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론에 대해서

2009-11-10 13:42:44 이름 : 김풍호
 

간만에 질문입니다.

이근호 목사님의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의 인죄론 중에서 질문 드립니다.

1. 일명 개혁주의라고 하는 인간론의 시작은 창세기 1장부터 시작이고,
그러나 성경에서의 인간론은 창세기 3장부터 시작해야 된다고 목사님 책에서는 이야기 합니다.

차이점이 무엇이며,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요?


2. 인간론이 창세기 3장부터 시작한다면 창세기 1~2장의 기록목적을 알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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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이근호  09-11-10 15:55  

1.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었다"고 한다면 그 '하나님'을 규정한 인간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서 하나님을 규정하게 됩니다. 인간이 말하는 하나님이 어디서 나온 개념인가는  창세기 3장 이후의 인간으로부터 출발해야 해야 옳습니다. 즉 죄인이 죄를 품고서는 죄악에서 나오는 발언이 바로 "하나님은 인간은 창조하셨다"가 됩니다. 이것을 지적하기 위한 하나님의 조치가 바로 창세기 3장의 내용입니다.

2. 즉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을 만들었다. 따라서 인간은 저주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인간론의 시작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창세기 1-2장은 하나님의 형상 앞에서 왜 인간은 저주받아 마땅함을 보여주는 겁니다. 참고로 불교에서는 인생을 생-노-병-사의 여정으로 보지요. 그런데 이러한 고생과 저주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창세기 3장으로부터 시작하기 않고 창세기 1장으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관리자  09-11-10 17:12  

죄인으로 출발하는 의미로써 3장부터 시작이고 1-2장에 왜 죄인인가를 보여주는 거죠.
즉 인간이란 없었다 라는 자리에서 출발하는 겁니다.

그러나 개혁주의나 특히 유대인은 천지창조를 믿었다고 하지만 단 한 번도 안 믿었습니다. 마치 안식일을 평생 지켜왔지만 단 한 번도 안식을 지킨 적이 없듯이 말이죠.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비로소 안식의 내막이 드러나지 인간이 백날 해도 알수 없듯이 창조도 예수님의 십자가로써 비로소 밝혀지지 십자가의 사건이 아니면 알수 없도록 되어 있는 것이 창조겠죠.
인간을 못 박겠다는 것이 창조죠. (즉 저들의 또는 모든 인간이 조립한 창조 개념과 정반대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창조 입니다. 십자가만이 실상 - 창조주를 죽이는 인간)

결국 예수님을 말하기 위해서 동원되는 인간이 바로 죄인으로 출발하는 창 3장이고

반대로 유대교 기독교 모든 종교가 출발하는 인간은 창 1장 즉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 회복운동의 차원에서 인간들이 조작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출발하는 것이 1장이니 완전 허구죠. 그 허구 조차도 십자가에서만 밝혀지겠지요.

오늘 올라온 부산 강의가 이 질문 내용 부분을 다루었기에 참고해 보세요.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부산/부산091110a침멀리01구약신학-머리말a.mp3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부산/부산091110b침멀리01구약신학-머리말b.mp3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부산/부산091110a침멀리01구약신학-머리말a.hwp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부산/부산091110b침멀리01구약신학-머리말b.hwp
 

김풍호  09-11-10 18:04  

왜 3장부터 인간이 출발해야 되는지는 알겠습니다. 1~2장에 대한 설명은 이해가 잘 안되네요.
이목사님께서 설명하신 내용 중 (즉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을 만들었다. 따라서 인간은 저주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인간론의 시작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관리자님께서 설명하신 내용 중( 1-2장에 왜 죄인인가를 보여주는 거죠. )
쉽게 설명해주십시요.
 
 
이근호  09-11-10 18:08
 
사람은 자신이 우선이지 하나님의 형상(예수님) 위주로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들 보기에 당연한 일이고 상식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위주로 살지 않는 자들을 위하여 영원히 따끈하고(?) 포근한(?) 불구덩이를 지옥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놓으셨습니다.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지어다"(고전 16:22)
 
 
관리자  09-11-10 20:17 
 
잃어버린 형상을 찾아서

가짜 인간 & 참 인간


인간이 신을 조작할 때에 당연시 하는 것이 처음이 있을 것이다는 생각입니다.
그것은 신이 처음이 있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처음을 통해서 투사한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신의 처음을 기억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근접 사유를 해도 5살 3살?
아니 처음 조차도 모호해 집니다.
어머니 뱃속인지? 아니면 어머니 뱃속에서 나와서 인지?
임신 10주인지? 아니면 몇 개월째인지?
자아 인식을 하는 때 6살인지? 아니면 어머니와 동일시 한데서 탈출하는 독립한 7살인지?

그런 모든 모호성을 한 번에 잠재우고자 신화(묵시) 속에 자신을 두어 역사화 시키면 이것보다 더 좋은 신인동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진 박듯이 확실한 증거 아니겠습니까?
가장 멋들어진 고정성입니다. 역사가 계속 움직이고 흘러가면 역사화 될 수 없겠지요. 역사가 아무리 변해도 과거의 역사는 고정이 되기에 해석을 첨가 할 수 있고 그 고정을 기념비화 할 수 있겠죠. 그런 식으로 인간 자신은 자신의 처음자리를 찾게 되는 겁니다.

영원불변의 고정된 자신의 처음자리
그 자리를 통해서 투시하여 신 또한 그렇게 찾아내고 조작해 내면 영원불변은 결국은 인간하기 나름이 되는 거죠.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듯이

인간 자신의 영원불멸성을 신에게 빌어 붙어서 신에게조차 영원불멸성을 붙여버리면
동시에 인간 또한 그 혜택에 빌어 붙어 가겠지요.

문제는 그런 인간의 처음자리와 인간의 신이
바로 그런 인간들 손에 죽는 십자가의 사건으로 말미암아 모든 비닐이 벗겨진다는 겁니다.

진짜 신은 인간에 손에 죽는 창조주 이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창조주라는 것이 형성이 될 리가 없지요.
창조주의 피조물 손에 죽는 창조주라면 말도 안 되고 어리석고 걸림돌이지
그게 어떻게 신이 되겠습니까?

결국 인간이 말하는 신이라는 신 모든 신의 개념을 비켜간 것이 십자가에서 말하는 창조주이겠지요.

이것이 인간들이 조작해 내는 하나님의 형상과 차이가 나는 예수님 곧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하나님 형상 vs 하나님 형상인 예수님 과의 차이성이겠지요.

인간의 하나님 형상은 실수로 죄를 지은 것을 이제는 만회 하여서 죄를 극복하고 더 나아가서 죄만 사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형상 까지 회복하자는 취지입니다.
절대로 머무를 수 없기에 힘써서 형상 회복에 전념해야 하는 겁니다.

그런 취지로 보는 것이 창 1장부터 보는 인간론이겠지요.

그러나 창 3장부터 본다는 취지는 죄인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인데
그 죄인이란 우리가 말하는 죄인이 아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죄인으로써 하나님 형상과 차이가 나는 의미입니다. 도리어 하나님 형상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라고 차이성을 외치는 자리가 죄인의 자리요 그 죄인의 자리가 바로 처음자리인 십자가가 우리를 잉태하여 배태한 창조의 자리인 겁니다. 그렇다면 1-2장은 바로 우리가 죄인임을 보여주는 차이성으로써 인간은 없었던 창조에 일체 개입한 적 조차도 없는 상태 완료인 상태인 겁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를 잉태하실 때에 우리가 그 어떤 일에도 개입 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려야만 했던 겁니다. 잉태하는데 지가 무슨 도움 준냥 말하지 못하도록 입을 막기 위함입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우리는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난 겁니다.

