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재성 곧 없음에 뛰어드는 기생라합

2010년 6월 8일 화요일 오후 9:48:17 김대식

Runaway.Jury.2003.720p.BluRay.mkv


성경을 보면 참 재미있는 것이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너무 너무 어려운 비밀 문서입니다.

즉 그런 의도가 너무 다분합니다. 아예 못 풀도록 약올리게 자물쇠를 잠구워 버렸습니다.

그러나 막상 답을 알면 너무 너무 허무합니다.
너무 너무 쉽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렇겠죠 답이 주어지면 그 답 때문에 너무 너무 쉽게 느껴지는 것은 마땅합니다.

그런데 더 웃기는 것은
시대적으로 볼 때 즉 역사적으로 볼 때

답은 다 주어 줬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쉽게 풀려야 합니다. 누가 봐도 답을 통한 문제를 풀수 있어야 합니다.
누가 봐도 말이죠.

그런데 오늘날까지 신학 박 박 박사 가 나와도 단 한 개도 풀리지 않습니다.

과연 이유는 뭘까요?

답은 주워 졌는데 정작 답이 뭔지 모른다. 라는 겁니다.


이 이유에 대해서 한번 심각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그 이유는 의외입니다.

즉 같은 문자로써의 답을 아무리 퍼붓듯이 퍼붓듯이 답을 퍼부어 줘도 모르도록 하는,
열쇠 키를 한다발 아니 아예 평생 토록 하늘에서 퍼부어 주어도 단 한 개도 못 풀도록 하는
답을 주신 자의 의도 때문입니다.

또 반대로 같은 문자의 답인데 딸랑 하나만 줘도 그 사람에게는 모든게 다 풀어버리는 만능열쇠가 주어지는 겁니다.


자 이렇게 되면 문제 푸는 열쇠 키 답에 대한 소유성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키를 소유해도 소용없는 겁니다.


광야에서 청함을 받은 자는 남자 장정 곧 가장만 60만명입니다. 곱하기 3 아니면 4 정도로 하면 대충 출애굽 인구가 나옵니다.

장정이란 그 가정의 운명권을 쥐고 있는자입니다.

그 한 사람 살면 그 딸린 식구는 거져 사는 대표자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청함만 대따 많이 받았을 뿐이지
택함을 받은 자는 딸랑 한 명입니다.

즉 갈렙 뿐입니다.

여호수아 아닙니다. 자신의 대표성을 갈렙에게 이미 넘겨졌습니다. 갈렙의 바지가랭이 잡다보니 얼떨결에 택함 받은 겁니다. 필연성 없습니다. 우발적입니다. 즉 은혜 다 라는 겁니다.

인간의 필연성은 반드시 탐심 곧 우상과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그 우상이란 항상 나는 버림받으면 안된다는 정당성을 추구하기에 시험들게 됩니다.

오히려 미쁘심이란 마땅히 버림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안 버리시니 의외입니다 라고 예상치 못한 것임에 은혜(공짜) 라고 외치는 겁니다. 마땅한 것은 심판인데요 라는 것이 주님의 피조물 만들기입니다. 그래서 죄인만 그런 고백합니다.

성령은 이런 죄인 만드는데 항상 임의적으로 부는 바람과 같습니다.
그러나 악령은 항상 자신이 반드시 의인이 되어야 한다는 정당성을 교리 속에 믿음 속에 교회 속에 집어 넣습니다. 그러나 도리어 그 짖이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는 하만 과 같은 겁니다. 왜냐하면 반드시 그렇게 하기 위해서 남을 시험 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남에게 시험한다는 말을 오해 마시길 바랍니다. 반대로 대부분 생각할테니까요~
남을 시험한다는 것은 남을 칭찬하고 격려하고 남에게 충성하고 등등 함으로써
댓가를 아예 안 바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당하게 그 댓가를 받아야 한다는 필연성 때문입니다.

이만큼 주님을 믿어줘 주었으면 우리 인간적으로 적어도 구원은 해 줘야 한다는 필연성입니다.

놀랍게도 성화론이든 어떤 교회든 정통교회든 개혁교회든 이거 안 가르치는 교회 없고
이것으로 돈을 노리고 있는 겁니다.


