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케 하는 온전한 율법

야고보서의 자유의 율법과 12지파 이스라엘


(약 1:25, 개역)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 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약 2:12, 개역)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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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수요예배 설교 중에 광야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광야의 의미는 살수 없는 땅이다. 그 살 수 없는 땅에 이스라엘을 집어 넣으신다.
또 그 속에서 도저히 살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거룩한 율법까지 주어진다.

그리고 우상이라는 개념과 여호와의 차이성도 설명이 되었다.
결국 12지파 이스라엘이라는 존재는 우상과 여호와가 누구인가를 광야 속에서 보여주도록 되어 있다.

이스라엘은 신과 겨루어 싸워 이긴자들이다. 이스라엘이 가는 곳에는 우상은 그 근원의 뿌리까지 밝혀지고 박살이 나도록 되어 있다.

이스라엘이 주체가 아니라 이스라엘 배후에 있는 여호와 때문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본인들은 모른다.

그저 이스라엘은 모든 인간들의 근원인 땅에서 붕 떴을 뿐인 땅의 근원에서 짤렸을 뿐인데 말이다. 땅의 출저인 양식도 못 먹을 뿐인데 말이다. 오로지 하늘의 출저인 만나만을 광야에서 죽도록 먹도록 되어 있을 뿐이다. 처음에는 자기를 위한 양식인줄 알고 꿀 같이 달았다. 그러나 인간 곧 이스라엘 조차에서 마저도 해석 될 수 없는 만나(이것이 무엇인가?)는 인간들의 본능인 그 적응성과 흡착성(흡수 빨아 들어서 모방창조성)에 도리어 거부감이 드는 양식이 된다. 육을 죽이는 양식이요 쓴나물이요 박한 음식이 된다. 자기를 위한 양식의 영역을 도리어 짤려야만 하는 양식을 말해주는 이스라엘이 되어야 한다. 곧 낮추심의 양식이다.

광야에서 주어지는 율법은 곧 낮추심(심판이다. 육을 죽이는 성령의 소욕이다.)

바로 자유케 하는 율법이란 낮추겠다는 취지이다. 지키라는 취지로 들리는 자들에게는 도리어 율법을 통해서 지킨 자아를 자랑하도록 입이 건지러워서 못 견디도록 했다. 말씀을 지키면 골치 아프다. 말씀 보다 말씀을 지킨 자신을 내세우도록 되어 있다.

예수님은 항상 말씀을 앞장세우고 자신은 늘 뒤로 빠져 버리는 누락성을 성령의 인도로 보여주셨다.

그러나 인간들은 성령의 소욕 보다 육의 소욕으로 말씀을 지킨 건전한 자신과 그런 자신에게서 도출된 건전한 신학을 앞장세우는 악마의 짖을 아주 당연한 듯이 주장하고 심지어 목숨까지 걸 정도로 육의 소욕을 드러낸다. 이것이 수요설교에서 우상이라고 표현 했다.

자기를 위한 예수, 자기 교회, 자기 가정, 자기 국가, 자기 사적인 영역을 위한 여호와는 우상이다.

그들은 분명 구약 이스라엘 백성이며 전통만을 이어온 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여호와를 우상화 한다.

여호와를 우상화 한다는 말이 무엇인가?
예수님을 우상화 한다는 말이 무엇인가?

알 수 없다. 설명 불가 이다.

오직 그 상대적인 활동 곧 율법 외에 한 의가 개입할 때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율법 외에 한 의가 무엇인가? 십자가의 피이다. 언약이다.

언약 만이 (십자가의 피 만이)
정통을 잇고 있다는 이스라엘 곧 바이러스에 감염된 이스라엘에게 그 차이성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감염 된 채로 말이다. 병든 자에게만이 의사가 필요한 것이다.(인간의 믿음에서 출발은 우상의 여호와와 언약의 여호와의 구분을 알 길이 없다. 눈 뜬 장님이기 떄문이다.)

