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하지 않고 자식이 없는 것이 예레미야의 구원이다?


레아와 라헬의 자식 낳기 싸움은 결국 구원 쟁취이다.
누가 남편으로부터 사랑 받는 자가 되는가 하는 점이다.

이것은 곧 예수님을 향한 마귀의 두 번째 시험으로써
성전에서 뛰어내려라

과연 너가 기적(사랑) 받는 자인지
하늘에서 친히 보호하는 자인지
두고보자 라는 뜻이다.

그러나 시험치 말라고 하신다.

사랑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겠다는 자체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사랑은 자기유익을 구하지 않는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기적을 구한다. 사랑받는 증거들을 모으는 것이다.
간증꺼리 기적꺼리 신앙꺼리 믿을꺼리 심지어 신학꺼리 교리꺼리
그 지옥불도 통과하지도 못하는 배설물들을 잔뜩 끌어모은다.

악한세대가 요구하는 것은 기적이다. 사랑이다.

(눅 11:29, 개역) 『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눅 11:30, 개역)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
(눅 11:31, 개역)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어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눅 11:32, 개역)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눅 11:33, 개역)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 속에나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니라』
(눅 11:34, 개역)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눅 11:35, 개역)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눅 11:36, 개역) 『네 온 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의 광선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 하시니라』
그러나 예수님이 보여줄 표적은 요나의 표적 뿐이다. 곧 심판, 저주이다. 십자가의 참혹함이다. 하나님으로부터의 버림받음이다. 그 잃어버림이 경험이 있는자에게 되찾음의 구원자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마 10:6, 개역)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마 15:24,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눅 19:10, 개역)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라헬은 레아에게 자식낳기 싸움에서 졌다.
부활 싸움에서 패배했다.
사랑 받기 싸움에서 패배했다.

더 이상 남편의 사랑도
더 이상 기업도
더 이상 부활도 없다

더 이상의 위로가 소용이 없다.

(렘 31:15, 개역)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
(마 2:18, 개역)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그저 그저 모든 것을 잃어버림을 당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라헬 사적인 개인 생각일 뿐이다.

왜냐하면 심판날이 중요하다.

둘 로 나뉘는 방식이 한쪽은 잃어버림을 당하고 한쪽은 견제하게 남은자가 되는 식이다.

마치 아벨은 허무하게 잃어버림을 당한다. 그 이름처럼 그야말로 허무다. 아무런 댓구 한마디 없이 허무스럽기 짝이 없이 죽임을 당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인은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는다. 그 살아남은 것을 더더욱 구체화 하고자
이마에 표를 남기고 그것도 모잘라 성을 짖고 그것도 모잘라 자신의 분신들인 자식들을 자기의 보디가드로 삼는다. 자신의 부활로 삼는다. 자기의 영웅 곧 신으로 삼는다.
인간이 조작해 낸 신이다.

아무나 못한다.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이마 표 받은자만이 만들어내는 영웅이요 신들이다. (계시록 짐승표)

그 모든 것이 죽기를 무서워 평생 종노릇하는데서 없는 허깨비 자아에게서 사로잡혀 자아라는 분신들인 우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사랑받고파서, 그 애정결핍을 악한세대가 어떻게해서든 기적으로 사랑으로 채워넣을려는 것이다. 신과의 하나됨의 에로스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라헬은 위로받기를 거절할 만큼 철저한 단절이요 분리요 삭제당함이다.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 버림의 자리를 (부활은 커녕 단절뿐이요, 하나됨의 결혼은 커녕 분리 뿐이다.) 마련하신다.

그러나 그 버림의 자리가 되찾음의 자리가 될 줄 누가 알았으리요?

심판의 날에 종말때에 모든 것은 전도된다. 바꿔치기가 된다. 어긋맞게 된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서 걸어가실때에 넘어지고 또 넘어지는 순간까지 저들에게 걸림돌로써 작용하신다. 요나의 표적이다. 정작 예수님이 걸려넘어지심에도 불구하고 그 모습으로 걸림돌의 사역을 충실히 행하신다.