제가 영화제목을 글제목 바로 밑에 올렸는데
이 영화를 보다가 힌트 삼은게 있습니다.

총기 난사 사건으로 인해서 한 가정의 가장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범인은 그 총으로 자살했습니다.

자 이제 범인은 죽고 없습니다.

범인의 범행 도구만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정작 죄는 없습니다. 부재성입니다.
죄가 남긴 흔적들만 있습니다.
그 범행 도구인 총으로 인해 법적인 소송을 총기회사에 걸게 되는 법정영화입니다.

뭐 뻔한 스토리이겠지만

저는 여기서 참 재미있었던 것이 범인은 정작 죽고 없는 부재성입니다.
즉 눈에 없습니다.

그런데 법정에서 죽은 범인의 총기를 가지고 두 패거리가 두뇌게임을 펼치는 겁니다.

여기서 웃기는 것이 서로 자기의 승소로 만들기 위해서 상대방 사람들이 숨기고자 했던 과거 즉 눈에 안보이게 숨긴 과거를 서로의 약점으로 찾고자 집요하게 찾아냅니다.

하여튼 인간은 별짖 다 합니다.

인간이 한번 시선을 위에 두지 않게 되면 뭐든지 자기쪽으로 끌어당기는 자기를 위한 우상짖만 골라서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 짖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원래 하도록 되어 있기에 울어야 하는 자리, 찢겨져야 하는 자리에 가도록 성령은 등 떠밀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여기서 무슨 필연성이니 따위가 나오겠습니까? 임의로 부는 바람인데? 우발적이요 사건인데, 사건 아니면 찢어지지 않는데?
사건 아니면 바로 복구하고 봉합하고 상처를 꿰매고 십자가의 흔적을 모조리 없애버리는데?

그래서 성령의 은사는 서로 서로 찢고 그 상처를 싸매기 위한 종교술이 아닌 그 상처로 난 두 홈 페임의 간격을 더 벌려버립니다. 아예 봉합하지 못하도록 말이죠.

부재성으로써의 은사 자리를 분명히 없는 임의로 부는 바람의 자리인데
넙쭉 앉아버리니 그 자리의 댓가로써 대우 해 달라고 우기니
덕분에 아 은사의 참뜻을 더더욱 알게 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면서 뜬금없이 기생라합 사건이 생각 났습니다.
구약에서 기록된 사건입니다. 즉 우발성이라는 포착불가 말입니다.

얼마나 우발성이면 지금까지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도통 안 풀리고 안 믿겨지니까요

기생라합의 거짓말이 놀랍게도 믿음과 연관이 되고 말았습니다.
성경이 못때빠지도록 참말을 말해서 기생라합을 언급했으면
그리고 참 중요한 것 기생 창녀가 아니라 정숙한 여인으로 언급했으면 누구든 납득이 될텐데 전혀 아닙니다.

바로 이런 구약 기생라합의 믿음과
신약의 음 음 보자 뭐였더라 갑자기 생각이 안 나네
신약의 예수님이 벌리신 사건이였는데

아 참 대표적인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이 생각이 나서

이 두 이야기를 묶어 봤습니다.

구약은 그저 신약에서의 예수님이 빠졌다고 보시면 되고 즉 은폐와 은닉의 숨어있음 이고
그것을 한번 집어 넣어보면 됩니다.

즉 기생라합의 사건에서 예수님을 개입 시켜버리면
기생라합의 거짓말이 무엇과 연관이 되는고 하니
무엇을 숨기기 위해서 거짓말을 한 셈이 됩니다.

약속이라고 보면 되겠죠

그 약속을 예수님이라고 보자 라는 겁니다.

그것이 결국 약속의 산물인 이스라엘입니다.
(애굽에 탁란 시켜 애굽을 찢고 다시 광야에서 10달 동안 임신하여 잉태시킨 아이처럼
자손은 곧 기업이요 후사요 열매입니다.)

결국 인간과 인간에게서 답을 찾을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런 말을 하고 있는 인간인 제가 하는 말도 답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직분과 은사는 항상 부재성입니다.

목사도 사라질 직분입니다. 그림자 직분입니다. 이 사라질 영광스러운 불의한 직분에 충성할 자는 죽고자 하는 자일 뿐입니다. 사라지게 하시는 분도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주인만 쳐다보는 종은 주인이 살아 있다는 그 자체로 족할 뿐입니다.

