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악하다 라고 증거하는 진리


매 맞는 진리에 반대편에 설 수 밖에 없도록 되어버린 매를 쥔 괴물이 된 인간임을 밝혀버리는 것이 진리가 할 일이다.


진리가 무엇이냐 라고 빌라도의 물음에 예수님은 답이 없습니다.

즉 진리는 진리에 개입하고자 적극적으로 나서는 자들을 소외 시키는 것이 진리입니다.

지금부터 진리는 어떻게 취급당하는지 보십시오.

예수님이 진리입니다.
그 예수님에 인간은 참여 할 수가 없고 개입 할 수가 없습니다.
창조주입니다.

그 창조에 이래라 저래라 라고 개입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개입하는 모습을 보여야 차이성이 드러납니다.

그 진리가 매를 맞습니다.

그렇다면 진리와 함께 매 맞고자 적극적으로 참여할까요?

아닙니다.

진리와 반대편에 모든 인간들은 서게 됩니다.

그것이 십자가가 밝혀내고 들추어낸 진리입니다.

이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 모든 인간의 모습인 비현실성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입장에서는 바로 그런 현실이 비현실로 취급해 버립니다.

그래서 누가 어리석게 취급 당해 버립니까?
대중의 힘으로 밀어 붙여버리면
지금 당장은 누가 승리하고 완료한 겁니까?

그런데 웃기는 소리를 예수님이 외칩니다.
누가 봐도 인간들의 다수가 예수님을 꺽어버렸습니다.
그것이 실제로 현실적으로 추구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렇게 외쳐야 합니다.
나는 실패했고 다 이루지 못한 미완료로 끝나버렸구나 라고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참으로 뻔뻔스럽게도 죽기직전에 딱 한 마디를 크게 누가 들으라고 외칩니다.

다 이루었도다.

그 소리를 들은 인간들은 무지 무지 찝찝해 합니다.
오늘날 까지 무지 무지 거북스러운 가시처럼 걸림돌로써 남아버린 소리입니다.

완료를 단 한번도 이뤄본적 없는 허깨비들이
완료를 당당하게 그것도 죽음 속에서 외쳐버린 저 떳떳한 외침이
죽기를 무서워 평생 죽음의 종노릇하는 육체에 갇혀버린 인간들에게서는 무지 무지 찝찝한 소리입니다.

왜인고 하니 정작 죽음을 무서워 벗어나지도 못한 주제에 남 죽이겠다고 나서버렸으니
그것도 적극적인 개입인 강렬한 살인의지를 불태워 시원하게 손을 턴 순간이 그 순간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역전패 당한 것처럼 도리어 뭔가 꽁꽁꽁 숨겨진 감추인 것을 틀겨버린냥 홀라당 발가벗겨져 구경꺼리가 된 것처럼 벌거숭이가 된 것처럼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분명 우리가 예수의 아주 정당하게 정치적이든 순수하게든 아주 합법적으로 죽이는데 성공해서 야호 라고 외치니까 그것도 모두가 한마음으로 손에 손 잡고 벽을 넘어서 세상이 하나가 되어 이룬 승리로 야호 라고 외쳤는데 그 소리가 그렇게 아름답고 우렁차고 기운이 넘쳐 감격에 감격을 이루었는데

정작 우리 손에 죽어가는 예수님 딸랑 한명의 외침이 모든 소리를 잠재워 버릴정도로
우렁차고 아름답고 그 어떤 지금까지의 소리보다 기운이 넘쳐 우아 이 소리 보다 완료를 완료답게 이룬 소리가 없다고 누구든지 공감하는 절대음감처럼 더 이상의 완료는 없다는 소리 앞에 모두가 자신들이 외친 소리를 취소시켜버려야 할 판국이고 도리어 집어 넣어서 감춰버리고 삭제시켜버리고 엎질러진 물을 도로 담을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뻔히 알지만 어떻게해서든 도로 담아서 원래로 되돌리고픈 후회를 불러 일으킬정도로 그 외침 앞에서 무릎을 꿇게 만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꼴에 자존심은 있어가지고 어차피 꿇을 무릎이 결정이 낫지만 지금 당장한 못하겠다고 버텨보고 버텨서 끝까지 버틸수 있을때까지 버텨보지만

정작 이미 끝난 게임 앞에서는 손 서 볼 입장이 못됨을 아는 겁니다.

바로 그것이 빌라도에게 닥쳐버린 지독한 미움입니다.

며칠 동안에 빌라도에 대해서 주변인들과 말씀을 나눠 보았습니다.
다들 공감을 했습니다.

아무리 봐도 빌라도는 폭력적인 자가 아닙니다. 강퍅한 자가 아닙니다.
문제는 강퍅함을 뒤짚어 씌우는 분 앞에서 소용없다는 겁니다. 어쩔수가 없습니다.

