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의 총화인 이스라엘과 누락의 총화인 새이스라엘


선택이 한 가닥 안에서 벌어진다면 쉽게 생각해볼 필요없을 정도로 다가온다. 문제는 선택의 기로에 서는 두 가닥에서의 선택은 반드시 한 쪽은 누락을 보여주도록 되어 있다.

인자는 모든 인간의 선택을 꺽는 누락의 모습으로 온 쌍둥이다.

즉 쌍둥이란 복사판인 모든 것이 동일하면서도(일치성) 불구하고 반드시 배타적인(차이성) 양상을 드러낸다.

예수님의 비유가 특히 그러하다. 비유란 반드시 유대인의 선택사상에서 비롯된 선민해석 곧 예정 해석이다.

그런데 그 예정 해석을 뒤짚어 엎어버리면서 또 다른 예정에 대한 해석을 펼치는 것이 비유다.

즉 쌍둥이 해석이다.

이스라엘 선택이다 라고 해석하고서는 그 해석을 뒤짚어 엎으면서 다른 선택 다른 예정을 증거한다.

쌍둥이 에서와 야곱의 싸움은 바로 장자권 싸움이다.

지금 현재 저 장자권을 누가 차지하느냐에 대한 싸움에 모든 정치술 인맥 부모와의 친화력 주변 환경인 대자연 심지어 우주 환경 더 나아가 창세전의 예정의 주체인 하나님까지 스폰지처럼 빨아들여서 흡수통합한다.

장자권이야 말로 신이 자신의 미래를 보장해 주는 친밀성이다. 곧 안식이다.

이 안식에 대한 보장에 마귀가 가만히 있을 수 없다. 두 번째 시험에 거룩한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라 할 정도이다.

예수님을 향하여 시험을 걸 정도이면 모든 인간은 이미 넘어갔다는 증거이다.

신에 대한 선택과 사랑을 확보하라 라는 마귀의 유혹?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겠다는 이유도 그렇고
사실 교회 다니는 이유도 그렇고
신앙을 하는 이유도 그렇고
말씀을 지키고 이웃 사랑 실천하는 이유가 다 마귀의 유혹에 이미 넘어갔기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 틀렸고 너만 맞다는 말인가?

라는 말을 늘 인간은 예수님에게 쏘아 붓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귀와 합한 인간을 예수님은 십자가로 떼어 놓고자
모든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밖겠다 라는 양보할 수 없는 창세전의 예정을
친히 그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밖음으로 인해서

약속을 다 이루셨다. 선택을 다 이루셨다.

자 이 선택에 모든 인간의 선택론과 구원론과 하나님의 사랑은 다 깨어진다.

선택의 총화를 이룬 것이 아니라 버림의 총화를 이룬 것이다.

이 새언약에서는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미워하지 않는 자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마 10:32, 개역)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마 10:33, 개역)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마 10:34, 개역)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마 10:35, 개역)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마 10:36, 개역)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마 10:37, 개역)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마 10:38, 개역)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마 10:39, 개역)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마 10:40, 개역)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마 10:41, 개역)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마 10:42, 개역)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 20:28, 개역)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누가복음 14장 17장)


최근 사랑과 미움이라는 오후 설교를 통해서 이미 자기를 향한 사랑에 눈이 떠 버린이상
반드시 자기를 미워하라 라는 말씀을 거부하도록 되어 있고 미워하도록 되어 있다.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사무엘하-2009/24강-삼하13장1-2(다말과암논의연애사건)-2sa100404.mp3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사무엘하-2009/24강-삼하13장1-2(다말과암논의연애사건)-2sa100404.avi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사무엘하-2009/24강-삼하13장1-2(다말과암논의연애사건)-2sa100404.hwp

괜히 나를 사랑하는 그 눈을 뜬 것이다.

위의 마태복음 10장,20장과 누가복음 14장,17장의 공통점은
종말에 나타난 부류가 있는데 바로 종말을 충실히 이행하는 자이다.

곧 종, 제자, 선지자 이다.

섬기러 자기목숨을 내어주어 온 종이 된 인자
그리고 자기 목숨을 미워 하는 제자
그리고 자기집안식구와 단절된 검을 쥔 선지자

이 모두가 사적인 영역인 자기 집, 가정, 특히 자기 목숨을 이미 빼앗김을 당한 자들이다.

이들에게서 종말이라는 상황이 펼쳐진다.

자 이런 제대로 된 종말의 상황에 더더욱 인간의 자기방어기제는 자기선택의 총화로 이어진다.

한결같이 예수님을 따르는 12제자들의 모습이나, 인자의 섬김을 거부하는 유대인들의 반응이나, 자기 국가 체제에 위협이 된다고 예민하게 관찰하는 로마세력인 이방인이나?

한결 같이 자기 목숨의 보호막 시스템을 걱정하고 있다.

여기에 예수님은 창녀 세리 강도 문둥병자 개같은 이방여자 등과 같은
이미 자기 영역을 더 이상 갖출래야 갖출 능력이 없는 누가봐도 이미 종친자들을 종말의 카페트 배경으로 깔고서 그 위에서 종이된 인자의 섬김인 십자가(자기목숨을 내어주는 저주 받은)를 외친다.

이 보다 걸림돌이 없고 넘어뜨리고 실족케 하는 것도 없으며
이렇게 어리석고 미련하기 짝이 없는 그야말로 이런 누락의 총화가 있을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런데 이런 십자가의 잉태로 태어난 족속이 또 생겨나 버렸다.

그리스도의 몸이다.


이제 새이스라엘은 항상 종말이라는 묵시의 배경을 깔고 등장하면서
누락(자기부인)과 동시에 숨어계신 은폐된 분을 증거하는 불가능한 일에 동원이 되는 소모품이 된다.

이 목적 하나의 차이성 때문에 인간들의 모든 선택이 배설물처럼 쏟아져야만 하고
그것이 왜 배설물이 썩은냄새인지를 증명되는 사건들이 벌어진다.

그리스도의 향기와 인간의 행함과 열심히 채워진 배설물의 차이다.

우리는 이 두 냄새를 교회라는 마당에서 토해내도록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는 취소되지 않는

창세전의 예정된 그 십자가 만으로

인간의 포착한 모든 선택을 공격하는 제대로 된 싸움을 홀로 펼치시면서 말이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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