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십자가가 선악적인가?


십자가가 구원용인줄 알았다가
아차 하고 잘못 발을 들여 놓았구나 라고 뺄려고 하니
이미 늦어버려 걸려들게 되어버렸으니 십자가의 소모품으로 죽어야만 되게 되었다는 것을
늦게 나마 눈치 차리게 된다.

십자가는 구원용은 커녕 완전 정반대인 심판용이다.

그 심판이 절대로 사랑으로 보일 리가 없다.

도리어 두 번째 십자가의 사건이 발생된다.

나 또한 그 폭력적인 무자비한 제물 삼으심 앞에서 돌을 들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 라고 누구보다 더 큰소리로 목이 날아갈정도로 외치게 될 것이다.

누구 보다 더 앞장 서서 말이다.

그 괴물이 자연스럽게 십자가 앞에서만 유독 드러난다.
다른 길로는 드러나지 않는다.

제물 앞에서 드러난다.
(이것이 화목제물의 진정한 의미이다. 그런데 화목 이라는 말뜻을 문자 그대로 한국교회는 오해를 하며 반대로 가르친다. 다가가면 친할 수 있다고 착각한 것이다. 아니다. 화목이야 말로 진정으로 인간 속의 괴물을 드러낸다. 그래서 인간은 완악함이 드러나도록 되어 있는데 인간들은 제물을 통해서 완악함의 반대인 광명한 친화력을 보인다. 예수 너는 죽고 나는 웃자 라는 식으로 제물로 장난치는 정치력을 친화력으로 사기를 치는 것이다.)

가인의 안색의 변함은 바로 아벨 당사자가 제물이 되어버린 순간이다.
분명 시간적으로 볼 때 안색의 변함이 뒤고 제물이 먼저 되었으리라 생각 되지만 아니다.

이 제물이 어떤 제물인가를 말하기 위해서 안색의 변함이 동반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평상시에 자꾸 입에 발린 듯이 자신은 십자가에 죽으러 왔다고 하니
그 십자가의 제물 앞에서 인간은 아니다 아니다 그런 일은 절대로 벌어지지 않는다 라고만
하늘의 제사가 절대 이루어 질 리가 없다고 보았다.

그저 제사는 자기 손으로 직접 드리는 제사만으로 충분하다는 식이다. 행함이다.

그러나 그런 제사는 헛 것이요 바람을 잡는 것과 같은 허망한 것이다. 남는 것은 인간 자신의 뿌듯함 뿐이다. 그래가지고는 제물의 죽음에 담긴 죄가 드러날 리가 없을 뿐더라 용서도 있을 수 없다.

용서도 없고 사랑도 없는 제사를 인간이 펼치겠다는 열심만 추구한 셈이다.
껍데기요 모양만 갖추었지 능력은 부인한 것이다.

이제 제대로 된 더 나은 제사가 있다.
더 나은 제사가 있다면 자신의 제사를 더 나은 제사 때문에 철거해야만 하는 입장 뿐이다는 것이다.

내가 드리는 제사 나로 출발한 모든 것은 거짓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말로만 이론으로 사색으로 떼울 수가 없다.

그래서 직접적인 내 속의 괴물을 십자가만이 들추어내고
내 속에 설마 괴물이 있으리야 라는 그 충격 앞에서
어찌할꼬 라는 성령의 숯불에 부정한 자신이 인두에 고문 당하듯 인두에 찌짐당해야 할 입장에 놓였을때에 그 인두(심판의 영 = 다리미)를 대신 당하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실제가 된다.

그 예가 바로 유다에게 다가온 약속이다.
유다에게 다가온 다말은 왜 십자가가 선악적인가를 제대로 보여준다.

다말은 약속에 올 인 하여서 죽어서라도 저 집 곧 약속의 집안에 귀신이 되어야 한다.

사실은 유다는 껍데기다 그 껍데기의 실체를 확 발가벗기는(할례) 약속 자체 덩어리가 다말이 되는 셈이다. 유다는 그 다말에 접붙임 당해야할 판국이다.

그래서 다말은 유다에게 접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창녀의 모습이다. 부정한 모습이다. 걸림돌이요 거침이 되는 실족케 되는 모습이다.