안됐다 청년, 착실하게 보이고 악하지 않게 보이는데 괜히 센 놈들 건드려서 밋보여서 개죽음 당하게 되었구나 안됐다 쯧쯧 쯧쯧쯧
(예레미야는 철저하게 저주와 심판으로써만 이스라엘과 하나 된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런 예레미야가 가시처럼 거슬린다.
긍휼과 자비로써 예레미야가 다가와 주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그렇게 울고있는 여인들을 향해서 쪽팔려서 한마디 하신다.

(눅 23:26, 개역) 『저희가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로서 오는 것을 잡아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좇게 하더라』
(눅 23:27, 개역)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 오는지라』
(눅 23:28, 개역)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눅 23:29, 개역)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눅 23:30, 개역)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눅 23:31, 개역)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예루살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고

종말의 날에 그 심판의 본성을 못보도록 하는 것이 땅의 가족이다.
육의 가족 때문에 종말의 뜻을 못 본다.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예레미야-2009/054강-렘16장1-4(땅의가족)-jer100317.mp3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예레미야-2009/054강-렘16장1-4(땅의가족)-jer100317.avi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예레미야-2009/054강-렘16장1-4(땅의가족)-jer100317.hwp

라헬은 몰랐다. 그리고 허물치 않았다. 그러나 그 라헬의 눈물에 예수님의 눈물이 덮쳐질줄 몰랐기에 자신의 위로 받기 거절당함이 예수님의 울부짖음의 거절당함으로 나타날줄을 말이다. 그저 사적인 경험인줄 알았는데 그 모든 것이 커튼 뒤에 응축된 점으로써 내려오는 것인줄 말이다. 그 막이 이제야 열리고 찢어지면서 그 막힌 담이 허물어 진다.

그렇게 뛰어드심 만이 지옥의 불 심판 날을 통과 할수 있거늘

그저 인간은 자신과 자신의 분신들의 부활과 안녕에만 머물고 정체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신과 하나되고자(결혼) 기적을(사랑) 따낼려고 찾아나서고, 그런 자신을 선택예정으로써 부활 곧 영원불멸을 꿈꾼다.)

그러나 정작 구원은 심판 속에, 단절 속에, 버림받음 속에, 잃어버림 속에, 죽음의 자리 속에 놓여져 있었던 것이다.

누가 알았으리요? 그 사망의 골짜기에 예수님이 뛰어들줄을 말이다.

비로소 자신의 있던 자리가 축복과 구원과 부활을 따 낼수 있는 기회의 땅이 아닌
이미 지옥 그 자체인 곳을 몰랐기에
자신만이 유일한 가능성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이미 지옥이였음을 사망의 골짜기에 뛰어드시는 예수님을 보고 비로소 알게 된다.

그리고 그의 나타나심 자체가 이미 부활이다.

스스로 버릴 권세가 있으시고 스스로 되찾을 권세가 있으신 분이다.

그 잃어버리심과 다시 되찾음 조차도 우리 쪽으로 끌어당길 입장이 못된다.

그가 나타났다는 그 자체가 이미 완료로써 다가온 것이다.

너희가 부활을 오해했구나? (마 22장, 눅 20장)

(마 22:30, 개역)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눅 20:35, 개역)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부활 때에는 장가 가고 시집 가는 것이 없다.

그러나 인간의 부활관은 육의 연장선이지 육의 단절성이 아니다.

그래서 그저 육과 육을 잇고 잇는

그래서 그 육체의 부활을 그 육체의 분신들을 줄줄이 낳는 부활을 땅에서 행하듯 하늘에서 행하고자 한다.

예수님의 답변은 주께서 내 주께의 방식 뿐이다.

