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매일 나를 속이시는 예수님


속인다 라고 하니까 상당히 거부감이 드는 느낌으로 다가올 것이다.

사실상 숨어있기에 늘 모르겠다는 취지이다.

그런데도 왜 속인다 라고 구지 저 표현을 쓰고싶은 것일까?

요즘 느끼는 주님이 늘 날 속이는 방식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속인다 라고 했을때에 그 속임을 당하는 나를 기준으로 했기 때문이다.

인간이 주체가 되었기에 차이나는 상대방이 속인다 라는 부정적인 의미로 다가오면
거부감이 듬과 동시에 방어적으로 변하게 된다.

전투적이다.

속든가 그 속임수를 뛰어넘어서 속임을 당하지 않는 승리의 숙제를 달성하던가?

결국 속임수로 다가와야만 사건이 발생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미 속임수로 다가왔다는 자체가 이미 잉여품을 완료했다는 취지이다.

완료품으로써 선물인 것이다.

나는 최근에 주님으로부터 선물을 받았다.
내용도 무엇인지 모르고 그것을 받고 기뻐했다.

그리고 그 선물박스에 새겨진 화려한 포장지 문구를 무슨 말인지 모르면서
그저 선물 주신 그 감사로 기쁨에 도취되어 적어 써내려갔다.

최근의 글들이 그런 식이였다.

그런데 엉뚱한 반응들이 나타났다.

주님이 주셨는데 다들 한마디씩 던지는 말들이

자기고백 곧 자기부인이 없다 는 둥
지식적인 뿐이다는 둥

그것도 주님의 은혜를 받은자들로 인한 지적이다 보니 괴로웠다.

아 나는 이 선물이 탈출구가 될줄 알았는데 탈출구는커녕 더욱더 코너에 몰린 입장이구나
선물이 도리어 나를 압사시키는 그 상황에 더욱 압박의 증폭을 더하는 구나.

내가 글을 올려 놓고 그 글로 인해 내 뺨을 내가 때리는 식이 되는 구나
라는 후회 막심에 급처방의 방어책을 추구했다.

이런 어리석은 짖을 왜 하느냐? 그저 자해 하는 식 밖에 되지 않는가?
그래서 다시는 글을 올리는가 봐라
내 손에 장을 지진다 라고 몇십번 다짐을 했다.

그런데 이게 왠 일인가?

또 선물상자를 퍼부으신다.
장 지진다는 장담도 하루도 가질 못한다.

그 선물의 포장에 적힌 내용에 기뻐
그 기쁨에 도취가 되어 적기 바빳다.

주님 선물 좀 그만 주이소

외쳐도 소용없다.

몰라 몰라 나도 몰라 맘대로 하라지 뭐
나도 마음대로 하면 되지 뭐

그런데 어느날 주님은 나를 죽일려고 달려드셨다.

누구 말 마따나 그게 주님인지 마귀인지 어떻게 아느냐고?

몰라 몰라 내 몸을 치는 이상 마귀라고 해도 그 마귀를 보낸 분도 주님이 아닌가?

몸을 치는데 아무것도 소용이 없다.

그저 엎드릴 수밖에

일단 얻어맞고 보니 비로소 그 내용물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강이아빠랑 차 타고 여러 대화를 하는 중에
이미지가 상상으로 떠오른다.

수많은 선물상자들이 나에게 주어지니
그 선물상자 포장에 적힌 화려한 것들을 글로 적기에 바쁜 나에게
그 선물상자의 열쇠구멍이 보이는데 열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느순간 갑자기 그 상자가 열리면서 두껑이 재껴지니까
잔뜩 부풀러 오른 마음에 그 내용물을 보니

한결같이 몽둥이가 놓여져 있었다.

아찔했다.

그 간밤에 만난 주님이 그 동안 선물상자를 잔뜩 줄때는 언제고
그 선물상자의 진짜 내용물은 결국 몽둥이였단 말인가?
아예 죽일려고 개패듯이 패던데?

하긴 내가 내 기쁨에 속은 것이지 남 탓할 수 없겠지만

누가 그 일을 당해도 다 그렇게 느껴졌을 것이다.

어린 아이가 아빠로부터 매일 선물을 받는데
그 아이는 선물 받은 선물상자를 다른 아이들에게 자랑하기 바쁠 것이다.

남들로부터의 그 부러운 시선에 잔뜩 기쁨에 도취 되었을텐데
막상 그 상자를 아빠가 열어주시니

정작 몽둥이가 있었다면

얼마나 웃음꺼리가 되지 않는가?

민망하고 쪽팔리고 몸둘바를 모를 것이다.

아이는 삐쳐서 밥도 안 먹고 닭고기 찜닭 요리도 거부한채
입이 튀어나오라 잔뜩 부풀어 있을 뿐이데

그 몽둥이가 진짜 선물이였다니

그것이 사랑이였다고 하니

말이 안된다.
말이 안돼?

하여튼 말이 안되는 사랑만 골라 하시는 분임을 또 새롭게 알게 된다.

또 속았구나 속았어 아이고 억울해라

이거 뭐 쪽팔려서 우찌사노?

그런데 그 속임수가 아니면
나의 자존심이 무너질 리가 없다.

그 자존심을 무너뜨리는 몽둥이야 말로 진짜 선물이 아닌가?

매일 매일 나를 속이시면서 몽둥이를 들고 달려드시는 주님

도통 내 힘으로는 내 머리로는 안 믿겨진다.

분명히 안 믿겨지는데도 불구하고

나도 모르게 믿겨진다.

그 믿음은 나의 믿음이 싫어하는줄 이제야 알게 된다.

왜 그런 믿음이 그렇게 죽도록 싫은지?

내 믿음이 그 믿음을 싫어하기 때문에

그 믿음을 주신 것이다.

속이는 모습으로
(다말이 분명히 창녀복장을 해서 유다와 동침했다. 부정과 불륜으로 다가오는 속임수를 누가 실족치 않으랴? 그런데 실족치 않게 하기 위한 실족케 하는 성령의 일은 늘 스캔들로 다가오니 참으로 할 말 없다. 입이 있어도 무용지물이다.)

내가 아는 예수님은 매일 매일 가짜임을

매일 매일 몽둥이를 들고 오시는 예수님에 의해 얻어터지면서 알게 된다.


정말 맞기가 싫타

물론 맞아도 안아프면 맞아도 상관이 없지만
너무 너무 아프서 몸이 견뎌나질 못한다.

이 몸에 저촉을 받지 않으면 상관이 없지만

너무 너무 밀착되어 있기에

그래서 예수님은 매일 매일 상한심령인 십자가를 거두지 않고자
몽둥이를 들고 오신다.

매일 매일 죽음의 자리를 성령의 처소를 마련하신다.

그것이 유일한 사랑이라고

그러나 육된 인간에게서 가장 악마같아 보이는 짖이
성령의 처소를 마련하는 일이다.

그 일을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다. 완료로써 말이다.

이제 빼도박도 못하는 사랑 안에 갇혀버렸다.

우짜겠는가?

그저 당하는 것 밖에 ....
(가짜 믿음 가짜 하나님을 형성하고파 정작 내가 예수님을 속여놓고
그것을 깨뜨리고자 속임수 곧 십자가의 불륜으로 다가오는 예수님에게 안당하고는 못배기는
속임수로 다가오는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고 하니?
무슨 수로 믿을 수 있겠는가? 그저 당하는 것 뿐이구나 !)


주여 십자가를 거두지 말아주소서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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