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소 마련 (죽을 자리 마련)

꺾으신 뼈, 상한 심령, 어린양의 죽음인 십자가(화목제물)를 거두지 마소서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다. 라는 지적은 성령의 지적이다.
성령의 소욕은 육의 소욕을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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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뜨리는 자다.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는 구나? (마 16:23)

하나님의 일이 뭡니까?
(요 6:28, 개역)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요 6:29,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요 6:30, 개역) 『저희가 묻되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요 6:31, 개역) 『기록된 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요 6:32,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요 6:33, 개역)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생명의 떡 곧 육체의 죽을 자리를 마련하는 것은 육이 아닌 유일한 영인 생명의 떡이 되실 분만이 마련해 주시는 처소 마련이 하나님의 일이다.]


바로 그런 육의 소욕을  지적하는 성령의 소리를 마련하는 것이 예수님의 목표이다.

인간 구원이 목적이 아니다.

예수님이 처소를 예비하시겠다는 것은 바로 우리의 육을 후패케 하는 죽을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바로 약속이다.

새언약이란 약속의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다.

다윗이 비로소 먹고 마시고 잔치를 벌이고 노래 부르고 춤춘다.

오 해피 데이 행복한 날이다 라고 외친다.

신하가 외친다. 왕이여 정신 차리세요? 방금 전까지는 아이를 살려달라고 금식하고 회개하고 눈물을 흘리고 이스라엘 전국에 까지 지시하셔놓고 왜? 지금은 먹고 마시나이까?

(삼하 12:15, 개역) 『나단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우리아의 처가 다윗에게 낳은 아이를 여호와께서 치시매 심히 앓는지라』
(삼하 12:16, 개역) 『다윗이 그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되 금식하고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으니』
(삼하 12:17, 개역) 『그 집의 늙은 자들이 곁에 이르러 다윗을 일으키려 하되 왕이 듣지 아니하고 저희로 더불어 먹지도 아니하더라』

(삼하 12:18, 개역) 『이레 만에 그 아이가 죽으니라 그러나 다윗의 신복들이 아이의 죽은 것을 왕에게 고하기를 두려워하니 이는 저희가 말하기를 아이가 살았을 때에 우리가 말하여도 왕이 그 말을 듣지 아니하셨나니 어떻게 그 아이의 죽은 것을 고할 수 있으랴 왕이 훼상하시리로다』
(삼하 12:19, 개역) 『다윗이 그 신복들의 서로 수군거리는 것을 보고 그 아이가 죽은 줄을 깨닫고 그 신복들에게 묻되 아이가 죽었느냐 대답하되 죽었나이다』
(삼하 12:20, 개역)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 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궁으로 돌아와서 명하여 음식을 그 앞에 베풀게 하고 먹은지라』
(삼하 12:21, 개역) 『신복들이 왕께 묻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는 위하여 금식하고 우시더니 죽은 후에는 일어나서 잡수시니 어찜이니이까』
(삼하 12:22, 개역) 『가로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어니와』
(삼하 12:23, 개역) 『시방은 죽었으니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저에게로 가려니와 저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삼하 12:24, 개역) 『다윗이 그 처 밧세바를 위로하고 저에게 들어가 동침하였더니 저가 아들을 낳으매 그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삼하 12:25, 개역) 『선지자 나단을 보내사 그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심을 인함이더라』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저에게로 가려니와 저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이름 없는 아이가 바로 다윗의 육의 소욕을 후패케 하는 처소를 마련한 것이다.

다윗은 그 아이의 죽음 곧 꺾으신 뼈를 통해서 눈이 열린다.
마치 선악과를 따먹고 눈이 밝아져 선악을 알게 된(육의 소욕에 눈뜸) 원리와 같은 식으로
이제는 거꾸로 성령의 소욕에 눈이 뜬 것이다.

