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 이니까? (죄의 소원)

(창 4:9, 개역)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


하나님은 지금 아벨의 부재성을 앞장 세운다. 어디 있냐고 묻는다.

가인은 자신은 아우를 지키는 자가 아니다 라고 한다. 즉 보호자가 아니다는 뜻이다.

보호받음 곧 지킴받는자가 없다.

뻔히 보호받는자가 없음을 알고서도 하나님은 이 보호받는자를 가지고서 어디있냐고
그 존재의 부재성으로써 묻고 계신다.

그렇다면 성경말씀을 푸는 해석은 바로 이 없는 자를 가지고서 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보호받는자는 없다.
사라져버렸다.
그 사라져버린자를 가지고서 여호와 하나님은 묻는다
어디 있냐고?

일단 사라져 버렸다는 것은 결핍이 졸지에 생겨버린 것이다.
그 결핍에 주님이 따진다.
그 결핍을 채우는 것에 가인은 나는 보호자도 지키는자도 아니다 라고 한다.

그런데 가인은 그 결핍을 바로 채워버린다.
정작 아벨이 결핍이 되어버린 것이 아니라
가인이 결핍이 된 것이다.
그래서 그 결핍을 채우고자
보호자가 될 수 있는 증거물 조건물 약조물을 달라고
그 결핍에 보상이 될만한 것을 달라고 애걸복걸한다.

아벨의 보호 받음 지킴당한에 대해서는 난도질을 해버려서
마음껏 유린하고 강간하고 홈이 페이도록 깊이 깊이 파버려놓고서는
정작 그 아벨의 홈페임이 자신의 홈페임으로 작용하게 된 것이다.
아벨을 결핍으로 남겨버린 것이
졸지에 자신의 결핍으로 남게 되어 버렸다.

그래서 그 결핍을 맥우어 달라고 애걸복걸 한다.

그래서 주어진 것이 이마표 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죽이고 십자가에 매달아 버리는데 성공해 버린다.
그런데 정작 우리가 우리 손으로 우리의 홈페임에 적극적인 개입을 한 것이 된 것이다.

마치 마귀가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더러운 제사장 옷을 고발하여서
끝까지 법적인 심판대에 세워버린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십자가 상에 율법의 저주로 몰아세워버린 것처럼
우리 자신이 스스로 십자가 상에, 그 율법의 저주 아래로 몰려버린것과 같다.

주의 성전을 사모하는 그 사랑실천이 주님을 삼켜버린 것이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주를 삼켜버린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주님을 미워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보호받는, 사랑받아야 하는, 지킴당해야 하는 그 자를 가지고서
해석해야 한다.

그런데 없다.

바로 이것이다.

없는 부재성의 보호받는 자를 통해서 해석해야 한다.

없는데 우째 그 없는 부재자를 기준으로 해석의 키포인트를 삼아야 하는가?

어쩔수 없다. 나타날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 부재성의 자리에 가인은 뛰어들지 않는다.
그럼 누가 뛰어드는가?

놀랍게도 가인과 아벨의 해석은 예수님이 뛰어들기전까지는
엉터리 해석만이 난무해야만 한다.

예수님이 그 부재의 자리에 앉기 까지는
도저히 풀수 없는 비밀이기 때문이다.

최초의 살인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알 수 없다.

저마다 최초의 살인과 살인을 언급하면서
또 엉터리 해석을 유발케 하도록 율법에서 살인을 저마다 해석할때에
예수님이 오시기 까지는 해석할길이 없다.

또 심지어 예수님이 산상수훈을 통해서도 말씀하신다.

너희가 살인하지 말라 라는 말씀을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즉 여기서 너희들이 살인하지 말라 라는 율법을 지킨적이 없다 라는 처음 듣는 해석을 하신다.

일단 법을 어긴적 없고 살인을 안했으니까 마음 푹 놓고 있는 그 평화를 깨버린다.
살인 안했으니 마음에 평안히 안주하고 있는 마당에
살인도 안했는데 살인 했다 라고 뒤짚어 씌워버린다.

사람 죽인적도 없는데 죽였다고 뒤짚어 씌우는 경우가 어디있는가?

