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고를 아는 자

2010년 6월 19일 토요일 오후 10:50:25  김대식

(사 53:1, 개역국한문) 『우리의 전(傳)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사 53:2, 개역국한문) 『그는 주(主)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軟)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貌樣)도 없고 풍채(風彩)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欽慕)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사 53:3, 개역국한문) 『그는 멸시(蔑視)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艱苦)를 많이겪었으며 질고(疾苦)를 아는 자(者)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않음을 받는 자(者) 같아서 멸시(蔑視)를 당(當)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貴)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사 53:4, 개역국한문)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疾苦)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當)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懲罰)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苦難)을 당(當)한다 하였노라』

(사 53:10, 개역국한문) 『여호와께서 그로 상(傷)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願)하사 질고(疾苦)를 당(當)케 하셨은즉 그 영혼(靈魂)을 속건제물(贖愆祭物)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成就)하리로다』


질고(疾苦) !

죽음을 아는 자 라는 뜻이다.
질고 병 아픔  저주의 맛 지독한 미움
그리고 하나님으로 부터의 버림 받음

곧 십자가

이것을 질고를 아는 자 라고 한다.

죽어 본 자 만이 질고를 아는 자 다.

과거의 제사장 조차도 평생을 직업 없이 기업없이 토지가 없이
오로지 이 죄 만 알도록 죽음만 알도록 저주만 알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알지 못했다. 그래서 거룩 근처에도 가 볼 수가 없었다.
딸랑 딸랑 방울 달고
거룩 근처에도 못 가고 죽어야만 하는 역할만을 했다.

죽여서라도 거룩이 자신에게 남긴 흔적으로 남겨져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거부하고 거부해도 거룩의 소품 앞에 그릇 값을 톡톡히 하도록 되어 있었던 거다.

유일한 제사장 이신 예수님은 친히 제물이 되신다.

제사장이 친히 제물이 되는 제사 보다 더 나은 제사란 있을까?

더 나은 제사가 뜬 이상
나머지의 제사는 다 헛것이다.

이것이 실상 곧 실제요 현실이다.

(사 53:11, 개역국한문) 『가라사대 그가 자기(自己) 영혼(靈魂)의 수고(受苦)한 것을 보고 만족(滿足)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義)로운 종이 자기(自己) 지식(知識)으로 많은 사람을 의(義)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罪惡)을 친히 담당(擔當)하리라』
(사 53:12, 개역국한문)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尊貴)한 자(者)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强)한 자(者)와 함께 탈취(奪取)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自己) 영혼(靈魂)을 버려 사망(死亡)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犯罪者) 중(中)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實狀)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罪)를 지며 범죄자(犯罪者)를 위(爲)하여 기도(祈禱)하였느니라 하시니라』

12절에 실상은 이라고 앞의 내용에 반전을 증거한다.
겉으로는 이러했지만 실상은 이러했다는 것이다.
오해의 소지를 갖고서 비밀로써 나타났지만 그 비밀의 감추어진 속 내막은 이러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반드시 오해 할 것은 오해 해야만 한다.
그리고 또 반드시 그 오해 속에서 그 감추어진 비밀을 또 역으로 알아야 한다.

오해도 주님이 하실 숙제요.
그 오해 속에서도 비밀을 푸는 것 또한 주님이 하실 숙제이다.

이것이 원인자가 자기자신을 자신이 친히 치셔서 이룬 성취이다.

(사 53:10, 개역국한문) 『여호와께서 그로 상(傷)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願)하사 질고(疾苦)를 당(當)케 하셨은즉 그 영혼(靈魂)을 속건제물(贖愆祭物)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成就)하리로다』

주님이 원하신 것이다.

그 원인자와 원인자 끼리의 내용에 참예되기 위해 우리는 이 질고 인 십자가 속에 들어가서 보게 되니 비밀을 알게 되는 것이다. 바로 속건제물로써 말이다.

드디어 하늘의 소망이 이루어진 것이다.

