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라는 성전과 인자라는 성전

(요 2:17, 개역)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요 2:18, 개역)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
(요 2:19,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요 2:20, 개역)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요 2:21, 개역)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성경을 보면서 참으로 신기한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쌍둥이 이야기를 통해서 일종의 나와 똑같은 분신들에 관한 이야기가 참으로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에서와 야곱이 쌍둥이입니다. 그리고 며느리 다말에게서 낳은 시아버지 유다의 자식이 바로 쌍둥이 베레스와 세라입니다.

그리고 사실상 통합적으로 볼때에 한 가정 내의 형제들은 한 모태에서 난 순차적인 쌍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육의 족보에서 아버지의 분신들이기에)

그리고 더 전체적으로 볼때에 모든 인간은 첫 번째 아담의 분신들로써 아담의 쌍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족보와 혈통이라는 의미는 곧 부활과 연계되는 겁니다.

자신의 분신을 낳는 것은 곧 자신의 부활을 꿈꾸는 것이니까요

최근 우리교회 설교를 통해서 인자라는 그 의미가 꼭 이런 쌍둥이의 의미로써

사실상 쌍둥이의 형태로 왔다 뿐이지 족보와 혈통 이 모든 것을 단절 시키는 쌍둥이 아닌 쌍둥이의 모습으로 온 인자라는 의미로 느껴졌습니다.

즉 인자는 내가 꿈꾸는 부활의 족보를(묵시운동을 포함해서) 모조리 단절화 시키는 구체적인 현실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서양이나 동양의 구전동화를 보면 이런 쌍둥이와 똑같은 나와 같은 분신이 나타나 자신을 삭제하고 무질서화된 자아의 세계를 거룩하게 만든다는 의미로 어린아이들 동화에 많이 인용이 되기도 합니다.

인간에게서의 유일한 타인은 인자라는 예수입니다.
모든 인간은 한 아담의 족보아래서 난 아담의 분신입니다.

그러나 유일한 타인이면서 전혀 별개의 족보인 하늘에서 난 족보는 인자 뿐입니다.

그 인자가 그냥 하늘에 가만히 있으면 좋겠지만
내려와서 자신의 족보에 접붙이는 작업을 구체적으로 벌리는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기에 그 십자가 사건은 단회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잉여(은혜)로써 증식이 되고 현실화 된다는 성령(은혜의 영)을 약속 하셨습니다.

자 이제 인간의 족보인 한 아담의 족보 세계에, 그 분신의 세계에, 그 부활의 세계에, 그 묵시의 세계에, 그 계시의 세계에

또 다른 족보, 또 다른 부활, 또 다른 묵시, 또 다른 계시가 투입이 되어서
반드시 걸림돌로 작용이 되는 현실로써 다가온다고 말씀이 증거합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의 족보는 비현실이 되고
그 인간의 족보와 차이가 나는 인자의 족보가 현실이 되는

그야말로 아이들 전래동화처럼 나중에 나타난 쌍둥이가, 처음 쌍둥이를 삭제시키는 방식으로 비현실을 현실이 삭제 시키는 방식으로 증거 되는 겁니다. 곧 누락이요 소외입니다.

바로 그런 것을 총체적으로 집약하는 것이 바로 인간을 대변해 주는 집(가문)입니다. 족보죠. (어떤 다큐를 보니 임금이 있는 궁전이 그 구조가 사람의 내부 신체 기관의 배열 방식과 같다라는 내용을 본적이 있습니다. 장소와 시간의 결합, 역사와 묵시의 결합인 거룩한집)

사람의 보호막인 집의 구조는 곧 인간의 분신으로써 자신이 취사선택한 분신들을 배치시킨 것입니다. 그것을 대변해 주는 것이 바로 애굽입니다. 애굽이라는 족장(아브라함 때)시대에서는 그 부활 시스템이 아이를 낳는 여자로 대변이 되었지만 그것이 좀더 구체적으로 한꺼플 벗긴 것이 바로 애굽의 피라미드 부활 시스템입니다. (이 차이로 인자의 족보는 불임여성으로 접근 합니다. 기적시스템이 아니라 표적구조입니다. 요나의 표적, 십자가 표적)

그것을 애굽 국가 시스템으로 발전하게 되니 그 부활관 묵시관 계시관이 구체화 됩니다.
여기에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없는데서 생겨난 이스라엘 국가 시스템이 대비되는 식으로 구체화 됩니다.

이런 인자의 족보는 무조건 인간의 족보와 반대되는 식입니다.

바로 그렇게 애굽이라는 국가가문의 집 시스템이 더더욱 구체화 되는 다윗왕 시대에는
성전이라는 인간의 손으로 지은 집이 그런 부활시스템인 인간족보의 구체화입니다.
말이 하나님의 족보이다 라고 하지만 인간의 혈통을 가입 시킨 겁니다.
여기에 다윗 또한 개입이 됩니다.

다윗이 이런 인간의 족보에서 빠져나올길이 없기에

다윗을 빼내시는 방식이 바로 인간의 족보 속에 탁란 시켜서(애굽에 이스라엘을 탁란 시키듯) 그 인간의 족보에서 빼내시는 방식이 인자의 족보에 접붙이는 방식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족보는 그 차이성으로써 애굽의 보호막시스템처럼 깨부셔지는 누락이 구체화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내부에 까지 구체화 되면서
인간의 족보에 탁란 시켜
인간의 찢어버리고 태어나는 인자의 족보를
구별케 되는 겁니다.
(찢어버린다는 의미는 어제수요설교에 구체적으로 나타남)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예레미야-2009/053강-렘15장16-21(예레미야의구원)-jer100310.mp3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예레미야-2009/053강-렘15장16-21(예레미야의구원)-jer100310.av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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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성전이라는 특정 장소와 특정 시간이 결합된 하늘의 문인 바벨탑의 장소에
탁란처럼 인자의 믿음과 행함이 바로 그 인간의 집에서 구체화 되기에
인간의 족보는 반드시 누락이 기정사실화 되면서 확인케 됩니다.

