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뻔스러운 걸레 바울과 순한 어린양


율법의 종지부를 찍은 인간이라고 자기 스스로 자부하는 뻔뻔스러운 인간이 있다.

바울이다.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

가마리엘 문하의 수석 제자 (최고의 엘리트 코스라는 코스는 다 밟고 최고점수로 졸업한자)

난지 8일 만에 할례 받고 정통이라는 정통은 죄다 다 통과한 인증받은 증표이다.
이스라엘 족속 곧 선민이요 그 선민 중에 선택받은 베냐민 지파 왕족의 후손이요

이론으로 끝나지 않고 현장 실습에 가장 현실적인 실적(성공)인 이단 사냥꾼들 중의 최고의 사냥꾼인 행함의 일치에 빈틈이 없는 열심으로 교회를 핍박하는자(즉 매국노와 싸우는 독립투사)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영웅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위하여는 오히려 해가 되는 독이였다는 것이다.
배설물이고 악취나는 똥덩어리였다.

(빌 3:1, 개역)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빌 3:2, 개역)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
(빌 3:3, 개역)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빌 3:4, 개역)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빌 3:5, 개역)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빌 3:6, 개역)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빌 3:7, 개역)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빌 3:8, 개역)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빌 3:9, 개역)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빌 3:10, 개역)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빌 3:11, 개역)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빌 3:12, 개역)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빌 3:13, 개역)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빌 3:14, 개역)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뻔뻔스럽게도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 주동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방금 그래놓고
바로 얼굴 싹 바꾸고 스데반이 증거한 그 복음의 바톤을 이어 받아서 증거하고 있다는 겁니다.

마치 다윗의 뻔뻔함과 같습니다.

방금 우리야 장군을 고이적으로 죽여놓고서는

나단의 고발에서 당신은 용서 받았다 라는 말을 듣고 그대로 수용하다니 웃기지 않는가?

그리고 이스라엘 전국민과 이스라엘 전국의 동물들의 양식을 금지시켜놓고
이름없는 아기를 살려달라는 회개 곧 죽음에 동참시켜 아이를 살려달라고 하고서는
이제와서는 뻔뻔 스럽게 먹고 마시고 잔치를 벌리라고 한다.

법궤 빼앗겨 되찾을려고 할려는 마음은 추호도 없었으면서
법궤가 돌아오는 발가벗고 춤추고 있는 것이다.

그 뻔뻔함 사람들 앞에서는 무능의 티를 죽어도 안내고 도리어 가장 강한자인척 서 있으면서도

여호와의 목전 앞에서는 발가벗겨지는 온갖치욕을 혼자 다 뒤짚어 쓴 냥
철저한 무능한 자의 모습으로 등장하니 이 무슨 일관성이 있어 보이는가?

아이가 막상 죽자 먹고 마신다.
오죽 이상하고 해석난감했으면 신하가 묻는다
왕이여 어찌하여 좀전까지는 우시더니 이제는 웃습니까? 낮짝 참 두껍네요?
그래 나 두껍다 내 낮짝 아무리 두꺼워도 아이 살릴수 없음을 알았다.

바로 이것이 행함의 종착점에 다다른 모호하고 미흡하기 짝이 없는 허깨비의 실체를 본 것이다.

바울이 뻔뻔한 것은 아무리 인간들 세계에게 좋다고 지혜롭다고 먹음직 보암직 하다고 한것들 다 행해봐도 모두다 배설물 곧 썩어 뭉드래지는 쓸모짝도 없는 것을
실상 곧 믿음을 만나고서는 그 강함앞에 머리를 조아릴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내가 가진 군사가 많다 하더라고
나를 적군 삼아 오시는 군사의 많음 앞에 빨리 엎드려 화친을 청하지 않는다는
화려한 배설물과 망할 것이 뻔하다.

빨리 엎드리는 것이 상책이다. 종말 앞에서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다 라는 말 외에는 구차하기 짝이 없는 거룩한 종교용어 따위는 다 똥이다.

