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유일한 언어 = 심판의 보편성인 십자가의 죽음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못 박으심)


(갈 5:22, 개역)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갈 5:23, 개역)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 5:24, 개역)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고전 2:2, 개역)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갈 6:14, 개역)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성령(공동의 집단)의 시선과 사적인 (선악) 시선


솔로몬의 지혜에 나타난 아이를 둘로 갈라서 저 쪽도 주고 이 쪽도 주라고 했을때에
이 공동의 분배라는 영의 시선에 아주 지극히 우발적으로 사적인 시선이 답변을 한다.

맞습니다. 옳으신 재판입니다. 이 쪽도 가지지 말게 하시고 저 쪽도 가지지 말게 하소서

선악을 없애 버리고 공동화 시키니 선악이 도리어 불쑥 튀어나온다. 껍데기로 포장된 법이라고 우기는 거룩을 벗겨보니 거룩이 아닌 선악의 시선이 소복히 담겨져 있다.

아이의 죽음은 처음자리를 보여줍니다. 인간은 원래 없었습니다. 그 없었다 라는 처음자리를 말하기 위해서 동원되는 것이 인간입니다. 없었는데 있게 하신 분을 말하기 위한 처음자리인 빈터 곧 영의 자리 공동 집단인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은혜로 용서받은 자리인 심판의 자리입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솔로몬 왕의 재판에 나타난 지혜를 인간은 넙쭉 흡수하고 빨아들여서 자기유익으로 땡겨버리는 선악과 나무로 따먹어버립니다. 아니 따먹혀 버립니다.

맞습니다. 옳으신 재판입니다. 이 쪽도 가지지 말게 하시고 저 쪽도 가지지 말게 하소서.
(인간의 목적은 이것이다. 사적인 자아를 자살할때도 이 목적 뿐이다. 신에게도 못 맡기고 마귀에게도 줄 수 없는 자아만의 고유영역 그것만 추구하겠다는 것이다. 재판도 심판도 심지어 구원도 성화도 천국도 자기가 자기에게 행한다.)

인간은 이 재판(지혜)에 아멘이라고 할 자격이 있는줄 착각한다.
이웃을 사랑하고 용서할 자격이 있는 줄 착각한다.
또 남을 판단하고 재판하고 심판할 자격이 있는 줄 착각한다.

이 영의 일에 육이 비로소 들통난다. 참여할수 있다고 여기는 육이 드러난다.
바로 영은 그 육을 십자가에 못박아 공동 집단화 해 버립니다. 즉 삭제요 심판이다.

십자가는 바로 솔로몬의 재판의 제대로된 실행이 된, 두 어미에게만 펼쳐진 또는 유대인들에게만 나타난 지혜가 아닌 우주적으로 보편화 해 버린 모든 인간 모든 피조물에게 적용시킨 통일성이다.

마귀는 예수님을 갈기갈기 찢은 하나님의 버리심에 대해
오직 그 하나님의 믿음에 참예를 한 냥 떠벌린다.
“잘했습니다. 옳습니다. 맞습니다.
예수님을 갈기 갈기 찢어서 모든 사람을 구원해주시는 그 구원이 참으로 옳습니다 라고
창세전의 처음자리만 없으면 모두가 공평케 됩니다.
누가 지옥가고 누가 천국가는 그런 편파적인 불공평은 없게 골고루 보편화 시키는 것이 옳습니다.

유일하게 하나님의 기쁘심이 되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

라는 특권은 없어야지 하나님의 사랑이 골고루 모두다 혜택을 누릴수 있는 겁니다.
법이란 그래서 있는 공평분배가 아닙니까?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의 왕권수립은 바로 이런 공동분배의 정치입니다.
솔로몬의 재판이 그래서 이도 가지지 말고 저도 가지지 마는 공동보편화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요셉에게 주어진 이스라엘의 편파적인 편애는 상대적인 10명의 야곱의 아들들 속에서 펼쳐질때는 지독한 미움으로 보편화 된다.

하늘의 편애성은 이 땅에서는 싫어버린바가 되며
하늘의 구조에서의 이미 미움받기로 작정된 자는 이 땅에서는 특정 편애의 선민과 같은 구원이나 예정된 선택처럼 또 그것을 묵시화 된 것처럼 영웅화(신화화) 된다.

