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숙한 여인 vs 값비싼 진주


(잠 31:10, 개역)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 값은 진주보다 더 하니라』


이번주 중고등부 설교 내용이 잠언 31장이다.

요즈음 소위 얼굴이 미인이고 아름답고 예쁜 여자들만 주변환경에 티비에 수두룩 깔려있다.
날씬한 하고 뜯어고쳐서라도 이뻐질려고 환장에 환장하는 거의 미치기를 원함에 푹 빠져 있는 모습들을 보면서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죽음이라는 자극이 아니면 저렇게 할수 있을까?

사람의 외모로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신다고 했지만
정작 그 말하시고 바로 가장 외모가 준수 하다고 일부러 모순점을 부각시키신다.
(이것이 부활논쟁에도 나온다.)

(삼상 16:7, 개역)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삼상 16:8, 개역) 『이새가 아비나답을 불러 사무엘의 앞을 지나게 하매 사무엘이 가로되 이도 여호와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삼상 16:9, 개역) 『이새가 삼마로 지나게 하매 사무엘이 가로되 이도 여호와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삼상 16:10, 개역) 『이새가 그 아들 일곱으로 다 사무엘 앞을 지나게 하나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들을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고』
(삼상 16:11, 개역) 『또 이새에게 이르되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가 가로되 아직 말째가 남았는데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보내어 그를 데려오라 그가 여기 오기까지는 우리가 식사 자리에 앉지 아니하겠노라』
(삼상 16:12, 개역) 『이에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선택이란 무조건 이쁘다 라는 것이다.
저주요 미움이란 무조건 싫다 라는 것이다.

성경은 의외로 이 외모에 상당히 거부감을 표한다.

(마 22:16, 개역)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막 12:14, 개역)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눅 20:21, 개역) 『그들이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치 아니하시고 오직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
(요 7:24, 개역)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 하시니라』
(행 10:34, 개역)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롬 2:11, 개역)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
(고후 10:7, 개역)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 만일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을진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 같이 우리도 그러한 줄을 자기 속으로 다시 생각할 것이라』
(갈 2:6, 개역) 『유명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명한 이들은 내게 더하여 준 것이 없고』
(엡 6:9, 개역)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고 공갈을 그치라 이는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니라』
(빌 1:18, 개역)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골 3:25, 개역)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심이 없느니라』
(약 2:1, 개역)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약 2:9, 개역)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
(벧전 1:17, 개역)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벧전 3:3, 개역)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그것은 외모에 상대적인 의미를 주장하고파서 그 차이성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즉 중심이 되는 속을 바깥으로 드러내는 작업이 바로 성령의 일이고

겉과 속을 일치성 시킬려고 하는 것이 인간이 외모로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다.

아무튼
내가 남자이다 보니 여자를 볼때도 외모 우선이다 그런데 모순되게도 그 외모를 가꾸는 여자를 보면 죽음이 먼저 덮쳐졌다 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고 하니

너무 일찍 늙어버린다 라는 것이다.
죽음이 바짝 땅겨져서 몰아세움 당하듯이 밀어붙이니
그것을 어떻게 해서든 막아보고 애써 멈추어볼려고 아등바등 몸부림 친다.
그것을 아무리 카바 해 볼려고 무진장 애를 쓰면서 화장을 해 보나
그 죽음의 속도가 워낙 빠르다 보니
힘이 부친다.

물론 남자인 나도 이런 생각을 할 정도이다 보니 나도 늙어가고 죽음의 그림자가 더 한발자국 가까이 다가왔다 라는 것을 느낀다.

과거에 그렇게 아름다웠던 여인들이 티비를 보면 너무 너무 늙어있다.

그렇다면 왜 여자는 더 빨리 늙는가?

사실상 여자는 늙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보일 뿐이다.

노인 부부 중에 여자인 할머니가 일찍 죽으면 남자는 6개월 안에 죽는단다.
실지로 내가 우리집 앞 교회에 새벽기도 다니다 보니 유독 노부부만이 새벽기도 다녔는데
그 부부 중에 할머니가 한동안 안보이더니만 할아버지도 얼마가지 않아서 보이질 않았다.

그러나 노부부 중에 할아버지가 일찍 죽어도 남겨진 할머니는 몇 년을 더 오래 산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남자는 전쟁하기 위해서 태어나는데 그것이 바로 죽음과의 전쟁이다.

죽음과 전쟁하는자 로써 남자는 태어난다.

인생의 동반자 라고 하는 남자의 뼈 중에 뼈인 여자는 일찍 적인 죽음에게 의해 빼앗기게 될 판국이다.

