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헬과 막벨라 굴

날짜: 2009년 10월 14일 수요일, 오후 19시 05분 16초 +0900
받는이: "김대식" <crosslamb@hanmail.net>

레아는 막벨라 굴에 들어 갔는데 라헬은 막벨라 굴에 왜 못들어간건가요

그건 어떤 의미로 봐야 하는건가요
 

답변 :
    
토기장이가 어떤 그릇을 천하게 또는 귀하게 쓰는 권한이 있듯이
어떤 그릇이나 사물 물체 시간 장소 개념은 토기장이의 뜻을 발현하는데 이용되는 겁니다.

예로 성전을 예를들면 성전이란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그런데 거룩한 분을 말하기 위해서 잠시 동원되는 소품이 됩니다.

그리고 원래의 빈터의 자리로 되돌아가도 상관이 없게 됩니다.

처소 개념도 그런 의미죠,

인간이라는 처소는 성령이라는 처소를 말하기 위해서 인간 처소는 상대적으로 무너져야 합니다.

자 막벨라 굴은 의미 없습니다. 처음부터 없던 장소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이 여기까지 이루어졌다 라는
약속의 움직임 속에서의 한 종착점 처럼 깃발의 의미를 꼿는 장소인 셈이 됩니다.

깃발 꼿는 장소가 중요해서가 아니라 약속의 움직임의 흐름이 중요하기에 그 움직이는 약속의 흔적이 되는 셈입니다. 그림자죠.

레아는 바로 그런 의미에서 아브라함의 양탄자 속에 그저 묻어 간 겁니다.

그 사람이 천국 갔냐 지옥 갔냐 라는 것은 우리가 알 필요가 없습니다.
전체적으로 약속이 말 그대로 약속대로 성취 되었다는 의미만 나열할 뿐입니다.

자 그런데 라헬은 의미가 더 깊어 집니다. 그것은 약속의 움직임이 더 깊게 들어간 겁니다.

사랑 받는 여자가 사랑 받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 때문에 사랑의 운명에 사랑이 격는 고통을 같이 격어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라헬은 더 나은 제사로 인한 아벨의 죽음처럼
라헬은 예수님의 죽음을 보여주는 의미까지 깊어지기에

약속의 흐름에 따라 베들레헴이라는 장소를 보여줍니다.

즉 이것은 약속의 흐름에 따라 모든 장소가 약속을 보여주는 마당이 되는 것이지
특정 장소가 아예 고정적인 전담적인 성격을 띤다는 것이 아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결국 이 지구 땅덩어리 자체는 예루살렘 성 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까지 특정 공간과 특정 시간을 성스러운 거룩한 곳이다 라고 고집하는 놈들은 마귀새끼들 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성전 밖에서 죽임을 당하는 겁니다.

바로 상대적으로 너희들이 거룩한 성전이라고 여기는 그 공간 바로 바깥에서 예수님이 친히 제물이 되신 거룩한 장소가 되었기에

너희들을 때려죽어도 지옥 보내겠다는 취지 입니다. 심판이지요.

라헬은 바로 이런 예수님의 죽음을 알기 위해서 레아와 차이가 나야만 했던 겁니다.

마치 형 에서와 동생 야곱은 아무리 쌍둥이 였어도 차이가 나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야곱은 반드시 환도뼈가 부러져서 이름이 교체 당하는 육의 통로가 차단 당하는 하늘의 통로인 이스라엘이 되어야 하듯이

라헬은 반드시 레아와 자녀 낳기 싸움에서 져서 그 죽은 태와 같은(환도뼈 부러지는 야곱처럼) 여자 구실 못했다는 바로 그 실패성이 도리어 하나님 자신이 친히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 제대로 된 포도나무 곧 하늘의 어머니 이다는 것을 라헬을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그렇기에 라헬은 뒤로 누락되고 빠져야 하고 실패해야만 하는 겁니다.
그 실패성이 하나님의 성공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곧 하나님의 실패요 메시아의 실패요 하나님의 어리석음 입니다.

바로 그 예수님의 실패가 진짜 하나님의 성공이 되는 겁니다. 이미 넉넉한 승리를 제대로 보여주는 다 이루심이기 때문입니다.

라헬은 여전히 모르기에 자신의 운명이 창세전 부터 예수님의 운명과 연관 된 줄로 모르고 그저 실패 했다고 여긴 것 뿐입니다.
그러나 깨닫든 못 깨닫든 상관 없이 이미 야곱의 사랑은 그리고 본 처는 라헬입니다.(머리로 결정 나는 겁니다. 그 머리된 신랑의 사랑을 제대로 보여주는 것이 몸인 신부인데 그 신부의 몸에 있는 머리는 빈터로써 보여주는 겁니다.)

계집종 하갈이 아무리 먼저 아이를 놓고 해도 약속의 자녀의 어머니는 이미 하늘에 있는 자유자이기 때문에
비록 반대의 모습으로 빈터의 모습으로 어리석은 모습으로
죽은 태의 모습으로 죽은자와 같은 모습으로 실패자의 모습인 것 같으나
넉넉한 승리자의 머리가 있는 자 임을 부재성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고후 6:8, 개역)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고후 6:9, 개역)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고후 6:10, 개역)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결국

교회란 누락 빈터 잉여터 입니다. 없는 것 같으나 있고
오히려 가짜 교회는 있는 것 같으나 없는

(마 13:12, 개역)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막 4:25, 개역)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눅 8:18, 개역)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하시니라』

오로지 머리만을 보여주는 것이 교회이지 교회 자신을 증거하는 머리의 자리를 자신들이 차지해 버리는 그런 가짜 이스라엘은 아무리 차지 해 본들
그 있는 것 까지도 빼앗길 뿐인 겁니다.

참고
http://crosslamb.tistory.com/269

http://crosslamb.tistory.com/270

오늘 수요설교와 같은 의미 입니다.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예레미야-2009/032강-렘9장10-11(황폐한예루살렘)-jer091014.mp3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예레미야-2009/032강-렘9장10-11(황폐한예루살렘)-jer091014.wmv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예레미야-2009/032강-렘9장10-11(황폐한예루살렘)-jer091014.hwp

비록 황폐해지고 불타는 실패한 예루살렘 처럼 보이나 그것이 하나님의 일(성공=완료)하심 입니다.

그러나 견고하고 아무 문제 없는 듯이 보이는 예루살렘은(마치 레아처럼) 여호와가 아닌 인간들의 행적 뿐입니다.

오직 사생아와 자녀의 차이점과 같습니다. 자녀일 수록 매를 대는 이유는 그 매 때문에 간섭하는 아버지가 있다는 뜻이고

사생아는 간섭자가 없기에 매가 없습니다. 매가 없으니 아무 문제 없는 듯이 보이는데 그것이 바로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 까지 빼앗긴다는 겁니다.

아버지는 매(심판)을 통해서 자녀를 종말에 대비한 자녀로 만들지만
사생아는 종말을 통과 할수가 없는 겁니다.

오로지 종말의 자녀만이 종말의 아버지가 있는 겁니다.

오죽하면 아내 십보라가 모세에게 당신은 어쩔수 없는 피 남편이군요 라고 말하는 것과 동일한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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