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계명 주신 이유

2009-11-02 14:36:11 이름 : 김풍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계명을 주신 이유가 무엇인가요?


댓글

박윤진  09-11-02 14:56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하기 위함입니다.(롬 7:13)
 

김풍호  09-11-02 15:57
  
실컷..애굽에서 데리고 나와선 " 십계명"으로 죄만 더러낸다.
그건 좀 웃기지 않습니까? 아무짝에 쓸모도 없는 인간을 꺼집어 내서 고작 한다는것이
죄만 드러낸다. 하나님의 입장에선 하등의 가치없는 일 아닌가요? 하나님의 거룩을 드러내면 모를까...
 
 
김대식  09-11-02 16:38  

이스라엘의 특권이 뭡니까?
율법 소유? 아닙니다.

다른 이방인들이 지적 받지 않는 죄를 지적 받는 것이 이스라엘의 특권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죄인에게만 다가오는 사랑(긍휼) 이요 무조건적인 용서의 사귐입니다.

그런데 님의 말대로 그런 죄인 되기를 좋아할 신이(선악을 아는) 된 인간이 어디있을까요?
자기부인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십자가의 사랑 앞에서 비로소 어찌할꼬? 라고

죄인이라는 보편적인 성령의 언어가 나오는 겁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저는 죄인이로소이다.

이것이 주님이 찾는 이스라엘의 처음자리인 고아 과부 나그네의 자리인 첫사랑의 처음자리
곧 창세전의 노선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창세전에 먼저 예정해 놓으시고
십계명을 후에 율법을 가입시켜서 죄인을 더욱더 죄인 되게 만드셔서

십자가의 사랑을 더욱더 크게 확장 시킨 겁니다.

많이 탕감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하듯이

(눅 7:42, 개역)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눅 7:43, 개역)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가라사대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권범식  09-11-02 17:20  

맞습니다...
웃기는 일인 것입니다...

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한테는 그것이 웃기는 일이 될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죄보다는 어떻게 하면 더욱 거룩하게 살아서 하나님의 거룩에 조금이라도 다가갈수 있을까?...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10계명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이런 사람들의 생각이 얼마나 죄악인지를 알게 하셨습니다.

자기들은 충분히 지킬수 있고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깡그리 부수어서 인간의 골수까지도 쪼개셔서 죄인의 모습을 낱낱이 공개해...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숨을 곳이 없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이 10계명을 못지킨 것이 확인된 이스라엘은 구원에서 멀어지면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니다...10계명을 지킬 사람이 아무도 없구나...라고요...

그러므로 저는 사람이 쓸모없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쓸모 있습니다...여러모로...주님의 십자가를 나타내는데 여기저기 쓰이고 있습니다...창세때 부터 정해진데로...쓰이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럼 추운데 감기 조심 하세요~
 
 
김풍호  09-11-02 17:27  

예말씀은 잘 알겠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제일 큰일일수 있으나, 절대자께 제일 큰일이
인간의 죄를 더러내는것이라고 생각하는 자체가 하나님을 우리의 생각으로 가두어 놓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과 또 거꾸로 이야기하면, 하나님의 거룩성을 드러낸 것이기도 하겠기에 그래서 애굽에서 쳐죽여야 할 것들을 일단은 살려놓는 방편으로 하나님께서 거룩의 테두리를 설정하지 않았을까 하는 저의 터무니없는 생각이 결합되어 드린 질문입니다.
 
 
강구만  09-11-02 17:36  

사람은 본인이 정상이라고 착각할 만큼 비 정상 입니다. 이렇게 정상이라고 착각 함에서부터 행함의 가능성과 당위성이 시작됩니다. 이근호 목사님 지적대로 하면 옷을 입는 것이 부끄러운 일인 것조차 모를 정도로(창2:25) 심하게 '죄의 지배'아래 있고,죄로 인해 '만물보다 부패'된 상태입니다.
 
 
김풍호  09-11-02 17:46  

제가 정상이라는 말씀이신지???? 죄를 드러내는 것에 대해서 거부하는 것도 아니요, 행위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꺼내 놓는것도 아니요. 다만, 하나님의 절대 권력은 무엇을 지향하고 십계명을 주셨느냐에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죄가 하나님의 가장 큰일이다. 십자가가 가장 큰일이다. 죄=십자가 똑같이 큰일이다. 뭐가 큰일이죠...
 