병든 놈에게 아무리 거룩한 율법을 때려 부어도 그 죄인에게는 오히려 건강한 척, 오히려 소경 아닌척만 하는 위선만 늘어나기 때문이다. (그릇 자체를 깨어버린다는 것이 자유케 함이다. 그릇을 유지하면서 아무리 부어본들 소용없다. 그것이 바로 처음자리 그 근원의 자리이다. 광야란 그 근원의 자리를 따져 묻는 것이다. 땅이 근원인지, 근원이 하늘인지?)

(요 9:24, 개역) 『이에 저희가 소경 되었던 사람을 두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우리는 저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요 9:25, 개역)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요 9:26, 개역) 『저희가 가로되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요 9:27, 개역) 『대답하되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요 9:28, 개역) 『저희가 욕하여 가로되 너는 그의 제자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요 9:29, 개역)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요 9:30, 개역) 『그 사람이 대답하여 가로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이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요 9:31, 개역)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요 9:32, 개역)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요 9:33, 개역)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요 9:34, 개역)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요 9:35, 개역) 『예수께서 저희가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가라사대 네가 인자를 믿느냐』
(요 9:36, 개역)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요 9:37,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요 9:38, 개역) 『가로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요 9:39,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요 9:40, 개역)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요 9:41,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바로 그런 육의 소욕에 자유케 하는 율법은 상대적인 대조성을 보여준다.

우상 숭배자 곧 육의 소욕의 대표자, 그것도 여호와 신앙의 전통을 잇는자인 유대인 바리새인과

방금 따끈 따끈한 막져낸 찐빵처럼 눈먼 자를 자유케 한 은혜의 해(아무것도 한 것 없는 자에게 주어진), 구원의 날(새 해 처음 날)을 부어준 그 창조 앞에서

실로암 소경은 눈 뜨기 싫어도, 아니 날 때부터 소경이라서 눈 뜨는 방법도 눈 깜는 방법 조차도 모르고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날 때부터 소경인 자신을 눈 뜨게한 유일하게 우상 아닌 분을 (모두다 우상에게 빠져 있음을 앎 = 죄인 아닌 길만 찾아다니는 속물들이 된 거룩을 자기에게 억지로 옷 입히는 유대인 오늘날로 치면 기독교인 곧 우상숭배자들)

유일하게 실로암 소경만이 우상 아닌 분을 만난 것이다.

예수님은 이 소경을 통해서 모든 인간을 소경 만들어 버리신다.

누가 봐도 가장 악한 자 곧 악마(귀신)가 씌여진 자를 통해서
도리어 전혀 귀신 씌인적 없는 자들을 악마 씌였다고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밝혀 내신다.
곧 인자다. 인자는 반드시 이 세상으로부터 악마다 라는 소리는 듣는 분이다.
그리고 그 인자는 도리어 이 땅에 속한 자들이 도리어 악마임을 증거하신다.
살인해서 살인자가 아니라 처음부터 살인자 였다는 것이다.
그것을 증거하는 것이 바로 자유케 하는 율법증거이다.
산상수훈은 바로 이 땅이 악하다 임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런데 산상수훈을 지키는 자들이 이 땅이 악하다 라고 증거하는 산상수훈을 지킴으로써 이 땅이 악하다는 증거를 희석시키고 방해하는 노릇을 하는 우상숭배자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성화론자들의 트레이드 마크 산상수훈은 그래서 더더욱 자신들을 가리우는 가리개로 사용된다. 발가벗기는 자유케 하는 산상수훈을 도리어 더더욱 겹겹으로 자신을 포장하고 은폐하는 무화과 나뭇잎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마치 예수님 당시에 특히 바리새인과 율법사 곧 말씀을 직접 다룬다고 하는 자들이 신명기 말씀의 큰 계명 곧 네 이웃을 사랑하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라고 하는 성경말씀으로 예수님 앞에서 자신들이 지킨 말씀의 영역을 내세울 때에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을 통해서 악한 유대인을 곧 살인마임을 밝혀 내듯이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가장 악마처럼 여기는
교회(성전=자아) 건드리는 자(누구든지)를 통해서 기독교인들이 마귀 자식임을 밝혀내시는 비유를 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자유다.
자유란 갇힘(포로됨, 억눌림, 눈먼 어두움, 사슬에 매임)을 드러내어야 한다.