이 말귀를 못 알아먹는 니고데모가 그럼 어머니 뱃속에서 다시 들어갔다 나와야 합니까? 라고 묻는 거죠.

사실상 태어난 것조차 기억 못하는데 다시 모태에서 태어나 본들 기억 하겠습니까?
아니 왜 기억하고파 할까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것이 태어남인데?
기억했다는 자신을 왜 염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독자적이고파서 사적인 영역을 추구하고파서입니다.

그 사적인 시선을 따로 챙길려는 심뽀가 바로 창세기 1장부터 자신의 시선을 갖고픈 겁니다.

그러나 복음은 인간은 예수님이라는 창조주를 말하기 위해서 일체 사적인 영역이 있을 수 없는 죄인으로부터 인간을 출발 시켜 예수님을 도출해 냅니다. 긍휼을 도출해 냅니다. 사랑을 도출해 냅니다. 거기에 인간은 소모품입니다. 피조물입니다.

그런데 피조물조차도 사적인 영역으로써 독자적인 신에 그런 독자적 신의 피조물인 독자적 피조물의 시선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사적인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것도 동양사상의 모든 만물과 관련성이 있다는 투의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전혀 사적인 것이 일체 없는 묵시 속 자연 속의 피조물인 냥 말하고 있지만
바로 그것이 사적인 겁니다.

왜냐? 그렇다면 십자가 사건이 벌어질 이유가 일체 없었거든요.

처음부터 십자가가 예정 되어 있다면 인간의 처음 자리는 없었던 자리입니다.
그 없었던 자리 창1-2장에서 인간은 이제 비로소 하나님 형상이 누구신가를 말하기 위해서 차이성으로써 창 3장에 죄인으로부터 출발하는 겁니다.

인간이 시건방지게 의인으로 출발한다면 하나님 형상과 동일시 된 자아가
죄 라는 실수 때문에 쭐떡 미끄러져서 이제는 제대로 말씀에 순종하고 예수님 까지 응원해 주게 되고 약속한 성령까지 오게 되니 넉넉히 하나님 형상 회복을 하게 되었다는 그런 취지는 마치 예수님의 도움으로 10명의 문둥병자 중에 고침을 받은 9명의 유대인과 동일한 겁니다. 그래서 그동안 쓰지 못했던 성령의 근육을 써서 성화 하고 형상 회복운동을 펼치면 회복된다는 취지죠.

그러나 한 명의 문둥병자는 달랐습니다. 비로소 죄인입니다 라는 공동언어가 나옵니다.
성경은 유대인이라고 해서 믿게 되는 천지창조가 아닌
죄인이라는 성령의 공동언어로만 고백케 되는 자신이 일체 개입한적 없는 창조를 보게 됩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죄인에게만 뿌려지는 그 피의 목격자로써 성경은 인간을 배태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창 1장으로 인간을 말할 것이 아니라 창 3장으로 죄인을 언급해야죠.
하나님의 형상도 아닌 주제에 하나님의 형상 인체 하는 그래놓고 영원히 그 하나님의 형상 다움을 채우겠다는 발상 자체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말이 하나님의 형상이지 결핍되고 분열된 자아 집착이 아닌가요?
그럴싸한 용어 붙였지 성화 한번 제대로 채우지 못하는 성화괴물?
성화 되고파서 안달한 괴물?
하나님 형상 되고파서 안달한 괴물?
괴물을 괴물이라고 하면 하나님 형상이라고 붙일 이유 없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하나님의 형상인 예수님은 죽여 버렸고
또 엎친데 덮친 격으로 다시 사신 하나님의 형상인 예수님마저도 꺾고 이기고파서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님을 경쟁자로 삼아서 하나님 형상을 추구하게 되어버렸으니
죄의 소원이 제대로 덮친 격입니다.

하나님 형상도 채워야죠. 그리스도의 형상도 채워야죠. 괴물 형상도 채워야죠. 바쁘다 바빠
말도 안 되는 소리이지만 사실상 이짖 꺼리만 하고 있던 걸요?
 
그 셋을 합쳐 놓으니 제대로 될 리가 있나요?  (롬 7장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구나)

질문에서
[왜 3장부터 인간이 출발해야 되는지는 알겠습니다. 1~2장에 대한 설명은 이해가 잘 안되네요.
이목사님께서 설명하신 내용 중 (즉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을 만들었다. 따라서 인간은 저주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인간론의 시작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관리자님께서 설명하신 내용 중( 1-2장에 왜 죄인인가를 보여주는 거죠. )
쉽게 설명해주십시요.]

하나님의 형상으로써 인간을 만들었는데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을 해석 하는 인간은 하나님 입니까? 아니면 인간입니까?

하나님이지요.

이제야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나야 그 하나님을 조져버려야 하는 겁니다.

못 박아야 합니다.

그런데 박힐까요? 도로 박히죠.

그래서 인간의 하나님의 형상이 다 들통 난 겁니다.

소위 순종이라는 단어로 또 사적으로 챙기는 하나님 형상을 또 추구하는데
그 순종이 개죽음입니다.
마치 멋들어진 종교적 광채가 나는 죽음이 아니라, 개죽음입니다. 더럽기 짝이 없는 죽음입니다.

그렇다면 인간 속에서 앞으로나 과거로나 현재나 먼 미래에도 순종이란 없습니다.

차라리 순종이라는 없는 그런 자리에서 보는 게 다른 순종을 보게 되는 기회라도 되겠지요.

하나님 형상이란 없는 자리에서 피어난 없는 자리입니다. 그것이 제사 보다 나은 순종입니다. 순종은 죽음과 결부가 되어 있습니다. 죽기까지 복종입니다.

순종인지 아닌지 죽여 보면 압니다. 하나님의 형상인지 가짜 형상인지 죽여 보면 압니다.
의인인지 아닌지 죽여 보면 압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을 깨뜨린 즉 죽여 버린 그 당사자가 도리어 그 깨어진 형상을 붙이겠다고 하니(타인을 위해 죽겠다? 말도 안 되는 소리죠. 저주 해 놓고 사랑하다니?) 없는 자리의 역할을 반드시 있는 자리의 역할로 만들겠다고 빡빡 우기니까 완악한 겁니다.

쉽게 말해서 사도바울에게 나타난 그 영광의 광채는 참 하나님의 형상을 보게 되니 곧 영광을 보게 되니 비로소 죄인의 자리를 고백하게 됩니다.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 라고 갑자기 율법 잘 지키는 자신에게서(하나님 형상 추구) 졸지에 사망의 몸이라고 하나님의 형상이 졸지에 사망의 몸이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성령의 집단 언어입니다.

이사야가 그 잘난 이스라엘 중에 잘 있다가 성전에서 늘 하나님 형상 회복 운동을 펼치다가
갑자기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이스라엘 백성 중에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었으니 저주로다 저주로다 라고 외칩니다.

다윗 모세 다 그러합니다.

그렇다면 망하게 된 자리에서 처음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니
하나님의 영광이 먼저 입니까? 망하는 게 먼저 입니까?