먹음직 보암직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창녀의 모습으로 유다에게 다가 간다.

유다는 벗어날 수가 없다. 제대로 걸려들었다. 선악과를 누가 마다 할 수 있으랴?

이미 선악과에 걸려든 이상 무조건 유다에게서는 다말은 선으로만 여겨질 뿐이다.

이것이 단 둘이 있을 때의 인간의 자연스러운 진짜 모습이다.

약속 앞에서의 단 둘만의 독대 앞에서는 서로 서로 발가벗었으나 부끄러워 하지 않았던 관계가

유다와 똑같은 신들의 세계인 다수인의 사회인 법의 세계에 들어가게 되니

그렇게 선으로 좋게 여겼던 선으로 여겨졌던 다말이

이제는 법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악으로 몰아 붙여야만 생존할 수 있게 되었다.

웅성 웅성 소문이 돈다.
법의 웅성거림이다.
그 소동의 내막은 유다의 며느리가 임신했다는 소리이다.

이제 소문으로 웅성 거리던 뜬 구름 잡는 연기소리가 실상이 되도록

방귓낀 놈이 더 큰소리 내도록

그 당사자가 법을 쥐도록 유발케 만든다.

법을 쥔 이상 악을 만들어 내어야만 한다.

내부에서의 괴물은 법을 쥔 이상 이미 믿음이 성립이 되었다.

이제 그 믿음직 스러운 괴물은 거룩이라는 법으로써 악마를 찾아내어야만
그 괴물은 확대가 된다.

옷을 찢으며 회개하듯이 자신의 신체를 찢으면서 반드시 이 악을 제거하겠다는 열성이 그 주변을 모두다 감염시켜서 집단적으로 정당성의 명분을 얻게 된다. 정치란 이렇게 조금의 안색 변함의 강퍅함으로써 그 콧방귀에 모두다 머리 숙이게 만든다.

이제 화형틀과 법적 재판 마당과 불과 기름 모든 처형 준비 도구가 완료 대비를 갖추었다.

누가 그 완벽한 심판 마당에 제물이 될 것인가 라는 문제만 남아 있다.

악마다.

그러나 준비하는데 도움이 된 이상 어떤 누구도 자신이 그 악마입니다 라고 나올 자가 없다.

법의 편에 다 서버렸기 때문이다.

십자가 라는 구원의 편에 모든 인간은 다 서버렸다.

자연스럽게 정치는 무언의 권력으로 질서를 잡게 된다.

이제 선은 갖추어 졌으니 악만 갖추면 된다.

방구 낀 그 당사자가
악을 잡아 온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보은 앞에서 자신의 죄의 알리바이를 제거하기 위해서 자신이 친히 처형을 그것도 강퍅하고 완악함으로 실시해야 다시는 이런 십자가라는 선악과는 발생치 못하도록 할 수 법의 틀을 제대로 갖추게 된다.

본때를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면 계속해서 이 사회는 좀벌레 같은 십자가는 신종임플렌자처럼 퍼지고 확산케 된다. 이 세상을 무너뜨릴 슈퍼 악종 바이러스다.

그 흔적 조차 남김 없이 없애버려야만 모든 악의 그림자는 불태워 지게 된다.

그래서 그 창녀의 모습으로 그 창녀짓으로 인한 부정한 열매 조차 다 한꺼번에 불태워 버려야 하기에 이 세명의 죄인에 부정한 씨앗에 그 원인 종자를 찾는데 까지 완악함은 파고 든다.

율법의 취지가 바로 이것이다. 죄가 가입한 이유까지 파고들게 된다. 그 괴물은 율법 외에 한 제물에 의해서만 드러날 수 있기에 율법은 더더욱 제물에 딱 맞는 괴물을 찾아내는 것이다.

참으로 고맙게도 유다가 그 일을 대신해 주고 있다.

괴물 찾기다. 누가 악이냐 하는 문제이다. 그래야 법을 들먹이는 자신의 선과 일치성을 이루는 정치에 부합이 된다.