성화론자들처럼 구원을 원리를 알았다고 까부는 눈뜸이 아니라.
대신 저주 받은 예수님의 피 흘림에 대해 눈 뜸이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라는 약속의 자리를 마련했다.
모든 육체의 마침을 마련했다. 비로소 비로소 드디어 드디어.
이제 육을 기대할 것이 없다. 우리 몸에서 나오는 것에서 미련을 둘 필요가 없다.
얼마나 다행인가? 의문의 증서가 육체의 장막이 찢겨지듯이 찢어진 것이다.
(예수님께서 지옥의 자리를 마련해야 사흘 만에 일어나는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그래서 매일 죽음에 넘기 우고, 매일 다시 살아남의 자리에 놓이는 것은 우리 구원을 위함이 아니라, 바로 은혜라는 약속을 위해서 소모품(잉여품)으로 사용한 것이다. 이런 피조물이 되기 위해 태어난 것이다.)
비로소 다윗은 외친다.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습니다.
죄에 대해 눈 뜬 것이다. 왜? 아이가 죽음의 자리를 마련했기 때문에 눈 뜬 것이다.

비로소 외친다. 항상 주께만 범죄 했다 라고 주의 목전에 바로 코 앞에서 악을 행했다고 말이다.

사실상 율법을 지키겠다는 그 열심이 도리어 완악하게 동시다발로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적 사망을 낳게 되는 살인을 낳게 될 줄을 꿈에도 몰랐던 것을

그 아이가 죽음의 자리인 처소를 마련해 줌으로써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비로소 정직한 마음이 없음을 알았고, 즉 율법을 지킬려고만 했지 애초부터 정직한 영이 없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비로소 애초부터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위에 율법 지킨 마일리지 성화를 쌓을려고 했다는 그 시도 자체가 악 이였음을 비로소 보게 됨으로써

이제서야 비로소 구한다. 정직한 영을 창조해 달라고

여기서 창조란 그 이전에는 없었다는 무 상태였다는 것이다. 무 상태에서 무슨 지켰다라는 것을 붙잡아 본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마치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의를 쌓겠다 라는 말과 똑같은 의 쌓기 운동을 펼치는 것이다.

베드로가 몇 번 용서 할까요? 예수님이 나에게 나타나기 전까지는 7번 정도로 디기 디기 많이 했습니다. 이제 예수님과 어울릴 정도가 될려면 적어도 몇 번 용서하면 될까요? 말씀만 하시면 그 부족분을 채우겠나이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꿀밤을 먹이신다. 굴욕이다. 그 굴욕 당함이 은혜요 창조다.

뭐 남을 용서 하겠다고? 남(타인이라는 지옥웬수) 용서 할 권리가 너에게 없다. 나에게서 용서 받아야할 입장 뿐이다. 너(웬수)는 용서의 피조물이지 너는 용서의 창조자가 아니야?

내가 너에게 매일 용서해주지 않으면,  그것도 마귀가 밀까불 듯이 매일 청구하는데서 너를 위해 기도해 주지 않으면 너는 남을 위해 100만번 용서 해 줘도 소용없는 지옥이 자식이 된단다. 그래서 내가 너를 위한 죄 값 곧 죽음의 자리 지옥의 자리를 마련한 것이야. 내가 너를 위해 대신해 죽지 아니하면 넌 소용없어. 그것을 볼 생각 없고 그것을 쳐다볼 생각이 없고, 왜 선악나무 몇 번 용서할줄 아는 인간이 될까 라는 그 나무를 왜 쳐다보느냐? 라고 모욕에 모욕을, 굴욕에 굴욕을, 지적에 지적을 받는 것이다. 이것이 사랑의 창조다.

(눅 22:31, 개역)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눅 22:32, 개역)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다윗은 비로소 알았다. 율법만 쥘줄 알았지 그 율법의 요구인 의와 신과 자비는 애초부터 없으면서 그저 쥘려고만(날라가는 화살을 잡아서 정체시킬려고만 했지 운동력을 왜 자기것으로 만들려는 그 악마성은 몰랐던 것이다.) 사랑이 애초부터 없는줄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이제야 그 사랑이 없음을 알고 외친다. 사랑을 소유케 해달라고 외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실천의 달인이 되게 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으로 태어난 피조물로 태어났다고 창조케 해달라는 것이다.

