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에서 덮치는 사건 (십자가를 거두지 마소서)


주로 인간의 자기성찰은 어디까지나 자신이 걸어온 흔적인 과거를 뒤적거려서 나오는 것으로 자기반성에 나오고 그것을 고치는 작업에 나선다.

그러나 성경은 참으로 이상하게도 과거에서 나온 잘못을 뜯어고치는 방식이 아니라.
미래에서 잘못을 뒤짚어 씌워서 그 잘못을 뜯어 고치겠다는 뜻이다.

(이것을 십자가의 흔적이라고 한다. 즉 표적이다. 인간은 늘 기적을 꿈꾸고 양산하나? 그 기적을 유발케 해서 그 기적을 깨뜨리는 것이 십자가의 표적이다. 즉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기적이 안나타나고서는 표적도 없다. 물론 주체는 십자가의 흔적이기에 이 흔적을 드러내기 위해서 인간들은 반드시 자신의 흔적에 미련을 두도록 되어 있다.)


이게 무슨 수로 이성으로 납득이 되겠는가?

A : 너 이거 잘못 되었어?

B : 어떻게 뭘 잘못 했는데? 언제 며칠 몇 시 쯤에 그런 잘못을 했는지 지적해 주길 바래?

A : 아냐 아냐 그런 잘못은 잘못으로 취급도 안해!

B : 그럼 무슨 잘못이 잘못을 취급하는데?

A : 미래에서 너의 잘못이 덮치도록 되어 있어!

B :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해? 술 먹었니?

A : 그것은 너를 개별자로 취급해서가 아니라
미래의 두 무리를 대변하는 자로써 잘못을 뒤짚어 씌우는 거야?

B : 그만 그만 너는 이제 약 먹어야 돼! 내가 아는 정신과 의사 한 사람 개별자를 소개해 줄께!!

A : 주님께서 종말에 두 무리로 패를 나누시는데 한 쪽은 심판이 없다 라고 외치는 무리와
또 한 쪽은 심판이 있고 그 심판을 그 신체에 직접 담고 심판받는 모습으로써 종말을 맞이하는 (본인이 아무리 원치 않아도) 새이스라엘이라는 무리로써 보여줘야만 해.

B : 하필이면 왜 나 인데? 나는 고작 한 명일 뿐인데, 집단적으로 다루지 왜 나를 겨냥해?
헛소리하지 말고 꺼져? 나는 나 밖에 몰라.

A : 그래 그래 가장 적합해. 나는 나 밖에 모르는 그 자가 가장 적합해.
개별자로써 가장 자기 자신만 인식하는 자를 이제는 집단적인 보편적 종말무리를 대변해 주는 가장 적절한 인물이야 !

B : 아냐 아냐 난 거부하겠어!

A : 거부해도 소용없어 이미 완료 된 채로 덮쳐진 것이야 !
너와 같은 그 개별자로써 똘똘똘 뭉쳐진 자들로 만들어서 그 어두움에서 빼내는 방식이 바로 구원자의 시나리오야.

B : 아냐 ! 너의 그 말 자체가 신을 조작해 내고 있어 ! 너의 말 조차도 조작된 거야 !
인간은 알 길이 없어 그냥 생긴대로 살면 돼 !

A : 그래 그래 맞어 그러니까 피조물로써 창조주를 거부할 수 없는 피조됨에 그 종말의 피조물로써 충실히 하게 되어 있어 !

B : 오냐 누가 이기나 한 번 보자
그래 그 충실케 하는 것이 뭔데?

A :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운명을 예정으로 하신 새언약이야!

B : 그래서 우짜라고?

A : 그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새언약 사건에 의해서 창조가 완료되는 것이지.
십자가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죄인 중에 괴수가 새언약 백성으로 창조되고
또 한 쪽은 십자가를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의인의 자리를 자기 자리로 고수하는 자로 창조하시는 것이지. 새 창조 로써 말이야.

B : 무슨 근거로?

A : 십자가의 사랑으로

B : 내가 거부하면?

A : 너의 거부로 거부되는게 아니라. 십자가가 너를 거부하기에 거부하고
너가 아무리 거부해도 십자가의 사랑이 너를 새언약의 죄인 중에 괴수로 만들면 너는 아무리 거부해도 새창조가 되는 것이지.