 
강구만  09-11-02 18:44  

성경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기록된 책이 아니고 하나님의 주권(권력)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고 예수님을 증거하는 책 입니다.(요5:39 )사람은 이 성경말씀까지 '나'의 영생을 위해 상고 할만큼 비정상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이'육신'이되어 오신 예수님과 당연히 충돌이 있겠지요.이분이 당시의 '최고의 의'를 소유한 정상인들에게 구원의 불가능성을 선포함으로 터진 사건이 십자가 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구원에 대해 고민할 자격이 없습니다.
 
 
이상규  09-11-02 19:21 
 
로마서7장에 보면 율법과(십계명) 죄와의 관계를
우리의 생각이 아닌 성령님의 뜻을 설명하고 계십니다.
또,
님의 표현대로 하나님이 무엇을 지향하고 십계명을(율법) 주셨느냐? 는
이어지는 로마서8장에서 확실히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특히,
로마서 7장에서 8장으로 넘어가는 부분은 아무리읽어도
몸에 전율이 옵니다

롬7;8,9
"그러나 죄가 기회를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속에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때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나는 죽었도다.

롬8;1.2 (7;25는 생략)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으리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니라...아멘,아멘....
 
 
박윤진  09-11-02 19:45  

하나님의 거룩은 그냥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룩은 죄를 용서하심으로 성취되는 거룩입니다. 죄를 넉넉히 이기는 거룩이기에 그 죄가 어느 정도인지 분명히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 죄는 인간들이 죄인 줄 조차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법을 통해 죄를 밝히 드러내는 것이 선결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법이 들어와 이제 죄가 살아났고 결국 인간은 죽었다는 실상이 밝혀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거룩을 늘 피를 통해서 증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임재하겠다고 약속하신 시은좌 위에 출렁이는 것은 바로 흠없는 어린양의 피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점을 간과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을 인간의 죄를 대속하는 피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법을 지키는 자신들의 행위로써 직접 하나님의 거룩에 접근하려고 했습니다. 죄와 거룩을 분리해서 생각했고 그래서 죄는 짓지 않고, 거룩은 법을 준수하는 행위로써 쌓아올리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마귀의 자식이라고 하셨습니다. 거룩과 죄를 분리해서 행위로써 취하려고 하는 인간의 심보 자체가 바로 선악과 아래 놓여진 죄인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강구만  09-11-03 07:53  

하나님이 말씀을 주신 것은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설득할 수도 없고 필요도 없습니다. 오직 그 말씀을 믿는 자기 백성을 가려내는 작업 입니다. 이마저도 착각 할만큼 사람은 비정상 입니다.
 
 
김대식  09-11-03 09:42  

제목 : 내 죄 때문에 죽으신 분의 시체를 어깨에 매고 보게되는 두 세계의 전쟁


[거꾸로 이야기하면, 하나님의 거룩성을 드러낸 것이기도 하겠기에 그래서 애굽에서 쳐죽여야 할 것들을 일단은 살려놓는 방편으로 하나님께서 거룩의 테두리를 설정하지 않았을까 하는 저의 터무니없는 생각이 결합되어 드린 질문입니다] 이 부분을 읽고 글을 올립니다.

애굽에서 쳐죽여야 할 것들을 일단은 살려놓는 방편?

사실상 그들(이스라엘이라는 집단)은 살려 놓은게 아닙니다.
여전히 죽었고 이미 죽은 시체들입니다.

이 시체들에게 어제 대구강의 표현대로 하자면 불이 붙은 겁니다.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대구/대구091102피p045자아경배의보편화.mp3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대구/대구091102피p045자아경배의보편화a.wmv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대구/대구091102피p045자아경배의보편화b.wmv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대구/대구091102피p045자아경배의보편화.hwp

가시 떨기 나무 라는 이미 죽은것과 동일한 나무에 그것도 더 죽어라 라는 식으로 불이 붙어 버렸습니다. 성령의 공동집단성 불입니다. 여호와의 불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마땅히 죽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살아있다는 것은
누가 내 대신 죄값을 치렀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집단성을 보여주도록 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이것을 영이라고 하고 집단적 언어인 성령의 언어입니다.

이 사랑을 구체화 시킨 것이 십계명입니다.

