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공간이 만들어 낸 자아 vs 미래의 공격

이번 대전강의 앞부분을 조금 듣고서 생각 난 바를 적어본다.

대전 6월 24일 14강 신을 바꿔라 -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100624 행 8:26 신을 바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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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6월 25일 에스겔 6장 선지자의 일 - 심판 선포(미래완료확정)
100625 겔6장 선지자의 일 - 부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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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공간이 만들어 낸 것이 자아다.
그 자아를 깨뜨리는 방법은 시간과 공간을 치면 된다.

태양이 멈추었던 여호수아서를 보면 이스라엘 곧 묵시가 이방나라를 치는 전쟁을 보여준다.

(수 10:13, 개역) 『태양이 머물고 달이 그치기를 백성이 그 대적에게 원수를 갚도록 하였느니라 야살의 책에 기록되기를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거의 종일토록 속히 내려가지 아니하였다 하지 아니하였느냐』

단순히 태양이 멈추었다 라는 과학적인 사건이 호기심으로 작용할 것이 아니라.
그 태양이 멈추어짐으로써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은 자들이
태양이 멈추어짐으로써 반드시 죽어야만 끝까지 죽게 한다는 겁니다.

인간을 죽게 하는 태양으로 작용할 줄을 인간은 몰랐던 것이다.

도리어 인간은 태양을 대상으로 하여서 그 태양에 적응할려고 시간과 공간을 허비했던 것이다.

요나 선지자도 마찬가지이다.

박넝쿨로 뜨거운 태양빛을 가려서 시간과 공간에 요나는 적응할려고 한다.

정작 그 태양과 시간과 공간과 심지어 박넝쿨을 만드신 여호와 하나님은 외면한 채로 말이다.

말이 안되는 모순이다. 그렇다고 인간인 주제에 여호와 하나님을 상대할 수가 없다. 그 모순을 극복할 재간 조차도 요나에게는 없다. 그저 자기 성깔대로 했을 뿐이다.

그런 속에서 시간과 공간과 박넝쿨을 깨뜨리면서 요나를 깨드리는 미래가 덮친다.
그 미래라는 묵시가 덮친다는 것은 요나를 완료하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과 박넝쿨 가리움으로 태양빛에 적응할려는 요나 자신이 자신을 완료시킬려는 그 미흡함에

미래라는 묵시는 요나의 완료를 결정해 버린다.

요나의 구원을 완료 시킨다.

그것 때문에 심판을 외치는 것이다.

그런데 심판을 또 대상으로 본 것이다. 하나 로 동행으로 보는 것이 아니였다.
그래서 니느웨 백성의 심판에 빨리 퍼뜩 망해버려라 라고
심판을 외치고 니느웨도 대상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정작 하나 됨 앞에서 요나 자신이 심판 속에 뛰어드는 동행을 보게 된다.

졸지에 니느웨 백성이 회개 할 줄을 미쳐 몰랐다. 예상 밖이다.
결국 그들이 회개 했다 라는 것은 회개의 주체가 그들 니느웨가 아니라.
아무 댓가 없이 회개의 영을 허락해 버린 여호와가 주체가 되어서
그 개같은 이방인 심판받아 마땅한 비천한 자들과
동행 곧 하나 됨 곧 아들 삼으심이 되어 버렸다.

여기에 요나는 참 고맙게도
그 동행과 하나 됨과 아들 삼으심 기업무르심 앞에 삐친다.

나 나 안할래

심판 하라 캐 놓고

심판 받아야 하는데 심판은 커녕 회개 했 뿌 네?

어차피 회개 시킬 것 정해 놓고서는 내가 괜히 반대로 심판을 외쳤으니
날 가지고 논 것에 기분 나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왜 이런 식으로 이스라엘 민족은 왜 안 돌이키시는가?
니느웨 보다 이스라엘이 못하단 말인가?

적어도 요나는 니느웨를 돌이키신 여호와의 마음이 이스라엘 보다 니느웨를 더 생각한다는 것에 자신의 사적인 감정 즉 자신의 사랑을 투자한 저들 이스라엘에 대한 마음이 앞선다.

니느웨야 자신이 투자 한 마음과 행함과 열심과 말씀연구 예언 선포는 아예 없었습니다.

결국 이 시나리오는 감독이 여호와 하나님이다 라는 것은 선지자는 적어도 알고 있다.

그래서 요나는 삐친다.

사실상 이 삐침 조차도 시간과 공간이 만들어낸 허상이다.