사도바울이 곤고한 사람임을 죄인임을 알기 전에는 그럼 핍박받던 예수는 없었습니까?
물론 있었습니다. 이사야가 화로다 라는 고백 이전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상관이 될려면 죄인에게 다가오는 사귐이 될려면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있고
많이 탕감 받고 많이 용서 받았기에 사랑하는 죄인의 자리이기에
비로소 죄인의 자리에서 그 영광이 비로소 의미가 되는 겁니다.
이 말은 십자가 사건에서 창세기를 재해석해야 한다는 취지입니다. 그렇다면 죄인의 자리에서 해석하게 되겠지요. 뒤로 거꾸로 소급해서 예수님으로 인해 창세기를 해석하면 하나님의 형상은 예수님이니 그 차이로써 인간은 죄인으로 해석될 수 밖에요.
예수님을 죽인 살인자로써 그런 살인자 원수를 용서한 사랑의 자리 십자가의 자리에서 다시 창세기를 해석한다면 기존의 시선은 다 사적인 해석임을 알게 되는 겁니다.

모세 또한 그러했습니다. 가시떨기 나무 불꽃을 봄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었을 때에
자기 눈에 그런 광경이 안 나타나면 하나님의 영광은 그 이전에 없었던 겁니까? 물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영광 자체가 죄인과의 사귐에서만 의미가 있는 겁니다.
죄인에게만 찾아오는 사귐으로써 영광입니다.
그랬을 때에 모세는 이 출애굽의 영광을 목격한 그 증인들에게 다시 천지창조의 영광을 이야기 합니다. 이것은 죄인된 이스라엘에게만 해당 되지 애굽백성에게 들려주지도 않았던 이야기입니다.
그들의 처음자리요 기억 속에 없었던 잃어버렸던 자리를 이야기 하는 겁니다. 또 원하고자 한 적도 없고 알고파 하지도 않았던 그 처음의 기억을 모세 본인 조차도 동일한 위치에서 받은바 대로 증거하는 겁니다. 지독한 편애로써 그 처음자리의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것이 창세기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신학자들이 도저히 해석할 수 도 없는 근처도 못가는 그 처음자리인 천지창조를 우리는 성령으로부터 처음 듣게 됩니다. 마치 모세에게 출애굽한 백성들이 처음 듣듯이. 우리가 없었던 그 처음자리의 영광을 듣게 되는 영광을 목격하게 되는 겁니다.

그렇지 않고 무슨 신학이 어떻고 저떻고 존재론적이고 뭐 어떻고 하는 해부하듯이 말하는 자들에게서는 늘 미흡하고 미완료 적이고 말로는 완료다 완료다 말하지만 지가 지 스스로도 그 미흡한 해석을 드러내는 식으로 우기기만 하는 사적인 용어 그 사적인 종교가 집단화 된 용어로 세뇌시키는 말만 되풀이 될 것입니다.(구약 이스라엘의 그 완악함처럼 오늘날 기독교 종교도 그런 모습처럼)


마찬가지로

미완료가 없는 창조 흠도 없고 부족함이 없는 완벽한 그 완료의 영광과 그 하나님의 형상을 증거하고 고백하는데 있어서 일치성의 의인의 자리가 아닌
차이성의 죄인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외치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나님의 형상이심이 옳았었구만요 라고

그는 나 보다 나은 하나님의 형상이니 나야 말로 말도 안 되는 주제에 꼴에 하나님의 형상인척 자꾸 껍데기를 덧포장하는데만 그 실상이 드러난 겁니다.

모세가 왜? 창 3장에 인간을 죄인으로부터 출발했고
그 차이로 창 1-2장에는 하나님을 영광의 자리로 출발했는지?
(이 부분은 누가복음 이번 주 설교에 아주 명확하게 나타납니다.)

너희들은 원래 없었던 자리였다고 이미 선언하고 창 1-2장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증거하고
그 차이로써 죄인이 하나님의 형상을 증거하기 위해 동원되는 긍휼의 그릇 진노의 그릇으로 증거 됩니다.

그러나 인간을 창 1장부터 출발하는 해석이나, 창 3장을 죄인으로 출발하지 않는 인간론은
진노의 그릇 긍휼의 그릇으로 인간을 둘로 절대로 나눌 수 없다는 취지로만 나열하는 이유가 하나님 형상 회복 운동을 하면 된다는 식으로 결국은 행함 문제로 빠져 버리기에
지극히 사적인 용어 곧 종교적 용어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 조차도 인간의 장난감 노리개 이니까요.

사적인 용어가 아닌 십자가의 영의 언어는 결국 죄인의 자리로 볼 수 밖에 없는 겁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증거하기 위한 피조물인 죄인입니다.

원래 없었는데 죄인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님을 목격하고 증거하게 되었다는 그 영광에 참예가 되었다는 자체가 죽어도 상관없을 정도로 기쁜 겁니다.

잃어버린 형상을 찾아서 미완료인 빈자리 채우고자 결핍의 창 1-2장이 아니라
이미 완료된 하나님의 형상(예수님)이기에 창 1-2장의 차이로써 죄인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증거하는 영광에 참여가 된 겁니다. 

나 하나님의 형상 아니요
예수님만이 하나님 형상 옳습니다 라는 성령의 공동 언어만을 토해내면서 말이죠.

(창세기에 참으로 희한한 용어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 형상을 인간에게 붙이면 모호하기 짝이 없습니다. 하나님 형상도 아니면서 하나님 형상인척 하게 되는 식으로 말이죠. 또 정녕 죽으리라 라는 표현도 하나님 형상이 인간이라면 인간에게 적용 되어할 것입니다. 그런데 안 죽습니다. 또 모호하기 짝이 없습니다. 뭐든지 인간에게 붙이면 모호하기 짝이 없는 사적인 용어들로만 남아버립니다.

그런데 하나님 형상이든 정녕 죽으리라 라는 죽음 조차도 뒤에 오실 예수님에게 이 의미들이 붙게 되면 명확하게 됩니다. 모호한 게 없습니다. 이 보다 더 명확 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 인간들은 성경 조차도 사적으로 더덕더덕 자기 온 몸에 도배질 하듯 말씀을 몸에 칭칭 감아도 아무리 지키고 완벽하게 행하고 해도 점점점 의문 속으로 점점점 모호함 속으로
점점점 완악하고 점점점 덥지도 차지도 않은 늘 미흡함과 미완료와 결핍의 구멍, 지옥의 무덤만 더욱더 커질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덤도 없습니다. 깔끔합니다. 모호함도 없고 의문도 없습니다.
십자가 이 보다 더 명확한 게 없습니다.

창조는 십자가로 명확히 풀립니다.

다 이루었도다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언놈이 꼬시노?

십자가만 자랑하겠노라

(갈 2:20, 개역)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1, 개역)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갈 3:1, 개역)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고전 2:2, 개역)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갈 6:14, 개역)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 6:15, 개역)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뿐이니라』
 

관리자  09-11-10 20:56 
 
말씀의 목격자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누가복음-2009/001강-눅1장1-4(말씀의목격자)-luk091108.mp3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누가복음-2009/001강-눅1장1-4(말씀의목격자)-luk091108.wmv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누가복음-2009/001강-눅1장1-4(말씀의목격자)-luk091108.hwp


001강-눅1장1-4(말씀의목격자)-luk091108전체녹취
 
20091108 우리교회주일설교녹취(누가복음1:1-4)

2009-11-08 23:15:15 이름 : 오용익

20091108 우리교회 주일설교/누가복음 1장 1-4절/부활의 목격자(이 근호목사)

(기도)

“길을 지으신 자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자가 보지 아니하시랴 열방을 징벌하는 자 곧 지식으로 사람을 교훈하는 자가 징치하지 아니하시랴 여호와께서 사람의 생각이 허무한 것을 아시느니라.”