이것이 종(섬김을 받는 자가 아닌 섬길분이 있다고 외치는자)과 늑대와의 차이입니다.

그렇게 보면 예수님이 보낸 자인지 아니면 악마가 씌여진 목사인지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주님의 부재성 때문에 우리에게는 분별력이 없는 겁니다.

자 그러면 부재성으로써의 예수님이 우발적인 사건의 상황에서 누구에게 뛰어드시는가 라는 점입니다. 설사 이 답을 알았다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고착화 되고 필연화 된 해석은 소용이 없으니까요

주께서 내 주께 라는 인자의 방식이란 항상 주님이 주님 스스로 치시면서 나오는 잉여입니다.

그렇기에 항상 새롭지 어제 것을 오늘에 까지 들고와서 잇고 잇는 연결로써 이을수가 없습니다. 항상 우발적이고 임의성입니다.

그럼 원리와 법칙도 없는가?
그건 있습니다. 방금 말했듯이 바람을 포착 못하는 임의성이다 라는 것이 원리요 법칙입니다.

이것을 말귀를 못 알아먹고 포착 못하는 무 는 무 라고 할 수 없기에 무 는 없는 겁니다 라고 또 성화론자의 언어로 사기치는 그 집중력(짐승)은 반드시 뭔가 잡히는 꺼리를 주어야 믿지 안 잡히는 꺼리를 주면 누가 믿느냐 라는 식입니다. 그러니 눈에 보이는 그런 말을 언어를 외치는 자신을 내 세울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를 내세우지 못하면 타인이 포착할 수가 없습니다. 포착할 꺼리는 주는 것이 언어술입니다.

그래서 믿을 수 있는 꺼리와 객관성과 역사적 사실들을 주기 바쁩니다.

이것이 바로 집중력 곧 세뇌 작업입니다.

중독이란 성과가 없으면 절대로 중독이 될 리가 없습니다.

카지노 라는 영화(로보트 드 니로)  앞 부분을 조금 봤는데
제가 보니 카지노가 알고보니 교회였습니다.

교회가 이런 짖을 합니다. 주인공이 이런 말을 하더군요.
처음에는 배팅한 성과를 줍니다. 세뇌 당할 정도로 줘야 중독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 시간을 장악 합니다.
늦게 앉아 있으면 있을수록 모든 것을 도로 회복하고 그 고객의 전재산까지 다 빨아버릴수 있다 라는 원리원칙을 영업방침으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바로 이겁니다. 다 빨아먹는 흡혈귀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초면에 눈치 채면 안되기에 양의 탈을 써야만 합니다.
고객이 땃을 때 박수를 치면서 이벤트 까지 열어줍니다.
행운에 행운의 곱절을 더해 줍니다.
뿅 갑니다.

이제 시간을 장악했습니다. 전 재산 알아서 바칩니다.

이게 성화론입니다. 집중력을 요구합니다.

선의 방관은 악을 꽃피운다 라는 1700년대에 살다 죽은 한 사람의 말처럼
히틀러 또한 예수님을 죽인 저 유대인이라는 악을 허용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또 그런 히틀러의 만행을 보고 한 기자가 바른소리인 정의를 외치는 내용이 영화에 담겨져 있습니다.

같은 말을 결국 서로 서로 써먹으면서 돌고 도는 겁니다.
저 성화론이 결국 집중력을 유발케 하는 언어속임수인줄도 모르고 말이죠.

아마 한국인들도 알겁니다. 전두환 광주만행을 비판하던 그 운동권 세력들이 지금 일부가 정치권 속에 들어가 보니 결국 본인들도 그 뒤를 잇고자 하는 정치를 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결국 정의를 부르짖는다는 것은 언어술로 사람의 집중력을 흡수케 합니다. 곧 권력입니다.

가난 하면 돈 욕심 없나요? 정작 가난한자가 가난한자는 말도 안되는 얼마 안되는 돈 때문에 죽이는 것은 여사가 되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인간의 공동분모입니다.

이 공동분모를 무시하고 찢겨지지도 않은채
정의로 나쁜 권력을 찢겠다고요? 말도 안되죠.