왜 없어 여기 있다.
즉 법의 해석의 범주가 더 확대 된 것이다.
사람들이 자기 편리 기준에서 저 마다 안정적인 라인으로 안정감을 누릴 때

정작 율법은 그런 사람들의 소원 에 그 범주를 넘어서는 죄의 소원으로 확대 되어 버린다.

율법은 죄의 소원을 겨냥한 것이다. 인간의 소원을 겨냥한 적 없다.

결국 살인의 해석이 넓어 진다.

단순히 지극히 단순히 사람의 목숨과 생명을 앗아간 것 만이 살인이 아니라

우발적인 미움 조차도 살인으로 취급해 버리는 것이다.

자 이렇게 되면 어떤 누구도 죄의 소원의 범주에서 벗어날 자는 아무도 없는 것이다.

법의 보호는커녕 법의 심판에 놓여진 것이다.
법으로 부터의 보호인 구원은커녕, 법 앞에서 냉철하기 짝이 없는 에누리 없는 심판을 법 대로 받아야 할 판국에 놓여진 것이다.

결국 가인은 죄의 소원이 뭔가를 보여주기 위한 도구로써 등장 한다.
반대로 아벨은 그 죄의 소원에 의한 살인이 뭔가를 보여주기 위한 도구로 등장한다.

이 두 세계가 확대 된다.

모든 인간은 예수님을 죽이는 죄의 소원이 뭔가를 보여주기 위한 소품으로 등장한다.
반대로 예수님은 아벨처럼 죄의 소원에 의한 살인이 뭔가를 보여주기 위한 도구로써 뛰어들게 된다.

자 이렇게 말하면 기존에 우려먹는 구원자 예수는 날라가 버린다.
신앙의 대상이 날라가 버린다.

정작 내 손으로 죽여버린 예수만 남게 된다.

그런데 그 예수가 그런 죄의 소원에 덮쳐진 나를 지적해 주지 않는다면 사랑이 아니다.

십자가가 이런 죄의 소원이 덮쳐진 나의 실체를 고스란히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보여주는 그 십자가 만이 제대로 된 창조로써의 새언약의 십자가 이다.

그러니 옛언약 백날 지켜본들 결국 죄의 소원만을 더욱더 키우는 꼴이다.

넌 왕도 아닌데 자꾸 이스라엘 왕 다움을 더욱더 보여줄려고 애를 쓴 그 모습이
더욱더 이스라엘의 왕을 삼키는 식이 된다.

그래서 그런 열심 보다 더 나은 열심을 보게 되니 시기와 질투와 살인이 등장하게 된다.
죄의 소원을 모른채 열심만을 갖출려고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야 장군을 죽여버린다.

그리고 우리야 장군이 죽지 않으면 다윗은 죄의 소원을 알 길이 없다.

이것을 지적 받는 것이 사랑이다.

가인은 지적은 외면해 버린채
그저 동생의 결핍이 곧 자신의 결핍이 되어버리게 되니
그 결핍의 자리를 채우는데 급급하다.

하나님의 보호하사(구원으로) 채우고
이마표로 채우고
에녹 성으로 채우고
당대의 영웅 자녀로 채운다.

오늘날 한국 학부모들이 죄의 소원이 덮쳐져서 자식을 영웅 만들기에 미쳐버린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가인의 족보는 충실하게 육의 족보 답게 형성 된다.
줄줄이 낳았더라 족보 이다.

있음에서 있음으로 연결하고 잇고 잇고 잇는 가인의 영원성 부활족보이다.
가인은 이 부활의 족보로 자신이 잊혀지는것에 대한 공포를 해소한다.

그런다고 죄의 소원을 그 문 앞에 있는 죄의 소원을 넘을 수 있을까?
멍청하게 죄의 소원이 그런 가인의 열심에 의해서 너끈히 풀릴수 있을까?
가인의 해석인 가인의 행함과 결핍채우기에 해석 당하는 멍청한 죄의 소원일까?

어떤 누고도 해석 못하도록
놀랍게도 죄의 소원이 가인인지 가인이 죄의 소원인지 모르도록
일치시켜버린다. 하나 되도록 일치성으로 만들어 버리게 되니
가인은 뭔가를 하면 할수록 행하면 행할수록 그 결핍성은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해소 되기는커녕 더욱더 그 결핍성을 커진다.