여기에 요나 자신이 생각한 니느웨 심판처럼 여호와께서 요나에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니느웨 백성에게 회개케 하시는 돌이키시고 동행하시고 하나 되시고 아들삼으심으로 니느웨 백성에게 다가간 것처럼 요나에게 다가오신다.

박넝쿨을 지워 버리시면서 말이다.
곧 요나를 지워 버리시면서 동행하신다.

죽음으로써 [죽었더라 족보]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처럼
그것이 바로 아벨족보
곧 하나 된 족보, 동행한 족보, 총알받이 족보, 잃어버렸다 되 찾은 족보,
이것이 바로 성령의 족보인, 처소 완료 이다.

이 처소 (원천, 안식, 잉여)와 반대되는 족보가 바로 가인의 족보인데
가인의 족보의 성향은 바벨탑과 같다.

바벨탑이 곧 인간이다.
진흙을 역어서 좀 더 보다 딴딴하고 튼튼하고 결집됨으로써 하나를 추구한다.
이유는 노아 홍수 심판에 대항한 처신이다.

심판에 대한 심판을 의식한 사고방식이다. 대처방안이다.

결국 시간과 공간을 찢는 심판이라는 묵시에 대한 저항이 바벨탑을 형성한다.

그 바벨탑의 의인화 가 바로 인간이다.

주님이 만드신적 창조하신적이 없는 인간이다.
바로 그런 가짜 인간을 배경으로 깔고 새로운 인간을 창조하신다.

그래서 가짜족보 가짜인간 가짜동행을 형성한 집단이 수평적으로 확대 됨으로써 나타난 것이 바로 애굽나라 이다.

애굽나라가 형성이 되지 아니하면 이스라엘이 그 차이로 설명이 불가능 하다.

남은자가 설명이 될려면 가짜 이스라엘이 규정이 되어야 한다.

새언약 백성이 차이가 날려면 반드시 옛언약 헌술 헌부대가 규정이 되어야 하고
예수님 나라가 증거 될려면 악마의 나라가 배경으로 깔려야 한다.

그 악마가 바로 가인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부적으로 삼아 이마표를 받아서 형성한 에녹성 가인성 종교적인 완벽한 신학을 추구하는 성전신학이다.

바벨탑을 통해서 인간이 얼마나 바벨탑 의식과 일치되어 있는지 그들의 손으로 지은 성전인 바벨탑을 보면 알 수 있다.

층을 하나 하나 올릴때에 공간을 하나 하나 올릴때에
과학이든 기술이든 인간의 지혜가 집약이 된다.

좀더 강하고 좀더 튼튼하고 좀더 안정성있는 성을 자아쌓기 하듯이 성을 쌓는다.

심판에 대비해서이다.

성화론이 딱 이런식이다. 심판에 대비한 자신의 행함을 하나 하나 쌓기이다.

바로 그런 바벨탑 의식이 만들어낸 공간과 시간으로 형성된 자아를

그 허상인 자아를 묵시 만이

심판만이

미래 만이 없애버린다.

그런데 허구가 전부인 자는 믿을 구석이 없기에 적극적인 거부로 인해 더욱더 점점더 바벨탑 쌓기에 열을 올린다.

심판 때문에 심판(미래)을 의식한 행동이요 미래대비요 미래에 자기의 공간 확보이다.

그런 사고 따위가 아무리 허구 라고 알려줘도 말이 먹혀들지 않는다.

왜냐 시간과 공간이 그들을 만들어 내니 말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이란 기존의 것에 대한 심판이다.

이것 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있는가?

나 라는 허구를 늘 만들어 내는 공간과 시간을 심판해 주시니 말이다.

더 이상 회개 눈물 슬픔이 없는 상대적인 공간 시간인 새하늘과 새땅으로 말이다.

그래서 척박한 공간인 십자가 속으로 곧 광야로 집어 넣는다.
그래서 척박한 시간인 십자가 속으로 곧 광야 40년으로 집어 넣는다.

나 라는 자아를 만들어 내는 그 허구의 실체인 애굽 나라, 애굽 바벨탑, 애굽 시간과 공간과 대비 된 광야 공간과 광야 시간을 대조 비교 시키는 곳으로 집어 넣는다.

약속이라는 광야, 언약이라는 심판이 만들어 내는 자아와

그 심판을 의식해서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 낸 바벨탑이라는 공간과 시간이 만들어 낸 자아

이 두 자아를 대비 시키는 것이다.

두 하나님의 대비처럼 말이다. 임마누엘

이제 신약에서는 그 구약의 애굽공간 애굽시간 vs 광야심판공간 광야심판시간의 수평적 확대가

지금 우리가 내 딛고 있는 땅 공간이요 이 대립의 흐름을 타고 있는 시간이다.

