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귀가 요구하는 공평성과 객관보편성


예수님은 마귀만을 상대로 일하신다.
그것은 사랑 때문이다. 사랑을 드러내기 위해서 미움을 이용해 차이를 극대화 시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폐쇄적인 사랑이라는 일방성 때문이다.

여기에 마귀는 폐쇄적이지 않은 개방적인 공평성을 주장한다.

한 남자에게 두 여자가 역이는 삼각관계가 우발적으로 형성된다.

남자는 한 여인만을 사랑한다. 그러나 그 여인은 그 남자의 사랑에 시큰둥하다.
그것은 본 다른 여인이 그 남자를 사랑하기로 마음먹게 된다.
그러나 남자는 자신을 사랑하는 여인을 극도로 거부한다.

야곱에게서의 두 아내의 모습은 단순히 한 가정의 두 갈래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 역사 속의 모습을 보여주는 서막이다.

또 그 이스라엘은 모든 인류의 대표성을 담아주는 그릇이 된다.

결국 누가 사랑 받는가 라는 것에 명확하고 뚜렷한 차이를 드러내기 위해서
사랑의 주체자인 누가가 이미 전제된 상태에서
사람들은 이제 자신이 사랑 받은 사람으로써의 그 조건을 충족 시킨다.
거기에 도화선 역할로서의 몽학선생인 율법이 가입이 된다.

이번주 오후 설교의 내용이 그런 식의 인간들의 사랑과 미움에 대한 내용이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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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메두사 같은 여인은 정작 자신들이 사랑받을 만한 조건들을 다 갖춘채로 사랑의 주체자도 그 사랑에 투사해 버린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역사와 전통과 거기에 따른 율법이라는 언어가 그들에게서의 물증이 된 셈이다.

그러나 정작 야곱처럼 예수님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은 따로 있었다.

그러나 그 여인은 이상하게도 언니 레아에게 남편의 사랑 받기에서 졌다 라는 의식만 남긴채 죽게 된다.

사랑하겠다는 여인인 레아가 이겼고
진짜 남편으로부터 사랑받는 여인인 라헬은 죽었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라헬의 죽음으로써 종식된 끝난 이야기여야 한다.

그러나 이 남편이 곧 사랑의 주체자가 이야기를 끝내지 않고 있다.

오히려 역전 시킨다.

이미 죽어버린, 탕자같이 더러운, 이방인과 같은 라헬은 살리고
이미 이겼다고 맏이같은 이스라엘 선택민족은 가지에서 짤라버리는 레아는 원래 죽은자로 취급해 버리는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사랑의 이야기가 아닌 (이스라엘의 하나님)
사랑의 주체자 당사자가 바로 그런 악마성에서 나온 사랑을 딛고 더 나은 사랑으로 나온 사건이 십자가의 사랑의 역전 드라마이다.

죽은 여인 라헬에게 남편의 사랑이 뛰어든다. 아니 사랑 자체가 사랑만을 드러내기 위해
일부러 죽은자와 방불한 자를 찾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이다.

그래서 믿음이 믿음을 잇는 방식은 레아의 자식에게서가 아닌 이미 죽은자와 방불한 사랑받은 여인에게서의 믿음 잇기 방식이다.

이 믿음 잇기에 반드시 동원이 되어 차이를 드러내는 육의 방식이 항상 동반 되어야 한다.

그래서 사랑의 조건을 여인 쪽에서 갖추어서 사랑하겠다는 쪽과
또 반대로 전혀 사랑 받을 조건 조차도 갖추지도 않았는데 일방적으로 사랑 받은 쪽과의

대립된 양상의 마당이 한 가정에서 국한 된 것이 아닌 응축된 점으로써의 보편적단독성으로써

사랑을 드러내는 응답해야만 하는 피조물인 것이다.

여기에 반드시 자기가 사랑하겠다는 쪽의 그 사고방식인 마귀는
개방성과 공평성을 요구한다.

예수님에게 3가지 시험을 했던 마귀의 시험과 그리고 마귀들은 유대인들과 모든 인간들과 그들의 메시아 등의 모든 요구는 바로 불공평 없애는 객관성이다.

편협한 사랑 따위에 얽매이지 말고, 그 폐쇄적이고 비밀로만 가득한 은밀한 사랑이 아니라.
누구나 공감이 가고 누구나 참여가 되는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는 아아 대한민국 같은 천국을 요구했다.