자기가 외치는 정의는 개혁이고 남이 외치는 정의는 쿠테타?
자기가 하면 로멘스 남이 하면 불륜

바로 이런 인간을 찢어버리는 방식이 자기가 하면 로멘스 사랑이고 남이 하면 불륜 폐륜 더러움이다 라는 것을 가지고서 인간을 찢기에 가장 적합하다는 겁니다.
바꿔치기 해도 소용 없습니다. 다시 바꿔 버리니깐요

자 그럼 구약에서 부재성인 눈에 보이지 않는 약속인 곧 예수님을 집어 넣으면
부합 되는 것이 있습니다.

첫 번째 말씀이라는 약속과 부합이 됩니다.
그것을 기생라합이 믿은 겁니다.
이 상황에서의 약속을 가시화 시키면 예수님입니다.

두 번째 이스라엘과 부합이 됩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독자적인 존재가 아니라. 항상 따라 붙죠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라고
이 말은 마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이라는 언약과 같습니다.
그렇기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산물이다는 겁니다. 즉 여기서 하나님이란 여호와입니다.

이 상황에서 이스라엘을 가시화 시키면 예수님입니다.

세 번째 그냥 라합이 아니라 기생라합 그리고 그냥 기생라합이 아니라 거짓말 하는 기생라합입니다.

기생 됨과 거짓말 함이 놀랍게도 믿음과 연관이 됩니다.

여기서 기존의 교리 사수자들은 겁을 먹습니다.
기생이라는 창녀 직업과 거짓말 이라는 것이 정당화 될 수 있다는 염려입니다.

이것이 참 중요합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은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예수님과 결부 시켜서 시험을 합니다.

과연 어떻게 말씀을 해석하는지? 그 꼬라지를 보자 라는 겁니다.

여기서 저들 바리새인들이 확실한 눈에 보이는 증거물을 가지고 다가올때에
예수님은 오히려 그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부재성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약점은커녕 그렇다고 긍정적인 마인드 라는 언어속임수가 아니
아예 부재성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빈자리입니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 뛰어드십니다.

쉽게 말해서 마귀만을 상대 하십니다. 인간 상대 안합니다.(왜 일까요? 예수님 자신이 포착 불가의 임의적인 바람같은 분입니다.
저들은 잡았다 포착했다 라고 앞장세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더거들 잡은게 어디있노 라고 투명인간 만들어 버립니다. 그리고 그 부재성을 확장 증식 시킵니다.
과연 율법에 근거해서 법적으로 그렇게 외치던 정의로운 자들 끝까지 남아 있는자들이 있는지?)

그것도 모르고 인간들은 자신들이 포착해서 잡은 죄인을 앞장세웁니다. 더러운 인간이라고

예수님은 그렇게 너희들이 규정한 그 법적 사고방식만을 상대합니다.
과연 법적인지?

땅에 뭔가를 쓰니 법 법 법 그렇게 외치던 놈들이 단 한 놈도 남지 않습니다.

정의는 어디로 갔나요?

율법 정신은 어디로 갔을까요?

오늘날 성화론자들 말씀 지키자 라고 우기면서 속이고 있는데
과연 끝까지 남아 있을 수 있을까요?

말씀 지키면 뭐합니까? 기껏 나오는 것이 돌맹이 쥐는 완악함 뿐인데?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 지키는 자를 상대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말씀을 어기는 자를 상대 합니까? 그것도 안 합니다.

예수님은 마귀만을 상대 합니다.

이 마귀만을 상대하는데 있어서
도리어 바리새인들이 낚인 겁니다.
그리고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이 증인 목격자로써 동원이 된 겁니다.

그리고 뛰어드십니다.
법 법 법 이라고 외치는 인간의 음성 곧 악마의 음성을 다 찢어버리고
빈 부재성의 자리로 만든 후에
그 여인에게 이 부재성의 자리로 초대하십니다.

결국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은 아무것도 한 것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에 보탠 것 있나요?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보태지 않으면 안됩니다. 왜? 중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원리를 매일 매일 대 수술을 통해서 하나 하나 빼냅니다.
마귀가 심은 선악의 법 의식을 빼냅니다.
수술 칼로 찢으면서도 박혀 있는 총알만 상대 합니다.
봉합 안 합니다.
오히려 더 찢습니다.
왜 너가 세뇌 당했는지 보라는 겁니다. 그 내용물을 그 여인처럼 우리는 매일 매일 주 안에서 죽고 주 안에서 다시 간섭받는 일만 남아 있습니다.
바로 이 남아있는 것을 종말의식이라고 합니다.

