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가운 원수, 반가운 살인자 ( 성령과 이웃 설정 )

2010년 7월 3일 토요일 오전 11:30:34 김대식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웃은 인간들이 그동안 사귀어 오던 이웃과 사뭇 낯설다.
어느 정도로 낯선고 하니 이웃의 정반대 개념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웃이라는 따뜻하고 온정으로 다가오는 그 느낌에 찬물을 끼엇는
그야말로 거리끼는 것이다.

기도도 거리낌으로
찬양도 걸림돌로
예배도 찢겨짐으로

결국 이웃도 그런 낯설음으로

그렇기에 도저히 우리가 상상도 못하는 이웃이다.
이런 이웃이 생길까봐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 정도이다.

아무도 이웃으로 삼고 심지 않은 이웃

얼마전에 티비에서 크리스마스 특집으로 이웃의 의미를 다루는 다큐 형식의 프로를 봤다.

아마 천주교에서 측에 다니는 사람인데 자신의 가족을 연쇄살인을 한 살인마에 대한 용서를 다룬 다큐형식의 프로였다.

한 중년 가장이 어미니(할머니)와 아내 그리고 대학생 자녀와 고등학생
단란하게 꿋꿋히 가정을 지켜왔고 행복하게 남부럽지 않게 잘 이끌어 왔고
그 속에서 자유롭게 마음껏 행복을 만끽하며 잘 자란 자녀와 그리고 아내
부모 공경 속에서 누가봐도 부럽고 누가봐도 아무문제 없는 가정에

한 검은 그림자가 찾아와서 아무이유없이
돈 뺏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그저 지나가다가 온 가족을 갈기 갈기 찢어버렸다.

그 처참한 관경을 본 한 가정의 가장

모든 책임을 지고 지금껏 이끌어 왔건만
한 순간에 다 무너지고 말았다.

다큐는 바로 그런 자신의 가족을 모두 살인마 에게 빼앗기고
졸지에 한 순간에 망해버린 모든 것을 잃어버린 한 남자가
그 살인마를 용서해 가는 과정을 다룬 것이였다.

물론 천주교에서 이런 한 가정과 한 남자를 이용해서
자신들의 정의인 사형제도를 없애는 정당성을 정치적으로 깔고서
그 내용을 그럴싸 하게 만든 것이다.

한꺼플 벗겨보면 그야말로 악마짓(광명한 천사)이 아닐수 없다.

이웃 사랑을 그런 식으로 증거하는 것이다. 오늘날 개신교의 개혁주의나 성화론도 마찬가지이다.

복수와 죽이고픈 그 원한을 어떻게 용서로 바뀌어 가는지
너무 너무 어려운 그 용서를 일년 이년 지나면서
그 불가능해 보였던 그 용서가 차츰 사랑으로, 용서로 바뀌어 가는 내용을 다루었다.

자신과 똑같이 당한 사람들의 사례를 끌어모아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편협한 마음을 누그러 뜨려서
차츰 차츰
그렇게 죽도록 미워했던 지독한 미움이
점 점 점 너무 너무 불쌍하기 짝이 없는 긍휼로 바뀌어 가는
그 과정을 다루었다.

지금 방금 검색을 해 보니 영화로도 나왔다는 생각이 들어 찾아봤다.
sbs를 영화정보란에 쳐 보니 처음 화면에 바로 뜬다.

용서, 그 먼 길 끝에 당신이 있습니까 (2007)
요약정보 다큐멘터리 | 한국 | 100 분 | 개봉 2008-11-06 | 
감독 조욱희 출연 김혜수 (내레이션 역) sbs 스페셜

반응이 좋으면 영화관에 상영하기도 한다. 아마존의 눈물도 그런식으로 영화관에 상영되었다.

아마존의 눈물에서도 마치 이웃으로 접근하는 시선이였지만 정작 그 순수하고 어릴적의 천진난만한 그 시절로 돌아가보라 라고 하면 현실이라는 벽 앞에서 좌절되고 만다.

그래서 그 죄책감과 의무감을 떨쳐버리기 위해서
인간은 자기 신체에 편리한 이웃을 설정해 버린다.

그것이 자신의 주변에 자기가 설정한 이웃이다.
그 범주에서 벗어나면 불편스럽기 짝이 없는 이웃이 되고 만다.