아뿔사! 가인이 지옥 갈 필요 없이 가인 자체가 지옥이 되어버린 것이다.

결국 본인 손으로 천국을 제거해 버렸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이런 어리석은 지혜의 방식으로 다가온다.

유일한 의사를 환자가 고침받을 길을 스스로 철폐시키는 방식으로 다가온다.

실로암 소경의 이야기가 그런 식이다.
아니 성경 전체가 그런 부재성으로 해석 되도록 되어 있다.

결국 부재성으로 다가오는 의사를
부재성의 자리에서 영접하는 길 외에는 구원이 없다.

죽으로 오신 십자가에 달릴려고 오는 의사를
우리가 십자가에 달려서 같이 죽는 그 죽음의 자리에서 의사의 병고침을 받는 길 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다.

웃긴다. 죽음의 자리에서 병고침을 받는다는 것은 결국 죽는다는 소리이니 병고침이 무용지물이 아닌가?

맞다
무용지물 맞다.

그런데 가인이 요구한 기적이 아닌
바리새인처럼 악한 세대가 달라고 하는 기적이 아닌

표적과 십자가의 흔적 곧 요나의 표적이란
누가봐도 무용지물 맞는데 누가봐도 어리석음이 맞는데
그 어리석음이 어리석다 라고 지적하는 그 시선을 너끈히 이기면서 역전으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물론 제 3자는 필요없다.
분명히 역전이 될려면 역전 당하는 자가 있고 역전 시키는 자가 있다.
이 두 시선 밖에 없다.

모든 인간과 심지어 피조물 마귀 조차도 그리심산 축복산에 다 올라간다. 넓은 길이다.
그러나 유독 예수님만이 에발산 저주의 산에 올라간다.

즉 부재성의 자리이다. 유일한 이는 내 기뻐하는 자요 내 아들이다 라는
기뻐하심을 받는 자가
아무도 귀히 여김받지 않는 부재성의 자리에 놓이게 된다.

귀히 여기지도 않고 싫어버린바 되고
고개를 돌려버리는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자 로 여김 받는다.

아버지 자신이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자 이다 라고 아들만을 내세우면서
자신을 숨겨버렸는데

그 아버지의 부재성으로 증거 되는 아들인데

이 아들이

농부들에게 기업을 상속받을 상속자가 온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제거됨을 당해 버린다.

문제는 그 부재성을 상속되는 그 기업을 받아봤자
그 부재성을 감당할 길이 없는데
바보 같이 그 상속물을 빼앗는 그런 어리석음이 어디 또 있으랴?

선악과를 괜히 따먹은 것이다.

율법을 괜히 지켜 버린 것이다.

괜히 따먹었어 괜히 따먹었어 어떻게 어떻게

뾰료룡 피를 마셔라

피를 먹는 것은 곧 살인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인간은 끝까지 완악함을 포기하지 않는다.

차라리 나 살인자 맞습니다 라고 하면 피를 마실텐데
또 유감없이 자신의 선악의 판단과 율법의 행함과 죄의 소원을 발휘한다.
지옥 덩어리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시면 살인자가 되고 뒤짚어 씌움을 당하게 될테고
법적으로 빼도박도 못하게 되니
자기가 자기를 지킬수 있는 그 어떤 명분이 다 사라져 버리게 되니(이것이 성령의 소욕)
도저히 맡길수가 없는 것이다.(이것이 미쁘심, 반대말은 시험 들었음)

그래서
가인과 똑같이
스스로 이마표를 따내고
스스로 에녹성을 짖고
스스로 보호막 텐트를 치고
스스로 육의 통로로 낳은 자식들로
자기 방어막과
자기 구원과
자기 부활과
자기 생명을 추구하는 철저하게 시험에 빠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정신분열이다.
최초의 도시요 국가요 인간의 뿌리인 지옥이다.

그러나 아벨은 떠돈다. 이 땅에서 피 흘림 곧 잃어버림 당함으로써 떠도는 자가 된다.
그리고 저런 가인의 뿌리를 고발하면서

성령의 소욕으로 가인의 족보에 시비를 거는 대립의 족보를 이룬다.

