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자 완성


2010년 6월 20일 일요일 오후 1:18:36   김대식


예수님께서 죄인이 되셨다는 것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죄인이 아니다.
그렇다고 율법에 의한 죄인도 아니다.
더 깊게 들어간다.

이유 없는 까닭없는 미움이요 저주요 심판이다.
날 때부터 망해야할 자 이다.
날 때부터 저주 받아야 마땅한 자 이다.

모친의 죄 중에 태어난
정직한 영에 의한 죄 개념이다.

율법에 의한 죄인이라면 율법을 지키면 죄인이 안된다.
그 법 조항의 조건을 갖추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직한 영에 의한 죄는
율법에 의한 것도 아닌
정죄 그 자체 덩어리 이다. (정녕 죽으리라 : 율법 이전)

예수님이 죄인이 되셨다는 것은 바로 이런 차원이다.

가인이 제사를 아무리 정성껏 드려도
십자가에서 이룰 새언약을 보여주기 위한 제사 때문에
졸지에 더 나은 제사로 인한 살인의지가 드러났다.

(요 2:17, 개역)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사랑의 껍데기를 벗겨보니 사랑이 아니라
결국은 살인의지가 그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과 같이 된 일치성을 추구한다고 했다.
그 하나님을 한꺼플 벗겨보니 하나님 근처는커녕 아예 악마의 본성이 자리 잡고 있었다.

자 이런 전제를 깔고 예수님이 죄인이 되심은 무엇을 말하는 가?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 된 선악에 대한 가면을 벗기는 작업이다.

어떻게 벗기는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 받으심 이다.

이유 없다. 그저 아무런 까닭없이 날때부터 저주 받아 마땅한 저주를 퍼부으심 이다.
잃어버림의 완성이다.

왜 이런 완성을 추구하는 것인가?

마귀의 실상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마귀만을 상대로 하신 예수님의 활동은

아무런 까닭없이 자신이 이룬 행함을 의로 여겨달라는 바로 그 마귀의 정체를 드러내는데 있다.

이유도 까닭도 없는 행함에 대한 의 성립이다.

여기에 반대로 이유도 없고 까닭도 없는 무조건적인 저주요 심판이요 버림바 된 것으로써 그 차이성을 드러낸다.

그저 이유도 없이 돌이 떡 되게 해 달랜다.
그저 이유도 없이 거룩한 성전에서 뛰어 천사들이 손으로 받쳐주는 기적을 보여달란다.
무조건적으로 사랑 해 달란다.
그저 이유도 없이 온 천하 만국의 영광으로 맞교환해줄테니 임금에게 절하듯 절 하란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로 이런 마귀의 시험을 근거로 해서 언약을 보이셨다.

돌이 떡이 되게 해달라는 그 요구에 상응하는 언약을 이루셨다. (기업, 후사, 아들, 부활, 열매)
거룩한 성전에서 뛰어내려도 천사들도 두 손으로 받쳐주는 기적을 보여주는
그야말로 사랑을 받은 선택받은자 임을 증명케 해 달라는 요구에 바로 그 요구에 상응하는 언약을 이루셨다. (거룩,사랑)

그리고 마지막으로 온 천하만국의 영광을 줄테니 절 하라 라는 요구에 상응하는 언약을 이루셨다. (정치, 임금)

이 3가지 시험을 통해서 예수님은 인간이 못 벗어나는 마귀에게 씌여진 메시아 관을 적나라 하게 보여준다.

그런 자기를 위한 메시아에 대응하는 예수님의 메시아는 언약으로써 증거 된다.

즉 언약이란 인간이 내세우는 그 조건을 유발케 해서 그 조건을 모조리 비켜가는
완전히 깨부셔버리는 식으로 언약을 이루신다.

그야말로 낯설기 짝이 없는 언약이다.

인간이 생각하는 언약은 미리 자기 쪽에서 언제든지 수용할 수 있는 흡수성을 과시한다.