솔로몬의 지혜에 대해 인터넷 다음 사이트의 지식검색을 보니 지혜이긴 커녕 어리석다 라는 평가가 일반인(보편성)의 평가이다. 인간은 이 솔로몬의 지혜가 전혀 지혜롭지 않은데 성경만 우길 뿐이다.

맞다 어리석기 짝이 없는 우매함이다. 바로 이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상대적인 그런 인간의 보편성(보편진리화된 인간의 바벨탑의 하나됨=일치성 일방성)을 깨뜨린다.

(고전 1:25, 개역)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고전 1:18, 개역)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 1:19, 개역)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고전 1:20, 개역)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고전 1:21, 개역)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고전 1:22, 개역)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고전 1:23, 개역)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 1:24, 개역)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전 1:25, 개역)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열왕기상 4장에서는 솔로몬의 지혜를 단독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뭐뭐 보다 라고 차이성으로 표현된다.

(왕상 4:29, 개역)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지혜와 총명을 심히 많이 주시고 또 넓은 마음을 주시되 바닷가의 모래 같이 하시니』
(왕상 4:30, 개역) 『솔로몬의 지혜가 동양 모든 사람의 지혜와 애굽의 모든 지혜보다 뛰어난지라』
(왕상 4:31, 개역) 『저는 모든 사람보다 지혜로워서 예스라 사람 에단과 마홀의 아들 헤만과 갈골과 다르다보다 나으므로 그 이름이 사방 모든 나라에 들렸더라』
(왕상 4:34, 개역) 『모든 민족 중에서 솔로몬의 지혜의 소문을 들은 천하 모든 왕 중에서 그 지혜를 들으러 왔더라』

[뭐뭐 보다 더 낫다] 라는 반드시 지혜는 상대적으로 지혜다 라고 자처하는 지혜 비스무리한 이미 대중(권력, 보편성, 다수, 힘, 하나됨의 일치성)에게 먹혀든 유사지혜를 동원하면서 그 속에서 독보적으로 차별화로 나타난 차이성으로써 더 나은 지혜이다.

누구 보다 더 낫고 또 누구 보다 더 나은

제사 드리는 열심에 그 제사 보다 순종이 낫고 라는 식으로
나름대로의 진리보편성을 가지고서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혁격한 차이로써 월등하게 더 낫다고
그렇게 되면 반드시 한 쪽은 안색이 아니 변하고서는 안되는 안색이 변함이 아주 마땅함이 벌어지고
또 한 쪽은 더더욱 그 간격을 벌려버리는 바로 삭제당함 곧 죽음이라는 진짜 보편성이 저쪽으로 인해서 살인을 유발케 되는 방식이 된다.

향유를 깨뜨려 값비싼 향유를 아무 가치 없이 삭제 허비 시키는 그 여인의 무모함에
일제히 예수님의 제자들은 분노를 표출한다.
보편적진리를 거슬렸고
바로 그것을 예수님이 있는 자리 예수님과 함께한 제자들이 생생하게 펄펄 살아있는 그 현장인 법의 자리 코 앞에서 펼쳐졌다.

모두다 버럭 의로운 분노로써 법의 짱돌을 들고 우르르 달려든다.

이건 뭐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용서 할 수가 없다.
바로 그 자리에서 발가벗겨버리고 까버린다.
집단적으로 확 달려들어서 삿대질 한다.

똥 - 덩 - 어 - 리

강마에의 독선 보다 더 날썬 검으로 두 조각 짤라버린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 정도의 위치에 선 모양이다.

똥덩어리 어떤 구석에서도 낯짝들지 못하도록 그녀가 한 행동을 제대로 밟아버린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보다 더 뛰어난 나은 행동 있으면 나와봐? 라고 뻔뻔스럽게 뭐뭐 보다 낫다 라고 하신다.

(마 26:13, 개역)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막 14:9, 개역)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뭐 보다 낫길래?
온 천하 보다 낫단다.

솔로몬의 지혜를 어리석다 라는 현대인간의 주장에 아직도 고리타분하게 하나님은 그 어리석음을 이 여인에게 까지 심으셔서 양보없이 절대 한치의 양보없이 펼치신다. 즉 예수님의 죽음에 참예한 행동이다. 이것 보다 더 영적인 언어가 어디 있으랴? 어떤 인간의 육의 언어에도 해석불가인 이 여인의 행동이 어디 있으랴? 솔로몬의 지혜? 해석불가이다. 심지어 유대인들 조차도 해석이 안되는 그 간격을 예수님 덕분에 좁혀지기는커녕 더더욱 그 개입이 지옥과 천국 사이에 건널수 없는 강처럼 벌어진 해석불가이다.

