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죽음)의 자리로 몰아넣는 예수님


흔히 영적인 일을 인간이 파악하는 기준은 어디까지나
육인 자신을 기준으로 영적이다 육적이다 라고 분류 분별을 한다.

바로 그런 인간의 판단 기준을 가지고서
예수님은 자신의 영을 펼치게 되면 과연 어떻게 될까?

그렇게 된다면 인간의 모든 일은 허사가 되고 만다.
아니 반드시 허사가 되는 방식으로만 일을 펼치신다.

왜냐하면 어떠한 일치점이 있을수 없는
도리어 철저한 이질감, 너무 너무 동떨어진 극과 극의 거리감을 추구할 것이다.

여기서 발생되는 인간의 방어책은
절대로 그 거리감을 멀리 동떨어지게 할수 없는
도리어 아주 친밀하게 밀착시킨 사랑스럽기 짝이 없는 방식으로
개조하게 될 것이다.

바로 이런 인간의 속성 조차 재료로 삼아서 다가오는 분을
전능자 라고 한다.

전능자라는 언어가 주는 호감도가 얼마나 인간에게 친밀하게 다가오는지
갑자기 인간이 그 전능자를 자기쪽으로 끌어당기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든다.

마치 남자들에게서 전쟁 액션 영화는 자신의 영웅성을 부풀려 주기에 안성마춤이고
여자들에게는 아름다운 감성의 멜로 드라마가 항상 사랑받기를 원하는 자신의 이쁜 아름다움을 일깨워 주듯이 말이다.

그러나 전능자의 의도는 그것이 아니다.
전능자 라고 정작 지상에 뜨게 되면

마치 자신 쪽으로 끌어당길려는 그 인간 속에 있는 속성을
자석이 같은 극을 찾듯이 인간 속에 있는 자석을 들추어 내는 방식이다.

자 그렇다면 상식적으로 전능자를 끌어당기는 인간 속의 자석은
같은 극이기에 N극이면 N극 끼리
또 S극이면 S극으로 서로 밀착되듯 착 달라붙으면
오히려 좋고 긍정적인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오히려 같은 극 끼리는 밀어내버린다.
아무리 밀어 붙여도 그 거부감을 당해낼수가 없다.
철저한 배척이다.(척력 斥力 밀힘)

전능자는 바로 이런 속성을 우리에게 나타내신다.
결국 전능자는 그 전능하심으로 우리를 긍정케 하시는 것이 아니라.
철저한 부정케 하시는 일에 전념이시다.

부정케 한다 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가?

구약에서는 이 전능자를 잘 표현한 의미가 룻기서에 나오는
나오미 이야기에서 잘 나타난다.

나오미의 남편은 그야말로 여호와 하나님 전능자의 이름을
자신을 긍정케 하기 위한 도구로 삼는다.
전능자가 졸지에 인간의 피조물로써 취급받는다.
바로 이것은 우리가 늘 이런식으로 성경과 하나님을 취급하고 있다는 고발이다.
아무리 교회에 다니고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돌아서면 나를 기준으로하는 자기유익과 자기긍정의 도구가 될 뿐이다.
그렇다고 나를 부정케 하기 위한 도구로 삼을 자는 이 세상에 없다.
그런 노림수에 놀아날 신도 없다.
없는 신기루와 같은 안개를 늘 포착하고 붙잡겠다는 평생을 그 짖만 한다.
그래서 인간은 늘 금지된 것을 꿈꾼다.
항상 우상 숭배만을 꿈꾸는 것이다. 우상 (탐심)

(룻 1:1) 『사사들의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우거하였는데』
(룻 1:2)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유하더니』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는 한마디로 이스라엘에게서조차도 머리가 없는 시대이다.
이상하다. 참으로 이상하다. 성경은 이해 불가 뿐이다.

사사가 무슨 뜻인가?
사사 라는 판관자 곧 치리할 자, 통치자를 그때 그때 마다 일시적으로 보내는 구원자이다.
그렇다면 그 구원자는 상대적인 갇혀있음과 포로당함과 괴롭힘을 당하는 그 처지에서만 주어진다.
즉 어두움의 배경을 깔고 등장하는 빛의 역할이다.

