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함 없는 믿음 vs 행함 있는 믿음 
 
2009-10-30 12:55:53 이름 : 김풍호


1.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바친 이유는 무엇이고?
  하나님의 약속을 전적으로 신뢰했었기 때문에 이삭을 바치는 행동이 따라 나왔나요?

2.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사건을 가지고 야고보가  믿음을 설명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을 이삭을 바친사건 관련해서 설명부탁드립니다.

3. "행함은 주의 은혜로 말미암아 자연스럽게 터져나오는 것이다" 이말이 맞는지요?
   (이것이 행함에 대한 저의 생각입니다..지금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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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댓글들 : 

이성근  09-10-31 03:12
 
이목사님이나 다른 분이 답해주시겠지만....평신도인 제가 답을 해보자면

1.히브리서에서 보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릴때에 부활 할것을 믿었다라고 나옵니다.왜냐하면 그 이삭을 통하여 예수그리스도가 나올것을 미리 보았고 분명히 죽여도 주님이 부활 시키리라는 믿음이 있었다는 것이고. 당연히 그 이삭을 드리는 그 믿음이 그냥 생긴것은 아니죠....

처음에 아브람을 하나님께서 대면하시고 불러내셨을때 주님의 명대로 하지 않았고. 많은 실수가 있었음에도 하나님께서는 약속대로 그를 이끌어 가시고 결국에는 이삭을 받치는 신앙의 단계까지 만들어 갔다고 보여집니다. 믿음은 아브람에서 나온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도록 하십니다라고 보여집니다.

2. 제가 언변이 딸려서 .....넘어가겠습니다.

3. 자연스럽게 터지는게 인간 내부로 부터가 아니라 주님의 죽음심의 그 은혜로 말미암아 성령께서 택한자를 붙들어 믿음의 행함이 터지게 나온다고 보여집니다..그러니까 결코 인간이 할수 있는게 없고 오직 성령께서 행하게 하신다고 봅니다..
 
 
박윤진 09-10-31 10:58  

행함과 믿음은 같은 말입니다. 왜냐하면 행함의 주체도, 믿음의 주체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안에서는 그 어떤 주체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매몰되기 때문에 자기만의 행함과 믿음을 챙기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참된 '나'의 속성 중 하나가 바로 믿음과 행함인 것이며 성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과 행함을 덧입는 신세에 불과합니다.

1.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바친 이유는 무엇이고?
  하나님의 약속을 전적으로 신뢰했었기 때문에 이삭을 바치는 행동이 따라 나왔나요?

---> 이삭은 아브라함의 육체적, 혈통적 아들이 아닙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언약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흔히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들 이삭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제물로 바쳤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대단한 믿음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실상 자신의 아들을 희생시키고 계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삭은 하나님 아들이니까요.

아브라함의 역할은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고 하는 그 결과가 그저 죄라는 것을 보여줄 뿐입니다. 아브라함의 죄는 오직 여호와 이레라는 하나님의 준비된 어린 양에 의해서만 용서된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동원된 것입니다. 자신의 아들까지 하나님을 위해서 바치는 위대한 아브라함이 아니라, 죄인은 그 아들을 바쳐도 죄인이기에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참된 제사는 죄인에게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 그 어떤 분의 피 밖에 없음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이 사건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잡으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아셨다고 하시면서 그만두게 하십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위해서 그 아들조차 아끼지 않는다는 것을 아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마음을 직접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별도로 수풀에 걸려 오도 가도 못하는 숫양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삭을 대신하여 잡으라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의 그 마음이 '의'라면 숫양의 죽음은 필요없는 것이지요. 이삭을 대신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아브라함의 그 열심 자체로 직통으로 하나님과 연결되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숫양이 미리 준비되었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참 제사는 아들도 잡아죽이는 아브라함의 행위도 아니고, 아버지가 하시는 일이라면 거부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만히 있었던 이삭의 순종도 아니며, 바로 하나님 자신과 동일시된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죽음이며 하나님의 죽음이 아닌 그 어떤 죄인의 죽음과 행위도 하나님께서는 일체 거부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아들 대신 죽는 숫양을 잡으면서 방금 바로 그 자신에 누워있었던 자신의 아들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은 원래 자신의 아들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언약의 아들을 참된 희생자로 만드시는 분임을 알았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희생자인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자신의 아들까지 직접 자신의 손으로 죽여야만 하는 기구한 인생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은 교묘한 죄의 위장술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더니 결국 하나님의 아들에게 칼을 겨누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희생자로 알았는데 진짜 희생자는 여호와 이레라는 이름으로 별도로 이미 준비되어 있더란 것이지요.