저희들의 귀를 만드시고 저희들의 눈을 만들어서 저희의 생사와 모든 것을 지켜보시는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의 마음속이 얼마나 허무하고 헛된 줄을 이시간도 꽤 뚫어보고 계실 줄 믿사오니 이 시간 우리 마음속에 우리 자신의 생각보다 하나님의 뜻과 마음이 가득히 담길 수 있는 시간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복음 1장 1-4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86페이지입니다.

누가복음 1:1-4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군 된 자들의 전하여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다.”

성경을 보면 특별한 사람들이 나옵니다. ‘누가’라는 분도 그중의 하나가 됩니다. 신앙인들이 이 세상 보통 평범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기 위해서 천국 보내기 위해서 이런 특별한 사람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본인이 과연 구원이 될까, 내가 과연 천국 갈까, 라는 생각이 드신다면 성경에 보시면 누가라든지, 마태, 요한, 예레미야, 이사야, 아브라함, 이런 여러 특별한 사람들과 자기와 한번 견주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 사람들, 특별한 사람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특별하게 되었기 때문에, 우리 본인들이 구원받고자 한다면, 천국 가는 사람들이라고 확인하고 싶다면, 그들과 같이 특별하게 하나님이 자기를 다루고 있다는 그것, 그 공통점을 찾아봐야 됩니다.

천국 가는 사람이 특별하다면, 나도 천국가야 된다면, 나도 역시 특별한 사람일 것이고, 옛날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특별하게 다루었다면 그 동일한 특별한 다루심이 오늘날 우리를 특별하게 다루고 있을 것이라는 말이죠. 그렇게 다루고 있으니까 하나님이 나를 다루는 것과 그분들을 다룬 것과 같은 다룸, 같은 관리냐, 비교해 보면 되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반갑고 놀라워야 되고 때로는 충격을 받아야 될 것이 뭐냐 하면, 여기 성경에 나오는 이 사람들이 흔히 우리가 거리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만나는, 신문지상에서나 방송에서 만나는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보다 더 놀라야 될 것은 지금 그 사람을 보고 있는 우리 자신도 우리가 우리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훨씬 더 보통사람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는 자꾸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어 해요.

그냥 대충 살고 싶어 하고 아무렇게나 살고 싶어 하고 내 몸이 땡기는 대로 편하게 살고 싶어 하고, 남들 찜질방에 가면 나도 찜질방에 가고 싶어 하고 남들 노래방에 가면 나도 노래방에 가고 싶어 하고, 그저 남과 비슷비슷하게 살고 싶어요.

튀지도 않고 너무 후지지도 않고 그냥 어떤 무리, 집단에 섞여서 들키지 않을 정도로, 무슨 짓을 해도 안 들킬 정도로 그냥 탁류에 휩쓸려 가듯이, 언제 이렇게 세월이 갔지, 할 정도로 그렇게 조용히 살고 싶은데. 여기 성경에 나와 있는 누가, 마태, 마가, 예레미야, 이사야, 아브라함, 노아, 모세, 그들도 마찬가지로 그냥 쉽게, 쉽게 살고 싶은데 주께서 특별하게 다루었습니다.

그 다루심이 지금도 저와 여러분도 동일하게 다루시고 있다는 겁니다. 따라서 어떻게 다루는가? 우리는 공통점을 찾으면 되겠지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공통점은 하나입니다. 이 누가라는 사람은 목격자노릇을 하겠다는 겁니다. 누구의 목격자냐 하면, 우리 가운데 일어난 어떤 사건이 있었는데 그 사건을 남들은 그냥 잊어버리고 지나쳐 버렸는지 모르지만 누가 본인은 하나님의 성령을 받아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살아났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왔다는 그 사실. 남들 눈에는 그저 교회나 기독교나 예배당에서 가끔 하는 소리로 들리지만 ‘누가’ 이 사람은 ‘나는 그렇게 되기 싫다’ 하는 거예요. 이것은 내가 알고 있고 목격한 것을, 내가 들은 것을, 내 손으로 남들 앞에 예수님의 목격자로 나서야 되겠다는 겁니다.

이 공통점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다룬다는 사실, 그리고 이렇게 다뤄져야 천국 가는 사람인데 그런 공통점이 있습니까? 이런 공통점은 누가만 그런 것이 아니고 누가 이전의 구약 이스라엘집단 전체가 다 목격자였습니다. 그들은 외부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내부에서 읽어내야 될 사명을 딛고 태어난 국가가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들 바깥에는 남들 보기에는 그냥 평범한 사건, 사건들이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 바깥에 일어나는 것이 그 배후에 여호와라는 하나님이 계셔서 그 하나님이 저 이스라엘을 유일한 하나님의 자기백성으로 만들어내는 작업의 연속들로 그렇게 읽혀지는 겁니다. 그걸 두자로 언약이라 하지요.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하나님의 약속된 바에 의해서 그들은 주위에 일어나는 모든 것은 평범한 것이 하나도 없고 하나님이 기적의 덩어리로서 찾아왔다는 겁니다. 그러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모세가 인도했는데 모세는 이스라엘 사람보다 한 걸음 더 나가서 더 길게 목격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창세기 1장이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가 태어나서의 한 살 두 살 때의 일을 기억 못해요. 기껏 기억나는 것은 세 살 때부터의 일인데 그것도 충격적인 사건, 예를 들어서 잠자고 일어나니 이부자리에 오줌을 쌌다든지, 하는 그런 충격적인 사건들로부터 기억을 하기 시작하는데,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특별히 다루어서 인간들이 사적으로 기억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서 하나님이 계시로 주셔서 천지창조부터 모세를 통하여 기록이 되었으니 그것이 창세기요, 출애굽기요, 레위기요, 민수기요, 신명기였습니다.

그 창세기, 하나님만 알 수밖에 없는, 하나님만 알고 다른 사람은 일체 모르게 되어 있는 그 천기의 누설, 천지를 창조했던 그 비밀, 모세는 40일동안 물도 마시지 않고, 밥도 안 먹고 피자나 자장면 배달도 안하고, 시내산위에 올라가서 하나님과 독대해서 거기서 천기의 누설, 천지창조에 관한 모든 것을 다 알고 내려와서 다 적었습니다.

그 내용이 뭐냐 하면 ‘세상에는 시작이 있다’ 는 겁니다. ‘시작, 시작이 있다’ 하는 겁니다. 보통 인간의 시작은 기껏해야 3살, 4살, 7살 때 부모가 이혼하면 그때 충격을 받아서 그 때 일을 기억하고. 저 같은 경우에는 7살 때의 일이 기억납니다. 대구 비산동의 대성국민학교에 입학했는데 입학첫날부터, 그 당시 나라에서 쇠 필통을 나눠줬어요.

그때 한반이 60명인데 제가 제일 끝에 지금 권사님 앉아계신 그 자리에 제가 앉아 있었어요. 선생님께서 나눠줄 때 나부터 나눠주면 되는데 저쪽부터 나눠주는 바람에 60명인데 필통은 딱 59개밖에 없어서 한 개가 딱 모자라는데 내가 못 받은 거예요. 얼마나 울었는지, 국가가 나눠준 그 쇠 필통 똑같은 것을 사달라고 울었어요.