B : 너무 소설 쓴다?

A : 왜 소설인데?

B : 일단 과거 역사로 기초로 해야 지금의 현실이 사실적이지
너는 이미 전제를 미래에서 덮치는 방식이야 그것은 사실적이지 않고 허구요 망상이야

A : 굿 바로 그거야 너 참 말 잘했다. 그 사실적으로 하나님까지 과거의 역사로 구축하여서 벌어진 사건이 뭔지 아니? 십자가 사건이야. 예수님이 반드시 하나님의 백성에 손에 죽어야만 한다는 것이야. 그것은 결국 미래를 과거와 현재를 역고 잇고 이어서 예수님의 피와 연결 될 수가 없다는 뜻이야. 도리어 예수님을 죽이게 되지.

B : 그렇다면 인간의 행함은 다 거부네?

A : 행함 뿐만이 아니지. 인간의 신학, 믿음, 신앙, 기도, 봉사, 그 모든 것의 거부이지.
인간 신체에서 나오는 것은 다 거부요 소외야!

B : 왜 그런데?

A : 미래에서 온 예수님의 몸과 졸지에 차이가 나 버린 것이지.
만약 예수님이 오지 않았다면 그런 유대인의 방식이 틀린 이유를 알 길이 없지
그들 조차도 그 잘못을 수정하는 것 조차도 과거와 현재에서 찾지
미래에서 찾을 수가 없지.
인간의 몸은 과거의 산물이나(그래서 늘 의문 뿐이지)
예수님의 몸은 미래에서 온 몸이야. 그래서 완료 뿐이지.

B : 그렇다면 너의 말은 잘못 조차도 미래에서 온다는 말은
예수님과 연관된 의미로써의 잘못이네?
마치 베드로가 예수님으로부터 건짐을 받기 위해서 예수님의 부인하는 사건이 발생이 되고
그 잘못을 씻기 위해서 닭을 준비한 것 처럼?

A : 물론이지 다윗이 과거를 축적해서 나온 율법의 행함들이
미래에서 덮친 십자가의 피로 연관되기 위해서
다윗에게서 나올수 있는 모든 거룩하다 라고 착각하는 그 행함들이 과연
죽음이라는 형벌을 피할 수 있는가 하는 점에서 여호와는 밧세바를 궁전 중앙에 심었던 거야.
다윗은 자신의 의로운 행동 마일리지로 그 지옥의 심판을 막을 길이 없었어.
죄의 소원을 무슨 수로 막겠어.
결국 상한 심령이 그에게 덮쳐져야해.
이미 죽이시기로 작정된 꺽으신 뼈로 인해서 심판에서 긍휼로 넘어가는 것이지.
그래서 심판을 담고자 미래에서 죄가 덮쳐지는 것이야.
이미 용서하기로 되어 있는 사랑이 완료되었다 라는 것을 보도록 하기 위함이지.

B : 그렇다면 우리는 철저하게 소외된 것이네?
아버지와 아들의 소원대로 사랑하실 자를 사랑하시니까?

A : 사랑이란 철저한 배타성이야. 그 배타성을 아무리 거부해도 그 배타성을 보편화 시키기 위해서 종말이라는 심판을 깔아버리는 것이지. 그 아래에서 마땅히 저주 받아야 할 자임을 아는 자는 사랑받은자요, 그 심판 아래에서 왜 날 저주하느냐 라고 그 심판의 주체를 거부하고 자신의 심판받음을 거부하는 자는 또 다시 십자가의 살인자로 뒤짚어 씌워서 판결하는 것이지. 결국 그 어떤 것도 인간의 행함 여부에서 나온 심판이 아니라. 예수님의 일방적인 사랑의 여부로써 나오는 것이지. 긍휼히 여길자를 여겨서, 강퍅케 하실 자를 강퍅케 해서 나누시는 창조이지.

B : 에이 그게 무슨 하나님이냐?