그러나 주님이 내세우는 약속은 어떤 인간도 통과 할수 없는 도리이 적극적인 거부로써만 일관하는 약속을 제시한다.

첫 번째 아들 개념은 주님께서 직접 이룬다. 하늘에서 난 자식만을 일관한다.
여기에 인간은 곧 아브라함은 모든 인간의 대표로써 다른 아들을 제시한다. 거부 마땅히 당해야만 하는 아들을 제시한다. 여기에 이삭으로부터 인해서 거부 당한다.

기업이란 그 원천을 열매를 통해서 고발하는 작업이다.

그 원천을 아브라함은 자신의 기업이 무너지고 망함으로써 비로소 새로운 원천을 보게 된다. 이삭 때문에 졸지에 보게 된 믿음의 눈을 뜨게 된 것이다.

그 이전의 기업은 그저 자신이 우상을 만들던 그 버릇 그대로 하나님의 언약을 해석함으로써 그 해석을 유발케 해서 그 해석을 깨부수는 도저히 그 해석 밖에 없는데도 불구하고
새롭고도 낯설은 불가능의 해석인 불임여성에서 태어난 이삭을 통해서 새로운 해석을 하게 된다.

행함이 아닌 거저주신 믿음의 해석이다. 아들 개념이 후사 개념이 부활개념이 믿음개념이 열매개념이 새롭게 해석 된다.

원천 때문에 말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예수님의 때를 원천으로 보고 새로 언약을 해석한다.


두 번째는 거룩에 대한 해석이다.

기적이 따라다니는 인간, 거룩이 붙어 다니는 인간

이것은 주객의 전도로 인간은 거룩을 해석한다.
거룩이 주체가 되어서 자신이 그 거룩에 소진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자기를 위해서 거룩을 동원하는 식으로 해석한다.

바리새인이나 율법사 서기관 즉 모든 유대인들의 성향 곧 모든 인간들의 성향은
자기를 위해서 거룩을 소진 시키는 방향으로 구원과 언약을 언급한다.

이것은 어쩔수 없는 버릇이다.

그래서 그 바리새인 속에 있던 바울이 이렇게 언급한다.

내 속에 두 법이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법을 사모하나 또 다른 하나는 죄의 법에 사로잡혀 버린다고 했다.

(롬 7:25, 개역)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그래서 곤고한 자 곧 저주받은자 라고 했다.

바로 이 저주성은 예수님에게만 해당 되는 것이다.
이것은 아브라함은 자신이 극복해야할 저주가 아니라
예수님을 쳐다봄으로써 해결 했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한다. 행함이 아닌 행함과 대조된 믿음

그렇다면 그 곤고함이라는 저주를 보여주는 것이 거룩이다.

미흡하고 부족하고 주저않고 은혜 자체를 아예 모르는 자를 향한 사랑이라는 거룩은
자기를 위하는 것이 일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체에 갇혀있는 인간이 말씀을 지키면 지킬수록 완악함이 드러나기를
그 거룩을 자기를 위해 흡수해 버리고 자기를 위해 이용하는데 작용한다.
이용하고픈 마음이 들지 않더라도 예수님과 졸지에 경쟁상태에 놓이게 된다.
경쟁하고 싶지 않더라도 주변에서 모든 환경을 주께서 깔아버리면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

율법이 가입이 된 것은 바로 죄 아래 두기 위함이다.

마치 예수님만을 쳐다봤던 아브라함처럼

유대인들은 이 율법을 지킬자를 쳐다보고 기다려야 했다.
왜? 더 이상 자기의 것에 쳐다볼 가치가 없음을 볼 때이다.

그러나 인간은 한 가닥의 율법 지킴을 가지고 있기에
이제는 더 나아가서
거룩이 자신을 따라붙는 기적맨이 되었고
선택맨이 되었고 선민 곧 구원맨이 된 것에
거룩이 도리어 시다바리로 동원된 사실을 입증해 달라고 메시아에게 요구한다.

그야말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 미완 -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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