이 미래라는 완료된 종말의식이 덮쳐지지 않은 자는 자꾸 성화를 해서 부족분을 채우겠다는 짐승의 집중력에 말려들게 되는 겁니다.

다시 돌아가서
바로

세 번째 그냥 라합이 아니라 기생라합 그리고 그냥 기생라합이 아니라 거짓말 하는 기생라합입니다.

기생 됨과 거짓말 함이 놀랍게도 믿음과 연관이 됩니다.

즉 이 기생라합 곧 거짓말한 기생라합이 숨어있는 예수님을 드러내는 역할이다는 겁니다.

또 오해 말길 분명 기생 따로 말하고 거짓말 따로 말하는게 아니라
기생라합이고 거짓말한 기생라합에 주님이 보이는 겁니다.

마치 현장에서 간음 그냥 간음이 아닌 현장에서 간음 해야 그 간음이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보여준다는 말이 아니라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자 라는 구체적인 인물 왜? 말씀의 흔적 곧 찢기는 간음을 찢는게 아니라 그 인물을 찢는 겁니다. 기생라합을 찢고 있지 기생을 찢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찢겨진 틈 속에서 보이지 않던 약속이 등장하는 겁니다.

구약을 이렇게 보면 됩니다.

신약도 이 숨어있는 십자가 라는 창조예정을 예수님이 아무리 말해도 인간들은 그저 예수님을 자신들과 같은 한 인물로만 상대할 뿐이지

도저히 새언약으로써 볼 수가 없습니다. 즉 은닉입니다.

도리어 보이니까 더 은폐 된 겁니다.

그리고 보고서 따라오는 방식을 주님 스스로가 다 차단하고 막아버립니다.

아무리 예수님의 제자들이 따라다녀도 정작 은닉된 십자가를 보여주니까
줄행랑 다 도망치는 겁니다.

반드시 도망쳐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눈으로 보고 포착해서 따라오는 방식을 거부한다는
십자가 스스로 벌려놓은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따라올자가 없습니다.

만약 지금 현재 2010년 6월 8일 오후 11시 27분에 십자가를 지고 따라간 자가
성화론자 중에서 나타났다 라는 자가 발생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의 생활방식과 사고방식 말투 행동방식 등등을 어떻게 해서든 흉내라도 내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참 주님이 이럴 때 너무 감사합니다.
단 한 놈도 그런 자는 없습니다.

놀랍게도 먹사들이 스데반 같이 되어라 라고 외치고
바울 같이 되어라  라고 외쳐도

심지어 베드로처럼 바울로처럼 그렇게 살수 없을까 라는 노래까지 아무리 부르고 기도해도
절대 기도 안 들어 줍니다. 그런 마귀 기도 마귀 찬양은 할 필요 없습니다.

얼마나 타인을 탐하는지?

차라리 예수님처럼 살 수 없을까 라고 해야지요

걱정 마세요 그래서 성령 주신 겁니다.
인간에게 포착 당하지도 않는 임의적으로 부는 바람같은 우발적인 성령이
내가 전혀 예상 못한 삶을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충만케 살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성령으로 인한 삶인지 본인 조차도 납득이 안됩니다.
얼마나 참 잘 인도하셨으면 납득이 안될까요?

만약 예수님께서 인간 상대 안하고 마귀와 그 독사의 자식인 바리새인을 상대하기 위해서
우리를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으로 만들고자 우리는 그렇게 삼으시면
감당하실래요?

그래놓고? 베드로 바울로처럼 살겠다구요? 예수님처럼 살겠다구요? 결백증환자입니까?

제가 놀랍게도 종교인과 특히 성화론자와 개혁주의를 보면 좀 결백증 환자가 대부분임을 봅니다. 착함 선함 이런 것들로 세뇌 시켜야 세뇌중독의 한꺼플이 벗겨집니다.