A : 바로 그거야 그래서 인간들이 조작한 하나님은 인간들이 바로 그런 배타성을 빼버리고 심판도 빼버리고 지옥도 빼버리고 저주도 빼버려서 인간의 강아지로 만들어 버리지. 최종적인 자기 이미지 이지. 자기자신을 감춘채 아무리 신을 찾아도 결국 자기자신을 찾는 것이지. 나약한 악마가 된 나를 거부하고 정의로운 영웅의 나를 찾듯 신을 찾고 있지. 자기자신을 찾으면서 말이지. 또 그래야 돈이 되지. 돈이란 단순히 소유욕이 아닌 남에게서 조차도 도움을 줄 수 있는 서로서로에게 유익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가장 보편적이고 객관적이니까 선한방향으로 특히 신에게 쓰면 되는 방식이면 다 선하게 되는 것이지. 만약 돈이 되지 않는 하나님은 (교인에게도 돈 되고 목사에게도 유익이고) 그 반대인 철저한 돌로써 응징되는 하나님이겠지. (증거자로 돌 맞고, 성도에게도 돌이 되는)

B : 에이 그럼 누가 그런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겠니? 불가능이지.
증거자도 돌삐 맞을 테고, 그 증거를 받아들이는 자도 돌 맞을 텐데.
분명히 서로 서로가 원치 않을텐데?

A : 맞아 맞아 원치 않아야 정상이지. 그런데 문제는 아무리 원치 않아도
새언약이라는 완료는 취소 되지를 않는다는 점이야.
오히려 그 완료가 취소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가장 원치 않는 자를 사용하시는 거겠지.
그것을 희한하게도 가장 거부자가 믿음의 선배로써 나열된 것이야.
그러니 주님의 솜씨이지 인간이 한게 단 하나도 없었고
인간의 철저한 소외 당함이 진정한 창조가 부각되는 것이지.
생각을 해봐? 인간이 개입이 된 것이 창조이겠니? 그것은 창조도 아니지.

B : 만약 인간이 개입케 되면 그것은 인간에게 자랑이 되겠고
또 인간이 한 것이 되면 미래에서 덮친것이 아닌 역사에서 나온 산물이니 새언약의 반대이겠네?

A : 그래 그래 그것을 우상이라고 해. 우상이란 인간의 신체에서 나온 산물을 말해.
그 신체는 아주 특이한 속성으로써 단 하나의 결과만 낳게 되지.

B : 뭔데?

A : 그 결과의 산물은 딱 하나야! 하나님과 같이 된 선악이야.
유일하게 인간이 하나님께 도전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님과 같이 되는 복사본이 되는 것이지.
인간의 모든 것은 신 흉내야.
의인 되기, 종교갖기, 선한행동하기, 죄를 반성하기, 착하게 살기, 이웃사랑하여 천국가기, 남을 괴롭혀 지옥 안가도록 하기, 등등 이 모든 것들이
신을 흉내내는 자신만의 하나님이 되는 경쟁심이지.
정작 그것이 죄인데 말야
즉 죄란 분리 된 것을 모르는 것이 죄야? 분리 되어서 개별자로써 따로 따로 신처럼 모양새를 갖추는 것이지. 하나님과 분리 된 게 죄이지. (에덴동산에서의 뱀의 역할의 반복성을 똑같이 하게 되고, 그 에덴동산에서 벌어진 상황의 반복이지. 부랴 부랴 생명나무 철거하는 것 조차도)

B : 그럼 십자가 사건 조차도 하나님과 분리 된것이 죄라는 것임을 규정하기 위해서 미래에서 온 사건이고, 더군다나. 과거의 산물이 아닌 미래이기에 그 단절성을 보여주는 것이
정작 과거의 역사를 다 담고 있는 그 유대인에게서만 버림을 받는 방식이네? 유대인이야 말로 가장 하나님의 법으로 자신들을 똘똘 감아버린 자들일테니까?

A : 물론이지, 그것은 오늘날에도 멈추어 지지 않지. (유대인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도 해당 되게 된 거지. 하나로 묶어버렸으니까 )

B : 왜 멈추어 지지 않는데?

A : 구름타고 다시 오실 분이 또 미래에서 오기 때문에 그 분이 벌리시는 사건에 연관 되기 위해서이지. 저들이 그 일을 알아서 하는 법은 없어. 다 자기가 하는 짖이 뭔지 모르고 미래의 사건이 덮쳐져서 하는 것이니까?

B : 에이 그럼 그것은 숙명론 운명론 아니니?

