답게 너와 우리를 구원해 내어라? 구원자 라매?

놀랍게도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다시 영생하게 하는 나무를 따먹을려고 접근하는 모습과 동일하다.

마치 자신은 제사를 참 잘 드렸으니 당연히 신도 이 제사를 열납해야 마땅하다는 취지로 가인은 자신이 드린 제사에 만족을 했다.

그런데 문제는 더 나은 제사가 등장했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안색이 변한다.

더 나은 제사가 뭘까? 믿음으로 드린 제사가 뭘까?

이 땅의 믿음이 아닌 딴 나라 딴 세계를 보여주는 제사요 믿음이다.

결국 예수님이 자신이 제물이 되셔서 보여주는 믿음의 제사는 다른 세계를 보여주는 산제사이다. 더 이상의 죽은 제사가 아닌 산제사?

산제사가 뭘까?

반드시 더 나은 제사를 말하기 위해서는 더 낫지 못한 제사가 동원이 되어야 한다.
더 낫지 못하는 제사는 남을 살리지 못하는 제사이다.

남을 살리지 못하는 제사는 죽은 제사이다.
산 영일 뿐인 모든 아담의 제사이다. 아론의 반차이다.
이 아론의 반차를 쫏아 드린 제사가 언제 완악함을 표출 할까?
더 나은 제사가 등장할 때이다.

그러나 살려주는 영이 드리는 제사는 산 제사로써
살려주시는 영이 드리는 마지막 아담의 제사이다.
놀랍게도 친히 자기 목숨을 버리는 제사이다.
멜기세덱의 반차를 쫏아 드린 제사이다.
비로소 평화가 온다. 전쟁의 종식이다.
선악의 종식이요 종착점이다.
은혜가 왕노릇하는 더 나은 제사인 십자가의 피로 단번에 다 이루었다.

이제 더 이상 미흡한 인간 제사장의 제사는 의미가 없다.

왜? 딴 나라 딴 세계 딴 곳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을 대변해 주는 것이 두 강도이다.

분명 두 사람은 행악자이다.
그런데 행악자에 대한 것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지금 이 순간에 두 행악자는 두 세계를 대변해 주는 자로 등장되는
말씀의 소품이 된다.

한 행악자는 이 땅 나라가 분개를 하면서 짜증내는 일인
밑에서 행해지는 완악함을 십자가 상 위에 까지 끌어 올려서
가장 가까이서 외친다.

날 구원해봐? 선악과를 따먹고 죽게 되었으니 이제는 생명나무 따먹어서 영생 좀 해 보자?
그리스도 라며? 빨리 구원해 보아라

밑에서 페스티발을 열면서 외치는 구호를 기여이 이 한 쪽 행악자는 위로 올려 죽음 직전의 상황까지 외친다.

그 비방에 또 한 행악자가 반발을 하면서 그 사람을 꾸짖는 말을 한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여기서 좀 살펴 볼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냐? 라는 논쟁과
그 하나님의 두려움 때문에 받는 벌에 대한 보응은 자신들은 당연하지만
이 죄 없는 분은 행한 것이 옳지 않음이 없다 라는 논쟁이다.

결국 한 쪽 강도는 왜 당신은 그리스도 구원자 라고 하면서 이런 악한 자들에게 죽냐?
한판 뒤 엎어버려 역전을 펼쳐보아라 그 혜택 좀 보자 라는 주장이다.

전형적인 구원, 인간들이 땅에서 자기들의 제사를 통해 구현하는 땅의 나라에서 펼쳐지는 구원이다.

그러나 다른 한 쪽 강도는 구원 포기다.
우리 자신들은 심판 받음이 마땅한데 이 분은 선한 분임에도 불구하고 심판 받는다는 주장이다.

즉 우리가 바라는 그런 구원은 없고 오히려 심판이 이 죄 없는 분 때문에 당연함을 보게 된다. 바로 그 심판성이 선하다 라는 것이다.

이것이 더 이상하지 않은가?

결국 한 쪽 행악자는 이 땅의 모든 경영이 악하고 심판 받아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영생나무를 따먹겠다는 심뽀로 가득찬 완악함을 대변해 주는 다른 한 쪽 행악자를 꾸짖는다.

그렇다면 그 꾸짖는 행악자는 뭐가 달라서 이견을 보이는가?

졸지에 논쟁 속에서도 나타났듯이 다른 세계를 본 것이다.

