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발적인 믿음 우발적인 은사


어제 대구 강의 중에 질문을 했다.

식사 중에도 이래 저래 질문을 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렇다면 우발성이 믿음이라는 말이 되고
그 믿음이란 철저한 잉여 라는 말이 된다.

그리고 그 우발적인 잉여는 곧 은사가 된다.

기르심 곧 덮쳐진 것은 항상 고정화되고 고착화된 것과 충돌을 일으킨다.

즉 그들 고정화 된 자들에게 눈꼴시러워 못 보는 전쟁유발자가 된다.
구타유발자

그러나 고정화 되었다는 말은 그만큼 노하우가 있고
절대로 그런 경솔한 행동을 함부로 하지 않는다.

어리석은 지혜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발적인 어리석은 지혜 곧 은사란
정말로 어리석게도 뻔하고 뻔한 어리석은 짖을 한다.

마치 다말이 창녀 짖을 해서 유다 속의 약속을 찾듯이 말이다.

이래 말하면 그럼 창녀 짖을 하라는 말인가? 라는 반발이
선악의 법칙으로 자기방어에 나선자들의 특징이다.

창녀 라는 표현이 자신에게 자극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약속에는 관심이 없다는 뜻이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그 부정함에 정작 예수님은 자유롭게 뛰어들었다. 자유란 자신의 모든 권리를 버리고 부정해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부정해도 부정되지 않는 것은 바로 부정에 뛰어든 사랑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런 예수님을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주인은 마귀를 의식한다. 예수를 믿어도 마귀를 의식한다. 그 예수를 자기 주인인 마귀 말을 듣고서 늘 우상화 시키면서 말이다. 도리어 자기 주인인 마귀 주인 말에 벗어날까봐 두려워 하기 때문이다. 여호수아 대제사장에게 정작 누가 송사를 하는고 하니 마귀다. 늘 송사를 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 송사에서 벗어날 짖만 예민하게 의식할 뿐이지 정작 예수님이 왜 부정한 죄인에게 뛰어드시고 왜 부정한 죄인만 병든 환자만 우리의 처음모습인 약자 곧 부정한 자에 뛰어드시는 그 사랑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부모라면 자식의 부정함에 뛰어들줄 아는 자가 부모가 된다. 그러나 저들의 남편은 마귀이기에 사랑보다 법을 쥔 마귀만을 의식할 뿐이다. 그래서 일까? 우상화된 예수를 매일 만들어내는 신체는 놀랍게도 마귀가 없다. 지옥도 없다. 적이 없다.)

그러면 저들의 논리는
그렇다면 좋은 결과를 위해서 부정적인 과정을 거쳐야 된단 말인가? 라고 되묻지만

사실은 부정적이지 않은 것이 없다.
이미 선을 형성했다는 그 악마성이 도리어 들통나는 것이다.

불의한 청지기 비유가 바로 그런 인간의 악마성을
절대로 불의한 청지기의 지혜에 대한 거부와 비동참성을 보여준다.

예수님의 십자가 곧 부정함에 절대거부
절대거부로 그냥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절대거부는 상대적으로 긍정에 절대참여이다.

이 절대참여의 대중이라는 그 구조가 악마인줄 몰랐던 것이다.

그 악마성 조차도 예수님이 규정했다.
인간은 그것이 악마성인줄도 모른다.

그저 예수님의 십자가의 그 부정함 그 어리석음 자체에 대한 거부 때문에
반대로 갔을 뿐이고 그저 거부만 했을 뿐인데
그 자체가 악마성이였다는 것을

저들의 도피처 저들의 믿는 구석이 바로 악마의 구조였다는 것이다.

인간들이 목사 라는 직분이나 은사라는 성령의 선물
그 모든 것은 자기를 부정화 시키는데 몰아간다.

그 부정함이란 우발적이고 잉여고 잃어버림이다.

그런데 목사라는 직분과 은사를 고착화 시킨다.

고착화 할 수 밖에 없는 그 어쩔수 없는 이유는
악마에게 갇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악마에 갇혀 빠져나올수 없음을 고백하는 것이 우발적인 은사다.

그러나 그 회개 보다
그 십자가에 달린 인자를 쳐다봄 보다.
그 우발적인 것 보다.

인간의 눈에 믿음직 스럽게 고착화 된 것은
그 우발적인 잉여를 반드시 무시하도록 되어 있다.

이것이 적극적인 악마 만들기 이다.
적극적인 죄인 만들기의 은사 만이
우발적인 것이 고정화 된 필연화된 모든 우상을
움직이는 사랑의 공격과 개입과 지적만이
우상에서 벗어나게 하는

유일한 외부의 우발성 곧 사건 곧 잉여요 은혜인 사랑이다.

너무 너무 우발적이기에 원인을 찾을 수 없다.

이유 없는 무조건적인 전쟁이다.

나 라는 자아(우상)을 적으로 삼았다는 것이 그저 감사할 뿐이다.

유일한 사랑은 전쟁이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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