가룟유다의 가난한자를 위한 생각 보다 더 나은 향유를 깨뜨린 행동이 영원히 기념이 되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이 결국 가난한자를 위한 죽음이다.

제자들의 가난한자에 대한 생각 보다 더 월등하게 나은 가난한자에 대한 남을 사랑하는 율법의 완성의 십자가 죽음의 보편성을 인간이 되도 않는 보편성은 가로막는 방해만 될 뿐이다.

인간의 이웃 용서? 가난한자에 대한 이웃 실천? 다 악마적이다. 하나님의 어리석은 지혜를 가로막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지혜에 왜 꼭 어리석다 라는 의미가 왜 붙는지 모른다.

뭐뭐 보다 낫기 때문이다.
결국 낫다고 여기는 것을 인간들은 다 끌어모을 수밖에 없는 그 열심들을 유발케 한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바로 이런 보편성을 일방적인 불공평인 십자가의 어리석은 지혜로 그것도 유대인 선민이 아닌 도저히 용서 할 수 없는 더러운 똥덩어리 부정한 인간 중에 부정한 인간들만 골르고 골라서 그런 불가능한 용서를 개같은 이방인을 통해서 인간 속에 하나됨으로 이루어진 보편적진리성 곧 인간 자체라는 바벨탑을 뻥뻥뻥 구멍 뚫어버리는 것이다.

이것을 해방이라고 한다.

구멍을 뻥뻥 뚫어서 빛의 아들들의 보다 더 나은 지혜를 종말이라는 다미리로 쭈우욱 펼치는 공평성이 도리어 첫째아들에게 불공평스럽게 다가올 정도로 너무 너무 공평하게 불질러 다리미질로 지워버리고 삭제해 버린다.(불의한 청지기는 바로 이 공동집단적 세계인 성령의 세계 불의 세계 심판의 세계 종말의 세계를 미리 앞당겨 대비하는 지혜를 펼친 종말의 대비이지만 정작 빛의 아들이라는 자들은 종말을 볼 줄 모르는 헛 똑똑이 였던 것이다.)

세상에 저런 놈도 용서 받았다니 말이 돼?
말이 안되니까 은혜이지 땡 잡은 것이다. 이것을 종말이라고 한다.
(누구든지 외칠 수밖에 없다. 저런 원수도 종말의 심판 속에서 건져졌다고 아이고 부러워라 라고, 죽음이라는 보편성 속에 지옥의 불이라는 보편성 속에서 건짐 받았다면 다 받은 것이다. 이제 왜 누가 건졌는지? 누가 대신 지옥 불구덩이 속에 있는 나에게 뛰어들었는지?
그 외부인을 보도록만 눈뜬 장님의 눈을 뜨게 하시는 분이 성령이요 성령의 언어인 성경이다. 사적인 구원 사적인 성화 자체를 챙길수 없는 오로지 나 아니요 그분에 대해서만 증거하는 집단의 공동 언어요 찬양이다.)

오 해피 데이 구원의 날이요 해방이요 은혜의 날인 희년이다. 온 몸에 퍼진 종기를 또 암덩어리를 감당할 길이 없었는데 아니 아예 사로잡혀 버렸는데 누가 와서 흰눈 같이 희게 다리미질로 쭈욱 펴버리게 되니 울퉁불퉁한 종기가 뻥뻥뻥 뚫혀버리니 먹보다도 더 검은 죄가 흰눈같이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렸다. 말도 안된다 말도, 심각한 어두운 공포 영화를 누가 채널을 휙 돌려버려서 갑자기 감사와 기쁨 뿐인 감동의 영화로 채널을 돌려버린 것이다.

슬픔 대신 화관(축하드립니다 합격이시네요)을
재(불에 다 타버린 찌꺼기 흙먼지) 대신 희락(휴 타 죽을뻔 했네)을
근심대신 찬송 찬양(노래 부르는 군대 - 사적인 노래가 일체 없는)의 옷을 입히시는

(사 61:3, 개역)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주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평준화 공동화 해 버리는 뚫어버리는 구원의 뿔의 등장이다.
이미 승리하고 들어가는 전쟁이요 넉넉한 이겼음을 확인하는 희년이다.