그런데 정작 그것이 아니다.
전혀 예상 밖으로
사사들은 도리어 이스라엘 외부의 어두움을 배경으로 깔고 등장하는 빛의 역할을 함과 동시에

동시에 이스라엘 내부의 표출되지 않는 그 꽁꽁꽁 숨겨진 내부의 어두움을 아예 새롭게 형성하면서 퇴장한다.

죄를 새롭게 형성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사사가 등장하면 등장할수록 죄가 깔끔하게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깊어진다. 더더욱 그 더러움과 수치와 냄새나는 죄의 깊이를 파재껴 나아가는 식이다.

그래서 사사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그 어중이 떠중이와 같은 자들을 사사로 삼을 정도로
그 정도로 인간의 내부는 이스라엘 안이든 밖이든 동일하다 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같은 자석의 극끼리 전능자를 찾으나 정작 그 더러움은 역시나 똑같다.

(삿 17:6)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머리가 없기에 지시받을 대상도 없고
자기 소견과 유익과 탐심과 긍정으로 일관한다.

요즘 뜨는 트렌드가 긍정의 힘 이라는 그 긍정이 무엇을 말하는가?

왕이 없다는 뜻이다.

왕이 없기에 누가 자신을 챙길자 기업무를자 곧 잔소리해줄 아버지가 없기에
자신이 자신이라는 그 무거운 쇠덩어리를 끌고가는데 있어서 (시치프스의 무거운 돌 짐)
투덜 거리지 말고 어차피 피할수 없는 것이라면 즐기자 그것이 정신건강에 이롭다는 것이다.
유일한 해결책은 자기 소견 자기 판단. 냉철하고 합리적인 사고만이
자기 자신만이 믿음을 줄 뿐이다.
그 믿음에 예수든 여호와든 전능자든 온갖 신이든 다 이용해 먹는 것이다.

별수 없다. 물에 빠졌으니 지푸라기도 잡을 수 밖에 없는 궁지에 몰린 입장이기에

온갖 더럽기 짝이 없는 인간 속의 내부를 해부 당하는 꼴이다.

성경은 인간을 너무 너무 난도질을 제대로 하고 있는 셈이다.

바로 그런 사사 때에 나오미 남편인 엘리멜렉은
"나의 하나님은 왕이시라" 이라는 이름의 뜻으로써 하나님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긴다.
너무 너무 일방적이다.

마치 오늘날 성화론이든 개혁주의든 가장 건전하고 정통이라고 자부하는 자들이
일방적으로 너무 너무 일방적으로 정통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듯이

또 오늘날 모든 종교와 모든 기독교인 교회가

예수님은 나의 구원자 라고 너무 너무 일방적으로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는 식이다.

정작 구원자에게 물어 봤는가? 구원하실 분의 주장은 일절 배제 된 채의 일방적인 독자성이다.

그러나 정작 왕이신 하나님은 언제 내가 너의 왕이냐 라고 그 엘리멜렉을 죽여버린다.

아무리 인간이 하나님을 자신의 왕으로 일방적으로 삼아도

정작 왕은 너의 왕이 되기 싫타 라고 배타적이다.

너의 하나님이 되기 싫타
너의 구원자가 되기 싫타
너의 임금이 되기 싫어 도망칠란다.
(마치 오병이어의 잉여(은혜)를 보고 임금삼고자 집요하게 따라당겨 밀착시킬려고 할 때
도리어 철저하게 단절로써 도망을 치신다. 그래도 따라붙은 인간에게 십자가의 표적을 들이대시니 인간들의 정체가 탄로난다. 드라큐라 였던 것이다. 피 빨아 먹는 흡혈귀. 좀비. 뱀파이어. 이렇게 정체를 들추어줘도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부정적인 단절성을 룻기에서는 전능자로써 일관하신다.

나의 하나님은 왕이시다 라는 그 전체 이스라엘의 주장을 대변해 주는 엘리멜렉이라는 나오미의 남편 이름에

정작 왕이신 당사자 하나님은 나는 너의 하나님이 아니요 너의 왕도 아니다 라고

엘리멜렉과 이스라엘이 포착한 하나님의 이미지를 비켜가는 방식으로 빠져버린다.
바로 이런 이스라엘의 내부에 어두움을 형성하고
그 하나님을 치시는 자기가 자기자신을 치시는 방식으로써
전능자가 등장한다.