그래서 과감하고 담대히 뻔뻔스럽게도 당신의 나라가 임할때에 나를 기억해 달라고 한다.
심판에서 빼달라가 아니라, 심판이 당연함을 알고 죽게 되었지만
그 죽음 속에서 다시 살아나게 해 달라는 것이다. 왜? 죽음이 없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즉 다른 세계인 당신의 나라는 어떤 악한 나라의 행악함으로써 해를 입지 않는 그런 세계임을 바로 당신의 죽음을 통해서 당신의 심판 받으심을 통해서 비로소 보게 된 것이다.

여기에 가당치도 않는 말이 오고간다.

그런 한 쪽 행악자의 말에

죄 없이 십자가에 달려 죽는 분은

오늘 지금 당장 너가 나와 함께 낙원(억수로 좋은 세계)에 있으리라 라고 말씀을 하신 후에

세 명 다 모조리 다 죽게 되었다.

이게 무슨 시츄에이션(뚱단지 같은 상황)인가?

뭔가 반전이 있어야지 반전? 반전도 없이 그냥 셋 다 죽어버려?

당신의 나라에 기억해 달라며? 너와 함께 낙원에 있다며?
그럼 뭔가 나타나야지? 기억으로 끝나고 함께 있다는 말로만 끝나니? 뭐여 뭐여?

그런 말 같으면 나도 할 수 있겠다? 말인들 누가 못하랴?

라고 또 한번의 이 땅의 나라의 대변자의 발언이 튀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 말이 진정으로 이루어 졌는지를 그야말로 다른세계에 가봐야 할 입장 뿐이다.
그런데 단절되어 있다. 그렇다면 확인할 길이 없다. 다른 세계가 외부에서 덮쳐지지 않는 이상 말이다.

그것이 전부다. 저 세 명의 대화가 전부이다. 그리고 이 세명의 대화가 바로 선악과 나무 따먹는 상황과 또 반복이 된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영생케 하는 나무의 상황이 또 벌어진 것이다.

선악은 누구나 다 안다.
문제는 생명나무에 대해서 어떤 누구도 알 길이 없도록 단절이 되어 있기에
확인할 길이 없다.

만약 한 쪽 행악자가 죄 없는 분으로 인해서 낙원에 갔다면
그 행악자는 아무리 이 땅의 나라에서 행악자 였다 할 지라도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그야말로
생명나무가 이런 의미이다 라고 보여주는 대변인 노릇을 하는 셈이고
동시에 또 다른 행악자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대변인 노릇만 한 셈이다.

결국 죄 없으신 분은 이 두 세계를 보여주는 창조의 두 패로 나누기를 이루기 위한 목적으로 창조의 소임을 다하고 자기 세계로 가버렸다는 뜻인데

문제는 남아 있는 이들이 그야말로 십자가에 벌어진 그 상황 대로 똑같이 지금 현재에도 반복되는 한 쪽 행악자처럼 선악을 대변하느냐? 생명나무를 대변하느냐?의 문제이고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 면서 십자가는 그저 과거의 어떤 조그마한 한 모퉁이 지역에서 벌어진 역사의 에피소드일 뿐 이라며 취급할 것이다.

그렇게 쉽게 하나의 에피소드로 취급해도 무방하게 여겨질 이 사건이 지금도 계속 운운이 된다면 십자가 상에서의 두 강도의 논쟁은 인류 처음부터 마지막 때 까지의 절대로 멈춰질 수가 없는 논쟁일 것이다.

한 쪽은 예수를 그리스도 구원자 라면서 왜 자신을 구원해 주지 못하냐 라는 비방일 것이며
또 한 쪽은 바로 그 비방을 통해서 비로소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보게 되는 어리석은 지혜 앞에 무릎 꿇는자로써 나타나게 될 것이다.

한 쪽 행악자의 요청처럼 구원자로 나타나면 얼마나 좋지 아니한가?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끝까지 선악으로만 보겠다는 취지가 여전히 잠재해 있는 우리 인간 속에 있는 괴물이라는 본성을 자극한다. 괴물이 신이 되고 구원받고 영생 받기를 소망하듯이 예수라는 자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처럼 먹음직 스럽고 보암직 스럽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다.

그런데 무슨 눈깔을 달고 있는지
한 쪽 행악자는 남들이 다 같이 그렇게 보는 시선과 다른 시선으로 예수님을 본다.