제발 제발 불공평을 없애자 라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악마다.

과연 그들이 불공평을 없애고픈 마음이 있을까?(가룟유다가 향유를 부은 여인을 화를 내면서 질책한다. 그 화냄은 가난한 자에 대한 배려의 마음이 추호도 없다는데에 대한 법적인 잣대이다. 곧 사랑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가룟유다 속의 사랑을 끄집어내는 비싼 향유 부음 허비에 대한 법적 지적을 유발케 함으로써 제사 보다 더 나은 사랑, 사랑 보다 더 나은 사랑을 이 여인에게서 뽑아낸다.)

불공평으로 봤다는 그 시선 자체가 이미 법으로 가득한 것이다.
(인간의 정의감이야 말로 가장 악마적이다. 그러나 그 정의감이 아니면 인간은 그 어떤 목적도 세울수 없다. 가장 대표적인 정의가 바로 성화론이다. 신과 나와의 성스러운 계약설정이다. 그 목적을 사람에게 던져주면 인간에게서는 행동이 나올 수밖에 없다. 과거로부터 도출된 행적이요 실적이다. 그러나 바로 그것을 깨뜨림으로 나타난 것이 미래가 덮쳐서 나오는 믿음이다. 아브라함은 하늘에서 난 약속의 자녀 때문에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과거로부터 도출된 믿음이 박살 남으로써 말이다.)

비록 그렇게 말을(공평해야한다고) 하지만 이미 법을 판단한 이상 하나님과 같이 되었고

신이란 두 신을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자 그러면 예수님의 숙제는 딱 하나다.

누가 진짜 신인지 가짜 신인지 가려내자 라는 것이다.

이 속내를 주님은 사건마다 들추어내신다.

그런데 인간의 반응들은 무슨 회개망측한 뚱딴지 같은 헛소리냐 라고 따진다.

나는 하나님과 같이 된 적 없다. 오로지 하나님을 섬기는 행동들 뿐이다.
그래서 명령을 따르는 것이다.

과연 명령을 따른다는 그 속내가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나오는 것일까?

명령을 지키고 따른다는 것은 일종의 복수다.

그 내용이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저 문자 기호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으면 그만이다는 식이다.정작 그 내용은 이러하다. 너는 못해 미래에 오실 예수님이 할꺼야.

일단 인간들은 예수님이 오기 까지 차곡차곡 명령어를 지켰다가

또 예수님이 드린 제사가 열납이 되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가 나타나기 까지는

이유 없이 그저 명령만 따른다.

정작 예수님이 비로소 올바른 제사를 드리니

모든 인간들은 죄의 소원이 씌인 가인인냥 다 달려들어 예수님을 죽여버린다.

마치 아벨의 제사를 열납하니 자신들이 그동안 지켜온 명령어를 지킨 그 제사는 버림받았기 때문에 안색이 변한 것처럼 말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의 사랑을 이루기 까지는
인간의 사랑이 그것도 하나님의 말씀의 명령어를 지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사랑을 제대로 수행한 것인냥 착각한 것처럼 말이다.

십자가의 사랑을 통해 거쳐서 보게 되니
인간이 그것도 유대인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 것은 악마적이였다는 것이다.

그것으로 자신이 사랑 받을 만한 조건들 그것도 법적인 효력을 가진 조건들만 지켜온 것이다.

참으로 악랄하기 짝이 없는 그야 말로 악마 그 자체이다. 가룟유다가 그랬다.
제자들도 그랬다.

모든 인간들이 그랬다.
문자를 해석할 줄 아는 자기의 해석과 언어풀이 능력으로 말씀 해석에 까지 손댄 것이다.

사랑하라 가 자신들의 손에 포착이 되니 지키면 그것으로 법적 효력을 갖는다고 일방적이고 폐쇄적인 자기들의 해석을 그것도 다수화 시켜서 주장하는 것이다.

놀랍게도 그렇게 그들이 완벽하게 지켜온 말씀도 십자가 앞에서 모두다 거짓임이 판명이 된 것이다.

그렇게도 개방적이고 객관적이고 온갖 편협치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자신들의 언어해석 풀이로 해석하고 또 그것을 행하고 실천했으나

도리어 그 행함들이 자신들의 해석에 자기가 갇혀버린 폐쇄성을 지니게 된 것이다.
그래놓고도 구원이란다. 사실상 그 해석과 실천력은 결국 예수님을 죽이는데 아낌없이 다 동원이 되었다.

