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귀의 일(사람의 일)

(마 16:23, 개역)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막 8:33, 개역)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가라사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마 16:13, 개역)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마 16:14, 개역) 『가로되 더러는 침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마 16:15, 개역)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 16:16, 개역)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 16:17,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마 16:18, 개역)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 16:19, 개역)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마 16:20, 개역) 『이에 제자들을 경계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마 16:21, 개역)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마 16:22, 개역)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마 16:23, 개역)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마 16:24, 개역)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마 16:25, 개역)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마 16:26, 개역)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마 16:27, 개역)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마 16:28, 개역)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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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가 겨냥하는 단 한가지! 

2009-11-13 10:40:25 이름 : 김성환  
 

불신자든 신자든 그들의 언어속에 베여나오는 단 한마디, '십자가는 이제 나무 막대기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더 이상 그 놈의 십자가가 그만 이야기하라고 다그친다.' 교회가 소형이든 중형이든 대형이든간에 그들의 입 밖으로 나오는 한 마디 ' 그 놈의 십자가 이제 그만 이야기 해!'

기존교회의 설교가 구역질나서 이단(사이비)로 빠진 자들의 기껏 나온다는 단 한마디 '이제 십자가 그만 둬!' 기존교회가 전하는 설교가 싫어서 출교당하고 뛰쳐 나갔건만 그들의 입 밖에 흘러나오는 것은 여전히 '맹탕'이다.

그럼 기존교회에 여전히 찰거머리처럼 붙어있는 교인들은 어떠한가? 개쳑교회의 창립맴버로서 집안일 제쳐놓고 새벽부터 교회에 출석하여 밤늦도록 충성봉사했던 교인들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 '십자가 복음이 뭔데?'.

이제는 천 명 이상의 교회 장로 집사 권사로 자리매김을 한 나란 존재는 복음이고 십자가고 한낯 목에 걸치고 다니는 악세사리에 지나지 않는다. 손때뭍은 교회벽과 바닥 그리고 헌물로 받친 피아노와 강대상 그 모든 것들이 자신들의 이름이 그곳에 찰떡처럼 뭍어 있다. 교회와도 자신이 그 헌물에 집에 누워 잠자도 자신이 그 헌물에 엿처럼 착 달라 붙어 있다.

창세전 후 지금까지 악마가 노린 것은 단 한가지 사건 밖에 없는 것 같다(아무리 따져보고 생각해 보아도).

'십자가에서 터져버린 하나님의 진노와 용서!'

나 자신안에 아담과 같은 십자가 피를 대적하는 원수가 들어 있었다. 나 자신도 몰랐던 그 악마가 뱀처럼 마음 밑바닥에 터잡고 있었던 것이다.

(요 13:2, 개역)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악마는 이미 나의 아비였고 살인자였고 거짓말쟁이였고 천하를 속이는 자였다. 이 아비가 나의 마음속에 몸 길이 16m와 체중 300kg보다 훨씬 더 이상되는 엄청난 세력으로 터잡고 있었다.

 (요 8:44, 개역)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이번에 중국에서 공사를 하던 한 일꾼이 큰 뱀을 잡았다고 하는데...믿거나 말거나)

악마의 말 : '너는 십자가 복음만 나오면 너는 무조건 따져보지도 묻지도 말고 그냥 뱉어버려! 알았지!

인간과 나의 대답 : 네! 그럼요! 아비님!

십자가 밖에서 인간이란 자들이 이해되었다. 그들과 난 별반 다르지 않는 가짜인간이였고 아비도 같은 아비였기에 그냥 그저 유유상종할 뿐이었다. 인간들 자체가 싫든 좋든 그냥 그저 장망성을 향해 달려가는 같은 배의 동료들이요 그 아비의 자녀들이었다.

그런데 왜 십자가에 마냥 땡길까! 무엇이 누가 악마를 아비로 알고 있던 가짜인간에게 들어왔나?

가짜인간의 판별법은 단 한가지! 십자가가 당신에게 땡기는가? 아님 나도 모르게 싫은가?

(주저리 주저리 몇 자 적고 갑니다...안산강의-'십자가 복음을 들으면 피폐해지나?')

 
 
 
댓글

김대식 091113 1229

마귀는 모호한 것을 증식하는데 있어서 모호한 것은 다 용서해 주기로 했다.
그런데 마귀가 이 모호한 것을 용서해 주기로 한 것에서 명확한 죽음에 대한 해석을 하는 실체가 나타나면 그 광명한 천사도 화를 내면서 안색이 변한다.

모든 것을 모호하게 안개로 만들었는데 그 안개를 젖히고 명확한 실상이 드러나면 비상사태가 아니고 무엇이랴?

멜기세댁이라는 실상이 죄가 익을때까지 잠시 모호하게 하니
그 모호하게 한 빈자리를 넙쭉 앉아서
그 모호함을 가지고 계속 사기를 친다.
인간 제사장이라는 모호한 의문의 직분(수건으로 얼굴을 가리운)으로 사기를 친다.
사라질 영광도 감당이 불감당임에도 불구함에도
실체의 영광은 오죽하랴?

