밉든 싫든 적이 있기 때문에
전쟁이란 적이 있기에 생겨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전쟁 속에 모인 전우들도 밉든 싫든 적이 있기 때문에 전우가 된 것이다.
적이 아니였다면 생사고락을 함께할 이유가 없다.
전우의 죽음에 대한 눈물을 흘림도 적이 있었기에 생판 남의 죽음에 눈물을 흘릴수가 있게 된 것이고
유치스럽고 아무것도 아닌 것에도 감사하고 기뻐하며 함께 웃을수가 있는 것도
적 때문에 형성 된 것이다.
죽음이라는 적이야 말로
우리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우리의 모든 속내를 끄집어 내어 준다.
아무리 봐도 적과 다를바 없는 모습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아무 이유없이 적 때문에
일방적으로 미움받는 저들 때문에
긍휼의 자리를 보게 되었다.
저들이 아니였다면 볼 수 없었던 자리 이다.
당대의 최고의 의인들이자
가장 독사의 자식들인 그 바리새인 덕분에
저들이 차 버린 그 처음자리요 긍휼의 자리를 알수 있게 되었다.
우리들 또한 바리새인처럼 늘 차 버리는 그 긍휼의 자리를
예수님은 거두지 않으셨다.
이유 없다 그저 자신의 영광만을 위함 이기에
어쩔수 없이 긍휼이 덮친 것이다.
진노가 없었다면
고마운 진노의 그릇이 없었다면
예수님이 당하신 그 저주를
그 고난의 쓴잔을 어떻게 마실 수가 있겠는가?
대신 진노 받으심으로써 알게 된 긍휼
우리에겐 너무나도 버거운
말도 못할 영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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