그리고 그 끊어짐도 보여주는 교체작업을 보여주어야 한다.
갇힌자가 보여줄수 없다.
갇힌자를 통해서 외부에서 작용된 운동력인 능력이다.

여기에 반드시 조작된 자유도 포함되어서 밝혀져야 한다.
자유인척, 소경 아닌척, 거룩한 척, 의인인척, 등등

그리고 자유란 좋은 이미지를 남기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악하다 라는 증거에 매진한다.

이것이 바로 인자다.
그리고 그 인자의 영을 받은 자는

인자의 USB처럼 12지파 이스라엘은 자유케 하는 복음으로 인해 이 땅을 가르는 여호와의 전쟁 곧 십자가의 전쟁에 중간에 낑긴 두 영의 세계를 밝혀내는 선지자의 영을 받아 그 창조(소멸)을 목격하는 목격자가 되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새이스라엘은 전쟁의 주체자가 될 수 없다.
도리어 누가 전쟁의 주체자인가 라는 것을 외치는 증거인이다.

보라 세상 죄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다 라는 말만 외칠 뿐이다.

[세상]이 뭔지? 그 근원과 출처를 알게됨을 당할 뿐이다.
[죄]가 뭔지? 그 근원과 출처를 알게됨을 당할 뿐이다. 실로암 소경 이야기를 보면 죄에 대해서 성경박사들이 죄에 대한 수많은 연구가 인자 앞에서는 도리어 자신 자체가 죄 덩어리임을 알지 못하는 이상 아무리 죄에 대한 신학연구가 산더미처럼 쌓여도 소용없는 것이다. 차라리 처음난자 실로암 소경에게 물어봐야 할 것이다. 그의 대답은 딱 하나다. 예수님이 죄인인지 아닌지 난 모르나 나의 눈을 뜨게 하신 분은 인자다 라는 대답 뿐이다. 그 인자가 바로 세상을 악하다 라는 규정으로 다가오는 자유다.

자유란 인자 앞에서 모든 자유를 포기 당함이다. 심지어 예정 신학으로 구축한 자유의지 따위로 자유라고 빡빡 우기는 그 자유도 삭제 당하는 소멸이 바로 창조주의 자유다.

광야에서만 태어난 이스라엘은 모든 자유를 박탈당함으로써 자유자에게서 태어난 자유자의 자녀들이다.

그리고 그 자유는 우상에게서 그 차이성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야고보서에서 자유케 하는 온전한 율법은 바로 십자가이다.
광야에서만 태어난 구약 이스라엘이듯이,
십자가라는 도저히 구원 될 수 없는 버림
그 버림 속에서 태어난 자가 새 이스라엘이다.
12지파 새 이스라엘은 자유케 하는 온전한 율법인 십자가 곧 언약을 드러내기 위한 그릇,
십자가를 담은 그릇으로써 철저하게 매인바 된다.

자유는커녕 눈꼽만치도 에누리 없는 얽매인바 된 자유가 박탈 당한 조롱거리요 미끼요 고래싸움에 등터져야할 새우요,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이다.

두 세계의 근원과 출처를 원치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로잡힌바 되어 보여줄 수밖에 없는 구속 곧 자유를 보여주게 된다.

자신의 자유가 아닌 자유자인 인자를 보여주기 위해 철저하게 사적인 것을 종말을 맞이한 자들이다.