구원의 장소가 심판의 장소가 되고
부활(영혼불멸)을 꿈꾸는 족보가 소멸케 하는 족보로 인해 허무요 안개였음이 구체화 됩니다.

인위적으로 물을 뿌리던 생명의 흐르는 목마르지 않는 샘이

피를 흘리는 살육의 장소가 되는 저주가 마르지 않는 저주의 샘이 된 겁니다.

이 일을 인자가 인간이라는 성전을 가지고서 그 차이로 증거합니다.
그 매 맞음에 이스라엘을 사용하신 겁니다.

그 매를 전 아담에게 구체화 시키는 겁니다.

일체 인간의 족보, 인간의 부활, 인간의 구원을 허용치 않겠다는 뜻입니다.

오로지 인자의 족보, 인자의 부활, 인자의 구원만을 추구하겠다는 뜻입니다.

그 인자에게 접붙임을 당하지 않는 자는 처음부터 저주였고 나중도 저주입니다.
그 인자라는 성전에 의해 박살이 나지 않는 성전은 살육이 끊이지 않습니다.
(다윗 이후 성전 중심으로 벌어지는 피비린내나는 전쟁은 이스라엘에서부터 확산되어 전인류로 구체화 됩니다.)

괜히 인간이라는 성전을 세운 겁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늘 꿈꾸는 에덴동산 천국동산 부활동산 생명의 동산을 잔상으로 기억해 이 땅에 실현할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괜히 성전을 세웠서, 괜히 성전을 세웠서, 괜히 성전을 세웠서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뾰로롱

인자라는 성전

인자가 세우는 성전은
그 무서운 저주를 감당할 종말에도 끄덕없는 심판 속에서도 홍수속에서도
불심판에도 타지 않는 성전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말씀을 지키고 성전을 세워도
그 정성이 부족했다든지
충성 봉사가 모잘랐다든지
뭔가를 빠뜨렸다든지 해서가 아니라

아니라

아무리 정성이든 완벽하게 짖든 아무리 해도

문제는 지옥불을 견디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자의 성전으로 갈아타라 라는 겁니다.
인간의 성전 인간의 족보는 버리라 라는 겁니다.
(물론 갈아탈 재간이나, 버릴 능력이 인간 몸에서는 없습니다.) 

고맙게도 우리가 도저히 우리 손으로 지은 것에 미련을 못 버리고
롯의 아내 처럼 백만번 뒤돌아 보고 또 돌아 볼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육체라는 성전을 빵구멍을 내어서 갈아타지 않고서는 못배기도록
타아타닉처럼 바닷속으로 깔아 앉도록 참수시킨다는 점입니다.

이 심판을 미리 앞당겨 받음으로써 갈아타기 싫어도 갈아탈 수밖에 없도록
인자라는 성전에 족보에 접붙이시는 겁니다.

진작 불타고 지옥심판불에 견디지 못하는 것을 알았더라면
정성을 쏟지 않았을텐데 라고 후회할지 몰라도
그것과 상관없이 감사하게도 그냥 타버리도록 내버려두셔도 되는데
잃어버림 당해도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내버려두시지 않고
인자의 성전의 영광을 외치라고 그 영광에 참예 시키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두 성전을 우리는 둘 다 놓이게 되면서
이 둘의 차이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 자신의 신체가 소모품으로써 사용되는 겁니다.(원치 않아도 소용없습니다.)

그래서 매일 죽음에 넘기우는 심판받아 마땅한 신체를 보여줌과 동시에
매일 주 안에서 다시 사는 인자의 몸을 보여주는 겁니다.

이 땅에 태어난 이유는 이것 뿐입니다.

우리 자신의 구원이 아니라
인자가 인자의 족보를 구체화 시키는데에 동원되는 몸뚱아리 뿐인 겁니다.

그 몸뚱아리 조차도 누락되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오로지 남아야 될 남은자는 인자의 족보 뿐입니다.

그 인자의 성전이 항상 십자가라는 표적을 향해 달음박질 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창조(잉여)를 인간의 손에 맡기지 않은 이유인 겁니다.

인간의 손으로 지은 성전에 (미흡하기 짝이 없는)
탁란 시키듯이
얄밉게도
그 성전 속에 다시 인자의 성전을 구체화 시켜서 (약속이라는 완료)

인간의 손으로 지은 성전을 찢으면서 그 속에서 인자의 성전이 세워지는 겁니다.
(의문의 증서를 찢듯이, 막힌 담을 헐듯이)

인자의 나라만이 영원할 뿐입니다.(인간이 말하는 천국은 모조리 가짜일 뿐입니다.)

(요 2:13, 개역)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요 2:14, 개역)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요 2:15, 개역)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요 2:16, 개역)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요 2:17, 개역)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요 2:18, 개역)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
(요 2:19,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요 2:20, 개역)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요 2:21, 개역)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요 2:22, 개역)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요 2:23, 개역)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요 2:24, 개역)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요 2:25, 개역)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
(요 3:1, 개역)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요 3:2, 개역)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요 3:3,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 3:4, 개역)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요 3:5,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 3:6, 개역)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요 3:7, 개역)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요 3:8, 개역)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요 3:9, 개역)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요 3:10,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
(요 3:11, 개역)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
(요 3:12, 개역)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요 3:13, 개역)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요 3:14, 개역)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요 3:15, 개역)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6, 개역)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7, 개역)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8, 개역)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요 3:19, 개역)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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