차라리 불편합니다. 거북스럽습니다 라고 솔직하게 인정하면 된다.
나는 저런 놈은 때려죽어도 이웃 못 삼겠습니다 라고 말이다.

결국 이웃이란 자신이 투자한 자신의 투영물이다.
그래서 자기 몸 같이 사랑할 수가 있다.

자신이 투여한 것이 없는데 우찌 이웃이라고 할 수 있는가?

여기에 예수님 또한 자신의 것을 심어서 이웃 삼아버리신다.
곧 자신의 피로 이룬 십자가 이다.

이 십자가를 심어서 이웃 삼게 되니
그 이웃을 기준으로 해서 악함이 발생이 된다.

마치 아벨을 이웃 삼으니 아벨을 기준으로 해서 살인이 발생된 것이다.
최초의 살인이다.

결국 살인이란 그리고 이웃용서인 사랑이란
십자가를 기준으로 해서 봐야 한다.

천주교의 사랑실천행위 행함에서가 아니다.
사형제도 폐지하자 라는 정의가 아니다.
그런 것은 이미 바리새인에게서 나왔다.
악마의 자식들에게서 그런 기준은 사랑은커녕 용서는커녕
도리어 하나님을 죽이는 살인으로 결론이 났다.

자신들의 정의를 기준으로 삼지 않고
엉뚱한 십자가를 기준으로 삼아버리는 그 기준을 용납할 수가 없어서
비로소 진짜 살인이 벌어진 것이다.

자신이 살인마를 용서한 그 사랑이라는 기준에 그 이웃용서라는 기준에
십자가 라는 생뚱맞은 기준이 새롭게 설정이 되니

두 기준이 양립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를 미워하거나 저를 미워하거나
저를 사랑하거나 이를 사랑하거나

둘 중에 하나를 해야 한다.

(마 6:24, 개역)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 6:25, 개역)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마 6:26, 개역)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마 6:27, 개역)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마 6:28, 개역)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마 6:29, 개역)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마 6:30, 개역)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마 6:31, 개역)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마 6:32, 개역)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마 6:33, 개역)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4, 개역)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예수님은 기존의 기도를 폐기처분하시면서
껄끄러운 기도에 대해서 알려 주신다.

처음 듣는 소리다.

기도가 저렇다니?
정말로 정말로 기도는 거리끼는 것이다.

여기에 엎친데 덮친격으로
주인에 대해서 알려주신다.

기도에 대해서 알려 줬으면 그 기도를 받는 분에 대해서 알려주시는 것이 당연하다.

제사를 받는 분이다.

그 주인이, 세상에 세상에나 두 주인이 있단다.

이 무슨 생뚱맞은 소리인가 두 주인이 있다니?

거봐 거봐 너도 두 주인을 용납하지 못하잖아
그럼 오죽 나 여호와는 그렇겠는가?

우리의 악마성 우리의 선악성 우리의 죄악성
우리의 언어로 사기치는 그 속임수 언어(처세)로

알려주신다.

마치 죄인의 몸으로 오셔서 알려주시듯이

바로 그런 것들을 찢는 식이다.

그래서 항상 모순적으로 들려온다.

그 모순이 소위 일관성이 있다는 그 일관성을 보기좋게 위선적이고 모순적이고 이중적임을
껍질을 확 벗겨버리듯이 홀라당 빨가벗겨버리는 식이다.

그래서 우리 속으로 우리의 거짓 세계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자 죄인의 몸으로 죄인 속으로 들어오신
하늘 영광 다 버리고 들어오신

그 예수님이 직접 설정하시는

이웃이란
과연 누구인가?

먼저 구약을 보자
참재미있게도 그 이웃을 볼려면 우리는 믿음의 시선으로 봐야 한다.
믿음 하면 아브라함이 생각난다.

아브라함 하면 자신이 해보고자 하는 자기에게서 나올수 있는 모든 것이 나와서
믿음을 달성할려고 할 때
도리어 그 믿음은 아브라함에게서 나온 것에 의해 희생제물이 되어야 하는
핍박당하는 모습이였다.

이스마엘은 이삭을 괴롭힌다.

(창 16:16, 개역)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 세이었더라』

(창 17:25, 개역) 『그 아들 이스마엘이 그 양피를 벤 때는 십삼 세이었더라』
(창 17:26, 개역) 『당일에 아브라함과 그 아들 이스마엘이 할례를 받았고』

(창 21:9, 개역)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소생이 이삭을 희롱하는지라』

왜 이런 구절을 갑자기 찾게 되었고 언급을 하는고하니
이스마엘이 창세기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계속 계속 집요하게 반복한다. 역대기에 까지 그 족보는 언급이 된다.
신약에서는 아주 중요한 의미로 갈라디아서에 기록이 된다.

