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못 박겠다는 것이 새창조

(인간을 못 박겠다는 것이 새창조라고? 
후패할 육의 소욕 : 말도 안돼 말도 안돼 말도 안돼 vs 날로 새로운 성령의 언어 : 문제 없어 문제 없어 문제 없이 삭제)

(갈 5:24, 개역)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창조란 소멸로써 증거 된다.
(소멸이라는 차이성이 아니면 창조를 알 길이 없다.빛을 어두움의 차이성으로 알수 있듯이생명 또한 죽음으로만 알수 있다.
영생나무는 선악나무의 차이로 접근 차단된 영생을 아는 것이다.
여호와란 우상의 차이로 안다. 그래서 약속은 비언약 곧 우상의 언어의 차이로 알게 된다.
여호와는 자신을 우상의 깔려 있는 곳에 비로소 자신을 드러내신다.
천국도 마찬가지이다. 지옥을 깔아 놓고 그 중앙에서 천국을 펼친다. 그래야 지옥의 어두움이 선명하게 대조를 이루면서 물러나는 사단아 물러가라 라는 말씀의 능력을 보게 된다.)

모든 인간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해 죽어 있음이 드러난다.

(고후 5:14, 개역)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들은 단 한번도 정녕 죽으리라의 의미 조차도 모른채 흙에서 흙으로 나타났다 되돌아갔다.

그렇다면 죽음(소멸)의 의미가 명확해 질려면 예수님에게 이 죽음의 의미를 물어봐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십자가 라는 창조로 증명하신다.
즉 자신의 소멸이다.
이 자신의 소멸을 통해서 모든 존재들은 그 소멸에 동참을 한다.
그러나 유독 가짜 인간만이 십자가에 소멸되지 않는 독자성을 띈다.

그것도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도배질을 하면서 말이다.

그렇다고 자살하라는 말인가? 천만의 말씀
예수님의 죽으심을 증거하는 것이 곧 창조세계의 동참이다.

그러나 이 말이 무슨 소리인지 모른다.

죽었다 깨어나도 즉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 나와도 말이다.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로는 예수님의 죽음이 절대로 생명으로 보일 리가 없다.
십자가의 죽음이 어떻게 창조가 되겠는가 말이다.

도리어 선악과가 생명으로 보이고 선악의 밖은 생명으로 도저히 보이질 않는다.

율법 외에 한 의란 의가 아니라 저주로만 보인다.
맞다 저주로만 봐야 한다. 그것이 십자가의 저주인데 그 저주가 사랑이다.

그러나 율법만이 생명이고 거룩이고 의롭지
율법 밖은 절대 의가 아니기에 율법에 갇혀 버렸다.
철저히 법에 갇혀 버린 올무에 빠진 꼴이다.
그 올무에 갇혀 버린 자를 건져내는 유일한 해방은 바로 소멸이다.

율법의 소멸 이다.
의문의 소멸 이다.
거룩이 거룩을 치는 방식이다.
유일한 거룩이 유일한 거룩을 치는 방식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지혜가 지혜를 자기 스스로 치는 방식
자기 스스로 죽는 방식
자기 스스로 소멸 하는 방식이다.

(율법이라는 거룩이 율법이라는 거룩을 치는 방식이 바로 율법의 폐함이자 곧 완성이다.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더욱더 완성하러 온 것이다. 일점 일획이라도 떨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율법 보다 더 강화된 사랑에 이제 양보 없다는 뜻이다.
이제 의문의 것은 일체 없다. 의문의 증서는 찢어버렸다.
율법으로 도배시킨 인간들의 외식이 이제는 안 통하는 성령의 시대이다. 그림자 시대는 끝났다.
어느 정도로? 하나님이 직접 자기 목숨을 맞바꿀 정도로 십자가에 이제 양보가 없다.
저들에게는 망하는 것으로 이들에게는 구원의 것으로
결국 십자가 보다 더 용서가 없는 동시에 십자가 보다 더 선악적인 것이 없도록 하셨다.
모든 인간의 내막은 이제 십자가로만 발가벗겨버리겠다는 것이다.)