베드로가 사랑의 피조물이 되는 것을 사랑의 창조자(실천자) 되는 것 보다 훨씬 더 나은 제사인줄을 몰랐던 것이다.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 때문에 베드로는 비로소 예수님의 목자의 음성을 듣게 된다. 목자 되신 예수님이 죽음의 자리인 처소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약속의 자리 사랑의 자리가 다 이루어졌기에 그 음성을 이제서야 듣게 된 것이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씩이나? 확정 된 사랑이다. 어느 누가 끊을 수 없다.

다윗은 외친다.

십자가를 거두지 마소서 나의 죽음의 자리를 거두지 마소서
죄악이 도말 되는 그 용서의 자리를 거두지 말라고

(시 51:9, 개역)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시 51:10, 개역)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시 51:11, 개역)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시 51:12, 개역)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애초부터 모친의 죄 중에 태어난 비로소 그 뿌리를 건드린 것은 이 아이의 죽음이였기에

이 꺾으신 뼈로 기뻐하게만 해 달라고

십자가를 거두지 말라고 외친다.

(시 51:16, 개역)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시 51:17, 개역)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나를 죽음의 자리로 몰고가는 것이 제사 보다 번제 보다 더 나은 제사임인 것을
나를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매일 매일 넘기우는 것이
주께서 원하시는 상한심령인 매일 매일 다시 살리는 것을 비로소 안 것이다.

(시 51:18, 개역)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예수님 자신이 친히 제물이 되셔서 그 시온에 선을(십자가에 달려 저주 받으심으로써 모든 육체의 죽음의 자리를 마련하심) 행하시고 그 십자가를 예루살렘에 자신의 몸을 세우셨으니

어느 누가 무너뜨릴 수 있는지 이제 그것을 확인하는 작업을 다윗은 보게 됩니다.

이스라엘도 무너뜨릴려고 달려들고, 세상나라도 달려들고 드디어 숨어있던 옛뱀 까지 다 달려듬을 통해서

죽음의 자리를 마련한 것을 취소하고자 모든 육이 다 달려드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죽음의 자리가 살리는 자리인데

육은 거부합니다.

그것을 미리 앞당겨 은혜로 다윗은 그리고 베드로는 바로 남이 아닌 자신이

남을 사랑하는 마음은 애초부터 없었고, 그저 죄중에 태어난 뿌리였음을
아이의 죽음이, 예수님의 죽음이 그 뿌리를 건드려 주심에

그 건드림 당한 그 섬기심 앞에 섬김 당함으로써 지적당함으로써

비로소 불가능한 선악에서 벗어남이,
그것도 더더욱 불가능한 생명나무에 옮기워 짐을
주님의 살과 피(죽음의 자리)를 먹음으로써 아니 먹임을 당함으로서
눈 뜨게 된 것입니다.

사랑은 우리가 한 것이 아니라
화목제물 홀라당 다 타버린 제물이 한 것임을

나에게 제물 당함으로써 홀라당 다 태워버림 당한 그 상한심령이 참사랑이였음을

그 상한심령이 감사하게도 죽음의 자리인 처소를 마련해 주신 것을

약속해 주셨다는 것을

이 약속을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보여도
이 약속만을 바라보고 푯대를 향하여 달릴 수밖에 없는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을

성령이 유일한 정직한 영인 임의로 부는 바람이 알려준 겁니다.

 
처소를 마련해 준 아이는 내게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가 그 어린양이 마련해 준 그 처소에 옮기움을 당함을 매일 매일 당할 뿐입니다.

팔을 어긋맛듯, 내가 생각한 천국의 자리가 지옥의 자리였고, (성문 안)
어린양 되신 예수님이 마련한 제물되신 저주의 자리인 십자가가 바로 천국의 자리였음을 (해골의 언덕인 영문 밖)

친히 자기 목숨을 내어준 그 죽음의 자리가 유일한 약속인 처소요. 생명의 자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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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13:10, 개역)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그 위에 있는 제물은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이 이 제단에서 먹을 권이 없나니』
(히 13:11, 개역)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니라』
(히 13:12, 개역)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히 13:13, 개역)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히 13:14, 개역)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
(히 13:15, 개역)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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