즉 인간을 위한 족보는 그 어디에도 없다.
오로지 예수님 자신의 족보를 돋보이게 할려고 동원이 된
반드시 대조적으로 차이를 드러내는 족보로써 나타나야만 하는 것이다.

누가 누구를 괴롭힌다 라는 인간들 세계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 속에
왜 생뚱맞게도 하나님의 개입이 생긴다는 것인가?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유발케 한 충돌이기 때문이다.

분명 이스마엘은 할례 받았다.
이삭도 할례 받은 자 이다.

주님은 이 두 할례자에게서 두 사람의 의미 보다
자신이 의미를 부여한 할례의 의미에 여호와 하나님은 책임을 지는 식이다 라는 것이다.

결국 할례 자체가 살인을 유발했다 라고 오해할 수 있는 여지가 된다.
반드시 이 오해를 해야만 할 것이다.

마치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 여호와 하나님은 아벨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벨에게서 나온 피와 기름에 의미를 부여하셨다.

(창 4:4, 개역)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또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 라는 의미를 완성하고자
십자가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고
더군다나 십자가에 반대된 미흡하기 짝이 없는 헌 옷 헌 술 헌 부대로만 가득채운
그림자의 영광으로만 가득채우고 그것에 목숨까지 걸어서 모든 것을 올인해 버린자들에게
그 생뚱맞은 것은 그야말로 돌삐맞아 죽어도 마땅한 모습이 아니고서는 안되는 식이였다.

13세의 할례자와 난지 8일만에 할례 받은자와
두 할례자의 충돌에
하나님은 그 사건충돌에 개입하신다.

그 충돌의 틈사이에서 새로운 잉여를 끄집어 내신다. 그것이 하늘의 일이다.
그 속에서 그 홈페인 그 틈사이에서
13세 할례자와 당일에 할례 받은 아브라함이
난지 8일만에 할례받은 이삭에게 옮겨 갈아타는 사건이 발생이 된다.

이 쪽 할례에서 저 쪽 할례로 갈아타면 뭐가 다른가?
한 쪽은 미흡한 미완료로 남게 되고
다른 한쪽은 완료인 미래의 예수님의 제사를 곧 십자가를 지금 이 순간에 자기의 기준으로 되었다고 덮침을 당하게 된다.

이삭의 희생제물됨은 바로 그 미래의 것을 보여준 것이다.

더 나은 할례였다. 더 나은 제사는 곧 순종인데 우리의 순종이 아니라 예수님의 순종
곧 십자가에서 원수들에게 내어주신 것이다.
반드시 원수들에게 이다.

여기서 이웃이라는 개념이 십자가에서 밝혀진다.

모세를 통해서 십계명이 주어지고
그 법은 철저하게 이웃환대법으로 약자보호법으로 규정이 된다.

모세는 자신이 십계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를 하면서
이스라엘이 모두다 선지자 되기를 바랬다.
그 소망 조차도 여호와의 신이 임해서 가지게 된 소망이다.

한마디로 그 소망은 거치는 것이다.
인간의 소원풀이와 다르다.

(민 11:25, 개역)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그에게 임한 신을 칠십 장로에게도 임하게 하시니 신이 임하신 때에 그들이 예언을 하다가 다시는 아니하였더라』
(민 11:26, 개역) 『그 녹명된 자 중 엘닷이라 하는 자와 메닷이라 하는 자 두 사람이 진에 머물고 회막에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나 그들에게도 신이 임하였으므로 진에서 예언한지라』
(민 11:27, 개역) 『한 소년이 달려와서 모세에게 고하여 가로되 엘닷과 메닷이 진 중에서 예언하더이다 하매』
(민 11:28, 개역) 『택한 자 중 한 사람 곧 모세를 섬기는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말하여 가로되 내 주 모세여 금하소서』
(민 11:29, 개역)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위하여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 신을 그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여기서 참 재미있는 것은

모세가 모두다 다 선지자 되게 해 달라는 내용에서 벌어진 사건배경을 보면 그야말로 낯설다.