A : 오호 바로 그거야 그 숙명론 운명론 선택론 예정론 처럼
인간이 가장 자신의 선악을 드러내는 방식이 없지
그러나 인간이 자신의 선택과 구원을 염두하고서(소외 아닌 개입) 나온 예정과 선택을
일부러 비켜가고 또는 박살 내는 식으로 오는 예정이라면 인간은 아무도 원치 않도록 되어 있어

B : 아 그래서 아까 말한 유대인에게서만 버림받는 식이라면 그들이 완벽한 예정을 구현했기 때문에 딱 맞는 식이네

A : 그래 그래서 십자가는 걸림돌이야

B : 그럼 내가 이렇게 너의 말을 받아주면서도 너는 십자가로 몰아넣는 것 조차도
너와 내가 아무리 이론으로 말로 논리로 합리적으로 다 따져도
그 십자가의 사랑을 내 쪽으로 너 쪽으로 끌어당길수 없는 것이네

A :
그렇지

B : 그럼 난 거부 할래

A : 아니지 넌 그리고 나는 처음부터 거부 당한 주제인줄 모르기 때문에
도리어 거부한다고 착각하는 것이지.(넌 거부할 권리조차도 없어. 이미 거부된채로 있는 것인줄 모르기 때문에 권리가 있는줄 착각하지)
그래도 상관 없어 오히려 얼마나 십자가가 미래에서 제대로 덮쳐졌으면 걸림돌로써 작용했기에 나온 결과이지 너의 결정에 의한 결과가 아닌 거지. 착각하도록 해야하겠지.

B : 딱 하나만 물어보자.
지금 모든 교회는 십자가를 증거 하고 있거든
그런데 왜 너는 다른 십자가를 증거하니?

A : 좋은 질문 해 줘서 고마워.
인간이 만들어내는 십자가는 그 십자가 조차도 자기를 위한 자기에게로 되돌아오는 십자가이기 때문이지. 역시 우상이야. 그런 십자가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구원용일 뿐이지. 전형적인 탐심을 십자가에서 조차도 포기 못하겠다는 것이지.
자기가 자기 십자가로 자기 구원의 자리를 마련해 놓을때
진짜 십자가는 그 자리를 심판의 자리로 만드는 것이지.
자신의 심판의 자리로 십자가를 못보는 자는 이미 멸망 받은 자이니
오히려 그런 인간 구원용 십자가가 널리 널리 퍼져야만 해.
그래야 똑같은 십자가 사건이 반복이 되고 증식이 되겠지.
괜히 주님이 신학자와 목사들을 그렇게 돈 들여 가면서 공부시간 투자 시키면서
저들을 양산해 놓은게 아니지? 인간 자체가 우상임을 인간구원용십자가를 양산시키는 것이야!

B : 결국 십자가의 영은 단절의 영이네? 육의 생각이 가입이 될 수 없으니까? 인간이 조작해 내는 구원 또는 십자가. 또는 교회 또는 뭐든지 하나님이든 예수님이든 뭐든지 다 단절이 아닌 일치성이 되도록 도와주겠다고 다가오겠구만?

A : 그래

B : 그렇다면 십자가가 이런 모순도 배경으로 깔겠네?

A : 어떤?

B : 바로 그렇게 말하고 있는 너 조차도 육이니, 그런 육인 너에게서 나온 말도 육으로써 나오게 하는 말 조차도 말야!

A : 그래 그래 바로 그거야 ! 예수님이 육으로 오신 이유도 그거야!
무슨 수로 요셉이라는 육의 아들의 말을 무슨 수로 믿을 수 있겠니
하물며 나 또한 더하면 더했지. 믿음에 보탬이 되는 방식은 일체 없어. 도리어 이전에 믿던 방식을 허물어버리는 방식 뿐.
결국 믿을 구석을 주는 식이 아니라. 도리어 잘 믿고 있는 그 믿음 조차도 한순간에 배신으로 돌아서게 할 정도로(가룟유다처럼, 베드로처럼 꼬끼오×3) 인간의 믿음 조차도 단절 곧 삭제 시키는 방식으로 오로지 예수님 자신의 믿음으로만(죄인 중에 괴수 만드는 십자가의 원수 만들기) 덮치는 방식이지. 그래서 미래에서 덮치는 것 뿐이야. 그 창조에 긍휼의 그릇 진노의 그릇으로 나누어지는 토기장이의 영광만 드러내는 것이지.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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