그렇다면 남자는 이 죽음과의 결판을 내어서라도 여자를 죽음으로부터 빼앗아 와야 한다.

어떻게 하면 죽음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가?

미움 저주 심판 사망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묻는 물음에서 알수 있다.

바요나 시몬아 너가 다른 사람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라는 것이다.

(요 21:15, 개역)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이 장면은 베드로와 예수님의 첫만남을 상기시키면서 등장한다.

바로 그물찢기 사건이다.

(요 21:3, 개역)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요 21:4, 개역)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요 21:5,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요 21:6, 개역)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요 21:7, 개역)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요 21:8, 개역)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상거가 불과 한 오십 간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
(요 21:9, 개역) 『육지에 올라 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요 21:10,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신대』
(요 21:11, 개역)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고기가 일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인간의 처음자리는 찢겨짐으로써 출발한다.

첫사랑 또한 찢어짐이다.

그 찢어진 자리가 빈터의 자리로써 원천으로 생명의 젖줄로 근원마당터로 자리 잡아버린다.

그래서 이상하게도 아무 영문도 이유도 없이 그저 사랑스럽다.
무조건 사랑이다. 이것이 첫사랑이다.

땍땍 거리는 여자도 첫사랑 앞에서는 쥐뿔도 기를 펴지 못한다.
온 손과 발이 오그라들 정도로 부끄럽고 한없이 작게 느껴진다.

그저 상대방만 크게 보인다.

상사병이다.

죽음도 못 고치는 상사병

중심 속에 있던 것이 바깥으로 나온다.

옆에 친구 가시나들이 비웃는다 어머머 가시나 지랄한다. 니가 남자를 개보다 더 못하게 여기면서 왜 저 머슴아 한테는 사족을 못스냐? 뭐 잘 난 구석은 니가 개보다 더 못하게 여기는 남자들 보다 더 없고 쥐뿔도 없는 화이트핸드 이구만 어머 웃기네 지지배

어떤 조건도 어떤 댓가도 어떤원인도 없는
그야말로 꽁깍지 씌인 것이다.

성령은 바로 임의로 부는 바람처럼 포착할꺼리를 줘서 믿도록 하지 않는다.
도리어 포착할 꺼리를 줘서 믿는 것은 허상인 우상임을 그 차이성으로 드러낼 뿐이다.

중심 속에 있던 것이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한 것이다

사람은 외모로 본다고 했다. 즉 중심은 감추어졌기에 볼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 감추어진 속에 있는 중심을 외부로 표출 시킨다는 것이다.

이제 외모와 중심의 교체 사건이 벌어진다.
거기에 동원이 되는 것이 죽음이다.

(마 5:27, 개역)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28, 개역)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마 5:29, 개역)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마 5:30, 개역)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여기에 인간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 의해 한계점이 드러나는 상황이 바로 외부적인것만 판단하는 눈의 한계를 보여준다.

지금 이 글씨 또한 인간은 눈으로 파악하고 있다. 눈이 아니면 파악 못한다.

외부만을 해석하는 눈의 한계점을 외부로 표출시키면 인간은 결국 간음이라는 행동을 구체적으로 실행을 해야 간음죄가 성립이 되는 것이 아니라 여자를 눈으로 보고 음욕을 품은 그 자체로써 마음 곧 중심 자체가 이미 간음 상태다 라는 것이다.

결국 인간이 선악적으로 판단하는 그 시선 보다 더 깊게 그 외모로 판단하는 시선을 더 깊게 해석한다.

왜냐하면 간음이라는 행동이 외부로 표출 되어야만 간음죄 라고 붙여서 그 사람의 중심을 파악하던 그 인간의 마음이

그 자체가 그렇게 판단하는 그 자체가 간음이다 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을 엉터리로 해석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간음죄다. 하나님의 법을 어설프게 그 중심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남을 판단했기에 그렇다.

그래서 하나님의 법 스스로가 직접 이 법의 취지를
인간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법을 가지고서 간음죄를 저질렀는지를
간음해서 간음이 아니라 간음죄를 가지고서 간음하는 자신의 중심 곧 마음을 숨기고 남을 간음죄로 몰아 세웠는지를 그 취지를 차이나게 아주 쉽게 알려주신다.

그 법과 법사이의 한계점을 노리는 인간이 하나님의 법을 간음하는 현장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한번은 예수님이 지나간다는 소리를 듣고 마침 하늘이 도우사 우리나라 만세 하고
자신들이 있는 근처에서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이 발생했다.

이것을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을 간음하는지? 여자 간음은 문제도 아니다.
하나님을 간음하는자들이 하나님의 법을 쥐는 현장이다.