(민 1:52, 개역) 『장막을 운반할 때에는 레위인이 그것을 걷고 장막을 세울 때에는 레위인이 그것을 세울 것이요 외인이 가까이 오면 죽일지며』
(민 3:12, 개역)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택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첫 태에 처음 난 자를 대신케 하였은즉 레위인은 내 것이라』

(민 18:30, 개역) 『이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그 중에서 아름다운 것을 취하여 드리고 남은 것은 너희 레위인에게는 타작 마당의 소출과 포도즙 틀의 소출 같이 되리니』
(신 12:19, 개역) 『너는 삼가서 네 땅에 거하는 동안에 레위인을 저버리지 말지니라』
(신 14:27, 개역) 『네 성읍에 거하는 레위인은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자니 또한 저버리지 말지니라』
(신 14:29, 개역)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축복을 주시리라』
(신 16:11, 개역)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

(민 25:7, 개역)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보고 회중의 가운데서 일어나 손에 창을 들고』
(민 25:8, 개역) 『그 이스라엘 남자를 따라 그의 막에 들어가서 이스라엘 남자와 그 여인의 배를 꿰뚫어서 두 사람을 죽이니 염병이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그쳤더라』
(민 25:9, 개역) 『그 염병으로 죽은 자가 이만 사천 명이었더라』
(민 25:10, 개역)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민 25:11, 개역)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의 노를 돌이켜서 나의 질투심으로 그들을 진멸하지 않게 하였도다』
(민 25:12, 개역) 『그러므로 말하라 내가 그에게 나의 평화의 언약을 주리니』
(민 25:13, 개역) 『그와 그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이라 그가 그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니라』

왜 그런고 하니 또 왜 이런 구절을 찾았는고 하니
먼저 민수기 라고 하면 백성의 숫자를 계산했다는 뜻이다.

이 말은 인간이 이런 식으로 숫자를 계산하는 인간 숫자 계산방식을 유발케 하면서
동시에 그 숫자계산법을 박살내겠다는 취지이다.

쉬운 예로 인간이 거룩이라는 개념을 아무리 성경적으로 성경법을 배워서 계산을 해도 그 계산한 그 계산법의 방식을 비켜가는 식으로 거룩을 양산해 내겠다는 식이다.

그 대표성이 바로 레위인이다.

레위인은 거룩은 다루는 자들이다. 그런데 그 거룩은 곧 죽음을 다루는 식이다.
죽음은 아무나 다루는 것이 아니다. 죄는 아무나 다루는 식이 아니다.

사회에서도 죄를 다루는 것은 곧 법을 다루는 자들이고
범죄를 다루는 것은 곧 질서를 다루는 자들인 경찰이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레위인은 하나님의 죽음 곧 희생을 다루는 자들이다.
그래서 거룩을 다루는 자들이다.

사실은 미흡한 인간에게 다루어질 하나님의 거룩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그림자 영광도 영광스러울 정도면
그만큼 낮아지시고 낮아지시고 참으시고 참았다는 것이다.

자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 생략해서

바로 이 레위인이 참아이러니 하게도 약자보호법에 의한 약자요
이웃환대법에 의한 이웃과 동일하다고 레위인을 첨가 시킨다.

우리가 흔히 보는 약자 이웃이라는 개념이 아니다.
단순히 죄와 죽음을 다루는 거룩으로 분류 되었다고 해서
거룩한 자나 또는 이웃이나 약자 라는 뜻이 아니다.

과연 레위인 비느하스처럼 나를 창으로 배를 꿰뚫어버리는 하나님의 질투를 퍼붓는 자가
이웃으로 반갑게 여겨질까?

(민 25:13, 개역) 『그와 그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이라 그가 그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니라』

그런 질투로 속죄 구원을 사람들은 원할까? 쪽팔릴텐데 말이다. 부끄러운 구원이라고 또 언어사기를 칠텐데?

결국 반대로 내용물에 의한 것이다.

바로 죽음이요 죄요 심판이요 저주 때문에 이웃이요 약자요 거룩한 레위인으로 분류되는 것이다.

즉 사람이 아닌 자리 이다.
그 위치이다.

그 위치 자리란 구조에서 결정난 바 이다 라는 뜻이다.

자 지금까지 본론을 말하고자 너무 길게 서론을 언급했는데

이웃이란 바로 이 죽음의 자리 원수의 자리 죄의 자리 심판의 자리로써 결정난다는 것을 말하고파서 이렇게 길게 설명했다.