이것이 바로 야고보서의 12지파 이스라엘인 종말의 집단무리이다.

이제 사적인 영역은 끝났습니다 라고 외치는 자들인 종말 무리이다.

묵시 무리이다.

그들의 출처는 선배인 구약 이스라엘이 광야이듯이(죽음의 땅)
이제 새이스라엘의 출처는 십자가 라는 저주 속에서 태어난 새피조물이다.(사망의 문)

야고보서 1장은 출처가 어디인가를 말해 준다. 광야라는 십자가(온전한 인내)임을 그 반대인 [시험=자기 챙기기]과의 차이나는 설명으로 보여준다.

2장은 처음자리, 첫사랑이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행해진 그 믿음이 바로 사랑이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어떻게 행해졌는가?

믿음의 개입이다. (마치 예수님은 그저 십자가에서 죽었을 뿐이다. 그런데 어떻게 남을 살리는 구원이 되는가? 이것은 믿음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두 가지 예를 들어야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행함이 있는 믿음, 기생 라합의 행함이 있는 믿음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말장난이 아닌 실상이다.

그 행함이 있는 믿음의 두 가지 예는

첫째로 육이라는 땅의 출처의 단절성이다. 이것이 성령의 일이다.

아브라함은 행함으로 [행함이 있는 믿음]을 추구하는 자신이 단절 되어야 한다.
불가능 하다. 그래서 믿음이 외부에서 개입된다. 곧 미래에서 믿음 자체이신 예수님의 개입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예수님을 보게 된다.

아브라함 자신의 행함이 있는 믿음을 완성한 것이 아니다.
도리어 미래에서 소급된 예수님의 저주 받으심의 제물을 보게 되는 실상을 격게 된다.
제물 된 행함을 직접 보고 깜짝 놀라게 된 것이다. 제물 되신 행함이 개입되지 않으면 알 수 없다.

바로 이 미래에서 소급되는 믿음의 행함이라는 연결 고리를 보지 못하는 자는
아브라함 자체에서 또는 아브라함의 영역에서(하나님도 포함) 행함이 있는 믿음을 운운하게 되니, 자기자신에게도 적용하여서 자신의 영역에서 행함이 있는 믿음을 추구할려고 또 그렇게 사기치는 설교를 할려고 하는 것이다.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둘째로 육의 단절성으로 인한 영의 개입이다. 영이란 환경이 아니다.

주변의 환경을 끌어 모아서 재료로 삼아서 행함이 있는 믿음을 만들어 낼수 없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땅에서는 도저히 그 근원을 밝혀낼수 없는 비밀이다.) 도리어 그런 재료들을(신앙이니 신학이니 성전이니) 악하고 불순한 재료임을 밝혀 당함을 당하는 사건이 십자가임을 그 십자가에 일체 양보 없음을 사도바울은 바로 로마서에서 나오는 행함과 믿음의 차이로 증거한다. 바울 자신이 그 악한 불순 재료를 사용해 왔음을 눈이 날라감으로써 비로소 보게 된다. 그랬을때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임을 알게 된다. 이사야 또한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라고 모든 눈에 보이는 것들을 재료로 삼아서 주 앞에서 나아갔던 것이 도리어 똥덩어리를 거룩자 앞에서 거룩하다고 내놓은 그런 악한 짖을 한 망할자임을 보게 된 것이다. 차라리 실로암 소경처럼 또는 성전에 두 사람(바리새인,세리) 중에 세리처럼 죄를 더러운 죄를 들고와서 고쳐달라고 하는 것이(눅 18장) 솔직한 참이스라엘이다(처음자리 곧 고아 과부 나그네, 무능자). 다윗이 여호와의 목전에서 깨끗한 짖은커녕 도리어 더러운 짖을 하게 되는 아무리 깨끗한 짖을 할려고 해도 여호와의 사랑 때문에 할 수가 없고 도리어 더러운 짖을 하게된 자신의 근원을 비로소 보게 된다.

