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의 (제사, 나라)

2010년 6월 20일 일요일 오전 10:32:04 김대식


(롬 3:19, 개역)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롬 3:20, 개역)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 3:21, 개역)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빌 3:9, 개역)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히 6:9, 개역)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

(히 11:4, 개역)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히 11:16, 개역)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뭐뭐 보다 낫다 또는 더 나은 이라는 표현은 그 이전 것과의 대조로써 그 차이성으로써의 낫다 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 이전 것을 거치지 않고서는 그 차이를 드러낼 수가 없다.

결국 그 이전 것은 반드시 그 이후의 것의 차이를 드러내기 위한 시다바리 역할을 해야 한다.

즉 과정을 거친다는 뜻이다. 그 이전의 것을 말이다.

그럼 그 이전의 것의 과정을 거친다고 하면 그것을 의로 봐야 한다는 것인가?

아니다. 그 이전의 것이 의로 또는 영광스러움으로 여김을 받았다 할 찌라도
그 이후에 오는 의 앞에서 자리를 내어주는 바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곱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 또한 차이성이다.

이 후에 올 것이 순한 연 같다면 그 이전의 것은 완악함으로 일관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믿음은 행함의 배경을 깔고 등장 한다. 그래서 그 차이성을 드러낸다.
그런데 믿음이 순종의 모습이라면 행함은 항상 완고함을 과시하는 모습으로 일관한다는 뜻이다.

언약 또한 마찬가지 이다.

언약은 비언약의 배경을 깔고 등장 한다.
빛은 어두움의 배경을 깔고 등장 한다.
묵시는 역사를 배경으로 깔고 등장 한다.
영은 육의 배경을 깔고 등장 한다.
구원은 생명은 심판과 죽음을 배경으로 깔고 등장한다.

한 쪽은 잠잠히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순한 양의 모습이라면
(왜 아무것도 한 것이 일방적인 용서이기 때문이다.)
(행 8:32, 개역) 『읽는 성경 귀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저가 사지로 가는 양과 같이 끌리었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의 잠잠함과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나머지 한 쪽은 완악함 이다.(자신의 행함 앞에서 더 나은 행함으로 용서가 펼쳐지니 졸지에 시기가 된 것이다.)(행 28:27, 개역)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하였으니』

(롬 11:1, 개역)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롬 11:2, 개역)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저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송사하되』
(롬 11:3, 개역) 『주여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롬 11:4, 개역)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롬 11:5, 개역)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롬 11:6, 개역)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롬 11:7, 개역) 『그런즉 어떠하뇨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졌느니라』
(롬 11:8, 개역)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날까지 저희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롬 11:9, 개역) 『또 다윗이 가로되 저희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옵시고』
(롬 11:10, 개역) 『저희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저희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
(롬 11:11, 개역)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롬 11:12, 개역)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

자 이렇게 한 쪽은 완악케 하는 강퍅함으로
또 다른 한 쪽은 일방적인 자비와 긍휼로써 구원하심으로

펼치심은 인간의 행함과 상관 없는 주님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려 하심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또한 이 완악함 곧 강퍅함을 거쳐서로만 그 자비와 영광을 알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차이성도 알 수 있다.

모세의 사라질 영광도 영광스럽기 짝이 없었듯이
왜 그 영광이 인간의 행함과 결부가 되었을 때에는 완악함으로 드러나는 것일까?

이유는 딱 하나 이다. 더 나은 의가 드러났을때이다.
더 나은 영광이 나타나기 전 까지는 그 영광이 완악함으로 드러날 줄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가인이 제사를 안 드린 것이 아니다.

또 아벨의 제사와의 차이성은 언제 벌어졌는지 알 수 없다.

처음 제사부터인지
아니면 한 참 둘 다 잘 드리는 중에 갑자기 한 쪽과의 구별 분리가 일어났는지?

사실상 원인자 앞에서는 그것은 중요치 않다.

원인자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흔히 한 쪽은 소홀히 드렸다고 하는데 아니다.

그 차이는 그 어떤 구석에서도 두 인간에게서는 차이성이 없다.

영광이란 주님 자신의 숙제로써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두 영광 자체가 허용치 않는다. 마치 두 하나님이 허용이 안 되듯이 말이다.
한 쪽이 드러나면 한 쪽은 그 다른 영광에 흡수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완악한 영광은 그 흡수조차도 허용치 않는다.

마치 두 소욕과 같다.

서로의 소욕을 서로가 허용치 않는 식이다.

왜 이렇게 육체에 임한 영광은 더 나은 영광을 허용치 않는가?

예수님의 행위는 어떤 육의 행위와도 일치하지 않는다.
도리어 그 일치성을 추구하는 육의 행함을 철저하게 거부함으로써 이룬 영광이다.

그래서 율법이 가입이 된 것이다.
아브라함이 바라 본 그 예수님 때문에

졸지에 율법이 그 예수님을 겨냥해서 등장한 것이다.

내 몸에서 나온 행함(열매)이 아닌
예수님 몸에서 나온 행함(열매)를 위해 한 쪽이 한 쪽을 배제 하는 방식이다.

새언약은 이렇게 옛언약을 배제 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다.

주께서 내 주께 라는 인자의 방식을
다윗은 다윗언약의 기준으로 삼아버린다.

약속에 걸었지
자신의 율법 또는 말씀 지킴과 행함에 기준을 삼지 않았다.

어떤 것을 기준으로 삼았다는 것은 그 것 외에는 다른 것은 기준으로 삼지 않았다 라는 다른 것을 기준으로 왜 삼지 않았는지를 대조시키면서 그 차이로 새로운 더 나은 것을 기준으로 삼은 그 타당성을 보여준다.

더 나은 의란
더 나은 의가 등장하기 전에

나름대로 낫다고 정당성을 추구했던 것이
솔지에 웃사스러움이 되었지만

그 웃사스러움 조차도 주님께서 덮어 주심으로써 그 덮어줌을 자랑함으로

그야 말로 더 나은 의 맞네 라고 자랑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더 낫지 못한 것인 나름대로 괜찮은 것(미흡하고 부족한)과 더 나은 것(미래완료)

이 두 대조를 통해서 아브라함은 자기 것을 포기하고 미래를 쳐다본다.

열매는 그 미래의 것이 진짜 참 옳았고 지금 나의 열매는 되도않는 마땅히 저주받아야함을 봅니다 라고 그 미래에 뛰어든다.

가인은 아벨의 제사가 왜 더 나은 제사인줄 미래가 덮치지 않아서 모르게 된다.
아벨의 제사는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앞당겨 준다.

그것 외에는 모두다 저주 마땅함을 아브라함은 보았다.

그러나 가인은 못 본다. 그저 자기가 드린 제사만 보일 뿐이다.
이 보다 더 나은 제사가 덮쳐지지 않았기에 포기할 수가 없다.

더 나은 것이 덮쳐지지 않은 이상

인간은 자기가 쥐고 있는 것이 전부이기에 부정 부인 할 수 없다.

그것이 저주 인줄도 모르고 나름대로 의롭다 라고 착각하면서 말이다.

(요 2:17, 개역)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바로 예수님을 죽이는 살인의지인줄 나의 사랑이 저주덩어리 인줄 배설물인줄 추호도 몰랐던 것이다.

예수님의 사랑이 덮쳐지지 않았기에

자기 사랑을
자기 행함을

자기가 해석을 하니 나름대로 괜찮은 의 라고 착각한 것이기 때문이다.

더 나은 의가 덮치면 똥 중에 똥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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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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