누가 더 센가?
누가 더 강한가?

[주님은 나보다 항상 강합니다] 앞에 일관성이고 뭐고 다 버릴 판국이다. 사대부의 지조니 선비의 경건이니 믿는자의 순결이니 뭐니 따위도 그 왕 앞에서는 더럽기 짝이 없는 걸레이다. 차라리 걸레로써 왕 앞에 나아오는 것이 유일한 살 길이다.

바울은 비로소 걸레가 되어서야 모호한 의문의 세계에서 벗어난다.
구원자 때문에 새롭게 된 죄인이다.

이제는 율법에 흠이 없는자인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 아니라,
율법 외에 한 의 때문에 죄인 중에 괴수로써
복음을 지붕뚷고 거침없이 증거한다. 누가 막을소냐?
더 이상 미흡한 미완료 없는 완료를 만났는데?
이제 끝만 외친다. 종말만 외친다. 완료만 외친다. 더 이상 더할것이나 뺄 것이 없다.

순한 양 앞에서
그 순한 어린양이 친히 감당한 십자가 앞에서 더 강한 것은 없다.

그가 채찍에 맞은 것 보다 더 강한 것이 없다.
그가 질고를 당한 것 보다 더 강한 것이 없다.
그가 상함을 당한 것 보다 더 강한 것이 없다.
그가 싫어버린바 된 것 보다 더 강한 것은 없다.
그가 매 맞은 것 보다 더 강한 것은 없다.
그가 죽기까지 복종 한 것 보다 더 강한 것은 없다.
그가 슬픔을 당한 것 보다 더 강한 것은 없다.
그가 찔림을 당한 것 보다 더 강한 것은 없다.

십자가 보다 더 센 놈 있으면 놔와 보라?

십자가가 센지? 성화론이 센지? 개혁주의가 센지? 인간믿음이 센지?

뻔뻔스러운 바울은 방금 자신이 십자가를 이단시해서 핍박해 놓고서는
율법 보다 더 센 강한 십자가 앞에서 깨개갱 치였다.

이제 십자가 보다 더 센 자 나와보라고 뻔뻔스럽게 외친다.

제대로 강한 분을 만났기에
그 강함 앞에서

되도 않는 인간의 믿음 성화 율법실천 행함 따위들이 다 모호하기 짝이 없는 배설물임을
명료하고 뚜렷하고 확실한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토해 버린다.

모든 역겨운 것들이 쓰레기처럼 잔뜩 쌓아둔 것이 괴물처럼 쏟아진다.
그래놓고 십자가의 사랑을 외친다.
아 이 뻔뻔스러움 누가 감당하랴?

살인자가 외치는 복음이야 말로 실제상황이 아닌가?
빛의 아들들이 외치는 복음이 아닌 불의한 청지기가 외치는 종말이야말로 장난이 아니다.

부정한 자리에서 외치는 자의 복음은 실제상황이다. 집단이스라엘의 용어 곧 성령의 언어이다.

그러나 이미 자신을 긍정한 자리에서 외치는 자의 성경은 장난이다. 사적인 배부름이요
썩어빠진 비린내나는 악취다. 사적인 집단의 배를 불리는 소리만 골라 한다.

십자가의 반대편에 선 그 부정한 자리에서 외치는 살인자의 복음
그리고 긍정의 소리가 아닌 부정스럽기 짝이 없는 십자가의 저주요 죽음
이 십자가의 죽음보다 더 세고 강하고 명료하고 뚜렷한 것이 어디 있으랴?

그러나 삯꾼들은 평강이다 평강이다 라는 모호한 소리만 떠들어 댈 뿐이다.

바울이 자신의 사도됨을 고후 12장에서 밝힌다. 그 내용은 11장에 있다. 11장에 거짓선지자와 자신을 비교한다.