그래서 딱 아다리 되어서
저 예수를 시험하는데 이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이용하는 것이다.

이것이 선이 악을 방관할수 없는 바리새인의 열심이다.
선은 선 답게 행동 해야만 한다는 취지 이다.

외모를 꾸미겠다는 취지이며 그 외모가 중심에 개입하고야 말겠다는 바벹탑 곧 우상의 취지이다.

그러나 정작 중심에는 소외 되어 있다.

그래서 소외 된 인물을 활용하신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이다.

현숙한 여인이란 잠언서에서 하나님을 아는 자 라고 했다.
그리고 그 상대적인 여인인 값비싼 진주만을 찾는 자 라고 했다.

그런데 이 잠언서가 바로 율법서 에 해당 된다. 지혜문서로써 율법적이다.
이것이 복음적이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어렵게 생각하면 골치 아파지니 쉽게 생각하자

바리새인이 이 본문 현숙한 여인을 적용할려고 한다면 자신들을 적용시킨다.
즉 자신의 개입 이다.

그래서 상대적인 값비싼 것을 좋아하지 않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쌓아가는 방식이 현숙한 여인과 동일한 현숙한 사람이 된다고 보는 것이다.

바로 이런 시선을 가지고 있는 자에게 예수님이 외모 문제를 언급하거나 유발케 했다.
자신이 잠언서의 현숙한 여인에 대한 해석을 끄집어 낼 수밖에 없다.

바로 그런 점에서 개입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취지는 그러니까 소외 가 너의 참 모습이 아니냐 라는 것이다.

베드로가 왜 사탄아 물러가라 라는 욕을 먹는가? 개입이다.

거기에 소외 시키기에 바쁜 것이 주님의 일이다.

소외 끝나는가? 아니다.

다시 찾아오심으로써 다시 첫만남을 형성한다.

베드로가 그물 찢겨지는 사건으로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 라고 했다.
자신이 첫사랑이라는 무조건적임 앞에 자신의 고백은 이것이 전부이다.

그러나 주님은 다시 첫사랑을 형성하신다.
나를 떠나소서 라는 라는 첫사랑의 고백을
이제는 십자가 라를 도끼로 난도질 함으로써 나온 고백을 다시 형성 하신다.

그리고 묻는다

너가 나를 다른 사람들 보다 더 사랑하느냐?

이것은 독점적인 선점이다.

즉 질투 다.

질투 할 만 한 것이

이래도 안 사랑할래 라는 주님 쪽에서의 뻔뻔함이다.

왜냐하면 죽음을 이겼다는 당당함 때문이다.

베드로는 그저 기적적인 신적 존재로써 자신이 한없이 초라한 죄인임을 첫사랑으로써의 고백을 외쳤다.

그러나 그 첫사랑의 잉여는 오늘에서야 또 날려버린다.
그 날라간 머리에 다시 머리가 피어오른다.

그리고 이제는 기적이 아닌 표적으로써 흔적으로써 외친다.

주님이 저의 남자 이시군요 라고 말이다.

죽음의 두껑을 열어서 재껴 보니

베드로 라는 교회는 완벽한 아름다운 신부였던 것이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넌 아름다운 여인이야
넌 교회야
넌 흠없는 여자야
넌 현숙한 여인이야
넌 내 사랑이요 내 뼈 다귀 중에 뼈다귀요 내 삼겹살 주에 삼겹살 이야

예수님이 원한 사랑은 바로 가증한 물건이 성전에 서게 되는 우상여인이 아니라.
짐승 여인이 아니라

자기 쪽에서 그 어떤 것도 사랑의 조건을 내세울 것이 없는
예수님의 사랑만 채워진 중심만 내세울 것 밖에 없는 여인이 바로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인 베드로 이다.

음부의 권세를 이긴다는 것이 뭔가?

자기 쪽에서 주를 사랑하겠다 라는 그것 조차 이기는 것이다.

내가 주님을 절대로 버리지 않겠습니다.
남들은 다 버려도

바로 이 표현이다. 남들은 다 버려도 나 만큼은 절대 안 버리겠다
라는 것을 이기는 것이다.

남들은 다 버려도 나 만큼은 절대 안 버리겠다
이것이 음부의 권세이다. 죄의 소원이다.
넘어설테면 넘어서봐라 라는 것이다.

바로 이런 바리새인보다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 못 들어간다고
바리새인을 바리케이트로 삼으셨다.

죽음의 권세
음부의 권세로 말이다.