애굽의 종 되었던 너희를 인도해 낸 여호와 이다 라는 십계명 전문을 통해서
생판 전혀 관련성이 일체 없는 타인인 남일 뿐인 너희를 불쌍히 여겼다는 겁니다.
그것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적인 편애입니다.

여기서 율법을 주신 취지가 드러나죠. 율법은 남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의 완성이다는 겁니다.

(롬 13:8, 개역)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롬 13:10, 개역)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그런데 문제는 인간은 타인을 볼 수 없는 자기만 쳐다보는 시선에 갇혀 버렸습니다. 선악에 눈 뜬 장님입니다. 그런 장님이 길을 인도한다? 율법 지킨다? 그것도 온전하게 전부를 다 내어주는 사랑을 한다? 쬐금 사랑하다 치우는 것이 아닌 전부를 그것도 하루 하루 24시간 올 풀 full 로? 말도 안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 지켰다 라고 나선다면 오히려 그 완악성이 더 드러나는 모습입니다.

그냥 사랑이 누구에게서 오는가만 쳐다볼 판국 뿐입니다.

이런 주님 자신의 사랑을 드러내는데 동원 된 것이 주님 자신의 제물이 된 유월절 어린양의 죽음입니다. 여기에 이제 일체의 양보가 없습니다. 사랑에 양보 없고 사랑은 질투적으로 투기적으로 도저히 용납 못하겠다는 행함이 있는 믿음이 곧 예수님입니다. 십자가입니다. 어딜 감히 침범하느냐 라는 단절성 입니다. 오히려 그 단절성으로 침노 침투 하십니다. 빼앗아 버립니다.

(아 8:6, 개역)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불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출 20:5, 개역)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출 34:14, 개역)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신 4:24, 개역)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
(신 5:9, 개역)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신 6:15, 개역) 『너희 중에 계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신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진노하사 너를 지면에서 멸절시키실까 두려워하노라』

이것이 여호와의 전쟁으로 표현 됩니다.

출애굽 때 새로운 족속이 하늘에서 태어납니다. 이 땅에 없었던 민족인 하늘의 족속 약속의 족속이 태어납니다. 해산하는 고통으로 이스라엘이 태어납니다.

그런 핏덩어리인 죽은자를 어깨에 매고서 지옥에서 음부의 권세에서 끄집어 내었습니다.
사랑입니다. 죄인만을 부르시는 구원입니다. 심판 속에서 불쌍히 여기심입니다.

바로 이 사랑에 양보 없다는 취지가 율법으로 표현 된 겁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특권입니다. 사생아와 자녀의 차이입니다. 자녀에게는 항상 매가 있습니다. 즉 부모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사생아는 매가 없습니다. 부모가 없다는 뜻입니다.

매(심판,저주)로 증명하는 겁니다.

이제 사생아들에게는 오히려 비방꺼리요 어리석음이요 걸림돌이 되는 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이는 무가치한 매, 회초리, 초라한 나뭇가지, 지팡이, 몽둥이인 저주와 심판이 얼마나 큰 사랑인가를 떳떳히 뻔뻔스럽게 양보함이 없이 보여주기 위한 방편으로써

광야 속에서 모조리 하나님을 원망하는 죄인 만들기로 인해 그들의 죄악을 원수됨을 증거궤에 소복히 담고 그 위에 시은좌 뚜껑을 덮어서 피를 뿌립니다.

왜죠? 사랑에 양보 없다고 했습니다. 질투입니다. 질투

이제 거꾸로 그 위에 뿌려진 예수님의 시체를 어깨에 매고 이 땅을 반토막 내는 나누는 곧 심판하는 방식입니다. 이것이 창조입니다. 그 창조에 거들어 준다는 보탬의 동참이 아니라, 이미 완료된 창조에 더 이상 더 보탤것이 없다는 것을 목격하기 위해서 참예(누락,소멸)가 됩니다. 창조 구경 실컷 하라고 여호와 전쟁에 동원되는 겁니다.

