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너무 귀한 죄인(뿌스래기) 찾기


(마 15:27, 개역)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마 9:13, 개역)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막 2:17, 개역)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참으로 감격에 궈여 몸을 가늘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도 찾고 찾던 뿌스래기를 찾았으니 말이다.

그래서일까? 일방적이고 독선적으로 하늘의 모든 천사들까지 강제로 억압적으로 폭력적으로 이 기쁨에 동참토록 그 죄인 하나 찾은 것에 하늘이 억수로 오바 하면서 잔치를 벌린다.

벌레 만도 못해서 늘 땅에서는 지나개나 다 개 취급해 버린 우리가 버린 돌을

귀히 귀히 여서 하늘이 덩실 덩실 춤을 춘다. 노래를 부른다. 합창을 한다.

어느 오케스트라의 연주 저리가라 할 정도이다.

압도적이다. 그 영광에 빠져나올수가 없다.


예수님이 비유로 우리 속내를 빡빡 긁어버린다.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 비유이다.

(눅 15:1, 개역)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눅 15:2, 개역)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눅 15:3, 개역)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눅 15:4, 개역)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눅 15:5, 개역)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눅 15:6, 개역)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눅 15:7,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눅 15:8, 개역)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눅 15:9, 개역) 『또 찾은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
(눅 15:10,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눅 15:11, 개역)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눅 15:12, 개역)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눅 15:13, 개역)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눅 15:14, 개역)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훙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눅 15:15, 개역)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눅 15:16, 개역)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을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눅 15:17, 개역)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눅 15:18, 개역)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눅 15:19, 개역)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눅 15:20, 개역)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 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눅 15:21, 개역)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눅 15:22, 개역)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눅 15:23, 개역)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눅 15:24, 개역)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눅 15:25, 개역)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웠을 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눅 15:26, 개역)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눅 15:27, 개역)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 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눅 15:28, 개역)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눅 15:29, 개역)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눅 15:30, 개역)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눅 15:31, 개역)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눅 15:32, 개역)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가만히 보니 누가복음 15장에 나타난 3가지 비유

99마리 양과 잃어버린 양 한 마리 비유
또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 비유
또 탕자 비유

이 세가지 비유가 왠지 왠지~~~ 마태복음 25장의 종말의 비유 세가지 비유와 동일한 성향으로 느껴진다.

종말에 이런 일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열처녀 비유가 아니라 어리석은 다섯처녀와 슬기로운 다섯처녀 비유
달란트 비유가 아니라 무익한 종과 충성된 종 비유
그리고 마지막으로 양과 염소의 비유 이다.

종말에 반드시 나타나는 거룩이 직접 스스로 두 패로 나눈 결과로써 나타난 것이다.

종말 곧 심판 곧 처음자리가 창조한 무리와 그렇지 않은 무리와의 두패 나누심이다.

그런데 누가복음15장은 그것을 잃어버림과 죽었던 자로 표현한다.

죽어 마땅했고 잃어버림 마땅했고 버림받음이 마땅했던 자들이

예수님이라는 종말의 주
예수님이라는 심판의 주
예수님이라는 뿌스래기 창조주가

직접 그렇게 찾고 또 찾고 또 찾아 해매고 그렇게 창조하고팠던
그 피조물인 뿌스래기가 비로소 만나게 되었다.

마치 임산부가 그렇게 10달 동안의 배아픔 속에서
해산의 고통으로 만나게 된 아기와의 만남처럼 말이다.

죽음 속에서 생명과의 만남이요
심판 속에서 선물과의 만남이요
전쟁 속에서 전리품인 잉여와의 만남이다.
흑암 속에서 만난 은혜다.

내 뼈 속에 뼈 요 살 중에 살이다.

그렇게 보잘 것 없고 아무런 능력도 없고
아무것도 할 줄도 모르고 무능하고 무가치한
약하디 약한 처음자리인 아기이지만

배 아파 낳은 엄마에게는 목숨을 걸어버린 귀하디 귀한 뿌스래기 잉여선물이다.

그렇게 갖고 싶었고 그렇게 안고 싶었고
그렇게 보고 싶었고 그렇게도 만지고 싶었던 뿌스래기이다.

모든 아픔을 참고 참아서 종말인 마지막때에만 만나기로 약속했던
기다리고 기다렸던 선물
기다리고 기다렸던 뿌스래기

아버지에게서는 죽었던 아들이 살아온 희열이요
잃어버렸던 아들을 되찾은 기쁨이요
실종된 아들 때문에 눈물의 집에 더 이상 눈물 없는 잔치집의 시끄럽고 왁자지껄 노래부르는 덩실 덩실 춤추는 집의 즐거움이다.

아무도 애달아 하지 않았다.

누가 뿌스래기 찾을려고 그렇게도 기다리고 기다렸던가?

정작 그렇게 어리석고 미련한 다섯처녀는 예수님이였다. 아무도 이 어리석음에 뛰어든자 없다.

그 처음자리에만 충실한 자는 예수님이였다. 아무도 그 무능한 처음자리 처음사랑을 지킨자는 아무도 없었다.

염소 취급 받으면서 양을 찾는 자는 예수님 뿐이였다. 아무도 염소이면서 정작 양의 탈을 쓰고 양을 잡아먹는 짖을 괴로워 하는자 없었다.