이것이 바로 고아 과부 나그네 라는 처음자리인 이스라엘의 자리에
누가 저런 더러운 실패자 망한자 저주받은자들의 숨겨진 보호자인가를 보여주는 뭔가를 어깨에 맨 USB이다.(휴대폰이나 MP3기 에 추가로 달아놓은 USB처럼)

기생라합 또한 똑같다. 육의 단절성 곧 국가집단의 단절성인 자기민족 자기국가 자기친족의 배신이요 배반이요 단절성이다.

그렇다고 자기 혼자 딸랑 자기 사적인 영역을 추구하는 국적포기가 아니라,
국적포기 보다 더 악하고 더러운 짖인 국가 자체를 팔아넘기고 민족 자체를 소멸케 하는 이스라엘의 여호와에게, 언약의 여호와 곧 믿음에게 접붙여버린다.

그 민족 그 국가 가짜인지 진짜인지 행함이 있는 믿음에 의해서 고발당할 판국이다.
그 교회가 그 성전이 그 유대인이 참 이스라엘인지 가짜 이스라엘인지 접붙여 보면 안다.
도금인지 정금인지 긁어보면 알 듯이 사람을 깨뜨려보면 그 속에 약속이 담겨 있으면 된 것이다. 그래서 두 사람을 깨뜨려 보니 그 껍질 아브라함과 기생라합이 중요한게 아니라, 약속이 들어 있음이 밝혀진 것이다.

그 출처가 땅에서 양식을 공급받는자인지
하늘에서 양식을 공급받는자인지
그래서 광야로 출발하는 이스라엘인지 땅을 근원으로 출현 된자인지 아는 것이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는가?
그 나사렛이라는 이미 땅에서 실패자로 정해진 곳에서 구원이 나는 것이 바로 광야성을 보여준다. 십자가의 의미를 보여주는 사랑을 말해준다.

그 나사렛 출신이 인자로써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잉여의 기준이 된다.

복과 저주를 가르는 나누는 기준이 된다.
참이스라엘이란 복과 저주를 나누는 자가 된다.
복의 근원인 아브라함이 가는 곳마다 복과 저주가 나누어지듯이

인자가 심판주로써 복과 저주가 나누어 진다.
그 인자의 활동은 지금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십자가의 의미가 활동하고 있다.

인자가 복과 저주를 가르는 기준이 되기 위해서
복과 저주에 중간에 낑긴 [행함이 있는 믿음]이 되어야 한 것이다.

가난한 자를 위하는 마음으로 저주를 퍼붓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가룟유다인 법의 저주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을 위해 돌진하는 예수님

그 중간에 낑겨버린 향유를 깨뜨려 비싼 향유를 땅에 허비해 버리는 창녀

마치 지혜란 믿음이란 솔로몬의 법의 칼 앞에서
옳습니다. 마땅히 죽여야만 합니다 라는 법과
안됩니다. 차라리 날 죽여달라고 하는 긍휼

이 둘 사이에 낑겨버린 이름도 없고 창녀의 자식이고 나사렛 출신이고 태어날때부터 저주받은 이 아이를 기준으로 해서 복과 저주가 나누어지는 창조가 벌어지고 행함이 있는 믿음이 벌어지는 것이다. 출신성분도 절망이요 저주인데 예수님의 죽음을 기념하는 그 버리심에 뛰어든다. 마치 다수가 옳다 라는 그 정치적인 분위기에 혼자 손가락질 받는 길로 욕먹을 짖만 골라서 하듯이 말이다. 바로 이런 이 두 양쪽 세계와 그 근원의 출처를 밝혀내는 것이다.