그런데 문방구에 가도 그게 있어야 말이죠. 똑 같은 것을 안파니까요. 그 때 일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그러나 창세기하고 아무 상관없는, 나, 사적인 이 몸, 그러니까 모든 인간은 완전히 토막 난 시작밖에 몰라요. 일반가정에서 기껏 자기가정을 이야기하지만, 고조할아버지까지는 안가고 보통 증조할아버지, 죽은 아버지, 이렇게 제사를 드리게 되면 그 시작이 토막 난 시작이에요.

우리 가문은 경주이씨에 산수공파가 어쩌고저쩌고, 전부 시작자체가 다 반칙입니다. 그전에 어떤 인과성, 어떤 원인과 결과 때문에 그러한 경주이씨가 되었는지 그것도 몰라요. 신당동 떡볶이 집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몰라요. 그저 자기가 시조가 되었어요. 뭐가 진리입니까? 진리에 대해서 뭘 알아요? 개 코를 알아요. 자기 몸, 몸의 시작밖에 모르는데.

하나님께서 다루는 사람은 자기 몸에서 있는 시작을, 그것을 자기의 바탕으로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이 길게 깔아준 그 바탕을 자기의 새로운 바탕으로 교체를 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특별한 다루심입니다. 우리의 바탕을 평범한 보통 사람들처럼, 자기 집안이야기로 시작해서 자기집안이야기로 끝내는 그런 시작이 아닙니다.

여기 주보에 바뀐 것이 있지요. 전에는 우리교회 개척을 언제 했는지 그게 있었는데 없앴어요. 교회시작은 창세전부터인데 교회가 몇 년도에 시작했다는 그런 것은 필요 없어요. 이걸 없앴다는 것이 굳이 중요한 의미도 없습니다만 기분 나빠서 없앴어요. 교회의 시작이 어떻게 8년입니까? 창세전인데, 그리스도 몸인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바탕을 바꿔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처음에 창세기부터 시작하면서, 그 창세기에서 모든 것이 시작만 되는 것이 아니에요. 그 시작이 되면서 댐 터지듯이 위에서 물이, 그 시작과 더불어 역사의 흐름과 더불어 바탕이 죽죽 이어지면서 그 원리가 그 위에 완전히 흘러내려옵니다.

그 흘러내려오는 성경의 대목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요한 계시록 22장 1-2절에 보면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생명나무, 어린양의 보좌가 있고 거기서 뭐가 흘러나와요. 뭐가 흘러 나오냐 하면, 생명수 강이 흘러 나와서 모든 세상이 새 하늘과 새 땅 천국을 두루 두루 흥건히 적심으로 강이 되고 그 강 주위에 가로수가 생명나무 가로수가 있는데, 그 가로수에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는 과실이 주렁주렁 맺혀 있더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사적인 몸의 시작 말고, 원래부터 있었던 그 시작은, 그 시작만 할 뿐 아니라 거기에다가 만물을 살리는 그 원리가 주르륵 타고 내려와요. 어디까지? 마지막 마무리까지, 끝까지, 천국까지 그 물이 흥건히 흘러서 그 보를 적시듯이 죽 흘러 내려옵니다. 그걸 모세가 봤다 아닙니까? 그걸 모세가 본 거예요. 그걸 엘리야가 본 겁니다. 그걸 아브라함이 본 거예요.

그걸 누가가 봤기 때문에 그는 이 일에 대해서 입을 못 다물겠다는 겁니다. 나는 목격자가 되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걸 듣고 있는 저희들이 이제는 제 2의 누가, 제 3의 누가가 되도록 주께서 그렇게 다루시는 겁니다. 일반적이고 사적인 자기 몸, 자기 태어난 자기가문, 이것부터 자기시작을 출발한다면 그 사람은 뭐든지 바깥을 관찰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 구약성경 전체에 하나님이 만드시고 하나님이 그 원리를 듬뿍 듬뿍 담아서, 그것도 팥빙수처럼 가득가득 담아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죽 흘려 보내주면 어떤 차이, 어떤 변화가 있느냐? 세상 사람들은 신을 찾아가는 거지만, 이스라엘의 특징이 뭐냐 하면 신이 이스라엘에게 질문을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신은 이렇다’고 하고 ‘이런 하나님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이스라엘은 그렇지 않습니다. 묻습니다. ‘너는 누구냐?’ 라고 물음을 통해서 우리를 찾아와요.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근호야, 네가 어디 있느냐?’ 이렇게 물어요. 하나님이 묻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이 어디에, 어느 구석에 박혀 있는지를 몰라요.

이사야 45장에 보면 하나님은 숨어계시는 하나님이에요. 숨바꼭질해요. 찾아도 찾아지지를 않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찾아지지 않는 하나님께서 세상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자기 사람 회수하겠다고, 자기사람 찾아내겠다고 직접 이 땅에 뛰어 내려왔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3장에 보면 세례요한이 이런 이야기를 하지요. ‘하늘에서 주시지 아니하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그 이스라엘, 하나님의 원리, 시작을 해놓고 이 천지창조를 살리는 원리 또는 죽이는 원리가 가득 담겨 있는 이 세상 이스라엘 속에서, 정말 하나님을 만났던 이사야 같은 사람은 이렇게 했습니다. ‘화로다. 내가 망하게 되었구나.’

진짜 하나님 만난 사람은 그렇게 이야기해요. ‘화로다. 내가 망하게 되었구나. 내가 망하는 백성중의 한 사람이 되었구나.’ 나만 망하는 것이 아니고 온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 앞에서 망할 집단인 것을 알게 된 거예요. 이것은 저주성입니다. ‘아, 저주받아야 되겠구나. 저주 받는 것이 합당하겠구나.’ 이걸 알게 된 게 진짜 하나님 만난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사도행전 9장에 보면 나오지요. 사도바울이 예수님 만날 때, 너무 놀라서 말에서 떨어졌지요. 완전히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주여, 누구십니까?’ 다른 사람은 ‘이 양반이? 여기 아무도 없는데 지금 이 사람이 헛소리를 하고 있네. 여기 누가 있다고? 여기 누가 있다고 그 따위 소리를 하느냐?’ ‘너는 모르지? 나는 안다. 주여, 누구십니까? 주여, 누구십니까?’

사도바울은 자기의 시작, 자기가 자기의 바탕이 되어서, 이것이 인생의 전부인줄 알고, 자기바탕에 인생의 모든 세상을 다 쓸어 담아서 ‘이것이 인생이고, 이것이 천국이고 이것이 하나님이다’라고 규정을 지어 놓았는데, 막상 주님이 나타나서 그게 완전히 다 뒤집어져버렸어요.

자기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주여, 누구십니까’ 라는 말이고 그 순간 자기는 죄인중의 괴수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죄인중의 괴수된 것을. 거룩하신 분은 하나님밖에 없고, 자신은 진짜 거룩한 분 앞에서 전혀 속물이고 더럽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비로소 나는 더러운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시작에 의해서 결국 인간이란 뭐냐? 인간이 우선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에 있어서 우선은 전 세계를 타작마당으로 만드는 거예요. 필드, 공간, 하나의 전체를 공간으로 만든 겁니다. 공간으로 만들어놓은 이유가 뭐냐 하면, ‘심은 대로 거둔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겁니다. 그게 갈라디아서에 나옵니다.