(사 61:1, 개역)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사 61:2, 개역)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사 61:3, 개역)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 61:4, 개역) 『그들은 오래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을 것이며 예로부터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킬 것이며 황폐한 성읍 곧 대대로 무너져 있던 것들을 중수할 것이며』
(사 61:5, 개역) 『외인은 서서 너희 양떼를 칠 것이요 이방 사람은 너희 농부와 포도원지기가 될 것이나』
(사 61:6, 개역) 『오직 너희는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얻을 것이라 사람들이 너희를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 할 것이며 너희가 열방의 재물을 먹으며 그들의 영광을 얻어 자랑할 것이며』
(사 61:7, 개역) 『너희가 수치 대신에 배나 얻으며 능욕 대신에 분깃을 인하여 즐거워할 것이라 그리하여 고토에서 배나 얻고 영영한 기쁨이 있으리라』
(사 61:8, 개역) 『대저 나 여호와는 공의를 사랑하며 불의의 강탈을 미워하여 성실히 그들에게 갚아 주고 그들과 영영한 언약을 세울 것이라』

예수님은 이 희년을 전쟁도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이미 희년을 선언하고 승리를 선언하고 들어가신다. 이겼다 라고 완료로서 선포하시고 적진으로 뛰어드신다.

이 승리에 더 이상의 미흡함이나? 더 보탤것이나 더 첨가시킬것이 아예 없이 완료 그 자체만을 증식 시킨다.
손댈 필요 조차 없는 그 모습 그대로 용서하셨다. 그야말로 값없는 은혜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인위적인 성형수술을 성화론이라는 정당성으로 추구한다. 자꾸 손댄다. 자꾸 얼굴을 천사처럼 흑인을 백인으로 죄인을 의인으로 인위적으로 손대며 조작한다. 천사도 흠모하는 이미 신부인데 자꾸 신부 보다 천사를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서 성형수술 하는 가면을 위선적으로 갖출려고 한다.)

이제 확인 할 것은 매일 매일 박살나는 것들만 보면 됩니다.
(아이구 내 속에 이런 죄도 숨어 있었구만 하며 박살나는 현장을 목격하는 용서 받는 위치에 서 있을 뿐이다. 처음자리 빈터 뿐이다.)

주인공이 지나가는 자리에 그런 흔적을 목격하게 된다. 뭔가가 지나가는 자리에 영화 품행제로에 나오는 장면처럼 유도부 집단이 그 골목길 집 주변의 집 지붕위에 덩치큰 놈들이 추풍낙엽처럼 나가떨어진다. 말도 안된다.

맞다 말도 안된다 그래서 우리는 그 확인 작업에 동원이 된다. 우리 자신도 나가 떨어지는 추풍낙엽이 되는 신세가 되어 허리 뿌라져 절뚝절뚝 거리며 얍복강가의 야곱처럼 확인을 당할 수밖에 없는 빼도박도 못한 입장에 놓인 것이다. 구원의 뿔에 뻥뻥뻥 뚫혀버리도록 되어 있다.

비로소 그 틈 사이로 이 눈에 보이지 않던 실상을 보게 된다. 믿음이다.
믿음이 사적인 아닌 예수님의 세계 집단 세계로써 덮쳐서 하늘의 구조를 보게 된다.
우리는 비로소 옆으로 서서 뭔가가 통가하는 통로 가스배관이 된다.
이 공동의 언어인 성령의 언어만 냅따 실어 나르는 배달관일 뿐이다.

가스배달하는 자를 이 세상은 미워하지 않는다. 이 땅에 침투한 독가스, 십자가 가스, 성령의 불 까스를 이 땅은 미워한다.

아니 가스가 이 땅이 가스를 미워하도록 만들어 버렸다.

(요 7:7, 개역)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그 통로를 짜르고 단절 시키면 오히려 두 줄기가 되어 더욱더 확장 된다.
건드리면 건드릴수록 손해다. 통로가 분절이 되어 두 통로가 생겨서 확장 증식되기 때문이다. 몇배로 몇배로 증식만 부추길 뿐이다. 죽음에 넘기우면 넘기울수록 더 창조가 드러난다.

바벨탑을 무너뜨리고 하나된 자아 곧 사적인 하늘의 문인 요새 캐슬 철벽성전을 삭제 허물어 버리기 때문이다.