그러한 여호와 이레의 세계를 아브라함은 언약을 통해 처음으로 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행함있는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하신, '여호와 이레'의 공간속에 담겨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자신의 그 어떤 열심과 행위도 결국 하나님을 찌를 수 밖에 없구나 하는 죄인의 한계에 부딪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한계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 용서되고 있음을 표현하는 것이 바로 행함이며 믿음입니다.

2.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사건을 가지고 야고보가  믿음을 설명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을 이삭을 바친사건 관련해서 설명부탁드립니다.

----> 결국 인간 쪽에서 조작한 것은 그것이 아들을 바치는 것이더라도 죄일 뿐입니다. 야고보는 바로 이 점을 부각하고자 합니다. 자신이 안개와 같은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행함과 믿음을 따로 따로 챙기고자 하는 심보가 바로 믿음없고 행함없는 것입니다. 안개의 행함과 안개의 믿음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안개가 믿는다고 말만 하면서 행동하지 않는 것을 보니 곧 사라질  안개 맞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말과 믿음과 행함은 모두 한가지입니다. 말씀마다 다 성취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라면 여호와 이레처럼 이미 준비된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과 행함 속에서 별도의 덕목으로서의 믿음과 행함을 챙길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준비하신 것이 아닌 인간 쪽에서 조작한 믿음과 행함이 바로 행함없는 믿음이요 음없는 행함입니다.

3. "행함은 주의 은혜로 말미암아 자연스럽게 터져나오는 것이다" 이말이 맞는지요?

---> 이 문장의 주어인 "행함"을 성도의 행함이라고 한다는 위 문장을 틀린 말입니다. 성도는 예수의 행함을 덧입고 사는 신세이기 때문에 성도의 행함이 별도로 필요하지 않습니다. 성도의 행함(죄)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행함(용서)을 불어오는 역할 뿐입니다.

그래서 위 문장은
"성도의 행함은 주님의 십자가 은혜를 드러내기 위해서 계속 터져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라고 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잡는 행위가 터져나옴으로써 참된 희생자는 이미 별도로 하나님께서 준비하고 계심을 드러낸 것처럼 말입니다.
 
 
김영완  09-10-31 11:19 
 
행함 없는 믿음이라는 것도 없는 것이고
행함 있는 믿음이라는 것도 없는 것입니다.
있지도 않은 것을 새삼스레 싸움 붙인 다고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행함과 믿음을 따로 분리해서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때 빠져나온 사람은
믿음만 있는 사람도 아니고
행함만 있는 사람도 아니고
그리고 믿음과 행함이 있는 사람도 아닙니다.
기쁜 소식을 들었을때
자신의 믿음도 안 보이고
행함도 안보이는
그저 빠져 나가게 하시는
은혜에 감사하게 됩니다.
기쁜 소식이 온전하기에
기쁜소식에 믿음의 영역 행함의 영역
그렇게 나누어 지거나 분리 되지 않습니다.
기쁜 소식에 대한 반응을 굳이 말할때
믿음과 행함 그렇게 순차적으로 일어 나는 것 같지만
은혜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은사이고 자기부인을 통합니다.
어떤 사건을 일으키실때
하나님의 뜻대로 반응하는 것에 또 그 내용에
촛점이 맞추어 질게 아니라
하나님 아들의 희생과
예수 그리스도의 일하심으로 이어지는
또 주님이 주님 되시는 영광으로 이어지는 사건을
이땅에 보이심에 성경에서의 사건이 의미가 있고 그 뜻이 있을 것이라 봅니다.
 