결국 신약 시대에는 어디든 어떤 시간이든 그 대립의 충돌 전쟁 상황인 것이다.
응축점의 완료 이다.

요나는 몰랐다. 자신이 애착을 가진 이스라엘이 없다 라는 것을
허구 하는 것을 몰랐다.

도리어 자신이 전혀 투자 한 적 없고 애정을 쏟지도 않은
저 니느웨 개같은 지옥백성 이방나라를
여호와께서 지금 이 순간 이스라엘로 삼으셨다는 것은
곧 요나가 애착을 부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적으로 서 있다는 것을 말이다.

요나는 정말 제대로 알려면
이스라엘을 빨리 퍼뜩 망해 뿌라고 사흘길을 돌아서 멸망 심판을 선포할 것을
하루만에 바벨탑성을 돌고 돌아서 심판을 퍼뜩 증거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요나는 반대로 했다. 뭘해도 반대로 할테니 나야 말로 방해꾼이니 방해꾼 되기 싫타 라고 내가 있으나 마나 차라리 자살 할란다 라는 식이다. 과연 양심적인 생각일까? 이것이 마귀가 심은 허구다. 베드로도 그랬다. 그래서 베드로를 끄집어 내는 방식이 더 원수로 만들어 버린다. 그리고 묻는다.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자기 쪽에서 나올 것이 없도록 해서 말이다.

여호와께서 애착을 보이신 니느웨를 요나를 심판 했 뿌 라 라고 돌고 돌아서 당연한 멸망을 우기고 있고

정작 여호와께서 무너뜨릴 이스라엘을 요나는 애착을 보이고 있다.

이스라엘 이라는 의미 조차도 몰랐던 요나이기에
이스라엘의 의미를 새롭게 보여준다.
혈통의 이스라엘이 아니라 언약으로써 긍휼로써 심판으로써 세워진 새이스라엘의 의미를 말이다.

이것은 바리새인 앞에서 일부러 세리 창기 문둥병자 강도 죄인을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행하심과 같다.

항상 인간의 행함은 예수님의 행함과 반대되는 대조성을 띤다.

차이성을 일부러 주님쪽에서 간격을 벌리시는 것이다.

항상 인간은 혈통적이다. 우상적이다. 과거를 중심으로 한 해석이다. 그래서 유지 보수를 일관하는 이마표 사고방식이다. 즉 미래에 덮칠 심판을 의식하면서 나올 수밖에 없는 사고방식이다. 마치 약속을 아브라함에게 하니 그 약속을 자기 과거의 경험으로 채우는 방식으로 그 열매는 겨우 겨우 이스마엘 밖에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이 가인의 제사 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더 나은 제사가 덮쳤다. 더 낫다 라는 미래성은 그렇지 않은 더 낫지 못하는 그 과거의 것으로 응축된 것을 가지고 대조성으로 나타난다.

너무 너무나 더 낫기 때문에 그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미흡한 시험들 것과 완료된 미쁘신 것 과의 차이다.

그 둘의 충돌로써 말이다.


결국 그 심판은 옳았습니다 라는 넉넉한 승리로만 일관 할 수 밖에 없도록 말이다.

그것은 미래가 덮쳤을 때 만이다.

그 미래란 나 라는 허구 대신 장대 높이 달리신 인자를 봄으로써 나온 유일한 운명이다.

인자가 이미 완료시킨 우리의 운명이 옳았습니다 라는 것만 보는 자만이

그 심판이 옳았음을 보게 된다.

그러나 그 심판은 우리를 살리기 위한
마귀가 형성한 환경에서 빼내시기 위한

마귀만을 상대로한 약속임을 우리는 모르기에
그저 동행이 아닌

자기 힘으로 지혜로 풀려고 하는 대상으로 본 언약이기에
그저 신학 지식으로 습득할려고 이해할려고 노력하니

마귀가 없기에
자신의 숙제 여부로 판단하는 것이다.

곧 예수님도 그저 구원자로 대상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구원자 입장인 예수님은 우리는 하나로 본다.

곧 하나 란

심판의 자리에 놓는 것이다.

원수의 자리에 놓는다.

그 동행이 바로 말도 안되는 어리석음 이요
말도 안되는 거리끼는 거치는 반석 걸림돌인

바로 사랑이다.

십자가의 사랑이다.

십자가 사랑 만이 미래 완료로 확정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것은 확정 된 것이 없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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