네 맞습니다 반드시 강퍅한 자가 아니여야 합니다.
그래야 양쪽의 그 숨겨진 본성을 빌라도를 앞잡이로 삼아서 드러내도록 되어 있으니까요

그러면 빌라도 개인은 억울하지요 맞습니다, 억울합니다.
그러나 집단 보편적 흐름에는 결국 빌라도는 마귀가 만들어낸 작품이기에 어쩔수가 없는 겁니다.

제가 강조한 겁니다. 어쩔수가 없는 겁니다.

지옥 갈만해서 가는 놈 없습니다.
지옥 가는 것 불가능함을 빌라도를 통해서 깨닫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아무나 못 갑니다. 지독한 미움을 받는 놈만 갑니다.

빌라도를 보니 이유 없이 그냥 그냥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가인의 족보일 뿐입니다.

마치 가인에게 죄의 소원이 덮쳐버렸듯이 죄의 소원이 덮쳐버린 역할을 한 것 뿐입니다.

아들의 소원이 덮쳐버린 자들이 이유 없이 그 불가능한 천국을 원치 않아도 가야만 하듯이
바로 그런 아버지와 아들의 소원대로 덮쳐진 그 불가능에 대한 차이로써 가인의 죄의 소원이 덮쳐진 자들이 그 차이로 반드시 등장해야했던 것처럼 말이죠.

지난주 오후 설교때 갑자기 창세기 4장 아벨 족보인 죽었더라 족보와 가인의 족보 살았더라 족보가 설교 듣다가 갑자기 그런 생각이 튀어나와서 아 이거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창세전에 예정된 십자가로 인해서 두 패로 나누어진 그 양상이 결정된사항을 펼치기 위해서 드러나는 겁니다.

그것을 열매라고 합니다. 열매를 통해서 나무 자체가 비슷비슷하다 보니 썩여져 심겨진 나무를 통해서는 그 나무가 무슨 나무인줄 모른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나무에서 열린 열매는 참나 어린아이가 봐도 금방 안다는 겁니다.
놀랍게도 사과를 내면 사과나무였음을
포도를 맺으면 포도나무임을 말이죠.

선악과 나무를 본적 있는 사람 없습니다.
숨겨졌습니다. 은폐 되었습니다.

그리고 영생을 하게 하는 생명나무를 본적 있는 사람 없습니다.
숨겨졌습니다. 은폐 되었습니다.

물론 아담과 하와는 제외입니다. 그들이 죽어버렸고 알려주지 않은 이상 이미 그런 나무에 대한 지식은 사라진 겁니다.

두 나무의 존재를 알 길이 없습니다.

놀랍게도 두 나무의 실상은 두 나무 스스로가 외칩니다.

모든 인간은 이 두 나무를 증거하기 위해서 평생을 소모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죽음을
영생케 하는 나무는 생명을

그런데 정작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속은 죽음이지만 곁은 누가 봐도 생생하게 살아있는 모습을 표방하는 많은 사람들이 찾는 넓은 길과 같고

반대로 영생케 하는 나무인 생명나무는 속은 생명이지만 정작 겉모습은 선악과와 무조건 반대의 양상으로써의 차이성만 나열될 뿐입니다.

그것이 가인의 족보인 낳았더라 영웅이 되었더라 족보와
아벨의 족인인 죽었더라 족보로 나타납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그저 죽었더라 족보일 뿐인데 누가 죽음을 안 보고 동행이라는 함께함이 외부에서 덮쳤다 라는 것만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내용들이 아 갑자기 오후 설교 오전설교 들으면서 딱 아다리가 되더라 말이죠. 놀랬습니다. 그것을 강이아빠와 나누니까 강이아빠도 나도 나도 나도 라고 둘이 큰소리로 갑자기 웃으며 떠들게 되니 참 신기했습니다.

매 맞는 진리를 모든 인간을 진리에 소외 시켜 버렸기에
그래도 인간들은 진리에 개입하고자 하기에
그 속성을 그대로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그 모습을
그대로 창조에 활용하셔서 토기장이로써 불가능한 진노의 그릇과 불가능한 긍휼의 그릇으로 만드시는 겁니다.
인간은 매 맞는 진리에 정작 서지 못하면서도 그래도 적극적으로 개입하고파서
엉뚱하게도 매를 드는 진리를 매질하는 선악의 편에 다 서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어리석은 지혜 앞에 드러난
인간들의 지혜롭다는 모습입니다.

바로 그런 인간들의 지혜에 어리석다 라고 판단당하는 모습으로써
매 맞는 진리는 지금도 모든 인간을 진리에 소외 시켜버리면서
이 세상을 악하다 라고 증거하는데 멈춤이 없습니다.

이것이 진리가 이룬 다 이루었다는 당당한 죽음 속에서의 외침입니다.

이 보다 완료는 더 이상 없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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