 
강구만 09-10-31 11:46
 
옳습니다. 성도는 주시지 않으면 받을게 없음을 아는사람 입니다. 믿음이든, 행함이든.
하나님이 받으시는 하나뿐인 행함 곧 십자가의 "다 이루었다"하심이 믿음으로, 행함으로 예수님에게 주신 자기 사람들에게 그대로 주어짐 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 또한 예수님의 인생,운명을 살게 하십니다. 나의 행함이란 없지요.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창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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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함 없는 믿음 vs 행함 있는 믿음

김대식 2009년 10월 31일 토요일 오전 10:54:10

단어에 집착하는 인간의 죄성은 죄 문제 조차도 자신의 숙제로 보는 죄 아래 갇혀 있다는 것을 오히려 증명하게 된다.

행함 없는 믿음 다른 말로 고쳐 보자 사랑 없는 집착 결국 인간에게서 나올수 있는 모든 것이 된다.

그렇다면 반대로 행함 있는 믿음은 사랑 있는 집착? 그렇다 질투이다. 이 얼마나 부정적인가? 그러나 인간의 사랑은 부정적이지 않다. 항상 긍정적이고 친화적이다.

또 다른 말로 고쳐 보자.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음을 이기지 못하는 사랑이다. 음부의 권세가 사망의 권세가 장악하는 믿음이다. 곧 인간의 믿음이다. 이 대표성을 아브라함이 보여준다.

아브라함에게서 나올 수 있는 모든 것은 사망의 권세가 장악하는 믿음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행함 있는 믿음은 무엇인가? 죽음을 이기는 사랑이다. 음부의 권세가 사망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믿음이다. 곧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완료하신 믿음이다. 이 대표성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보여주신다.

아브라함에게서 나올수 없는 죽음의 권세 마저도 이기는 십자가의 믿음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서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믿음은 예수님의 믿음으로 완료한 그 십자가의 숙제로 이룬 사망의 권세를 이긴 믿음을 이미 과거로 고정되어 죽어버린 그 아브라함을 살리고자 미래에서 과거로 소급하여 더 이상 죽은 과거 죽어버린 고정된 과거가 아닌 살아 꿈틀거려서 모든 인간의 고정된 우상성을 뒤 흔들어버리는 걸림돌이 되도록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누구든지 아브라함 자손이라고 주장해 버린다면 과연 그런지 아닌지 십자가가 점검에 나서도록 광야로 인도할 것이다. 자아의 세계가 삭제 당하는 사적인 소유가 없는 집단인 광야교회인지 아닌지의 여부를 어떤 인간도 아닌 십자가가 수셔서 부딧히는 돌로 점검을 직접하게 나서게 된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이 아닌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이삭을 바치는 사건이다. 곧 십자가의 사랑의 확정이다.

이 창조의 사랑에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나누어 지게 된다.
행함이 없는 믿음과 행함이 있는 믿음이 나누어 지게 된다.

과연 행함이 있는 믿음인지 행함이 없는 믿음인지? 알려면
사랑이 있는지 사랑이 없는지 알려면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 라는 그 실상을 실체화 시키는 사건인 십자가가 실행이 되는 것이다.

아브라함(행함이 없는 믿음)이 도저히 행할 수 없는 믿음을
아브라함의 하나님(행함이 있는 믿음)이 이삭의 죽음에 이삭의 희생제사를 통해서 증거하게 된다. 이 계획 외에는 어떤 예정도 없다. 사랑 외에는 예정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믿음의 행함에 비로소 아브라함은 이삭의 죽음이 아닌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죽음,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자신이 친히 치시는 제물 되심을 목격하게 된다.