왕을 증거해야할 그림자가 도리어 실상은 뒤로한채
그림자 주제에 왕의 보좌를 넙쭉 앉아버렸다.

사라질 모호한 직분과 실상의 영광의 사이에
이미와 아직의 사이에
인간은 모호한 말로 그 사이까지만이라고 마음껏 사기를 치고
모호한 것으로 막을 때 까지 막아보자는 장난질만 친다.

자기도 못들어가고 남들도 못 들어가게 하는 완악함

(눅 11:46, 개역) 『가라사대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눅 11:47, 개역) 『화 있을진저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는도다 저희를 죽인 자도 너희 조상들이로다』
(눅 11:48, 개역) 『이와 같이 저희는 죽이고 너희는 쌓으니 너희가 너희 조상의 행한 일에 증인이 되어 옳게 여기는도다』
(눅 11:49, 개역) 『이러므로 하나님의 지혜가 일렀으되 내가 선지자와 사도들을 저희에게 보내리니 그 중에 더러는 죽이며 또 핍박하리라 하였으니』
(눅 11:50, 개역)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눅 11:51, 개역)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
(눅 11:52, 개역)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 가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지도 모르면서 남까지 모르도록 모호하게 귀를 막고 길목에 죽치고 앉아서
통행료 내라고 사기친다.

짐승이 뭔가?

동물의 왕국에서 참 희한한 광경을 본적이 있다.

이동 동물들은 주로 약한 동물 떠돌이가 주류이다. 이유는 딱 하나
먹는 풀 뜯어먹기 위해 늘 이동이다. 그 정도로 무능할 뿐이다. 만나 주워 먹듯이 심지도 기르지도 않은 것 주워 먹다 보다 이동한다.
(산 넘고서 물 건너서 바다 건너셔 뗏목 타고가다 뒤집어져셔 모타보트 갈아탓는데 모타보트 기름떨어져 그냥 막 헤엄치면 셔 셔 셔    셔~셔르셔셔~ 셔!셔!)

그런 이동에 항상 미리 올 것을 예측을 하고 가는 길목에 떡 하니 버티고 있는 것이 악어이다.

레비아단 ㅋㅋㅋ

우찌 알았을까잉

그런데 더 희한한 일이 있다. 마치 솔로몬이 그렇게 알고파 했던 지혜, 욥기에 나오는 지혜를 보는 듯 했다. 왜 아무도 살지 않고 매마른 광야에 비를 내리는지 아느냐? 라는 물음이 하나님의 음성으로 나타나듯 말이다. 모호함이 없는 명확한 광야의 소리이다.

그 희한한 명료한 실상이 무엇인고 하니
이미 훤희 다 보이는 판 이다. 구조이다.

아니 일부러 저쪽 악어들 중에 늦게 지각한 악어가 있을까봐 여유있게 기다려 준다.
또 바로 지나가지 않는다. 그 풀을 향한 젖과 꿀을 향한 요단강을 건너기 직전에 마치 할례 의식을 하는냥 의도적으로 대대적으로 기다린다. 기다리고 기다린다.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서 만나리 라고 찬양을 부르는냥
드디어 우두머리가 건너니까 다 따라 대대적인 군집현상처럼 뒤를 끝도 없는 행렬처럼 가로질러 간다. 우는 사자들이 뻔히 옆에서 갈기 갈기 찢어버려도 뻔히 알고서도 피하지 않고 가로지른다. 애굽 홍해 같은 기적은 없다. 목에 물이 가득차고 눈에 모든 모호한 것을 까가득 채워도 오로지 그 죽음의 강을 건넌다.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 따위는 없다. 오로지 죽고자 가는 듯 보인다. 삥 둘러서 악아가 모이지 않는 곳 억수로 많다. 그런데 일부러 모인 곳에만 골라 간다. 광야 이스라엘처럼 죽을 곳 원망할 곳만 양식 없는 곳 물 없는 곳 생명 없는 곳만 골라 골라 가는 듯 생명이라고는 없는 곳 지혜라는 곳은 없는 곳만 골라서

짐승이 미리 기다리고 있는 곳만 골라서 간다. 어리석음만 있을 뿐이다.

이것보다 더 명료하고 명확한 것이 없다. 모호한 것이 일체 없다.

죽음을 넘어서지 않는 이상 생명이라는 실상은 없다.
지독한 미움을 넘어서지 않는 이상 편애를 알 길이 없다.
두려움을 넘어서지 않는 이상 사랑은 없다. 사랑은 모든 두려움을 없이 하기 때문이다.
죽기를 무서워 하는 종에게 죽음이라는 허상 모호함의 안개를 제대로 걷어치우는 자유가 누구인가를 실상이 누구인가를 믿음이 누구인가를 보여준다.
이제 그림자 따위 모호하고 의문이고 사라질 것은 무대 뒤로 누락 되고 사라져 지도록 되어 있다.