친히 제사장 되시고 친히 제물이 되셔서 이룬 것이 속건제물 완성이다.

즉 성령이라는 선물 이다.

제사의 완성은 성령을 보혜사로 주는 것이다.
20 프로 덤으로 얹어 주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100 퍼센트 이다.

모세가 소망했던 것이다.
민수기 11장에 모세는 자신에게 여호와의 신이 임했듯이 모든 사람에게 여호와의 신이 임하기를 원했다. 곧 모든 이가 선지자가 되기를 바랬다. (사실은 모세의 소망이 아니라 여호와의 신이 모세에게 임하니까 그런 소망을 역시 들게 된 것이니, 주님의 소망이다.)

곧 총알받이 이다.

(민 11:1, 개역) 『백성이 여호와의 들으시기에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여호와의 불로 그들 중에 붙어서 진 끝을 사르게 하시매』
(민 11:2, 개역) 『백성이 모세에게 부르짖으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기도하니 불이 꺼졌더라』
(민 11:3, 개역) 『그곳 이름을 다베라라 칭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불이 그들 중에 붙은 연고였더라』
(민 11:4, 개역) 『이스라엘 중에 섞어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민 11:5, 개역)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 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민 11:6, 개역)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
(민 11:7, 개역) 『만나는 깟씨와 같고 모양은 진주와 같은 것이라』
(민 11:8, 개역) 『백성이 두루 다니며 그것을 거두어 맷돌에 갈기도 하며 절구에 찧기도 하고 가마에 삶기도 하여 과자를 만들었으니 그 맛이 기름 섞은 과자맛 같았더라』
(민 11:9, 개역) 『밤에 이슬이 진에 내릴 때에 만나도 같이 내렸더라』
(민 11:10, 개역) 『백성의 온 가족들이 각기 장막 문에서 우는 것을 모세가 들으니라 이러므로 여호와의 진노가 심히 크고 모세도 기뻐하지 아니하여』
(민 11:11, 개역) 『여호와께 여짜오되 주께서 어찌하여 종을 괴롭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나로 주의 목전에 은혜를 입게 아니하시고 이 모든 백성을 내게 맡기사 나로 그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
(민 11:12, 개역) 『이 모든 백성을 내가 잉태하였나이까 내가 어찌 그들을 생산하였기에 주께서 나더러 양육하는 아비가 젖 먹는 아이를 품듯 그들을 품에 품고 주께서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가라 하시나이까』
(민 11:13, 개역) 『이 모든 백성에게 줄 고기를 내가 어디서 얻으리이까 그들이 나를 향하여 울며 가로되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라 하온즉』
(민 11:14, 개역) 『책임이 심히 중하여 나 혼자는 이 모든 백성을 질 수 없나이다』
(민 11:15, 개역)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나로 나의 곤고함을 보지 않게 하옵소서』
(민 11:16, 개역)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노인 중 백성의 장로와 유사되는 줄을 네가 아는 자 칠십 인을 모아 데리고 회막 내 앞에 이르러 거기서 너와 함께 서게 하라』
(민 11:17, 개역) 『내가 강림하여 거기서 너와 말하고 네게 임한 신을 그들에게도 임하게 하리니 그들이 너와 함께 백성의 짐을 담당하고 너 혼자 지지 아니하리라』
(민 11:18, 개역) 『또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 몸을 거룩히 하여 내일 고기 먹기를 기다리라 너희가 울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애굽에 있을 때가 우리에게 재미 있었다 하는 말이 여호와께 들렸으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실 것이라』
(민 11:19, 개역) 『하루나 이틀이나 닷새나 열흘이나 이십 일만 먹을 뿐 아니라』
(민 11:20, 개역) 『코에서 넘쳐서 싫어하기까지 일 개월 간을 먹게 하시리니 이는 너희가 너희 중에 거하시는 여호와를 멸시하고 그 앞에서 울며 이르기를 우리가 어찌하여 애굽에서 나왔던고 함이라 하라』
(민 11:21, 개역) 『모세가 가로되 나와 함께 있는 이 백성의 보행자가 육십만 명이온데 주의 말씀이 일 개월간 고기를 주어 먹게 하겠다 하시오니』
(민 11:22, 개역) 『그들을 위하여 양떼와 소떼를 잡은들 족하오며 바다의 모든 고기를 모은들 족하오리이까』
(민 11:23, 개역)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여호와의 손이 짧아졌느냐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응하는 여부를 보리라』
(민 11:24, 개역) 『모세가 나가서 여호와의 말씀을 백성에게 고하고 백성의 장로 칠십 인을 모아 장막에 둘러 세우매』
(민 11:25, 개역)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그에게 임한 신을 칠십 장로에게도 임하게 하시니 신이 임하신 때에 그들이 예언을 하다가 다시는 아니하였더라』
(민 11:26, 개역) 『그 녹명된 자 중 엘닷이라 하는 자와 메닷이라 하는 자 두 사람이 진에 머물고 회막에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나 그들에게도 신이 임하였으므로 진에서 예언한지라』
(민 11:27, 개역) 『한 소년이 달려와서 모세에게 고하여 가로되 엘닷과 메닷이 진 중에서 예언하더이다 하매』
(민 11:28, 개역) 『택한 자 중 한 사람 곧 모세를 섬기는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말하여 가로되 내 주 모세여 금하소서』
(민 11:29, 개역)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위하여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 신을 그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원망 질고와 10절에 여호와의 진노, 그리고 11절에 괴롭힘, 무거운 짐, 15절에 곤고함,
바로 이런 것이 근거가 되어서 주어지는 선물이 바로 속건제물과 같은 여호와의 신이다. 곧 말씀의 영이다. 배고픈데 말씀을 먹이겠다는 뜻이다. 원망과 진노와 괴로움과 짐과 곤고함에 고기를 주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신을 먹이겠다 라는 것이다. 즉 완료를 주겠다는 것이다. 먹어도 어차피 또 배고파 지는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신을 주겠다는 것이다. 이것을 다윗이 선물로 또한 받는다. 반드시 질고를 거쳐서 그 차이로 주어지는 선물이다.)