여기에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육의 단절의 사건으로써 이룬 믿음을 말씀하신다.
그 믿음만이 살아 있고 믿음으로 하지않는 모든 것은 육이요 죽은 시체일 뿐이다.

육과 육을 잇는 것은 죽은자의 하나님의 방식이다고 하신다. 죽은 자는 죽은 시체들에게 맡기면 그만이다.

육의 단절을 모르기에 믿음의 방식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육의 단절인(결혼하지 않음과 자식없음) 그 십자가가 바로 구원이다는 것이다.

부활은 바로 이 십자가의 확대요 증식이다. 우주까지 온 천하 과거 현재 미래 창세전 그리고 미말과 새시대인 새하늘과 새땅의 기준이다.

이 기준을 중심으로 모든 것이 배치될 뿐이다.


추신

또 이 글을 읽고 오해해서 결혼하지 않는 것의 정당성 자식 없음의 정당성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는 시험을 하나님께 하지 마라. 말씀은 자기 쪽으로 땡길 그 어떤 것도 없다.
모두다 예수님이 친히 하실 숙제 뿐이다.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는 순간 시험에 빠져들며 또 행했기에 완악해 지고 걍퍅케 되며
기필코 선택받은 사랑받고 기적을 받았다고 자랑하고픈 티를 내고픈 악한세대의 독사의 자식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독사의 자식 티를 안내어도 이미 독사의 자식일 뿐이다.
그저 예수님이 이 지옥 속에 뛰어들었다는 그 자체로 감사할 뿐이다.

그저 그저 그 사랑에 감사하면 된다.
백만번 지옥 가도 마땅할 따름인데
왠 은혜인지 왠 사랑인지

그 사랑에 고마워 할 뿐이다.

(성화론자들은 반대다. 고마워 할 뿐이면 안된다 라고 그런 말이면 누구든 다 할 수 있다고
그렇기에 반드시 실천하고 행해야 한다고 외친다. 그 자체가 완악함의 극치가 아닐까?

왜 그 피를 모독하는 것일까? 피 자체가 우리의 행함을 단절 시키고 증거되는 것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아브라함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이라고 산자의 하나님이지
죽은자의 하나님이 아니다 라고 말씀하신 이유다.

즉 산자의 하나님 앞에 정작 아브라함 야곱 이삭은 죽은자리에 놓여진다.

그러나 죽은자의 하나님을 포착한 자들은 자신이 바로 살아서 행해야 한다고 우기기 때문이다.)


(눅 20:27, 개역) 『부활이 없다 주장하는 사두개인 중 어떤 이들이 와서』
(눅 20:28, 개역)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사람의 형이 만일 아내를 두고 자식이 없이 죽거든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눅 20:29, 개역) 『그런데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아내를 취하였다가 자식이 없이 죽고』
(눅 20:30, 개역) 『그 둘째와 셋째가 저를 취하고』
(눅 20:31, 개역) 『일곱이 다 그와 같이 자식이 없이 죽고』
(눅 20:32, 개역) 『그 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눅 20:33, 개역) 『일곱이 다 저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그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눅 20:34,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눅 20:35, 개역)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눅 20:36, 개역) 『저희는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니라』
(눅 20:37, 개역)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보였으되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눅 20:38, 개역)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
(눅 20:39, 개역) 『서기관 중 어떤 이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말씀이 옳으니이다 하니』
(눅 20:40, 개역) 『저희는 아무 것도 감히 더 물을 수 없음이더라』
(눅 20:41, 개역)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눅 20:42, 개역) 『시편에 다윗이 친히 말하였으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눅 20:43, 개역) 『내가 네 원수를 네 발의 발등상으로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눅 20:44, 개역) 『그런즉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뇨 하시니라』
(눅 20:45, 개역) 『모든 백성이 들을 때에 예수께서 그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눅 20:46, 개역)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눅 20:47, 개역)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Posted by 김 대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