믿음은 바로 그 원수의 성문을 열어재껴서 인간들이 막아 놓은 심판의 문을 활짝 열어
그 뜨거운 용암의 화산으로 인간들이 정성껏 갖춘 그 사적이고 개별적인 모든 것을 불살라 버리고 평준화 시킨다.

종말에 부어 주는 그 약속한 성령 (원수의 성문만 골라 찾아간다.)

차별없이 개인차이 없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부자나 가난뱅이나 늙은이나 젊은이나
남자나 여자나 안 따진다.

(행 2:17, 개역)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욜 2:28-32)
불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안 따진다. 심판은 목사라고 안 비켜간다.
오히려 은사란 목사이기에 더 밟아 버린다. 남들 보란듯이
불은 안 가린다는 것을 더욱더 잘 보여주는 먼저 매 맞는 특권이 바로 은사다.

정작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선민만 빠져버리고 (빛의 아들들)
도리어 불의하기 짝이 없는 청지기가 먼저 매 맞는 특권을 누렸고 왜? 저들이 싫어버려 차버려서 그 처음자리(고아 과부 나그네의 첫사랑)가 넘어간 것이다.
또 향유를 깨뜨리는 여인이 먼저 매 맞는 특권을 또 누렸고
원가지는 짤려지고 죽은가지들이 접붙임 당하게 되었다.

원가지들인 우리가 안 도와 주면 하나님도 안 움직일 것이다는 그 편견을 무너뜨린 것이다.

차라리 돌들을 통해서 아브라함 자손 만드시는 것이다.

그래서 도끼를 나무 위에 두는 것이다. 종말이요 이미 완료인데 건방지게 이 완료를 더더욱 완료 답게 해야 한다는 둥 보충하겠다는 둥 그 딴 소리를 못하게 단절성으로 심판성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도리어 삭제 안당하는 것이 더 이상한 것이다.
끝났는데 철거를 안 당하는 것이 이상하다. 남아서 교회 하겠단다? ㅋㅋㅋ
가시떨기 나무에 불이 붙어서 재가 안되는 것이 더 이상하다. 더욱더 활활 타올라서 모조리 삭제한다. 먹보다 검은 죄도 삭제하고, 예수님이여 예수님이여 제가 이런 계명을 지켰다고 이웃사랑 실천하고 7 곱하고 70 인 안식을 완료하는 평강을 외치고 용서를 실천했다 라는 것 조차 모두 불에 집어 넣는다. 과연 불 속에서도 안 타는지 타는지? 다 홀라당 탈것 같으면 가짜요 우상이다.

진짜 기념되는 것은 예수님의 장사함에 뛰어든 여인만 불에 타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가짜인지 진짜인지 정금인지 도금인지 알려면 긁어보자

불에 집어 넣어보자 공동적인 것이 나오면 성령의 것으로 난 것이고
불에 집어 넣어보니 사적인 것으로 나오면 아무리 하나되자? 공동보편적 진리를 갖추고 행했다 라고 우겨도 성령의 것으로 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성령 훼방자 이다.

우리 또한 우리 스스로 불 속에 늘 당하는 일 뿐이다.
사적인 것이 불 태워지고 진짜 정금만 소복히 남는 그 남아 있는 것만 쳐다 보면 된다.

사랑만 있으면 모든 것을 얻은 것이다.

이 보물만 중요하기에 마음 놓고 솔로몬은 두 패로 갈라버린다.
가르면 양쪽 부모가 튀어나온다.
두 배후 세력이 나온다.

긍휼의 사랑인지 완악한 법인지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원수에게 뛰어드는 자신을 삭제하는 내어주는 사귐
도저히 용서 할 수 없는 행악자에게 뛰어드는 심판(대신 저주 받으심) 이다.

열매란 나무의 드러낸다.
앞으로 이런 이런 열매가 되어가면 열매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완료된 나무의 정체를 드러내는데 있다.

그래서 불에 열매를 미끼로 던지면 도저히 가려낼수 없는
해석불가인 숨은 정체, 누가 이 열매의 나무인지 인간의 모든 지혜를 동원해서 풀수 없는
하늘에서 매인 매듭을 하늘이 집적 그 불 속에 뛰어들어서 푼다.
숨어있던 나무의 정체가 누가봐도 확연하게 드러난다.
드러났음에도 부정해 버리는 그 숨어 있는 정체가 도리어 부끄러움을 당하게 된다.