한 드라크마를 잃어버렸다. 한 마리 양을 잃어버렸다. 방탕한 자식이 나가버렸다.
열 드라크마에서 하나면 아홉으로 족하면 그만이다.
백마리 양 중에서 하나 잃어버렸으면 아흔아홉으로 족하면 그만이다.
두 자식 중에 늘 곁에서 묵묵히 아무 반항없이 순종하는 자식 하나만 있다면
속 썩히는 그놈의 자식 없어져도 그만이다. 재산 탕진하는 놈 보다 기업을 고스란히 잘 관리하는 든든한 맏아들만 있으면 그렇게 자식농사 실패한 것이 아니다. 탕자에게 물려줘 봤자 아버지 이름에 먹칠만 할 뿐이다.

그러나 저주 받는 종으로 오신 예수님이 주가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로써 주가 되심은
우리의 선악 아버지와 선악 하나님과 차이가 난다.

반대다

그 주 되심은 낯설다.

이미 장악한 인간의 주인을 깨뜨린 새로운 주인이다.

그 새로운 주 가 되신 새창조주는 새피조물로써 새로운 편성을 하셨다.

새하늘과 새땅이다.

이제 헌하늘과 헌땅은
새로운 전쟁의 기준인 십자가로써 철폐 당하는 모습만을 보여줘야만 한다.

아홉 드라크마로 족하지 않고 반대로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로 아홉을 잔치에 소비시킨다.
예수님 자신이 소비 했듯이 말이다.

아흔 아홉 마리로 족하지 않고 반대로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위해 99마리 양을 소비시킨다. 이 한 마리 양을 위해 99마리 양은 덩실 덩실 춤을 춰야만 한다.

마치 잃어버림 당한 예수님 자신이 되찾음 앞에 이유 없이 조건 없이 그 주 되심 앞에 무릎꿇고 엎드려야만 하듯이 말이다.

(빌 2:5, 개역)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6, 개역)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 2:7, 개역)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빌 2:8, 개역)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9, 개역)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빌 2:10, 개역)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빌 2:11, 개역)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 2:12, 개역)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무능하고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양을 위해 예수님 자신이 염소 취급받으면서 너무 너무 귀하디 귀한 뿌쓰래기를 찾았듯이 말이다.

주변을 둘러보자 정말 누가봐도 저런 인간은 인간도 아닌 악마요 인간 말종이요 탕자요 가망없는 자가 누구인지?

그런 자에게 예수님이 자기 목숨을 아낌없이 때려부워 귀하디 귀하게 하셨는지?
모든 다른 것들을 소비 소모 시키면서 세우신 자가 누구인지?

또 또 또 착각하면 골란하다.

바로 당신이다.

둘러 볼 것도 없다. 바로 당신이기에

당신이 가망없는 탕자이기에

주변을 모두 소비시켜서라도 심지어 예수님 자신의 피를 다 흘려서라도

찾고 찾은 뿌쓰래기이기에

주님은 혼자 덩실 덩실 춤추신다.

아무도 따라하지 않아도
동의 하지 않아도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 시대만을 골라

일부러 춤추지 않고 가슴을 치지 않는 시대만을 소비 시키면서

얄밉게 피리 불고 얄밉게 애곡하시면서 말이다.

 

아무도 찾지 않는 영웅이고 잘난 사람 되기에 좋은 사람 되기에 미쳐버린 미친세상을 소비시키면서 까지

끝까지 뿌스래기를 찾으신다.

(마 10:5, 개역)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어 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마 10:6, 개역)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마 10:7, 개역)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웠다 하고』
(마 10:8, 개역)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마 10:9, 개역)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마 10:10, 개역)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

(12사도(제자)와 천국은 잃어버린 자를 찾기 위한 소모품이다. 심지어 천국 조차도 말이다.)

(마 15:22, 개역)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마 15:23, 개역)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마 15:24,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마 15:25, 개역)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마 15:26, 개역)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마 15:27, 개역)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마 15:28, 개역)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이 부스러기 앞에 예수님은 자신이 친히 소모품이 되신다.)

(마 8:5, 개역)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마 8:6, 개역) 『가로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마 8:7, 개역) 『가라사대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
(마 8:8, 개역)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마 8:9, 개역)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마 8:10, 개역)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마 8:11, 개역)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마 8:12, 개역)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마 8:13, 개역)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
(마 8:14, 개역)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
(마 8:15, 개역)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
(주의 주 되심이란, 주 앞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은 자가 주를 만난자였듯이
주님의 주 되심 조차도 부스러기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끝까지 섬겼다. 다 내어주셨다.)

주께서 내 주께의 방식은 바로 이 부쓰래기 만을 통해서 드러내시겠다는 철저한 자신의 은닉성이다.

이스라엘 외에는 보냄을 받지 않으신 은폐적인 숨어버린 계시이다.

왜 일까

자신이 몰고온 천국 그리고 복음 그리고 심지어 자기자신 조차도 목숨을 버려서라도

모두 소비 시키고 소멸시켜서라도 뿌쓰래기 만을 찾으시겠다는 양보없는 약속에 철저하게

구속 당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자유다.

진리는 자유다. 이 보다 더 자유로운 것이 어디 있겠는가?

이 진리에 모든 것은 소외 당했다. 이것이 진리다.
도리어 소비 당할 입장 뿐이다.

창조주 예수님 자신이 소비 하셨듯이


 

Posted by 김 대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