넘어설 필요 없다.
주님이 이런 말씀 하셨다는 자체는 주님 자신이 넘어 오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넘어오셔서
베드로의 사랑을 훨씬 뛰어 넘어서
베드로 보다 더 베드로를 사랑하심으로써 이미 사랑을 완료하셨기에 묻는다.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래서 죽음을 넘어서지 않고서는 안되는 것이다.

죽음이 닥친 여인에게 죽음을 해결하면

저절로 이뻐보인다. 아무리 늙든 말든 상관 없다.

웃는 여자는 다 이뻐 라는 노래도 있듯이 말이다.

죽음 문제를 해결한 여자가 현숙한 여인이다.

하나님을 믿는 자 하나님을 아는 자가 잠언에서는 현숙한 여인이다 라고 했다.

그러나 아니다.

예수님을 아는 남자와 여자가 현숙한 자다.
죽음을 이겼기에 죽음을 여는 어리석은 짖을 밥먹듯이 해대기 때문이다.

죽음과 저주와 심판과 미움의 두껑을 활짝 활짝 벌컥 벌컥 여는 여자여!

복이 있도다 !!!

 
(창 24:60, 개역) 『리브가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미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지어다』

(룻 1:20, 개역)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룻 1:21, 개역)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칭하느뇨 하니라』

나오미(복된여자:기쁜여자) 마라(슬픈여자:저주받은여자:괴로운여자)

(룻 3:11, 개역) 『내 딸아 두려워말라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네가 현숙한 여자인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
(룻 3:12, 개역) 『참으로 나는 네 기업을 무를 자나 무를 자가 나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있으니』

 

안식처는 곧 타작마당이였다. 물레방아 도는 생명의 젖줄

(룻 3:1, 개역) 『룻의 시모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로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룻 3:2, 개역) 『네가 함께 하던 시녀들을 둔 보아스는 우리의 친족이 아니냐 그가 오늘 밤에 타작 마당에서 보리를 까불리라』
(룻 3:3, 개역) 『그런즉 너는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타작 마당에 내려가서 그 사람이 먹고 마시기를 다하기까지는 그에게 보이지 말고』
(룻 3:4, 개역) 『그가 누울 때에 너는 그 눕는 곳을 알았다가 들어 가서 그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 그가 너의 할 일을 네게 고하리라』
(룻 3:5, 개역) 『룻이 시모에게 이르되 어머니의 말씀대로 내가 다 행하리이다 하니라』
(룻 3:6, 개역) 『그가 타작 마당으로 내려가서 시모의 명대로 다 하니라』
(룻 3:7, 개역) 『보아스가 먹고 마시고 마음이 즐거워서 가서 노적가리 곁에 눕는지라 룻이 가만히 가서 그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웠더라』
(룻 3:8, 개역) 『밤중에 그 사람이 놀라 몸을 돌이켜 본즉 한 여인이 자기 발치에 누웠는지라』
(룻 3:9, 개역) 『가로되 네가 누구뇨 대답하되 나는 당신의 시녀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으소서 당신은 우리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룻 3:10, 개역) 『가로되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빈부를 물론하고 연소한 자를 좇지 아니하였으니 너의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룻 3:11, 개역) 『내 딸아 두려워말라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네가 현숙한 여자인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
(룻 3:12, 개역) 『참으로 나는 네 기업을 무를 자나 무를 자가 나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있으니』
(룻 3:13, 개역) 『이 밤에 여기서 머무르라 아침에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려 하면 좋으니 그가 그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행할 것이니라 만일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코자 아니하면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노니 내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행하리라 아침까지 누울지니라』
(룻 3:14, 개역) 『룻이 새벽까지 그 발치에 누웠다가 사람이 피차 알아보기 어려울 때에 일어났으니 보아스의 말에 여인이 타작 마당에 들어온 것을 사람이 알지 못하여야 할 것이라 하였음이라』
(룻 3:15, 개역) 『보아스가 가로되 네 겉옷을 가져다가 펴서 잡으라 펴서 잡으니 보리를 여섯번 되어 룻에게 이워주고 성으로 들어가니라』
(룻 3:16, 개역) 『룻이 시모에게 이르니 그가 가로되 내 딸아 어떻게 되었느냐 룻이 그 사람의 자기에게 행한 것을 다 고하고』
(룻 3:17, 개역) 『가로되 그가 내게 이 보리를 여섯번 되어 주며 이르기를 빈손으로 네 시모에게 가지말라 하더이다』
(룻 3:18, 개역) 『이에 시모가 가로되 내 딸아 이 사건이 어떻게 되는 것을 알기까지 가만히 앉아 있으라 그 사람이 오늘날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


쉬지 아니하리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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