다말은 임신한 몸으로 잡혀 온다. (그러나 이미 완료다 사랑은 잉여다. 미래완료다. 법이 그것을 없애고 잉여의 결과를 삭제해도 소용없다. 법은 무용지물이다. 사랑은 이미 완료이기 때문이다. 게임 오바이다. 게임 오바임을 드러내는 것이 이미 끝났는데 뒷북치듯이 법 붙잡고 완악함을 드러낸다. 사랑의 완료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법의 미완료가 동원되듯 말이다.)

(창 38:24, 개역) 『석 달쯤 후에 혹이 유다에게 고하여 가로되 네 며느리 다말이 행음하였고 그 행음함을 인하여 잉태하였느니라 유다가 가로되 그를 끌어 내어 불사르라』

법은 에누리가 없다. 철두철미하다. 그런 법이 하나님만 쥐도록 되어 있는 것을 인간이 쥐는 입장이 되면 그 사람은 심판자로써 심판을 대행하기 이전에 이미 그 사람 자체가 심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약속을 소홀히 여긴 유다는 대충 대충 약속을 회피하면서, 며느리 다말에게 자식들의 죄악을 뒤짚어 씌우고 자기자신은 철저하게 단도리 해왔다.

그것이 우상이라는 괴물이다. 약속에 대해서는 자신에게는 고정화 시키면서
자신에게 벌어진 부정적인 결과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벌거벗은 모습) 완벽하게 카바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그 부정함을 뒤짚어 씌울 인물을 찾게 된다.

약속을 지킬수 없는 것고 소홀히 여기는 것이 괴물의 특징이다.
동시에 괴물은 자신의 수치를 가리우는데 아주 적극적이다.
둘 다 동시에 할 수 없기에 우선적으로 벗은 몸을 가리우는데 정신팔릴 수 밖에 없다.

참으로 고맙게도 그 완악함에 다말이 걸려들게 된다. 율법을 지키면 지킬수록 완악함만 더해 간다. 자신이 약속에 대해서는 관심은 없으면서도 그 약속에 대해서 신경섰다는 티는 외부적으로 표출해야만 하는 증거물을 찾아내야만 하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소욕에 걸려든 것이다.

이제 십자가라는 피는 이 양쪽세계의 배후 세력을 드러내게 된다.

주님은 가인과 아벨이라는 가족이라는 형제 속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배후세력을 드러내기 위해서 가족이라는 껍질로써 원수성을 보여주고 있다. 영원히 갈라져야만 하는 영적 세계로써 말이다.

유다는 자신이 선을 드러내기 위해서 완악함으로써 다말을 악으로 삼는다.

왜 십자가가 선악적이어야만 하는지 알겠는가?

맞다 십자가 보다 더 나은 율법적인 것이 없다. 유일한 타인을 사랑한 사랑이다. 다른 사랑은 없다.

인간이 제일 싫어하는 뱀으로써 사랑을 증거한다.

회피하고픈 그 뱀이라는 악마의 모습으로만 다가오는 사랑이다.

그렇다면 내가 악마임을 성령으로인해 고백당함이 나오지 않는 이상 인간 자아는 사랑을
사랑의 반대 편에 서서 못 보는
자신도 사랑 속에 속할 수 있는 사랑의 같은 편으로만 인식할 뿐이다.

그래서 인간은 모두 자신으로부터 출발한 사랑만 믿을 수 있다.

악마의 모습으로 다가오는 외부에서 오는 사랑은 유난스럽게도 거부한다.
그래서 다말은 거부대상이다. 그로 인한 사랑의 열매는 도리어 부정함의 열매가 된다. 더더욱 거부 대상이다. 확장 확대 증식 번성 충만 나를 그런 사랑이 다스릴까봐 겁이 날 뿐이니 끝까지 부정해 버려야만 한다.

(요일 4:10, 개역)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오전 설교와 오전 이종성 장로님의 대표기도를 통해서 아 이거구나 하고 무릎을 탁 쳤다.

탕자가 아버지께 찾아간 것이 아니다.
이미 아버지가 멀리서 멀리서 이제나 저제나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우리가 찾아낸 사랑은 없다. (우리가 찾아내었다는 것은 사랑이 아닌 법이다. 그래서 법 찾았다고 완악하다. 건드리지 말라고 가인의 이마표를 붙인 모습이다.)