즉 질고와 속건제물의 연관성은 곧 십자가의 성취는 약속한 성령의 완성이다. 처소 완성이다.

다윗이 자신의 율법 지킴이 얼마나 어설펐는지 결국 율법으로 자신의 죄를 가리우는데 알리바이로 이용할 뿐이다.(모든 인간의 대표성이다. 안 그러는 인간이 없다는 뜻이다. 율법 지킴은 곧 완악함으로 드러난다. 더욱더 깨끗하고 순전한 마음으로 지키면 지킬수록 더욱더 완악함만 더더욱 드러난다.)

곧 인간의 믿음, 인간의 신앙, 인간의 신학, 인간의 충성, 행함, 봉사, 충성, 사랑실천 등등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알수 없는 더 깊은 죄악을 가리우는데 알리바이로 이용하는데 나올 뿐이다.

그래서 다윗은 더 이상 자기 쪽에서의 원천을 다 바닥내고 소진 시켜버리는
속건제물 때문에 밑바닥을 친다.
곧 하나님 자신이 친히 다윗을 죄의 소원에서 건지기 위한 친히 제물 되심이다.

다윗은 그 제물을 보도 자신의 제사 보다 더 나은 제사임을 보고 더 이상 자신의 것을 내어놓지 않는다. 금식, 회개, 기도 다 소용 없다. 꺽으신 뼈를 되물릴수 없다. (다윗 자신이 드리는 제사를 거쳐서 그 차이로 등장한 더 나은 제사인 꺽으신 뼈 이다. 절대로 되 돌리지 않는다.)
오히려 더 나은 제사 앞에 금식은 커녕 먹고, 회개는 커녕 춤추며, 기도는 커녕 노래 불렀다.

누가 잔칫날에 금식 회개 기도를 하는가?
인자는 친히 먹고 마시고 세리와 죄인의 친구이다.