악마는 벗겨진줄도 모르는 가면을 여전히 쓴줄로 알고
법의 공의성에 동참하며 얼쑤 훈수를 뜨기 시작한다.

(왕상 3:16, 개역) 『때에 창기 두 계집이 왕에게 와서 그 앞에 서며』
(왕상 3:17, 개역) 『한 계집은 말하되 내 주여 나와 이 계집이 한 집에서 사는데 내가 저와 함께 집에 있으며 아이를 낳았더니』
(왕상 3:18, 개역) 『나의 해산한 지 삼일에 이 계집도 해산하고 우리가 함께 있었고 우리 둘 외에는 집에 다른 사람이 없었나이다』
(왕상 3:19, 개역) 『그런데 밤에 저 계집이 그 아들 위에 누우므로 그 아들이 죽으니』
(왕상 3:20, 개역) 『저가 밤중에 일어나서 계집종 나의 잠든 사이에 내 아들을 내 곁에서 가져다가 자기의 품에 누이고 자기의 죽은 아들을 내 품에 뉘었나이다』
(왕상 3:21, 개역) 『미명에 내가 내 아들을 젖 먹이려고 일어나 본즉 죽었기로 내가 아침에 자세히 보니 내가 낳은 아들이 아니더이다 하매』
(왕상 3:22, 개역) 『다른 계집은 이르되 아니라 산 것은 내 아들이요 죽은 것은 네 아들이라 하고 이 계집은 이르되 아니라 죽은 것이 네 아들이요 산 것이 내 아들이라 하매 왕 앞에서 그와 같이 쟁론하는지라』
(왕상 3:23, 개역) 『왕이 가로되 이는 말하기를 산 것은 내 아들이요 죽은 것은 네 아들이라 하고 저는 말하기를 아니라 죽은 것이 네 아들이요 산 것이 내 아들이라 하는도다 하고』
(왕상 3:24, 개역) 『또 가로되 칼을 내게로 가져오라 하니 칼을 왕의 앞으로 가져온지라』
(왕상 3:25, 개역) 『왕이 이르되 산 아들을 둘에 나눠 반은 이에게 주고 반은 저에게 주라』
(왕상 3:26, 개역) 『그 산 아들의 어미되는 계집이 그 아들을 위하여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왕께 아뢰어 가로되 청컨대 내 주여 산 아들을 저에게 주시고 아무쪼록 죽이지 마옵소서 하되 한 계집은 말하기를 내 것도 되게 말고 네 것도 되게 말고 나누게 하라 하는지라』
(왕상 3:27, 개역) 『왕이 대답하여 가로되 산 아들을 저 계집에게 주고 결코 죽이지 말라 저가 그 어미니라 하매』
(왕상 3:28, 개역) 『온 이스라엘이 왕의 심리하여 판결함을 듣고 왕을 두려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지혜가 저의 속에 있어 판결함을 봄이더라』

성령의 공동 언어에 마치 정의인냥 공의인냥 거들어 나서는 사적인 언어를 펼치는 육의 언어가 반드시 그 차이를 드러낸다.

도리어 공동언어인 성령이 임한 자는 마음이 불붙는 듯 하여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심판 의 불 앞에 무능함을 보는 것인데

육은 그러하지 못하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바로 이 육의 언어를 파하고
성령의 언어로 이미 심판 받은 죄인을 찾는 것이다.
고아 과부 나그네인 첫사랑 처음자리 빈터를 찾는다.

아니 이미 승리했고 완료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연속적으로 증식하는
다시 흩뿌려서 숨박꼭질의 사랑의 넉넉함으로
잃어버린 자녀를 찾는 것이다.

놀랍게도 엉뚱한 자들이 자녀라고 했고
도리어 자녀는 나 자녀 될 자격 조차도 없는 죄인임을 아는
그런 고백이 솔로몬이 구한 그 십자가의 긍휼이 바로 주의 마음에 어쩜 그리 딱 맞는 성령의 언어 공동집단적 언어이다. 사적인 언어가 아무리 조직화 하여 공동보편적으로 하나로 갖추어도 그 사적인 본심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하늘에서 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왕상 3:10, 개역)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맞은지라』
(왕상 3:11, 개역) 『이에 하나님이 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수도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원수의 생명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은즉』
(왕상 3:12, 개역)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너의 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너의 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왕상 3:13, 개역) 『내가 또 너의 구하지 아니한 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열왕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
(왕상 3:14, 개역)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의 행함 같이 내 길로 행하며 내 법도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또 네 날을 길게 하리라』
(왕상 3:15, 개역) 『솔로몬이 깨어보니 꿈이더라 이에 예루살렘에 이르러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 서서 번제와 수은제를 드리고 모든 신복을 위하여 잔치하였더라』