오직 사랑이 날 찾았다.

우상에게 조롱 당하고 괴물에게 겁탈당하여
자신도 모르게 괴물처럼 완악하게 된 그 악마를 찾아낸 것이다.

놀랠까 싶어서 오죽 겸손하고 순한 모습으로 우리와 같은 모습인 죄인의 모습 종의 모습으로 오셨다. 이것이 빈터이다. (이 빈터의 모습은 오히려 모세는 수건으로 덮어서 그 영광의 모습을 사수하고 지킬려고 하다가 완악함만 드러내었다. 자신을 구별화 차별화 시키겠다는 것이 오히려 더 완악한 모습만 표출 시켰다.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죄인의 모습으로 오셨다. 이것이 순한 모습이다. 빈터이다. 영광의 자리인 하늘 자리를 비워두고 오니 땅에 있는 인간들이 하늘 자리를 덮썩 앉고 이 땅에서 호령하다가 예수님을 죽이는데만 올인하는 허무한 인생만 집착하고 있다 (고후 3:6-18) 12『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13『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14『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15『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죄인의 모습으로 종된 모습 싫어버린다 된 모습으로 오셨고, 우리가 악마로 변했는데 주님도 악마의 모습으로 온 것인데(살리는 영)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이 뭔지도 모르고 그것도 되도않는 법제도와 거룩이라는 정당성이라는 것은 모조리 다 끌어모아다 갖추어서 그 사랑을 십자가에 매달았다. 그만큼 사랑이 없기에(생존) 두려워서 법이란 법을 다 끌어모아 죽인 것이다. (광명하고 흰 인간과 싫어버린바 되고 검게 된 인자)

유다의 모습이 우리 모습이다. 그런 완악한 모습을 십자가가 깨뜨렸다.
유리조각처럼 금이가고 깨어진 그 틈사이로 다말의 더 나은 제사가 촉촉이 스며든다.

그 완악한 유다는 사랑에 의해 촉촉이 그 값없는 은혜에 촉촉이 녹아든다.
(야곱이 환도뼈가 뿌러짐으로써 인간 자체가 발가벗겨지는 할례 가죽이 벗겨진다. 육체는 부서지고 이제 이스라엘이라는 하늘의 일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하늘의 가스배관통로가 된다. 옆으로 선 인간이 된 것이다.)


인간 자신이 제사장이 되어서 드리는 제물은 자신이 친히 제물이 될 수 없다.

인간은 끝까지 되도 않는 제사장 위치인 아론의 반차를 포기 못할것이 뻔하다.

그렇다고 제물이 되어버리면 자신의 제사는 헛제사가 될 것으로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우상이다. 괴물이다.

결국 지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한 것이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지 못하고
시간과 공간에 갇혀서 그 한계 뿐인 미흡한 제사로써 완악하고 강퍅함만 더해 갔을 뿐이다.
말씀을 지키면 지킬수록 더더욱 걍퍅할 뿐이였다. 더더욱 위선적이였을 뿐이였다.

사랑이 외부에서 오는 것을 못 보기에 자신이 전부이다.

주님은 친히 자신이 제물이 되시고 자신이 친히 멜기세덱이 되셔서
더 나은 제사를 이루셨다.

그 사랑의 제사에 초대해 주셨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그 더 나은 사랑의 화목제물에 동참(세례,할례)케 되었다.
이 십자가의 사랑 외에는 그 어떤 소통도 없도록 만들어 버렸다.성령 곧 십자가의 영 외에는 어떤 소통도 안되는 단절 뿐이다.

비로소 왜 십자가가 선악적일 수 밖에 없는가를 보게 된다.

(롬 13:8, 개역)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롬 13:9, 개역)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롬 13:10, 개역)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십자가 사랑 외에는 그 어떤 빚도 지지말라 하셨듯이 십자가 사랑 외에는 다른 소통이 없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않는다.

유다처럼 선을 억지로 유지하기 위해서 창녀의 부정한 모습이 아닌 선의 모습으로 왔다면
도리어 유다가 타 버렸을 것이다.