마치 바울이 차라리 내 구원 너 받고 너 지옥 내가 가마 라는 생명 맞바꾸기 방식이다.

자기 스스로 소멸하는 방식이 바로 이런 방식이다.
사랑 보다 더 폭력적인 것이 있으면 나와보라 얼마나 일방적이며 질투적인가?
죽음보다 더 시기를 뿜어내는 것이 사랑이다.

맞바꾸겠다는 식이다.

나 소멸 할게 너 창조 했뿌라
그래서 십자가에 소멸 당하신다.
인간을 못 박겠다는 그 취지는
결국 참 인간이신 예수님의 모범의 본을 보이신 사랑이다.

정녕 죽으리라를 맞바꾸기 한 것이다.
이것이 창조다.

소멸 보다 더 나은 창조가 없다.

아벨의 죽음을 왜 말리지 않는가?

아벨의 죽음에 말릴 필요 없이 아예 하나님 자신이 곧 예수님이 그 죽음에 뛰어들었다.

그렇다면 가인이 더 문제가 된 것이다.
가인에게 뛰어드는 자가 없기에 (맞바꾸자 라고 뛰어드는 분이 없기에)
가인은 자기가 자기를 챙기는 성화의 성을 쌓는다.
아무리 쌓아도 쌓아도 미흡하다.
아무리 영웅으로 성을 도배하고 영웅으로 국가를 도배해도
그 공포는 가실 길이 없다.

죽기를 무서워 평생 종노릇 하기에 더욱더 높이 더욱더 멀리 더욱더 길게 쌓고 쌓는다.
인간의 하나님 형상 되기 나
인간의 구원 챙기기나
인간의 천국 가기 운동이나.
인간의 성화 쌓기
이 모든 것이 밑빠진 장독대에 물 붓기로써 점점 의문만 더해 갈 뿐이다.
만족함이 없다.

다만 그 만족을 해소하는 길은 약자를 찾아나서는 악마성이다.

나보다 못한 놈 찾으면 자동적으로 자랑이 된다.

그래서 인간들은 다 올무에 빠졌다.

이 올무 끊는 길이 무엇이랴?

그 정과 욕심 못 박는 길이다.
(갈 5:22, 개역)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갈 5:23, 개역)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 5:24, 개역)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이 정과 욕심을 불교식으로 착각하는 기독교 목사들 신학자들 교인들이 100%이다.

그 정과 욕심을 끊고자 하는 그것이 정과 욕심이다.

자기부인 하자 라고 하는 것이 자기긍정이요 자기자랑이다.

그 정과 욕심 조차도 성령에게 맡길수가 없다.
철저한 가인의 모습이다. 불안과 공포로 인해 그 정과 욕심을 끊을려는 시도 조차도 서슴없이 하고 있다.

왜 그 성령의 언어를 육의 행함의 언어로 교체하는지?
맞다 바로 알수 없는 공포 때문이다.

주를 사랑해서가 아니다.
자기를 자기가 손대고 싶어서 이다.

끝까지 주님 앞에서 마저 우리는 늘 외식적이다.
남의 시선이 없다면 절대로 안할 위인들만 교회에 다 빠글빠글 채워져 있다.

주님은 이제 하나 하나 골라내신다.

십자가에서 잉태한 자와 (긍휼의 그릇)
행함에서 배태된 자 (진노의 그릇)

바로 두 언약의 두 여자에게서 난 열매로써 말이다.

(갈 4:19, 개역)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갈 4:20, 개역)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음성을 변하려 함은 너희를 대하여 의심이 있음이라』
(갈 4:21, 개역)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갈 4:22, 개역)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갈 4:23, 개역)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갈 4:24, 개역)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갈 4:25, 개역)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 노릇 하고』
(갈 4:26, 개역)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갈 4:27, 개역)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갈 4:28, 개역)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갈 4:29, 개역)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갈 4:30, 개역)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갈 4:31, 개역)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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