나 이렇게 용서 받은 죄인이라고 이것이 바로 양보 없는 영의 언어입니다.(이것이 창세전에 이미 예정된 죄인(원수)로써 사랑이 용서하기로 되어있었다는 그 뻔뻔스러움 임을 댓글로써 공동성(심판)의 언어로 여러분들이 표현한 겁니다. 특히 구득영 목사님의 표현이 그런 의미입니다. 구득영  09-10-31 16:59  모두가 다 주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자기가 했다고 우기는 자들이 바로 지옥으로 가는 자들이고, 주께서 하셨다고 자기를 부인하는 자들은 천국에 가는 자들입니다. 사람을 죽여놓고도 자기가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셨다고 우기는 그 뻔뻔함, 그것은 인간에게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뭔가 사는 동네가 다르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 또 이 뻔뻔함에 대해서 박윤진 성도님이 [인간에게 고유영역을 인정할 수 있는가?]으로 글을 칼럼에 올렸습니다  )

이 영의 언어는 육(바벨탑)의 언어가 팽배한 세계 속에서 펼쳐집니다. 이해 하라고 던져지는 언어가 아니라 두 패로 나눠 졌다 라는 완료성으로 던져지는 언어입니다.

이스라엘은 원래부터 없었습니다.
이미 죽은자요 없었던 자들이 생겨났습니다.

(롬 4:17, 개역)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롬 4:18, 개역)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그들은 그들의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이제 양쪽 세계를 보여주는데 동원됩니다.
죽은자의 세계인 이 땅의 죽음의 세계와 생명이 있는 세계인 약속의 세계

이 땅에서 이미 심판 받은 자로써 그 심판을 부여한 약속의 세계 곧 긍휼의 세계를 말이죠.
이것이 여호와의 전쟁으로 표출 됩니다.

죽은자 같으나 산 자요? 성령의 언어입니다. 영의 소욕입니다.

죽은자와 방불한 전쟁을 합니다. 꼭 할례 하고 전쟁합니다. 육의 이익 따위를 전혀 챙길수가 없는 전쟁만 골라 합니다.
죽은자(심판받아 저주받은 십자가)와 같으나 산 자요? 이것을 일부러 육의 소욕이 있는 곳에서 일부러 펼칩니다. 육와 영의 차이성이요 빛과 어두움의 차이를 드러냅니다.

원 가지였던 이스라엘이 영의 소욕을 거부하고 육의 소욕에 사적인 집단이 되어버리니
주님은 원가지 짤라버리고 언제든지 없는데서 불러내어
돌과 같은 죽은 가지인 이방인을 접붙여서 라도 자신의 피에 양보없는 질투심 곧 여호와의 불을 맹렬히 타오르게 하십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증식하십니다.

어딜 감히 인간이 사적인 주제에 불을 취사선택하겠다는 발상이 나옵니까?

불 앞에 사적인 생각 사조직화 사유화란 있을 수 없습니다.
율법을 지키겠다는 완악함이 결국 도리어 이스라엘이 실시하는 전쟁의 대상이 되고 만 겁니다. 율법을 지켰다는 자기만의 영역이(부자청년) 보편적인 성령의 불 앞에서는 아무가치없이 사라질 허무한 허상임이 드러납니다. 등 돌리고 근심하고 돌아섭니다. 우상을 도리어 세운 겁니다. 지키지도 못하는 약속을 허깨비 잡듯이 잡고 집착한 겁니다.

그래서 사적인 것을 모조리 불살라 버리는 공통적으로 차별없이 부어지는 심판의 불이 고맙고 감사한 겁니다.

바벨탑과 같은 사적인 지극히 사조직화 된 우상의 세계에
성령이라는 심판의 불을 예수님은 약속하셨고 또 그 약속하신 성령을 부으셨습니다.

이제 모든 개인적인 것은 일체 없는 세상임을 우리는 사조직화 된 교회 속에서 주님의 말씀이 옳았고 인간들의 손으로 지은 교회는 틀렸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더 이상 손댈 필요가 없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를 주님이 이미 세웠기에
그 완료성에 도전하는 미흡한 사조직들

소위 개혁주의, 성화론, 건전함을 지향하는 교회, 관념적이지 않다고 주장하는 교회,
객관적인 정통주의 교회 등등 하여튼 좋은 의미 일부러 다 붙여도 결국은 하나입니다. 사조직 바벨탑입니다. 가인 탑

이 모든 것이 가짜로써 불 타 없어졌기에 그 허깨비가 설칠 뿐입니다.

완료되었기에 그 상대적인 차이로 우리에게 보여주는 미흡하기 짝이 없는 감사한 배치물입니다.
 
 
김풍호  09-11-03 11:23  

제대로 이해하고 갑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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