겨우 사도됨의 증거가 매 맞고 죽을 고비 몇 번씩이나 당하고 누가봐도 안좋고 부정스러움을 사도됨이라고 증거한다. 그 상대적인 거짓선지자를 받아들이는 교회를 나무랜다. 뺨을 때리고 등쳐먹어도 도리어 잘도 참고 견디고 허용하는 서로 용납하고 있다고 책망한다.

(고후 11:20, 쉬운) 『심지어 여러분을 노예로 삼는 사람, 여러분에게 사기치는 사람, 여러분을 이용해 먹는 사람, 여러분의 뺨을 때리는 사람에 대해서도 여러분은 잘도 참아 내고 있습니다.』
(고후 11:4, 개역)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고후 11:5, 개역) 『내가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 줄 생각하노라』
(고후 11:13, 개역)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고후 11:14, 개역)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고후 11:15, 개역) 『그러므로 사단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고후 11:16, 개역) 『내가 다시 말하노니 누구든지 나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말라 만일 그러하더라도 나로 조금 자랑하게 어리석은 자로 받으라』
(고후 11:17, 개역) 『내가 말하는 것은 주를 따라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어리석은 자와 같이 기탄 없이 자랑하노라』
(고후 11:18, 개역) 『여러 사람이 육체를 따라 자랑하니 나도 자랑하겠노라』
(고후 11:19, 개역) 『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구나』
(고후 11:20, 개역) 『누가 너희로 종을 삼거나 잡아 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고하다 하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

자신이 영적치유자 영적인 의사 영적 아버지 따위 라는 소리를 하지 않는다.
누구든지 너희를 가르쳐들려는 이 땅의 사람에게 선생이라 하지 말라고 했다.

(마 23:2, 개역)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마 23:3, 개역)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마 23:4, 개역)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마 23:5, 개역)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마 23:6, 개역)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마 23:7, 개역)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마 23:8, 개역)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마 23:9, 개역)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마 23:10, 개역)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마 23:11, 개역)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마 23:12, 개역)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마 23:13, 개역)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마 23:14, 개역) 『(없음)』
(마 23:15, 개역)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마 23:16, 개역) 『화 있을진저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마 23:17, 개역) 『우맹이요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금이냐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선생이란 부모란 죽음에 뛰어드는 자이다. 무지함에 뛰어드는 자이다.
저주에 뛰어드는 자이다. 그런데 그들은 반대로 부정한 자리에 뛰어드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높은자리 바로 모세의 자리에 앉아버린다. 지도자 자리이다. 머리 자리이다.
바로 이것이 다른 복음이다. 복음을 이용해서 지도자 자리 가르치는 자리 높은자리 정치권력의 자리 이다.

그러나 그 거짓선지자들의 반격 또한 만만치 않다.
그들은 또 말한다. 동시에 자신들은 섬기는 자리에 앉은 섬기는 자 라고
바로 이렇기 때문에 유혹이다. 유혹이 유혹 답지 않으면 누구든지 다 눈치채고 헷갈리지 않는 미혹이요 모호함이요 의문이 아니다면 용납할 이유가 없다. 모두다 용납하기 때문에 사도바울만 매 맞을 뿐이다. 뺨 맞을 수 밖에 없고, 종 부림 당할 수 밖에 없고, 잡아 먹힘 당하고, 잡힘 당하고, 그 교만함에 이용 당할 수 밖에 없는 갇혀 버림을 당할 수 밖에 없다.
(몽학선생이란 누가 너희 더러운 죄에 뛰어드는자인가를 안내하는 가이드 역할을 한다.
죄에 죽음에 저주에 부정한 자리에 뛰어들지 않는 자는 거짓선지자요 거짓복음이다.
더 이상 가이드가 필요없는 이유는 그렇게 몽학선생이 외치는 남을 사랑하는 자 바로 믿음이 왔기 때문이다. 그 실상이 옴으로써 무대 뒤로 누락되고 빠져버린다. 율법 보다 강한 분은 이 분입니다 라고 율법이 외친다.)
(갈 3:25, 개역)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딤전 1:7, 개역)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의 말하는 것이나 자기의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그렇다고 바울의 사도됨을 증거하는 그 소리는 더더욱 믿음직 스럽지 않다.
전혀 먹음직 보암직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지 않다. 그 반대다.