그것은 곧 예수님의 십자가 상에서의 죽으심 이다. 이것이 바로 행함이 있는 믿음이다.

흔히 행함이 있는 믿음을 인간들마저 성경문구를 운운하면서 실천의 숙제인냥 떠벌리고 타인에게 요구하면서 종교적인 욕망으로 부추긴다.

자신도 못하는 행함이 있는 믿음을 주장하면서 타인에게 행함이 없는 믿음이라고 정죄하는 법적 용어로 삼아버린다.

아브라함은 비언약의 자리에 놓이고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언약의 자리에서
아브라함은 자신의 행함이 있는 믿음에게서 나올수 있는 모든 믿음을 발산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믿음 앞에서 거짓임이 낱낱이 까발리게 되는 차이성을 발견하게 된다.

인간의 믿음이란 어떻게 하면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믿음과 일치화 될 수 있을까에 대한 망상에 해당 되지만

예수님의 믿음은 바로 그런 망상에 사로잡힌 아브라함을 구체적으로 건지고자 미래의 십자가의 사랑 미래의 영생 미래의 천국 생명나무에 대한 증거를 실제상황으로 침투 시키는 방식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이다.

바랄 수 없는 것들의 실상이다. 즉 한계성에 봉착한 인간의 무능에 전능하심으로 다가오는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이다. 즉 단절이 된 생명나무인 영생케 하는 열매의 증거물이 된다.

유대인의 조상인 광야 이스라엘도 보이도록 먹도록 소유할수 있도록 주어진 하늘에서 떨어진 만나를 먹고도 죽었지만

예수님께서 주시는 양식은 절대로 죽지 않는 영생케 하도록 하는 양식이다.

이것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을까?

그러나 오히려 이것이 더욱더 단절로써 다가온다.

이것이 예수님의 믿음이다. 더욱더 빛과 어두움의 간격을 벌려 놓는 것이다. 천국과 지옥은 건널수 없는 큰 강을 놓이게 함으로써 도저히 오고갈수 없는 소통이 없는 단절성을 펼치는 것이 예수님의 믿음이다.

그러나 인간의 믿음은 이런 단절성은 없고 그저 가능성을 펼치는 하늘과 땅에 있는 자신과의 일치화? 친화력? 하나님 마저도 움직일수 있다는 망상을 펼치는 우상적 믿음을 믿음이라고 우길 뿐이다.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오신 예수님의 믿음에 항상 경쟁적이다.

그렇다면 그 단절성을 제대로 보여주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야고보서에 나타난 행함이 있는 믿음 곧 아브라함의 이삭 바치는 믿음과 기생 라합의 정탐꾼을 숨기는 믿음이다.

즉 어떤 누구도 흉내낼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믿음(종교성)이 아닌
오히려 철저한 단절성을 보여주는 나누이는 분리성 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곧 육체의 파괴이다. 육에 대한 철저한 양보할 수 없는 단절이다.

(갈 5:24, 개역)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두 언약으로써 소개된 두 여자의 자녀는 육에서 육의 잇기와 육의 단절에서의 약속의 자녀의 차이이다. 그 차이가 계속해서 증식되는 방식이 점점더 그 차이성을 계속해서 반복되는 형식이다. 마치 가인이 이마표를 받고 더더욱 에녹성처럼 자아를 더욱더 곤고히 하는 보호막(무화과나뭇잎의 확장)인 바벨탑의 원조 에녹성을 형성하고 하나님의 의미를 부적처럼 도배를 한다. 그것이 국가 라는 보호막으로 확대가 되고 이것이 바로 지옥인 짐승의 나라로 확대된다.

바로 그 자리에서 아벨의 죽었더라 족보를 형성하면서 약속의 자녀인 이삭 또한 계속 해서 단절로써 약속의 자녀의 반복성을 보여준다.