갈라디아서 6장 8절에 보면,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이미 그 타작마당이라는 그 마당에서 주님이 계속 뭔가 흩뿌리듯이 뿌려주고 있었던 겁니다. 그 뿌리는 씨앗 중에 하나가 저와 여러분들이에요. 그리고 그 뿌리는 씨앗들이 뭐냐 하면 가라지고, 피고, 쭉정이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타작마당을 만드시고 쭉정이도 뿌리고 천국 들어가야 될 하나님의 알곡의 씨도 뿌려놓고 그래놓고 그 타작마당을 계속해서 운영해 오신 겁니다. 마태복음 3장 11절에 보면 세례요한이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내가 감당 못한다. 너희들 나보고 시비를 거는데 왜 자꾸 나만 미워하고 그래. 나보고 시비 걸지 마라. 내 뒤에 오시는 분은 감당 못할 분이다.’ 그분은 죽인다, 이 말이죠.

손에 뭘 들고 있단 말이지요. 뭘? 타작할 때 쓰는 키, 손에 키를 들고 오시는 분인데…, 주님께서 빈손 들고 오시는 줄 알았지요. 아닙니다. 몽둥이 들고 왔어요. 그분은 타작마당을 깨끗하게 정하게 하시는데 어떻게 분류하시느냐 하면, 알곡은 모아서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기 위해서 타작마당을 심판의 마당으로 분명하게 드러내는 작업을 손에 키를 들고 하시는 겁니다.

그럴 때, 이 사실을 우리가 받았을 때, 그동안 인간은 자기중심으로 시작을 사적인 내 몸, 내가 출생했다는 데서부터 시작했던, 그래서 내가 나의 인생의 바탕으로 간주했던 이것이 얼마나 저주스러운 인식이고 사고방식인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얼마나 일방적인지 몰라요. 나밖에 모르는 거예요. 개 코도 아무것도 모르면서 인생을 논하고 철학을 논하고 과학을 논하고 세상을 논하고 심지어 하나님이 어떻고 교회가 어떻고 그런 소리를 한 겁니다. 주님께서 하신 이 타작마당이라 하는 것은 결국 우리를 뭘 로 바꾸어 놓느냐 하면 우리를 주체가 아니고 하나의 흐름으로 바꾸어놔요. 과정으로 바꾸는 겁니다.

제가 어느 강의에서 이 내용을 하는데 사람들이 이 대목에서 굉장히 난색을 표하고 있어요.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겁니다. “‘사람은 존재가 아니고 과정이다’ 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라고 울산에서 강의를 하는데 어떤 목사님이 중간에 그렇게 물으셨어요. ‘사람이 존재가 아니고 과정이다’ 라는 말이 너무 압축이 되어서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것이지요.

흐름이라는 것은 일종의 액체가 되어서 죽 부우면 줄줄 흘러내려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흘러내려간다는 것은 방향만 이렇게 저렇게 바꾸어주면 그냥 그 방향 따라서 죽 가게 되어 있어요.

말이 참 어렵다! 쉽게 갑시다. 고속도로 휴게소에 가면 여자화장실과 남자화장실이 구분되어 있는데, 여자 화장실에 가서 남자가 있는 가 찾아보세요. 없지요. 그러면 여자화장실에 가서 아주머니한테 물어보세요. 왜 당신은 남자화장실에 가지 않고 여자화장실에 갑니까, 라고 물으신다면 그분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에이, 꺼져라’ 할 겁니다.

여자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여자화장실에 가고 남자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남자 화장실에 가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 자연스럽다는 것은 내가 나를 생각한 이 전부터 나를 결정짓는 것, 나를 규정하는 것이다, 라는 말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엄마, 나 여자로 태어날래. 엄마, 나 남자로 태어날래.’ 이렇게 건의해서 ‘가만있어봐라. 내가 네 아버지께 물어보고 알아서 남자든 여자든 결정할게.’ 그래서 남자나 여자로 태어나는 법이 없어요.

남자와 여자가 남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남자화장실에 가고 여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여자화장실에 가는 것처럼, 세상의 모든 것은 본인이 하고 싶은 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주체라고 하지만 본인의 결정권, 주체는 없다 이 말입니다. 없고, 판을 죽 내리면 중력이 당겨 가는대로 골이 생기는 대로 그냥 죽죽 자기 자리를 찾아 흘러가는 거예요.

그래서 인생이라 하는 것은 하나의 과정이고 흐름이다, 이 말입니다. 요한복음 1장 3절, 4절에 보면,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라고 되어 있어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 늦게 오신 분들이 있어서 설교를 다시 하겠습니다.

늦게 오신 분들이 있어서 어떤 때는 설교를 한 11시 30분에 시작할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그럴 필요 없이 한 번 되풀이 하면 됩니다. 처음에 모든 것이 시작이 있다고 했습니다. 시작이 있는데 그 시작은 내 몸에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고, 내 몸이 있는 것도 줄줄 흘리면 그냥 흘러가는 하나의 흐름으로서 날 만든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돼요. ‘하나님이여, 나는 자연스럽게 어디서부터 어디로 흘러갑니까?’ 이렇게 물어야 된다 이 말이지요. ‘나는 전도했습니다. 나는 헌금했습니다. 나는 오늘 교회 나왔습니다’ 이렇게 나는, 나는, 하지 말라, 이 말이지요. 자꾸 물어야 돼요. 우리가 주님을 관찰하면 안 되고, 주님이 우리를 관찰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주님이여, 저는 어디서부터 와서 어디로 흘러갑니까?’ 라고 물어야 된다는 말이지요. 그게 뭐냐? 나는 주체가 아니고, 주체는 따로 있고 나는 주체에 의해서 흘러가는 하나의 흐름에 불과하고 액체에 불과하고 하나의 과정에 불과하다, 이래 되는 겁니다. 그게 요한복음 1장 3절, 4절의 말씀이에요. ‘만물이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다’ 는 거예요.

참 쉽지요. 저도 이것 아는데 수 십년 걸렸는데 쉽기는 뭐가 쉬워요. 요한복음 1장 3절에 나와 있는데, 이걸 나와 결부해서 생각을 안 하고, ‘예수님이 아마 그럴 거다’ 이렇게 생각한 거예요. 이 성경말씀이 이 말씀대로 나를 다루겠다는 것인데, 우리는 나를 터치하지 마세요, 해 놓고는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사세요. 나는 나대로 살 겁니다.’ 이러니까 성경이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세상의 모든 것이 예수님 없이는 된 것이 없다고 한다면 거기에 누구도 포함시켜야 하느냐 하면 바로 나 자신을 포함을 시켜야 돼요. 포함을 시킬 때는 나는 여기 있다, 하지 말고 나를 마늘 부수는 데 있지요, 아니면 참기름 짜는데 가서 나를 거기에 집어넣으세요. 집어넣어서 아예 바수든지 아예 물길을 내든지 해서 아예 나, 라는 이 딱딱한 쇠 덩어리를, 차돌 같은 덩어리를 하나의 참기름 같은 흐름으로 만들어버리라, 이 말이지요.

주여, 오늘은 어디서부터 어디로 가고, 내일되면 또 내일은 어디로 흘러가야 됩니까? 다음에 또 누구를 만나야 됩니까, 라고 해야 된다고요. 그런데 그 흐름가운데서 주께서 타작하는 타작마당의 원리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축복했는데 축복만 한 것이 아니고, 그 축복이라는 말을 설명하기 위해서 저주를 반드시 이야기 한 겁니다.