죽어가면서 까지 예수를 구원자로 보면서 먹음직 스럽게 본 한 쪽 행악자로 다르게
다른 한 쪽의 행악자는 두려움을 느낀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것이 사랑이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버리는 모습이 다른 한 쪽 행악자는 두려움으로 보게 되었고
바로 그 모습을 통해서 인간 제사장과 인간들이 바치는 제물로 인한 모든 인간들의 제사 속에 전혀 발견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거룩을 보게 된 것이다.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어설픈 제사 속에서는 자신의 심판을 보기는커녕 나도 한 거룩 해내었다 라는 행함이 자리를 잡는데 이 하나님이 친히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이 되시고 또 하나님이 친히 제물이 되시는 어린양이 되심을 통해서 두려움을 보게 된 것이다. 그 두려움 때문에 비로소 믿음을 보게 되고 그 믿음으로 당신의 나라에 나를 기억해 달라는 뻔뻔스러운 행함이 아닌 믿음으로 가는 나라 곧 딴 세계가 이미 그 강도를 끌어 당기는 즐거운 비명으로 터져 나오는 소리로써 나타나는 것이다.

심판을 통해서 정죄함이 없는 세계가 그에게 덮친 것이다.

그러나 정죄함이 없는 세계가 덮쳐지지 않은 강도는 이 땅의 나라의 속성을 그대로 대변해 주는 발언만 할 뿐이다.
예수라는 먹음직 보암직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자를 자기 편으로 끌어 당긴다면 예수는 죽을지언정 나는 살 수 있다는 확답을 얻을수 있는 것이다.

여전히 자신의 가능성과 구원을 절대로 포기 못하는 인간 제사의 전형적인 속성을 반영한다.

그러면 그럴수록 십자가도 십자가에 달린 예수도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다.
탐스럽기에 그렇게 보는 자신의 시선을 포기 할 수 없다.

지혜롭다 라고 남이 아닌 자신이 그렇게 의미를 붙였기에 죽는 순간까지도 포기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 쪽 강도는 전혀 십자가에 달리는 예수님이 먹음직 보암직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이질 않는다.

그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심판성에 두려울 뿐이다.

비로소 화로다 망하게 된 자신의 심판의 당위성을 보게 된다.
오호라 곤고한 자로서 바로 이런 완악한 세계에 갇혀버린 자신을 보게 된 것이다.
갇혀버렸고 선악에서 빠져나올수 없는 자신을 봄으로써 비로소 예수님이 다른 세계로 보게 된 것이다.

즉 자신의 저주를 예수님의 저주 받으심을 통해서 보았고 (전혀 먹음직 보암직 스럽지 않음)
바로 그런 어리석은 십자가가의 지혜를 모든 인간들은 거부할 수 밖에 없지만
그 십자가의 어리석은 지혜가 아니고서는 죄사함의 피흘림이 없이는 사랑이 없음을 비로소 앎으로써 그 십자가가 옳았다 옳지 않음이 없다 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전혀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지 않은 오히려 정반대인 참으로 어리석고 거리끼게 하고 실족케 하는 그 십자가 라는 질투성이 바로 참 사랑임을 알았다는 것이다.)

십자가 라는 더 나은 제사로 인해서 두 논쟁은 본격화 되고
두 강도의 논쟁은 두 강도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생생히 살아 꿈틀거리면서 우리 속에서 우리들을 두 강도처럼 두 패로 나누고 있다.

한 쪽은 선악으로 예수님을 먹음직 보암직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자신의 위기 상황을 모면해 주는 십자가로 또는 구원으로 반드시 자기유익으로 끌어당기는 선악으로만 취급하겠지만

또 다른 한 쪽으로 갈려져서 나오게 되는 자는 진정으로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만 했는가를 보여주는 생명나무 되심을 증거할 것이다.

전혀 먹음직 스럽지 않은 생명나무? 전혀 보암직 스럼지 않은 싫어버린바 된 십자가?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지 않은 도리어 외면하고파 회피하고프고 도망쳐버리고 싶은 거리낌이 되고 실족케 하는 거친 돌로써 사람들의 평화를 깨뜨리는 검의 운동력으로써 쪼개고 찌르는 십자가로서의 생명나무를 증거할 것이다.

결국 이 찔림이 되는 십자가의 죽음이 생명나무 이다.

(행 2:36, 개역)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행 2:37, 개역)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행 2:38, 개역)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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