바로 이 지혜에 솔로몬이 아닌 예수님이 직접 올인하고 뛰어드신다.(솔로몬 숙제가 아니다 솔로몬 조차도 소외이다. 도리어 누가 뛰어들었는지에 대한 목격자의 위치요 뛰어드신분 때문에 건짐받음 당할 건지시는 분의 목격자일 뿐이다.)

(왕상 3:4, 개역)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
(왕상 3:5, 개역) 『기브온에서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왕상 3:6, 개역) 『솔로몬이 가로되 주의 종 내 아비 다윗이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의 앞에서 행하므로 주께서 저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 주께서 또 저를 위하여 이 큰 은혜를 예비하시고 오늘날과 같이 저의 위에 앉을 아들을 저에게 주셨나이다』
(왕상 3:7, 개역)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비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왕상 3:8, 개역) 『주의 빼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저희는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왕상 3:9, 개역)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십자가의 어리석은 지혜이다.

이제 이 십자가에서 피 외에 어떤 것도 용납이 되지 않는 양보없는 성령의 소욕을
육의 소욕과 대립시켜서 그 차이성으로 우리에게 알려주신다.

(행 1:8, 개역)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것이 이미 완료된 넉넉한 승리의 전리품인 성령의 증인이다.


《 설교 요약 》 2009년 11월 8일

〈 지난 주 설교 요약 〉

믿음 자체가 표적입니다. 표적이란 이적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기적이라는 말이 아니라 사람들이 원하지도 않는 일, 즉 우리 자신이 비정상적인 존재라는 것을 들추어내는 그런 기적을 표적이라고 말합니다. 이 표적으로 인하여 구원얻을 자와 정죄받을 자가 결정됩니다. 이런 안목이 성도에게 생기는 것이 바로 부활의 능력이 성도를 사용하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성도는 더 이상 자신의 안목이 아니라 예수님의 안목으로 세상을 보게 됩니다.

〈이번 주 설교 요약 〉

누가복음 1:1-4                                                                                                                 말씀의 목격자

본다고 해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보는 습성이 있습니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장면을 보아도 기억하는 것은 다 제각각입니다. 이것은 사람에게는 나름대로 사전에 기대하는 바가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관해서 목격한 자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자신보다 더 중요한 인물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안 사람은 성령받은 사람 외에는 있을 수 없습니다. 대인관계에 있어 상대방에 대해 호감을 가질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상대방이 자신보다 더 중요해서 자신이 사라져도 무방하다고 여길 정도로 상대를 사랑하는 것은 특이한 현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전체는 인간이 대단함을 말하는 책이 아니라 예수님의 대단함을 말해주는 책입니다. 도저히 용서될 수 없는 자들을 용서하여 자기 백성 삼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지독한지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자기 백성을 기어이 건지시는 식으로 자신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십니다. 죄를 용서한다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죄에게 굴복하는 꼴이 될 수도 있습니다. 죄에 굴복하지 않으시면서 죄인을 의인되게 하시는 작업은 사람의 상상력으로는 부족합니다. 사람들이 미처 알지 못하는 하나님과 하나님과의 내막이 있고 비밀스러운 사전 약속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하나님이 일의 외부에서는 인간들끼리 상호 납득이 되는 방식의 사이비한 구원방식으로 둘러싸여져 있습니다. 바로 복음을 방해하는 세력들입니다. 자기 힘대로, 자기 지혜대로 구원을 성사시켜 자신의 잘남을 뽐내겠다는 심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이러한 생색내기를 거부하시고 본래의 뜻을 누가복음을 통해서 펼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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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들 중에 솔로몬의 지혜가 정말로 최고인가?]

인터넷 다음 지식검색

http://k.daum.net/qna/view.html?category_id=QFC001&qid=3SLFn&q=%BC%D6%B7%CE%B8%F3%C0%C7+%C0%E7%C6%C7&srchid=NKS3SLFn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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