무리의 우두머리가 기껏 하는 행동이 무리를 살리기 위해서 악어를 피해 저렇게 많은 공간을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다 냅뚜고 의도적으로 미리 쩌억 입벌리고 기다리고 있는 그 악어의 입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가당한가 말이다.

광야 이스라엘이 그래서 모세 때려잡자 공산당 무찌르자 모세 라는 구호를 안 외치고 배기느냐 하는 말이다.

그러나 참으로 고맙게도 그런 모세 없다.
모세 뒤를 쫏겠다 라고 나오는 허접스러운 모호한 것들이 그 누락된 빈자리를 안쓰럽게 채울려고 한다.

또 광야 이스라엘도 이제는 다 사라졌다. 분명히 생생하게 명료했던 광야를 누비고(죽은자 같으나 산자) 악어의 입속을 누비고 죽음 속을 누비고 물 없는 곳을 누비고 죽음의 바다 속을 누볐던 광야 이스라엘은 없고 그저 허접스러운 모호한 의문의 의심스럽기 짝이 없는 교회라는 집단이 바벨탑인지 취미가들인지 알 수 없는 모호하기 짝이 없는 그럴싸한 포장을 입혀서(금도금) 울리는 꽹과리 소리만 요란하게 외치면서 잡소음만 낼 뿐이다.

빈자리를 깡통들만 가득차서 모호한 중언부언 지도 못 알아 먹고 남도 못 알아 먹고

지도 안 들어가고 남도 못 들어가는 소리만 외친다. 우려 먹는다. 새것이 없다. 새술 새부대의 명료한 소리가 없다. 그저 입안에서 우물 우물 거리며 여전히 헌술 헌부대 시대만 정통이라고 우기면서 우려먹는다. 지도 모르면서 남도 모르게 말이다.

(눅 11:52, 개역)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 가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그림자를 계속 우려 먹겠다는 것이다.

명료한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바로 피에 대한 명확한 증거를 막겠다는 심뽀다. 막는다고 막을 피였다면 흐르지도 않았다.

한번 뚫혀진 것이면 이미 다 뚫혀진 것이다. 점점점 명료하고 점점점 명확하게 증식만 될 뿐이다.

그래서 막겠다고 나서는 놈들이 많아야 한다.
그래서 짐승 레비아단 악어가 미리 입을 쩌억 벌리고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증식을 위해서 말이다. 잉여를 위해서 말이다. 취소 시킬 사랑이 과연 있겠는가?
푸하하하하 생각 해 봐라?

취소 될 사랑 같으면 아예 시작도 안했다.

시작을 했다는 말은 이미 끝났다는 것이다. 양보 없다. 알파와 오메가 이다.

바로 모든 것이 주로 부터 와서 주께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가기 위함이다.

사랑으로부터 시작해서 사랑만으로 말미암고 사랑만으로 돌아간다.

이 명확하고 명료함 앞에 모호하고 사라질 안개들은 고맙게도 사라져주기 위해서라고 배치 된다.


인간은 이 명확함이 드러났음 앞에서 또 드러났기 때문에
여전히 마귀와 손잡고 그림자를 붙든다.

사도행전부터 그 뒤의 계시록 까지, 아니 성경 전체 내용은 바로 이 싸움이다. 초대교회의 싸움은 이 싸움이다.

그림자와 실상의 싸움이다. 교회 내부에서 말이다.

왜 말씀을 듣지도 않는 사람들이 왜 목사까지도 용서할 마음을 미리 만반의 준비로 입을 쩌억 벌리고 있는가?

이 보다 더 선한 것이 어디있는가?

그 지옥 같은 종말의 불 속에서 목사를 용서하며 태우겠단다.
(안태워도 그동안 사기 친 돈으로 그 좌석을 살려고 그동안 번 돈으로 남들보다 먼저 티켓을 끊는줄도 모르고 말이다. 그야말로 대중이 어리석다. 쉰들러 리스트의 쉰들러이다. 구원열차를 태우겠단다. 성경도 싫고 말씀도 싫고 예수도 더더욱 싫어하지만
그저 같은 연약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라는 이유 만으로 이미 용서 하면서 말이다.)

목사는 반대로 저들을 용서 하겠단다. 그 와중에도 자존심이다.
(사실은 목사가 왜 착한척 하는 줄 아는가? 불쌍히 여김 받아야 꽁꼬물이라도 얻어먹기 때문이다. 미리 미리 그 술책으로 대중을 세뇌 시켰기 때문이다. 즉 목사 자체가 마약 덩어리이요 중독성이 강하며 끊을 수 없는 백해무익이다. 아니 바이러스가 바이러스를 걱정해 주다니 ㅋㅋㅋ )

웃낀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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