바로 괴롭게 하는 자로써 말이다.

부정의 자리인 저주와 죽음의 자리를 마련하는 분이다.

왜 그럴까?

인간들이 정작 잇고자 했던 것은 자신의 부활이다. 남이 아닌 자기자신이다.

그런데 그런 인간들이 새까맣게 싹 다 잊어버린 약속을 하나님 자신이 친히 이루신다.
관심사가 약속 뿐이다.

전능자 하나님 본인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하신 약속을 마치 유훈정치처럼
그 이미 눈에 없는 죽은자들을 끌어당긴다.
단절되고 삭제 된 자들을 끌어당기고
반대로 지금 생생하게 살아있고 오히려 그런 역사를 잇고 잇는 일에
가능성이 충분한자는 죽여 없애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모세 에게 했던 약속을 구체화 시킨다.
반드시 배경을 깔고서
마치 천지창조를 무 라는 혼돈 속에서 창조를 했듯이 말이다.
결국 창조란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들에게는 그 어떤것도 원치않는 속성들만 나열된 것이다.

아무리 창조의 의미를 좋은 의미로 해석하고 자기쪽으로 끌어당겨봤자 소용없다.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이 뱀파이어가 된 이상
전능자가 펼치는 창조(잉여)는 그저 괴로운 일 뿐이다.

그래서 죄인에게만 해당되는 창조의 일이다.

그런데 왠일인가? 인간은 자신을 뱀파이어로 여기지 않는다.
도리어 의인으로 취급한다.

그래서 전능자의 창조는 자신을 죄인이라고 뱀파이어라고 여기는 자에게만 해당되는 약속의 일이다.

그 상대적인 엘리멜렉의 아내인 나오미는 그저 일방적으로 당할 뿐이다.
그리고 바로 이렇게 행하신 여호와 이다 라고 며느리에게 증거할 뿐이다.

나 이런 여호와에게서 벗어날 수 없을 뿐이니
각자 알아서 자기 갈 길로 가라고 한다.

남편도 죽여버리는 여호와
자식도 죽여버리는 여호와

모든 씨앗의 단절로 일관하시는 여호와

나는 이런 여호와 뿐이니

가문 자체가 형성 될 리가 없다는 뜻이다.

여자로써 돕는 베필로써의 구실은 끝난 것이다.
이건 뭐 산 송장일 뿐이다. 살아 있으나 산 것이 아니요 죽었으나 죽은 것도 아닌
그저 좀비처럼 시체 취급받은 저주덩어리일 뿐이다.

생명이라고는 일체 없다.

불임여성 아닌 불임여성이 되고 만 것이다.

누가 봐도 다 그렇게 보이니
합리적인 판단은 딱 하나 뿐이다.
멀리 멀리 떨어지는 것이다. (시체를 가까이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나오미의 두 며느리가 동일하게 멀리 떨어져 버린다면 누구든지 수긍이 간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또 이 사건을 중심으로 두 패로 나누어 진다.

죽은자로 안 보는 시선의 등장이다.

오히려 아주 적극적인 산자로 취급한다.

나오미를 불임여성처럼 죽은자처럼 만든 그 여호와 하나님이 자신의 하나님이라고 외친다.
죽음에 뛰어들고, 저주, 부정, 시체에 뛰어드는 것이다.
생명의 단절에 뛰어드는 그 불가능성에 뛰어드는 자와 그렇지 않은자로 졸지에 나누어진다.

(룻 1:11, 개역) 『나오미가 가로되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나의 태중에 너희 남편될 아들들이 오히려 있느냐』
(룻 1:12, 개역) 『내 딸들아 돌이켜 너희 길로 가라 나는 늙었으니 남편을 두지 못할지라 가령 내가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든지 오늘 밤에 남편을 두어서 아들들을 생산한다 하자』
(룻 1:13, 개역) 『너희가 어찌 그것을 인하여 그들의 자라기를 기다리겠느냐 어찌 그것을 인하여 남편두기를 멈추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인하여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룻 1:14, 개역)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 시모에게 입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룻 1:15, 개역) 『나오미가 또 가로되 보라 네 동서는 그 백성과 그 신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룻 1:16, 개역)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룻 1:17, 개역)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룻 1:18, 개역) 『나오미가 룻의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

 


 - 미완료 -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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