제가 아까 이야기한 이사야 6장에서 이사야가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라고 했지요. 다윗 같은 경우에 뭐라고 했느냐 하면, ‘주여, 주께서 원하는 것은 상한 심령입니다. 내가 태어날 때 죄인으로 태어났군요.’ 우리는 어떤 참기름이냐 하면, 시커먼 죄인이라는 참기름으로 이 땅에 태어나게 됩니다.

죄인이라는 참기름으로 태어나면 어떤 특징이 있느냐 하면, 죄를 드러내는데 이 죄가 어떤 죄냐 하면, 시작을 창세기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고 나부터 시작하는, ‘하나님, 저리 꺼져! 하나님, 저리 가! 나는 뭐든지 나부터 시작 하겠어’ 라고 자기부터 시작하는 그런 경향을 죄라는 이름으로 내요. 나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죄가 되는 겁니다. 나부터 시작하게 되면 그 때부터 뭘 끄집어 내느냐 하면, 내 몸을 편하게 하면 그걸 축복이라고 하고, 내 몸을 불편하게 하면 그걸 저주라고 하는 거예요.

지금 제가 이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사람들은 그냥 여기 내 몸이 있으면 그 때부터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고 내 나름대로의 역사를 만들어 내는데 그 역사가 뭐냐 하면, 내가 축복받는 역사, 그리고 나를 해코지 하는 놈은 저주받는 역사, 라는 새로운 역사가 여기서 기어 나와요.

그렇다면 바탕이 되는 것은 주님의 타작마당인데 우리가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우리도 하나님 비스무리 하게 되어서 내가 독단적으로 나만의 마당을 따로 만들어요. 이것은 내 마당이고 내 왕국이고 내 천국이고 나의 세계가 되는 겁니다. 나의 세계에서 나름대로 일방적으로 축복과 저주를 누가 결정하느냐? 내가 결정하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 왜 오느냐 하면 내가 복 받기 위해서 오는 겁니다. 복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내 마음을 편하게 하는 것은 복이고,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저주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 와서 신에게 따지는 거예요.

‘지난주에 복을 달라고 했는데 왜 기도응답 안 해줍니까? 귀머거리입니까? 하나님, 똑바로 하세요. 하나님답게. 나는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에요. 나에게 축복을 달란 말이에요. 돈 좀 더 달라고? 돈 밝히기는! 더 줄게요자, 이제 복 주세요. 복 달란 말이에요.’

앞으로 일주일 안에 수능이 있잖아요. 수능 시험이 있다고요. 고 3 엄마들 전부 다 비상입니다. 생전 고 3 애한테 신경도 안 쓰다가 그 때 되면 신경 쓰는 척 하면서 지금 붙들고 있어요. 온 집안 조용히 해야 돼요. 복 달라는 겁니다.

‘내 위주로 복 다오. 만약에 나한테 이런 복을 안주면 하나님은 나에게 저주를 준 게 됩니다. 그런 저주를 주는 하나님을 나는 발길 끊겠습니다. 당신하고 상대 안하겠습니다. 나한테 복주는 하나님을 찾아서 다른 교회 가겠습니다’ 라고 나온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그러한 자기위주의 복과 저주 때문에 오늘 누가 복음에 보면 어떤 사건이 벌어졌는데 그 사건이 뭐냐 하면 십자가사건이 벌어졌다는 겁니다. 처음에 천지를 창조하신 그 생명 되시는 하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이 세상에 내려왔는데, 와보니까 뭐가 다르냐 하면, 인간들 각자 나름대로의 자기가 요구하는 축복이 있고 자기가 요구하는 저주를 각자 따로 따로 다 꼬불치고 있는 거예요. 각자 전부 다 있는 거예요.

여기서부터 그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결국 망해야 될 이유가 바로 거기서 발생되는 겁니다. 이스라엘나라를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니까 하나님이 함께 있는 나라가 뭘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했느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으니까 이제 우리에게 복이 오겠지’ 라고 복이 온다고 예상을 했는데, 복이 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함께 있음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얼마나 더러운지가 드러나니까, 이제는 그들이 복주는 신을 찾아서 이스라엘의 여호와를 버리고, 이름은 여호와인데 알맹이는 바알과 자기에게 복주는, 자기존재를 크게 만드는 그런 신, 바알 신을 섬기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망하게 했습니다.

망하고 난 뒤에 유대민족이 그 짓을 또 하고 있을 때, 주님께서 자기 아들을 보내셔서, 직접 천지를 만드신 분과, 인간과 딱 만나게 해주니까 거기서 십자가죽음이라는,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것이 드러난 겁니다.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이스라엘백성들이 자기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고, 다른 나라보다 자기들이 축복받았다고, 특별한 선택을 받았다고 우겼는데 사실은 그것이 아니었다’ 하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3장 10절에 보면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이 율법을, 이 성경책을 준 것은 …, 인간들은 자기가 흐름인데 자기 자신을 흐름인줄 모르고 딱딱한 주체인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거기에다가 하나님이 법을 주니까 ‘아, 이 법 지키면 복 받고 이 법 안 지키면 저주받으니까, 하나님이여, 내가 이 법을 지킬 테니까 축복을 내 놓으라’ 고 이렇게 해석을 한 겁니다. 그렇게 해석을 했는데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그 해석이 거꾸로 된 해석이라는 겁니다. 그 해석은 반대로 해석해야 된다는 겁니다.

법을 줬다는 그 자체가 너 자신도 모르는 ‘너는 저주 받아야 마땅함’을 폭로시키기 위해서 법을 준 거예요. 이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우리는 이 성경대로 살면 구원받겠지’ 라고 생각하신다면 그것은 큰 오산입니다. 이 성경을 주신 것은 우리가 짐작도 못할 정도로 우리가 저주받아야 마땅한, 축복이 합당한 사람이 아니고 저주가 합당한 사람인 것을 폭로하기 위해서 성경을 준 거예요.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교회 와서 뭘 달라고요? 복을 달라고? ‘저 사람들은 갓 바위를 섬기는데 우리는 교회 왔으니까 저 사람과 달리 복 달라’는 거예요. 내가 잘 되게 해 달라는 겁니다. 죽어서 천국가게 해 달라는 거예요. 그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잘못된 거예요. ‘네 주제를 파악하라’ 고 주신 성경이에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셔서 그 피로 말미암아 구원하신다는 것은 우리의 바탕자체가 복을 달라할 수 있는 권한이나 그런 처지에 있지 않다는 겁니다. 외부에서 예수님께서 피를 가지고 구원한다는 말은 ‘내가 조물락조물락 거리면서 성경을 지키고 뭘 함으로써, 그래서 남보다 더 뛰어나고 훌륭한 사람 되어서, 그래서 이걸 근거로 해서 복 얻어서 구원받는 그런 처지에 아예 있지 않고,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는 그 순간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주여, 누구십니까?’ 예수님이 십자가는 우리가 저주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을 질문 형식으로 찾아온 거예요.