절망 죽음 질투 소멸 멸망 절망 저주 버림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이것보다 명료하고 확실한게 없다. 눈에 보이는 확실한 증거이다. 제대로 만났기에 확실하고 실상이다.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

희망 생명 사랑 창조 부흥 소망 축복 선택 

바로 이런 그리심산(축복산)에 올라간 자들 보다 더 모호하고 의문스럽고 미흡하기 짝이 없고 누가 과연 축복 받은자인가 라는 말이다. 예수님을 죽여 놓고 정작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아 달아 놓은 살인자로 태어난 주제에 축복보다 구원 보다 선택 보다 모호한 것이 어디 있으랴?


그래서 자유가 개입하는 것이다. 율법 외에 한 의가 개입한다. 자유케 하는 온전한 율법인 십자가의 저주가 개입하는 것이다. 그 저주 그 육의 연결고리 내가 대신 짊어지마 라는 행함이 덮쳐진다. 그 믿음의 운동력이 덮쳐진다.(참이스라엘이란 모호한 생명을 어깨에 매고 가르는 자들이 아니라, 실상인 죽음을 어깨에 매고 가르는 자들이다.)

결국 인간들의 가짜 믿음을 고정화 된 믿음을 (우상의 출처자리)
진짜 믿음은 악마 취급당하면서 온다는 것이다. (광야의 자리, 절망의 자리)

전혀 믿음 스럽지 않은 믿음이 두 사람의 믿음으로 증거된 예이다.
이런 믿음이라면 인간들은 믿고 싶어 하는 것이 일체 없다.
(이 두 사람의 행함이 있는 믿음의 예를 흉내내고자 수많은 시도들이 있었고 앞으로도 실행이 되어도 근처도 간자는 단 한명도 없다. 아예 실시 할려는 생각조차도 악마적임을 모른다.)

진짜 믿음인 행함이 있는 믿음이란 전혀 믿을 수 없는 짖만 골라 한다는 뜻이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을 USB로 삼은 믿음의 주체요 실상이다.

이 세상을 악하다 라고 규정하는 믿음이다.(기생라함처럼 전체 세상을, 모든 인간을, 전체 국가를, 전체 우상을 악하다 라고 외치는 것이다. 전체 교회를 말이다. 이 전체성 ...... )

그런 믿음은
세상도 긍정 못하고 이스라엘 본인들도 긍정하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는 믿음이다.
(자기 자신 조차도 미워한다. 과거의 자아 현재의 자아 미래의 자아 곧 전체 자아를 전부 미워하는 믿음이 외부에서 개입 되었다.)

왜냐? 낮추기 때문이고 목을 부러뜨리기 때문이다.

자유케 하는 온전한 율법이란 도저히 그 앞에서 입을 열수 없는 잠잠함이다.

찍소리 못하는 쓰레기 취급 당하는 것이다. 왜? 거룩이 제대로 앞에 왔기에 내가 깨작 깨작 거룩을 조작하는 그런 짖 앞에서 진짜 거룩은 모두다 불태워버려도 남을 소멸하는 불을 만난 것이다.

도저히 낮아지지 않기에 대신 낮춰진 십자가의 죽음이다.
도저히 목이 곧아서 안 뿌라 지기에 대신 목을 부러뜨린 십자가의 꺽으심이다.

입을 열수가 없다. 그 죽음 앞에서

그런데 이제 그 죽음을 마음껏 떠들고 다닐수 있도록 십자가의 영을 허락 하셨다.
믿음이다. 인간의 믿음에서 도저히 나올수 없는 예수님의 믿음으로 주어진 성령의 선물이다.

매일 매일 뜯어보는 즐거움 뿐이다. 나도 삭제하고 너도 삭제하고 교회도 삭제하고 이스라엘도 삭제 당하는 즐거움 뿐이다.
지워 져도 지워져도 매일 매일 다시 새롭게 태어난다.
매일 날마다 주안에서 죽고 매일 날마다 주안에서 다시 산다.

죽음의 문을 여는 자가 생명의 문을 여는 자이다.
악마의 실체를 밝히지 못하는 자는 메시야의 실체를 보여줄 수 없다.