죽음과 저주와 매맞음과 여러번 죽을고비를 뻔뻔스럽고 당당하게 오히려 그것이 더 뚜렷하고 명료함이다 라고 외칠 뿐이다.

차라리 거짓사도들을 용납한 그 내용들이 더 편리하고 익숙하지
바울의 거짓사도들의 반대되는 참사도됨의 그 내용은 너무 너무 낯설고 뻔뻔스럽고 의심스럽기 짝이 없다.

거짓사도들의 증거가 그만큼 익숙하게 길들여 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바울은 그것을 깨버러야 한다.

오늘날 개혁주의나 성화론자들은 그 깨버린 익숙함을 도리어
깨진채로 나온 첫사랑에 빠진자들에게 교회라는 사조직을 익숙하게 만들려고
산산히 조각난 그 깨진 편리성을 접착채로 붙일려는 프로그램을 활성화 하고 있다.

온갖 성경공부 신학공부 단계 단계를 거쳐서 깨진 조각을 회복하는 운동을 교회라는 거짓가면으로 길들일려고 하고 있다.

좀처럼 길들여지지 않는 융통성 없는 자들을 건전한 시스템 공장에 집어 넣어 자신들의 종교상품을 대량생산하는 상품을 조작해 내고 있다.

그만큼 불안하다는 증거이다. 못 믿겨우니까 내버려 둘수가 없다. 걸핏하면 목사에게 대드는 교인이 될까봐 아예 처음부터 찍어낸다. 목사 자신의 괴물로 자신의 복제품을 양산하고 있다. 그래서 더더욱 덧입히기 식으로 겹겹이 무화과 나뭇잎을 더더욱 화려하게 끼여 입는 것이다. 건전하고 검증된 다수가 공인한 신학 교리 사상을 다 끌어모아 더덕 더덕 붙인다. 내용이 뭔지도 알지도 못하면서 대다수가 승인한 품질보증이 된 친환경제품인 신학들로만 모아서 재포장해서 판매한다. 오 이거 이거 먹혀든다. 역시 역사 속에서 성공한 브랜드는 뭔가 달라도 다르다 라는 경험을 하게 된다.

대기업의 기술을 따와서 중소기업 공장에서 찍어내는 그 괴물들을 양산해 내고 있다.

바로 그 괴물에게 딱 맞는 구원의 뿔이 뭔가?

뻔뻔스러운 죄인 중에 괴수이다.

전혀 서로 단 한 개도 일치성이 없다. 차이성이다.
저가 우 하면 이가 좌 하는 무조건 반대로만 증거되고 외친다.

그 익숙한 거짓사도에 길들여진 자들에게
걸레가 된(과거는 정 반대) 바울의 사도됨을 너무 너무 낯설다.

12사도들도 의심이 갈 정도로 낯설다.

12사도 보다 오히려 더 뚜렷하고 명료하다.
너무 너무 확실하다.

아예 죽음 속으로 달음박질 한다.
불속에 뛰어 든다.
저주로 냅다 전력질주를 한다.
 
허깨비 자아라는 괴물의 종착점인 율법의 최고봉을 다 행해 봤기에 그 허깨비에 그 모호함에 속은 없는 자아임을 알았기에
더더욱 질주본능을 펼친다. 거침없다. 명료하다. 뚜렷하다.
막힘이 없이 시원하다.

언 놈이 꾀던가?

십자가가 눈 앞에 밝히 또렷히 너무 너무 선명하게 보이는데
누가 너에게 또 흐릿한 소리를 하는가 라고

명료함과 흐릿한 것을 대조하면서 말이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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