(눅 7:31, 개역) 『또 가라사대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꼬 무엇과 같은고』
(눅 7:32, 개역)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을 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눅 7:33, 개역) 『침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눅 7:34, 개역)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눅 7:35, 개역)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선지자의 외침에도 아무런 반응을 나타내지 않는다는 뜻이다. 성령의 시대 곧 종말의 시대는 노아의 때와 같다는 것이다. 반드시 그런 배경을 깔고 와야 종말이 종말 답다는 것이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는 시대

다윗은 혼자 춤춘다.
죽음과 저주와 진노와 질고에 바닥을 쳤기 때문이다.

이 완료 앞에서는 무용지물임을 비로소 안 것이다.
이것이 믿음이다.

여호와의 신은 곧 예수의 마음이다.

(빌 2:5, 개역)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6, 개역)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 2:7, 개역)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빌 2:8, 개역)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9, 개역)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빌 2:10, 개역)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빌 2:11, 개역)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 2:12, 개역)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즉 사랑이다.
그냥 사랑이 아니라 죽음 보다 더 강한 사랑이다.
죽음을 거쳐서 이룬 사랑이다 라는 뜻이다.
저주를 거쳐서 이룬 사랑이다.
진노를 심판을 지독한 미움을 거쳐서 이룬 사랑이다.

우리는 이 사랑의 완료품을 공짜로 일방적으로 받게 되었다.
그리고 이 선물 때문에 성령 때문에 졸지에
죽음과 저주와 미움과 진노와 심판과 지독한 미움을 거치게 된다.
거치게 되면서 이상하게 사랑의 완료만 더욱더 누리게 된다.
노래 부른다. 먹고 마신다. 춤을 추게 된다.
이 상대적인 행동이 종말의 행동이다는 것이다.

율법을 자신이 말씀을 캐취해서 실천하는 행위가 아니라.
말씀 스스로가 다윗에게 덮쳐서 저절로 성령강림의 오순절날처럼 희년을 외친다.

이 두 행위가 차이가 난다.
하나는 가인의 제사의 행위가 되고
하나는 아벨처럼 더 나은 제사가 된다.

한 쪽은 반드시 다른 한 쪽을 미워하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아벨은 그 미움을 거쳐서 이루어진 그야말로 제물이 됨으로써 이루는 예수님의 몸을 이룬다.

아벨이든 아브라함이든 모세든 다윗이든 그들이 누구의 역할을 했는가를 보라?
예수님의 몸이다.

발가벗겨지는 몸이다.
찢겨지는 몸이다.
질고를 아는 몸이다.

결국 성령은 이 그리스도의 몸을 성령이 친히 이루었듯이
인간이 이루는 그리스도의 몸과의 차이성을 지금 현재에도 펼치신다.

예수님 조차도 선지자로써 질고를 거쳐서 희년을 외치는가?
희년을 질고를 통하지 않고서는 안되는가?

놀랍게도 인간이 조작하는 기쁜소식인 희년이나 복음이나 성령은
바로 이 질고를 거치지 않고
또 그 질고 조차도 조작하는
십자가 마저도 조작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아무도 질고를 아는 자가 없다.

죽음을 거쳐서 이룬 사랑을 이룬 자는 아무도 없다.

오늘날 교회 목사는 질고 근처도 안 가 본 자들이다.

십자가를 진 적 조차도 없다.

고난을 받는 자는 아무도 없다.
성령을 받은 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차라리 잃어버린 양에게 가야 할 것이다.

(마 10:6, 개역)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마 15:24,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눅 19:10, 개역)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교회 백날 뒤져 봐도 없다.

인자 되신 예수님은 이 잃어버린 자를 찾으신다.

질고를 아는 자요 속건제물의 성취로 인해
예수님의 죽음을 아는 자이기 때문이다.

(갈 6:14, 개역)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 6:15, 개역)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뿐이니라』
(갈 6:16, 개역)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갈 6:17, 개역)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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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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