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자리


예수님의 자리는 항상 비어 있다.
그 자리는 항상 먹음직 보암직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다.

그래서 답답하게 비어있는 그 자리를 부재로 남겨놓는것에 대해
너도 나도 넙죽 앉기 시작했다.

예수님의 자리를 목사가 넙쭉 앉아버렸고
예수님의 자리를 기독교가 교세의 힘으로 넙쭉 쟁탈해 버렸다.
예수님의 자리를 개혁주의와 성화론자 새생명운동가 하나님나라운동가들도 앉아버린다.

물론 이것은 오늘날만 그런 것이 아니다.

과거 이스라엘의 전 역사는 이 짖만 계속 했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유만으로 하나님과 같이 되고팠다.
그리고 늘 하나님의 빈 자리는 하나님과 같이 되고픈 이스라엘백성에게서의 큰 유혹거리이다.

좀처럼 그 유혹을 뿌리칠수가 없다.

늘 비어져 있기 때문이다.

왕을 주소서 왕을 주소서

왕이라는 부재는 왕을 달라고 해서 과연 채워질까?
그 왕을 달라는 그 백성은 과연 백성의 자리에 만족할까?

왕을 달라는 것은 왕을 자기 종으로 삼기 위함이다.
왕을 종처럼 부려먹을줄 모르는 인간은 인간도 아니기 때문이다.

교회는 바로 이런 인간의 죄악성을 고스란히 담은채로
하나 하나 빼앗기는 부재의 자리를 극대화 시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실패 했다.
그 부재의 자리에 항상 넙쪽 앉아버리는 자들로 인해 괴롭힘을 당했으면서도 불구하고
그들 스스로가 그 자리를 부재로 남겨두질 않는다.

그러나 교회는 이미 완료 된채로 세워진 예수님의 피로 흥건히 적셔져 있다.

완료 되지 않은 것이 없다.

부재로 남겨진 그 빈자리를
빈자리 그대로 놔두어도 상관이 없다.

그런데 선악이라는 법의 힘에 장악당한자는 그 빈자리를 절대로 가만히 둘수가 없다.

누가 앉든 앉아야 하고 가만히 비어 있는 그 자체로 불안해 미친다.

예수님이 앉든지 하나님이 앉든지 목사가 앉든지
누구든 앉으라는 것이다.

그 비어 있다는 그 자체로 싫은 것이다.
공포요 두려움 그 자체이다.

그러나 비어있다는 그 자체로 아름답게 보시는 이가 있다.
하늘 영광을 버리고 빈자리로 남겨둔채
이 땅에 내려온 분에게 꼿혀버린자들만 아름답게 보인다.

뭐든지 꽉꽉 채워야만 한다는 알수 없는 의식에 상반된
그냥 가만히 비워져 있어도 상관 없다는 그 의식은

빈자리의 비어있다는 그 자체로 두려움과 공포가 되는 것과 (정신분열) 반대로
누가 비우셨다 라는 그 누구라는 주체에 관심을 두게 되는 것이다.

정신분열은 하나님과 같이 된 인간이 자아를 그 빈자리를 비어둠에 있어서 미쳐버린다.
그 빈 공간을 뭐든지 채워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게 된다.
가만히 둘 수가 없는 것이다.
결국 모든 관심사가 자아이다. 하나님과 같이 되었기에 하나님처럼 뭔가를 행세를 해야함에 있어서 그 비어있음이 용납이 되질 않는 것이다.

그러나 비어두신 분이 외부에서 졸지에 생긴자는 그 비워둠이 아름답니다.

자기부인이란 성령의 육체에 대한 단절적인 생각을 말한다.

비로소 다윗은 왕의 자리에 왕답게 자신이 뭔가를 해야한다는 그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왕 자리를 비운다.

그리고 앞으로 두가 그 자리에 앉을것인가에도 관심 없다.

비우게 하신 분만 있으면 족한 것이다.

그 구체적인 인물이 다윗을 빼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비움이라는 자기목숨을 내어준 구체적인 사건인 십자가에 피흘리심으로써 말이다.

다윗은 약속이란 십자가의 사랑만을 예정하셨고 그 예정된 약속을 이루시는 구체적인 활동상을 언약으로 본 것이다.

그 인물 유일하게 모든 것을 비우신 분
자기자신을 내어주며 십자가에 못 밖히고자 화목제물이 되시려 오신 분

그 구체적인 인물을

목사든 교회든 장로든 개혁주의든 성화주의든 뭐든 등등이

그 빈자리를 가로막고자 넙쭉 앉게 됨을 봄으로써

우리는 예수님이 규정한 악함을 보게 된다.

그들이 왜 거룩의 자리에 넙죽 앉는지를 말이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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