‘아담아, 너, 저주받아야 된데이’ 라는 식으로 먼저 말하기 위해서 십자가로 우리에게 나타난 거예요. 죽은 자로서 산 자를 규정하시겠다는 겁니다. 십자가로 말입니다. 이 사건에 대한 목격자로 누가가 나서겠다는 겁니다. 우리가 저주받아야 마땅하다는 말, 이것이 여러분에게 굉장히 슬픈 이야기로 들리십니까? 슬픈 이야기가 아닙니다. 기쁜 소식, 복음입니다.

왜? 모든 천국 가는 사람은 이 과정과 절차를 통과해야 됩니다. 잃어버린 양이 아니면 우리는 구원 못 받는 양입니다. 잃어버려야 돼요. 우리는 잃어버린 양이 되어야 됩니다. 잃어버린 양이 될 때, 바로 저주받아 합당하는 것, 이 저주받아 합당한 내가 그동안 멋도 모르고, 진짜 개 코도 모르고, 내가 축복을 논했다는 그 자체가 얼마나 내 중심으로 생각하는, 내 좋으라고 하는 것인지.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너는 이런 인간’이라고 이야기한 사람이 없으니까, 우리는 곁눈질 해가면서 다른 사람 보는 것으로 비슷하게 살아가다 보니까, 너도 나 누군지 모르고 나도 너 누군지 모르잖아요.

모르고 대충 대충 열심히 하면 구원되는 줄 알았지요. 십자가 피를 직접 대해 보니까, 창 자국 못 자국 직접 대해 보니까, 사람이 나를 누구라고 이야기해주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직접 ‘너는 이런 사람이다’ 라고 비로소 이야기해주는 겁니다. 죽은 자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 안에 우리 인간이 어떤 인간이지 확정된 채 담겨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만든 역사라는 것, 그리고 주님이 만든 역사는 서로가 서로에게 죽은 자가 됩니다. 주님 보시기에 우리는 죽은 자가 되고, 우리가 보기에 예수님은 떠밀어서 죽여 버리고. 나보고 예수님이 ‘너는 저주받아 마땅하다’는 그 소리 했다고, 나 살고 싶어서 예수님을 떠밀어 버렸습니다.

그 소리가 맞는 소리인데, 그 소리가 우리의 진짜 모습인데. 여러분이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 찍는 기사 보고, 엑스레이 사진에 갈빗대 나온다고, ‘당신이 내 250만원 짜리 양복을 뭘 로 보고 이걸 제대로 안 찍고…’ 하면서 귀때기 때립니까? ‘어이, 기사! 여기 내가 입은 양복이 안 나오는데요? 사진 잘못 찍었으니까 새로 찍어. 포샵을 해!’ 이럽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래서 너는 저주받아야 마땅해’ 라는 율법적 기능을 가지고 십자가로 들이대는 겁니다. 우리가 저주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을 아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최초로 처음의 시작을 갖는 순간이 되는 거예요. ‘야, 나의 시작은 축복부터 시작한 것이 아니고, 나의 시작은 내가 저주받아야 된다는 이것부터 주께서 시작하셨구나.’

우리가 저주받는 존재라는 것에서부터 시작이 될 때, 그 뒤에 이어지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되고 하나님의 축복이 되는 겁니다. 모든 것이 축복 아닌 것이 없어요. ‘범사에 감사하라.’ 축복 아닌 게 없어요. 그래서 우리의 몸이 아픈 것도 축복이고 몸이 해체되는 것도 축복이고 죽는 것도 축복이고 죽는 것도 잠자는 것에 불과하고.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의 몸 안에 편입이 되니까 그 때부터 우리는 십자가 안에 합류케 되고 우리는 예수님을 볼 때마다 그분의 못자국과 손자국을 보게 되고, ‘그 예수님 못 자국 누구 때문에? 저 창자국은 누구 때문에?’ 물으면 우리는 ‘너 때문에’라고 이야기 하고 그렇게 주고받을 때, 그 때 비로소 우리는 영원히 살아 있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시작부터 내려왔던 원리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시작하셨고, 거기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통해서 생명나무 생명을 우리에게 흘려보내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축복을 축복되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철저하게 저주 받아 합당하다는 것을 만들어서, 저주받아 합당한 존재로 태어나야만 하는 거예요.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저주로 태어나서 예수님 피 덕분에 축복으로 전환된 사람입니다. 바로 이것을 목격하고 증언하라고 부름받은 우리가 복받은 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걸 모르고 나부터 출발하니까, 우리 가정부터 출발하고, 우리 교회부터 출발하고, 우리나라부터 출발하니까, 그 다음부터는 전부 다 남이야 죽든 말든, 남보다 더 뛰어나면 된다고 해가지고 ‘주여, 부끄럽지 않도록 남 보란 듯이 축복해 주옵소서’ 라고 축복의 교회들을 만들었어요.

어떤 사람은 만날 하는 소리가 있습니다. 교회로 가야 되는데 만날 절로 간다고. 교회 안가고 만날 절로, 절로 간다고. 여러분, 교회 다녀도 이단입니다. 교회 안 다녀도 이단이고. 교회 다녀도 저주받는 사람이고 안다녀도 저주받는 사람인데, 그래도 주께서 흐름으로 교회 다니게 하신 것은, 교회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만나서 ‘교회 다녀도 저주 받는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겁니다.

그게 바로 그리스도 몸 안에 있는 진짜 교회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이 교회 다니는 것부터 벗어나야 돼요. 아예 교회 다니지 마시고 교회가 되어서 교회에 나타나시기 바랍니다. 집에 있어도 교회, 교회와도 교회, 교회 어떤 때 안 나와도 교회, 그럴 때 여러분 속에는 여러분이 시작이 아니고, 여러분이 처음부터 끝까지 시작 중에 있는, 여러분들이 시작가운데 있는, 시작속의 하나의 흐름으로 여러분들이 관여하다가 주께서 한 90년 살게 하다가 부름 받을 때, 그 흐름은 이제는 주님 안에서 흘러가 버리는 흐름이 될 것입니다.

교회라 하는 것은 시체놀이 하는 겁니다. 시체놀이. 정말 죽어 마땅한데 오늘도 힘주셔서 은혜 주셔서, 저주받아야 될 이 사람 은혜 주셔서 이렇게 있습니다, 라고 시체놀이 해야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만 이야기 할 뿐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살아 있어서 서로 마주보고 이런 것도 이게 언제까지 흐름일지 모릅니다.

주께서 이렇게 기울여 버리면, 우리교회를 이렇게 기울여 버리면 다음 주 되면 저 뒤에 앉아계신 분이 돌아가셔서 장례 2일장 한다고 할 수도 있고, 또 앞으로 죽 기울여버리면 애 하나 임신해서 어느새 애 안고 올수도 있고. 이 모든 것, ‘네가 잘났나, 내가 잘났나’ 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다 한 물컹물컹한 흐름에서 그리스도께서 내가 누군지를 알려준 사람들의 시체들의 집합, 이게 바로 교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우리의 시작이 우리 자신부터 우리 가정부터 하지 않게 하옵소서. 어떤 사람은 출생부터, 어떤 사람은 결혼부터, 어떤 사람은 취직한 것부터, 어떤 사람은 주택 장만 한 것부터 인생을 새로 시작한다 하지만 우리의 시작과 끝은 우리에게 남아 있을 수가 없고, 우리는 주께서 흘러가게 하신대로 흘러갈 수밖에 없는 하나의 흐름인 것을, 주께서 살아계시는 흐름인 것을, 주께서 하신 사건을 증거 하는 흐름인 것을 저희들이 맘 편하게 생각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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