마태복음의 예수님의 족보는 바로 이런 가인의 족보와 같은 유대인의 족보 기독교의 족보에 대립을 이루는 아벨의 족보인 육의 차단 단절의 족보이다. 그래서 다섯 여인이 등장한다.

누가복음의 예수님의 족보는 바로 이 잃어버림 당한 자들의 족보이다.
이 잃어버림 받은 자 곧 부재성의 자리로써의 족보로
세상 족보를 구멍 뚫어버리겠다는 취지이다.
세상 부활을 심판 하겠다는 취지이다.

세상 부활이 제거 되는 현장이 없다면 부활을 꿈도 꾸지 말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 속에서 나의 부활이 제거 됨으로써 성령의 열매는 피어 나는 것이다.

나의 믿음이 제거 되는 그 현장에서 그 자리에서 부재성이 도리어 또렷히 됨에서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 예수님의 믿음을 보게 되는 것이다.

죄의 소원이 제거 되는 그 현장을 격지 않고서
어떻게 그냥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아들의 소원을 자기 쪽으로 끌어 당길수가 있는가?

아들의 소원을 내 쪽으로 땅긴다고 그것이 내 소원이 되는가?
도리어 그 홈페임을 더욱더 심하게 나를 완악하게 나를 죄의 소원의 지옥구덩이로 만들텐데?

죄의 소원이 되는 나 라는 주체의 자리가 하나의 응축점으로서
십자가는 그 응축된 점으로서 원수의 성문을 열고자 오신 것이다.

나의 악마성을 두껑을 열어재낀다.
한 마리 마귀가 나갔다고 좋아하다가
일곱 귀신으로 채워진 나의 두껑을
예수님이 홀라당 열여재낀다.

죄의 소원이 가득한 그 맨홀 두껑을 열어 재끼는 분이 없다면
그 유일한 그리스도의 형상이 없다면
우리는 부재성이 아닌
나의 있음으로 출발해서 있음 안에서 자기 부활을 찾아내고 생산할려고 할 것이다.

꼴에 그 있음이 되도않는 있음인줄도 모르고
아무리 그 있음 안에서 찾아봐도 사실상 없다.

참으로 신기하게도 루터를 우려먹는 놈들을 가까이서 많이 봤는데
루터가 말한 그 숨어계신 하나님 곧 부재성으로써 다가오시는 하나님은
끝까지 부재성으로써 예수님을 증거한다. 아들의 소원에 자신을 숨기신다.

그것이 믿음이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낳은 부활 자신이 이룬 기업 자신이 믿은 믿음이
홀라당 날라가버림을 당하는 그 빼앗는 자의 믿음에 의해 믿음이 채워진다.
그것을 아브라함 언약이라고 한다.

아브람과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대립에서 누가 틀렸고 누가 옳았습니다. 라는 그 내용을 고스란히 담은 것이 아브라함 믿음 속에 담겨지고 그 인자라는 박스에 담고 하나님은 또 자신을 은폐 숨기신다.

그것도 모르고 그 부재성(숨어있음)의 자리에
본인들이 루터 칼빈 우려먹으면서 숨어있는 하나님 우려먹으면서 그 빈자리인 부재성 자리를 넢쭉 앉아버린다.

참 신기하다. 죄의 소원이 덮친 것이다.
선악을 알아버렸으니 안 앉고는 못배긴다.

문제는 죄의 소원이 덮쳤듯이 이제는 아들의 소원이 덮쳐져야한다.
그런데 갇혔다. 빠져나올수 없다. 망했다 라는 의식이 없기에

도리어 구원의 자리에 앉았다고 우기기에
빼낼 자가 필요 없게 된 것이다.

갇혔다 라는 의식이 없는데 빼내어 달라고 긍휼을 바랄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그져 그 빈자리에 넢쭉 앉아버린 자신의 믿음 자신의 성공담 자신의 육의 자랑거리
자신의 행함의 실천력만 쏟아낼 뿐이다. 완료인줄 알았는데 더욱더 결핍이 생겨버린 것이다. 아벨을 제거함으로써 더 이상의 결핍이 없게 된 줄로 알았는데 점점더 큰 구멍이 날마다 새롭게 생겨나 버렸다. 욕심을 부려서 욕심이 아닌 욕심이 자신을 다루고 있는 갇혀버림 당한 것이다. 어느 정도로 그것 조차도 모르는 소경이 된 정도로 말이다. 그래서 남의 소경됨을 기가막히게 찾아내는데 도사가 된 것이다. 실로암 소경 찾듯이 말이다. 누룩이다. 썩은 똥을 배설할 뿐이며 그 똥을 온 벽에 발라버림으로써 결국 모든 주변을 썩게 만들어 버린다.