오늘날 현대도 마찬가지이다. 해석 포기를 하지 않는다. 아니 할 수도 없다.

자기가 예수님을 사랑하면 할수록 예수님을 죽이는 줄도 모른다.

(요 2:17, 개역)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그렇게 딴딴하게 굳혀진 자기가 자기를 가두어 버린 그 성전에서

사도바울은 십자가가 그 성전을 깨뜨렸음에 대해 이렇게 고백한다.
그 성전 안에서는 무엇 뿐이다?

곤고함 뿐이다 라고

(롬 7:18, 개역)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롬 7:19, 개역)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롬 7:20, 개역)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롬 7:21, 개역)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롬 7:22, 개역)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롬 7:23, 개역)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롬 7:24, 개역)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것을 사망의 몸이라고 했다. 말씀을 지키고서도 여전히 사망의 몸 곧 의문의 몸이고
말씀을 지켜 행하고 사랑하고서도 여전히 사망의 몸 곧 의문의 몸이다.

몸 자체가 선악 덩어리가 되었기에

자기 몸 밖에 안 보인다.

그래서 그 몸을 그 성전을

먹음직 보암직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게 하기 위해서 말씀을 지키고 행한것이지

진정으로 사랑이 있어서 말씀을 지킨 것이 아닌 것이다. 말씀을 이용해서 자기 방어용의 수단으로 사용했지 여전히 그 주체와 원인은 땅에 발을 때지 못하는 곧 사망의 몸인 것이다.

죽음도 못 이기는 주제에 무슨 사랑을 하는가?

그런데 웬걸?

비로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임을 아는데 외부에서 사랑하는 자와 찾아왔다.

비로소 그 첫사랑(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사랑을 받아버린 상태)에 눈을 뜨게 되니 상대방만 크게 보이고 자기자신은 너무 하찮게 보인다.

전에는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려면 자신을 극대화 시키고 극대화 시켜야 그 에너지원이 모여서 사랑할 수가 있다. 목사가 사랑하고 싶으니 돈을 모으는 것이다.

인위적으로 실로암 물가에 가서 물을 퍼 담아 성전에 물 뿌려 생명수가 흐르는 티를 낼려는 짖이다.

자체적으로 물이 생명수처럼 마르지 않고 퍼도 퍼도 소멸되지 않는 목마르지 않는 샘이 아니다는 증거이다.

그런 자신에게 눈을 뜬 것이다.

처음부터 발가벗겨져 있었고, 지금도 발가벗겨져 있고, 앞으로도 발가벗겨져있을 뿐이데
그동안 성화든 말씀이든 행함이든 믿음이든 되도 않는 것들로 더덕 더덕 온 몸을 걸쳐 자기자신을 폐쇄적으로 감추는데 사용한 것이다.

그 사망의 몸이라는 수치를 가리우고자 말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온 상태에서 율법(남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의 완성)의 완성을 보게 되니
자신이 율법을 지킨 것이 주님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도리어 의문의 법으로써 사망의 몸 뚱아리의 그 저주를 자기가 자기치료로 자기구원으로 고치고자 했던 것이다. 가릴려고 했고 가릴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차라리 소경이였더면 죄인이였더면 환자이였더면 예수님이 고쳐주실텐데
나일롱 환자처럼(9명의 문둥병자처럼) 또 그 병고침 조차도 기적으로 자기를 가리우는데 사용한 것이다.

바보다 바보. 우리는 늘 바보다. 사망의 몸을 가린다고 가려지는 사망의 몸인가?

차라리 나 소경이요 저주 받은자인데 안고쳐줘도 될 사망의 몸을 주님이 대신 사망의 몸이 되셔서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사랑은 다 거짓이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만 참되십니다.

사망의 몸에서 나온 사랑은 결국 예수님에 대한 적개심일 뿐입니다.

예수님이 사망의 몸을 이기셨습니다.


아무리 외쳐도 소용없다.

여전히 역사라는 마당에서는 레아와 라헬은 자신의 생산물 자신의 신체에서 나오는 자기열심의 결과물에만 관심둘 뿐이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이다. 이미 죽은 라헬에게 뛰어들어서 자신의 몸에 접붙임 하신다.
생명의 몸에서 나오는 목마르지 않는 샘이 도리어 죽은자와 방불한 라헬에게 재격인 것이다.