이삭에게서 난 두 아들인 에서와 야곱 또한 이 분리성에서 예외 없이 보여준다.
야곱의 12 아들 조차도 예외가 없다.
이 12 아들이 12지파의 이스라엘이 되어서 조차 그 단절성은 예외 없이 보여준다.

결국 하늘에서 난 자는 예수님에게로 집결이 되고 그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12지파에 해당 되는 이스라엘은 하늘에서 난 자인 예수님을 드러내는 어두움의 역할을 하게 된다.

즉 행함이 있는 믿음은 예수님을 말하기 위함이지
인간에게서 할 수 있는 가능성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의 숙제가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이 홀로 하신 숙제를 우리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무상으로 공급받았을 뿐이다.

아브라함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하신 숙제 곧 죽음을 이기는 사랑을 아브라함에게 무상으로 제공했을 뿐이다.

그것을 율법 외에 한 의가 나타남으로써 사랑이 완료 되었음을 다윗은 우리야의 죽음을 통해서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죄 사함을 받은 그 행복함에 대해서 감사하고 있다. 즉 다윗은 다윗의 하나님의 숙제에 혜택을 창조를 은혜를 긍휼하심을 무상으로 제공받은 것이다.

(롬 4:1, 개역)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롬 4:2, 개역)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롬 4:3, 개역)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롬 4:4, 개역)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롬 4:5, 개역)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롬 4:6, 개역)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롬 4:7, 개역)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롬 4:8, 개역)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롬 4:9, 개역)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인간의 믿음은 오히려 살인 뿐이다. 경쟁 뿐이다. 남을 꺽어서 이기겠다는 복수심이다.
그 복수심이 결국은 예수님에게 향하게 되어버린 예수님을 겨냥한 살인의지요 적개심이 된다. 완벽한 신이 되고파서 신과의 일치성을 추구하는 처세술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믿음을 우리에게 도저히 따라올수 없는 죽음의 길로 가심으로서 죽음을 상대로 한 전쟁의 승리요 그 전리품이 우리요 아브라함인 것이다. 죄 값을 치르고 피 값으로 사신 아브라함이다. 기생라합이다. 우리 이다.

이 어리석은 지혜 외에 다른 방식은 없다. 피 값을 치르는 방식
대신 죽으심의 방식 그 어리석은 십자가를 계속해서 반복하여 지금도 매일 매일 빼내시는 방식 외에는 다른 사랑은 없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든 기생라합이든 그리고 그들 가정은 바로 이 빼내심을 반복하는 방식이다.

아브라함을 이삭이 빼내고 다시 이삭은 야곱에 빼내고 다시 야곱은 요셉이 빼내는 방식이고
또 다시 이스라엘은 모세가 빼내고 그 모세를 다윗이 빼내고 또 다시 다윗은 예수님이 빼내는 방식이다.

그렇기에 이미 빠져나왔기 때문에 성화해야한다는 무리는 오히려 전혀 빠져나온 의식 조차 없는 처음자리를 상실한 완악함만 나타내는 자신의 무화과 나무 잎 가리개의 응용화에 매달리게 된다. 그것을 바로 행함이 없는 믿음에 대한 분노로써 행함이 있는 믿음을 억지스럽게 갖추는 방식이다. 발가벗겨진채로 있을 수 없어서 무화과 나뭇잎의 가인 성처럼 [행함이 있는 믿음]을 또 자신의 무화과 나뭇잎처럼 자신을 은폐시키는 방식이다.

오히려 십자가는 매일 매일 발가벗겨버림으로써 멋진 옷을 잘 입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발가벗겨져도 상관이 없는 생명나무 안에서 발가벗겨진 채로 죽어도 상관 없는 조롱거리 비방거리 미말에 둔 찌기가 되어도 부끄럽지 않는 선악의 눈뜸이 일체 없는 미래의 천국 완료를 미리 앞당겨 누리는 방식이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심판을 저주를 자신의 신체에 담고서 이미 마음의 할례가 완료 되었음을 외치자? 육체의 할례를 오히려 행한 자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게 된다. 올무에 걸려든 것이다.