그래서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신다.


십자가가 뭔가?

유일하게 하늘이 구멍을 열고서 외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 라는 그 음성 때문에
제거버림을 당한 인간의 죄의 소원을 들추어낸 것이다.

그리고 인간 자신의 구원으로 그 기뻐하는자 사랑하는 아들의 자리를 넙쭉 앉아버린다.
십자가 라는 그 빈자리를 자기 구원으로 자기 부활로 땡겨버린다.

못박으라 죽일때는 언제고 이제는 그 십자가가 구원용이 되었다고 선전하고 난리이다.
더 이상 인간의 악마성을 두껑 열지 말라는 식이다.

두껑 열어버리는 것은 이제 인간들이 용납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는 가인의 이마표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십자가는 인간들의 죄의 소원을 더욱더 보호하는 보호막이 되고 말았다.

그런다고 그 빈자리에 인간들이 다 앉아버리고 자기쪽으로 끌어당겨버린다고 해서
그 결핍이 채워지는가?

바보들이다. 도리어 지옥을 끌어당긴 것이다.
에녹성과 같은 교회를 아무리 세우고 해도 소용없다.
아무리 믿음의 영웅들을 가인의 아들들처럼 낳고 낳고 잇고 잇고
믿고 믿고 부활하고 부활해도 소용없다.

도리어 십자가에 낚인 것이다.

차라리 이런 나의 가인과 같은 악마성을 지적해 주고 홀라당 벗겨버리는 그 십자가가 아니면 죄의 소원을 알길이 없었고
그 죄의 소원을 통해서 다시 아들의 소원을 알길이 없었음을 고백케 될 것이다.

그래서 개같은 이방인 여자가 외친다.

맞습니다. 저 개 맞습니다.

그런 개도

주인이 있고

그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먹는 주인의 긍휼로 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아벨의 운명이 되어도 할 말이 없다.
도리어 가인처럼 살아있다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다.

아벨 같이 죽어도 마땅함을 우리는 모른다.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개 죽음 당장 당해도 할 말 없다.

그러나 오히려 우리는 그 반대의 자리에 서 버렸고
그 빈자리 그 부재성의 자리가 아닌

내가 생생하게 주체로써 존재하는 그 자리에 앉아서
자기 자리가 있다 라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그 자리 차지하겠다는 지극히 작은 소망 가질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우리는 예수님을 죽여버렸다.

그리고 이 순간에도 숨어있는 하나님께 외친다.


얄밉게 막고자 나타나지도 않고 부재성으로 있던 하나님이 불쑥 나타난다.
꼭 인간의 감추고자 했던
죄의 소원이 발휘 되었을 그 순간에 등장한다. 얄밉다 즉 부재성이다.

(마치 사울 왕이 아무리 기다려도 사무엘 선지자가 안 오니까 결국은 참다 참다 못해서 제사를 해 버리니까 그때서야 기다렸다는 듯이 숨어있었으면서 짠 하고 나타나는 것처럼 말이다. 이 부재성으로 성경전체가 해석이 된다.)

너에게 보낸 구원자 어디 있는가?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 어디있는가?

우리가 예수님을 지키는 자 입니까?

자 그렇다면 십자가는 우리를 죽여도 우리는 할 말 없다.

우리가 예수님을 갈기 갈기 찢였듯이
십자가가 나를 갈기 갈기 찢어버려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그 십자가가 오늘 하루를 허락 하신 것이다.

내일 아궁이에 던질 들풀도 귀히 귀히

너무 너무 귀히 입히시거늘 하물며 ...


(마 6:24, 개역)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 6:25, 개역)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마 6:26, 개역)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마 6:27, 개역)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마 6:28, 개역)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마 6:29, 개역)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마 6:30, 개역)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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