이스라엘 내부에서 레아 에게 속한 자들은 자신의 풍성한 소산물이 라헬의 사랑의 소산물인 열매 보고 이를 뿌득 뿌득 갈 것이다.

열심히 사랑했기에(순풍 레아),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사랑받을 자를 (야곱의 일방적 사랑)
죽도록 미워 하는 것이다.

사랑도 미움도 예수님에게만 권리가 있음에도 우리는 사랑 받고자 힘썻고
또 미움의 권리를 가지고자 남들을 사랑했다.

곧 사망의 몸으로써 남을 사랑했기에 남을 미워한 셈이다.

바로 이런 인간임을 알고 남을 미워하는 것이 사랑이다.
예수님은 세상을 악하다 라고 규정하셨다.

그 증거로 사랑하는 자들을 이 세상으로부터(기독교, 교회, 유대인을 포함해서) 미움받도록 하셨다.

여기에 또 무슨 권리가 있는냥 마귀는 반발한다.

불공평 하다 라고.

정 불공평 하면 마귀의 편에 썬 인간들은 공평하게 사망의 몸이 아닌 몸으로써 남을 온전히 다 내어주는 목숨마저 버리는 사랑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들은 정치적인 이슈나 다수의 객관적 결정에 의한 것이 아닌 이상

자기의 몸을 너무 너무 사랑하기에 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이웃을 자기 몸 같이 사랑하는 자는 없다.

자기 몸 같이 이다. 자기 몸이란 철저한 이기적인 몸이기 때문이며 그렇기에 사망의 몸이다.

그 이웃 조차도 그런 몸 뿐이다. 자기 밖에 모르는 몸이다.

그래서 남이 어떤 도움을 주더라도 이용해 먹고 그만이다. 9명의 문둥병자처럼 말이다. 법적인 몸이라서 그렇다. 결국 이웃이란 없다. 단 하나의 몸 뿐이다. 사망의 몸이다.

이웃이 될려면 생명을 나눌수 있는 몸에게만 해당 된다.

결국 이웃도 불가요
자기 몸 같이 사랑도 불가이다.

눈에 보이는 것들은 모조리 다 그림자이다는 뜻이다.

실체가 본을 보여줘도 그 본을 못 따라하는 그림자임을 뼈저리게 아는 자는 없다.

그것조차도 실체가 해야할 숙제이지 그림자인 허상이 할 숙제란 없고, 해 봤자 안개이다.

우상을 들추어내질 않는 이웃 사랑은 거짓이다.

결국 유일하게 이웃을 위해 목숨을 버린 자 만이 유일하게 공평하다.

그러나 그림자들끼리 허상이고 안개들이 모으고 모은 공평은 자신들의 실체가 드러날까봐
지래 겁먹고 예수여 아직 시간이 안 되었는데 벌써 왔느냐 라고 따지듯이
예수님의 사랑에 불공평만을 주장한다.

십자가의 사랑이 왜 불공평하게 보여야만 할까?

제대로 악마가 반응했다는 뜻이다.

이 불공평의 사랑을 외치는 것이 유일한 사랑이다.

우상을 악마(사망의 몸=사망에서 자유롭지 못하는 폐쇄적인 몸)를 들추어 내니까 말이다.
(우상 만들기의 달인들인 인간은 우상, 악마(사망의 몸=사망에서 자유롭지 못하는 폐쇄적인 몸) 세우기에 평생 이짖만 한다.

예수님은 우상을 깨부수시고 사망에서 자유로운 죽어도 상관 없는 몸 만 만드는 토기장이요 달인이다. 그 기준이 바로 예수님 형상이다.

이제 인간(악마)이 만드는 하나님의 형상과
예수님이 만드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의 대립된 구조가

이 땅에 가시화 되는 것이다. 어떻게?

아벨처럼 죽어도 상관 없는 십자가의 창조 제물이 된 것처럼 말이다.

(고후 4:8, 개역)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고후 4:9, 개역)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고후 4:10, 개역)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후 4:11, 개역)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고후 4:12, 개역)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고후 4:13, 개역) 『기록한 바 내가 믿는 고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는 고로 또한 말하노라』
(고후 4:14, 개역)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니』
(고후 4:15, 개역) 『모든 것을 너희를 위하여 하는 것은 은혜가 많은 사람의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고후 4:16, 개역)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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