우상의 실체를 보여주지 못하는 자는 참이스라엘이 아니다.
광야의 실체를 보여주지 못하는 자는 새이스라엘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찬양하자를 지키는 자가 아닌 찬양자 그 자체로 태어난 이스라엘이다. 바로 야고보서 3장의 의미이다.

이미 찬양자로써 태어났기에 이미 승리했음을 미완료된 전쟁은 없음을 보여주는 전쟁이 바로 이스라엘만이 목격하는 전쟁이다. 야고보서 4장의 의미이다.

이 전쟁만이 허다한 죄를 덮는 사랑의 전쟁이다. 야고보서 5장

죽음의 문을 활짝 여는 전쟁이다. 더 이상 무덤이 없는 전쟁이다.

자유케 하는 율법 곧 자유케 하는 거룩한 전쟁은 이스라엘을 기준으로 갈라지는 실상이다.

이스라엘이 가는 곳 마다 소동이 벌어진다. 자유와 갇혔음이 드러난다.

자유자와 종이 드러난다.

정작 종은 자유자인척 노릇하고 있고,
자유자는 갇혀있는 모습으로 고아 과부 나그네의 모습으로 살고 있다.

비록 죽은자 같으나 산자인 이 자유케 하는 율법은
십자가로써 그 내막이 실상으로 드러난다.

어두 컴컴한 안개로 가리워진 소경의 눈꺼플이
십자가의 사랑이 지나가는 자리에는
소경이 눈 뜨게 되고 (사막에 샘이 솟고)
도리어 본다고 하는 자는 소경이 되는 희한한 일들이 벌어진다. (풍요의 땅이 황폐케 된다)
역전이다. 눈치 챌 수 있는 역전이면 역전이 아니다. 갚을 수 있는 은혜라면 은혜가 아니다. 보답할 수 있는 사랑이라면 사랑이 아니다. 거래다.
무조건 대상의 자리에 놓일 뿐이다. 그래서 중깐에 낑긴 선지자 자리에 놓이게 될 뿐이다.
모든 자가 선지자 되게 해 달라는 모세의 기도와 왕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선지자는 결국 중간에 낑긴 자들이다.

바로 그 희한한 일의 출처가
광야에서 태어난 언약이 담겨진 그릇으로 인해 가시화 된다.
아무것도 없는 자리에서 태어난 제대로 또렷하게 보여주는 자들이다.

(히 11:12, 개역)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없음]의 광야에서 출처가 된 자가 [있음]의 세계를 드러내고,
[있음]의 땅에서 태어나 눈에 보이는 것들을(모호한) 곧 성전 교회 우상화된 예수 우상화된 하나님 곧 우상을 주장하던 자가 [없음]의 세계를 드러낸다.

[땅에 있는 것을 어떻게 없다고 할 수 있는가? 없는 것은 없다. 다만 있는 것만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라고 저들은 주장한다. 그렇기에 땅에 속한 자는 무슨 소리 인지 모른다. 십자가 조차도 대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롬 4:17, 개역)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롬 4:18, 개역)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롬 4:19, 개역)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롬 4:20, 개역)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롬 4:21, 개역)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롬 4:22, 개역)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롬 4:23, 개역)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롬 4:24, 개역)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롬 4:25, 개역)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고전 1:28, 개역)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그 가시화를 위해 이스라엘은 철저하게 중간에 낑긴 두 세계를 보여주는 그릇이 된 영광에 참예된 집단이다.

인자 되신 예수님은 자유는커녕 철저하게 버린바 된 종이 되셨다.

(빌 2:1, 개역)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빌 2:2, 개역)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빌 2:3, 개역)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빌 2:4, 개역)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빌 2:5, 개역)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6, 개역)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 2:7, 개역)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빌 2:8, 개역)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9, 개역)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빌 2:10, 개역)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빌 2:11, 개역)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 2:12, 개역)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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