행함이 있는 믿음이 무엇인가? 발가벗기기 이다.
오직 성령만이 하시는 일이다. 육체의 소욕을 삭제 시키는 방식이다. 지우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 무엇인가? 빼앗기는 것이 없고, 삭제 당하는 것이 없고, 누락 당하는 것이 없는 방식이다. 오히려 더욱더 가리우기 위해서 덧입히는 방식이다. 지키고 행하고 실천하고 사수하는 방식이다.

십자가 마저도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환영하는 덧입히우기 이다.

자아라는 성을 겹겹이 포장하여서 3중 4중 최종적인 육의 잇기인 장자로 덧입히운 애굽의 피라미드 신전의 체제인 짐승의 실체를 추구하는 것이 행함이 없는 믿음으로 사랑이 없는 꽹과리로 형성한 것이요,

반드시 그런 숨겨진 짐승의 체제를 들추어 내는 방식으로서 육의 잇기(장자)를 끝까지 추적해서 분리시켜 버리는 그 단절성이 바로 행함이 있는 믿음이다.

[행함이 있는 믿음]은 [행함이 없는 믿음] 없이는 그 차이성을 알 수 없다,
빛은 어두움의 차이로서 알 수 있듯이

마귀가 심은 세가지의 메시야 신앙은 예수님의 광야에서의 마귀에서 시험 받으심 없이는 그 깊숙이 숨은 정체를 알 수 없듯이 말이다.

인간의 행함이든 인간의 믿음이든 결국은 마귀와 연결 되어 있다. 마귀의 행함 마귀의 믿음이다.

그 숨어있는 정체를 들추어내시는 것이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비로소 드러난다.

예수님의 행함과 예수님의 믿음은 인간의 행함과 믿음에 어떠한 연결고리가 없다.
철저하게 단절되었고 분리 되었다.

제자들의 무수한 일체화 노력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사탄이라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는다고 충고를 받는다.

제자들의 행함과 믿음에도 부합되지 않고 오로지 예수님의 믿음은 십자가로 달려간다.

마귀만을 상대로한 믿음이다. 사망의 권세만을 상대로 펼치신 믿음이다.

바로 이 믿음이 과거에 고정되어버린 아브라함에게 소급되어 펼쳐진다.

사망도 못 이기면서 자기 속에서 나올수 있는 모든 믿음을 펼치는 우상조각가 아브라함을 그 사망의 권세에게 빼내는 방식이 뭔가?

하나님 자신이 친히 제물이 되셔서 친히 자신을 치시는 죽음이다.

자기 목숨을 내어주심 아브라함이 이것을 본 것이다. 미래를 본 것이다. 미래의 긍휼이 아브라함에게 덮쳤다. 미래의 긍휼이 다윗을 덮쳤다.

이제 이 땅에서 죄인으로써 구원자를 증거한다.
원수로써 사랑을 증거한다.
심판으로서 구원을 증거한다.
강도로써 죄 없는 분을 증거한다.

비언약으로써 언약을 증거한다.

아브라함 아니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옳았다고
이삭이 아니요 이삭의 하나님이 옳았다고
야곱이 아니요 야곱의 하나님이 옳았다고
모세가 아니요 모세의 하나님이 옳았다고
다윗이 아니요 다윗의 하나님이 옳았다고
이스라엘이 아니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옳았다고

나 아니요 예수님이 옳았다고

십자가의 자리에서
저주의 자리에서
심판의 자리에서
발가벗겨진 자리에서
미말에 찌기가 된 자리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의 자리에서 아브라함은 틀렸고 [행함이 있는 믿음] 뿐인 예수님의 그 십자가의 죽으심이 그 부정함이 그 어리석음이 옳았다고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빈터의 자리에서 [창조자의 십자가의 대신 죽으신 사랑]인 모든 것을 다 이루신 십자가의 예정이 옳았다고 ......

(고전 4:9, 개역)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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