약속의 광채 앞에서 그 영광성 앞에 살아남을 재간이 있는 자가 없다. 조금이라도 죄가 있다면 타 죽는다. 의인만이 그 영광 앞에서 안 타죽는다.

샬롬 곧 평화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독대하고 대면하고도 안 타 죽었다는 것이다.

그 안 타 죽은 것이 주님의 낮아지심 곧 창녀 되심, 죄인 되심인데

인간은 도리어 창녀를 드디어 잡았다고 부정을 잡았으니 나를 긍정해 달라고 비로소 완악함을 드러낸다. (솔로몬의 지혜가 바로 이 근원적인 악마를 드러내는데 있다. 오직 아무 죄 없이 죽는 그 의인의 죽음만이 괴물을 잡아낸다.)

이것이 인간 속의 괴물이다.

이 괴물 잡는 방법은 딱 하나다. 십자가다. 인간을 상대로 하지 않고 괴물만 상대하시는 이유다.

우리 속에 있는 괴물은 선악에만 반응한다. 그래서 십자가는 철저하게 선악적이다.

창녀의 모습 죄인의 모습 뱀의 모습 바알세불 걸린 모습은 상대적으로 경건의 모양을 걍퍅하게 갖춘 자에게만 창녀의 모습이 눈에 밝게 띈다.
의인을 모습을 위선적으로 갖춘 자에게만 죄인의 모습이 눈에 밝게 띄여 거슬리게 보인다.
뱀과 거리가 먼 모습만 갖춘 자에게만 뱀에게 고개를 돌려 버린다.
하나님과 가까이 한 생활만 한 자에게만 바알세불 걸린 대 마왕의 모습으로만 보인다.

다말이 그렇게 선악적으로 보인 것이다. 아니 반드시 선악적으로만 보여야만 한다.
살리고자 온 영 곧 약속은 마치 우리를 죽을려고 다가온 샬롬전쟁이다.
(그러나 살리는 영이 아닌 그저 산 영일 뿐인 자는 생존만 했다고 우길 뿐이다.)

이제 평화는 반대로 바로 그런 자의 모습을 갖춘 자에게 원수로 다가 온다.
서로가 원수의 모습만 갖추었기에 제대로 그 배후의 정체를 드러내는데
둘 다 묵시의 세계를 보여주는데 이용 당하게 된다.

십자가야 말로 이 세계의 내막을 보여준다.

사랑이 아닌 것으로 아무리 실체의 내막을 살펴보아도 보이질 않는다.
눈 씻고 봐도 안 보이는 세계이다.

안약을 사서 발라야 한다.

십자가의 사랑이라는 안약을 발라서 보면

거꾸로 된 세상을 보게 될 것이다.

악은 선으로 자리잡고 있고 (마치 악마들은 전부 교회 라는 선으로 포장해 있듯이)
선은 악으로 취급 당하고 있음을

예수님이 이 땅에서도 같은 취급 당했다.

십자가 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십자가가 왜 인간들에게 선악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요 7:7, 개역)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십자가 보다 모질고 아픈 징계의 매가 없다.
철저한 버림이다. 저주요 죽음. 심판이다. 버림(지옫한 미움 지독한 저주)를 모르고서는 어떻게 되찾음을 알 수 있는가?
심판을 모르고서는 용서를 알 수 없도록 하셨다.
생명 나무를 알기 위해서는 선악의 나무를 거쳐야 한다.괴물이 드러나지 않으면 인자를 볼 수 없다.
그져 뱀이 뱀을 쳐다본 결과만 나열할 뿐이다.
쳐다 봤다는 자기 행함만 주장한다.
내 속의 괴물을 남김없이 다 끄집어 내고자 폭로하고 발가벗기신다.나의 마음 가죽 껍데기를 구석 구석 찾아서 말이다. 이것이 세례다.
주님의 숙제다. 사랑의 숙제다. 사랑에게 당하는 입장 뿐이다. 이것이 자녀다.
 
사랑이기 때문에 자녀에게만 해당 되는 징계의 매다.
그러나 사생아에게는 매가 필요 없다.
완악함 그대로 내어버려 두었기 때문이다.

십자가라는 창조로 영원히 나누어진 완료된 결과만 이 땅에 드러날 뿐이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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