그렇지만 정작 그들의 지도자들은 한번만 툭 건드려 보면 늑대임을 양의 탈을 긁어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제가 너무 길게 글을 썼는데
보이지 않는 것으로 해석하면 된다는 짧은 말을 무지 길게 했네요

문제는 보이지 않는데 우찌 그것을 가지고 해석하느냐 라는 겁니다.

또 문제는 보이지 않는 것을 가지고 해석하고 그 답변과 해석 조차도 여전히 보이지 않는 것으로써 남게 되는 말장난이 아닌가?

그래서 차라리 보이는 것으로 해석해서 보이는 것으로 결론 내리면 된다는 식입니다.

제가 말하는 보이지 않는 것은 예수님의 부재성을 두고 말합니다.
결국 저들에게는 숨기시고 제자들에게는 나타내심이라 라는 표현으로써 주님은 하나님나라의 비밀을 증거하십니다.

공개는 같이 되었는데 저들에게는 못 알아먹는 말귀로
그러나 제자들에게는 나타내는데
제자들 조차도 말귀 못 알아먹기로는 마찬가지인데
여기서 자력이 아닌
약속한 성령이 오니 다 알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 버리신다는 겁니다.

바로 이 방식이 부재성의 원리라는 겁니다.

즉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함과 동시에
반대로 다른 한쪽은 아무리 무식하고 심지어 날때부터 소경이고 날때부터 귀머거리이며
글자의 문자 조차도 모르는 까막눈이여도

학자도 못 알아먹는 비밀을 풀수 없는 복음을 저들이 평생을 걸고 연구해도 안되는 해석을

다른한쪽에게는 무상으로 주겠다는


두 패 가르기입니다.

이 두 패 로 찢어서 그 사이를 극대화 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아무리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다가갈려고 해고 다가올수가 없었고
아무리 예수님으로부터 도망칠려고 해도 그 썩은 팔 썩은 눈 썩은 귀 온몸에 번진 문둥병을 고쳐 버리니 안 따라가고파도 다가오니 어쩔수가 없는 겁니다.

이것은 너희가 날 사랑하는 것이 아니요
사랑은 거기에는 없고

사랑은 여기에 있다.
하나님이 화목제물로써 사랑을 증거했다.

그 화목제물이 도저히 봉합할수 없도록 하는 찢어버림이다 라는 겁니다.

정작 종말에 심판의 자리에 놓인 부정한 자리에 있던 교회가 구원 받고
(부정함이 조건이 아니라 예수님이 뛰어든 부재성-임의성의 자리이기에)

정작 종말에 구원에 자리에 앉아버린 교회가 심판을 받는
(구원이 고착화 되었기에 그 정당성을 더더욱 덧입히는 행위에 집착)

이것이 종말에 성령에 의해서 벌어진다는 겁니다.

부정한 염소가 양이 되고
정결하다던 양이 염소가 되는 방식입니다.

어리석은 다섯처녀가 슬기로운 다섯처녀가 되고
똑똑한 다섯처녀가 어리석은 다섯처녀가 된다는 겁니다.

즉 뒤바꿔 치기의 교체작업입니다.

죽고자 망하고자 심판받을수 있는 무모한 것에 뛰어든 충성된 종은 갑절로 받고
(처음자리, 심판자리, 저주자리, 원천 근본인 십자가 자리 - 어리석은 지혜 = 광야자리 -  죽을 곳으로만 골라가는)

살고자 원금 그대로 더 이상 책망받을 근거를 자기쪽에서 다 제거한 악한 종은 그 있는 것도 빼앗기는 겁니다. (주인 보다 자기 영역을 사적으로 이미 확보 - 아간의 범죄)


죽고자 하는 이 보이지 않는 종말을 가시화 시키는 해석이 십자가의 복음이고
살고자 하는 보이는 것으로써 다가올 종말을 대비하는 것은 모래위에 집 짖는
사기에 넘어간 겁니다.

죽고자 하는 자는 예수님만 쳐다 보면 되지 이 땅에서 찾을 필요 없습니다.
도리어 죽고자 하는 것을 지키겠다는 자들에 의해 우리는 부재성으로써 성령에 등떠밀릴 뿐입니다.

기생 라합처럼 거짓말과 기생이라는 의미가 저들에게 평생 걸림돌이 되는 방식으로 말이죠.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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