왜 그런가?

심판의 자리에서 성령의 소욕이 피어나는 것이다.
원수의 자리에서 사랑의 욕망이 피어나는 것이다.
저주의 자리에서 거룩의 질투가 피어나는 것이다.
죽음의 자리에서 생명의 투기가 피어나는 것이다.

누구의? 예수님 이다.

그래서 십자가란 뛰어드시는 자리 이다.

그 상대적인 자리는 심판의 자리 원수의 자리 저주의 자리 죽음의 자리에 놓이게 되는 이웃이다.

이 이웃은 바로 심판 원수 저주 죽음을 등에 엎고 아이러니 하게도 그 반대의 미래완료를 외친다. 이것을 심판의 자리에서 심판의 영을 받아 십자가를 증거하는 자 라고 한다.

이 자를 이웃이라고 한다.

즉 이웃이란 구약에서 약자다
이스라엘 전체가 약자다.

그런데 위에서 언급했듯이
그 약자 사이에서 충돌이 발생한다.

이 충돌은 70인을 세우는데서 더더욱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더더욱 확대 된다.

두 약자의 충돌로써 두 주인이 정체가 드러난다.

두 이웃의 충돌로써 두 사랑의 정체가 드러난다.

이것이 이스라엘 전체 역사로 확대된다.

확대 되면 될수록 주의 사랑은 깊어진다.

한나가 기도를 한다. 이스라엘 속에서 약자의 충돌이 발생이 되었는데
과연 누가 진짜 약자 인가 라는 것이다.

아이를 못 낳은 죽은태에서 태어난 자가 이스라엘 그 자체이다.
없는데서 생겨난 그야말로 이스라엘 자체가 약자요 이웃이다.
그런 약자에게 부~~불 쌓~쌍히 여긴바 된 자들이 이스라엘이다.

그런데 그저 다른 나라 일방인들처럼
아이를 낳았다는 것에서 그저 조금 자랑한 것 뿐이고 유세부린 것 뿐이다.
물론 막상 당하는 상처입는자는 전혀 그 상처가 아무렇지 않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항상 여기서 여호와의 개입이 그 상처를 쉽게 쉽게 아물어 버리도록 사람들끼리의 봉합을 허용치 않고

도리어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찢고 찢어서 그 상처를 다시는 봉합치 못하도록 확 벌려버린다는 사실이다.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의 충돌은 여호와 보시기에는 가짜와 진짜의 충돌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확 더 찢어버린다.

아이가 없던 처녀때의 여인이 이제는 한 남자의 아내가 되다 보니
곧 한 남자의 불쌍히 여김으로써 이웃이 되었는데
이 두 이웃 속에 한 이웃은 가짜 라는 것이다.

사랑은 한 쪽의 사랑이 진짜 사랑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가짜 신부가 반드시 그 가짜 신부 노릇을 톡톡히 해 주어야만 한다.

그래서 브닌나가 아이를 낳고 그 열매를 통해서 한나를 괴롭히게 한다.

충돌이요 사건이다. 여호와의 개입이 시작 된다.

약자와 약자의 충돌로써 누가 참 선한 사마리아의 이웃인가 라는 점을 드러낸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인가?
(그래서 반드시 이웃 개념을 논할때는 레위인이 동원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레위인도 그냥 강도만난자를 스쳐 지나갔고 제사장도 스쳐 지나갔다. 레위인 본인이 강도 만난 약자 임을 거부한 샘이다.)

(눅 10:29, 개역)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눅 10:30,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눅 10:31, 개역)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눅 10:32, 개역)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눅 10:33, 개역)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참 아이러니 하게도 누가 이웃입니까 라고 묻는 자의 의도가 바로 자기를 옳게 보일려는 그것이 강도당했다는 의미이다. 자아가 생긴 것이 아니라 자아라는 강도가 자신에게 주인의 자리를 차지해 버리니 저런 고상한 질문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천주교처럼 사형제도폐기를 주장할 것이 아니라 차라리 비느하스처럼 여호와의 질투로 화친의 언약을 세울 것이 낫지 아니한가? 성령을 거꾸로 해석 했고, 이웃을 반대로 해석 했기 때문이다.)

항상 이웃을 드러낸다는 것은 항상 그 이웃을 사랑한 사랑을 드러내는 것과 같다.

그래서 이스라엘 내부에서는 항상 이웃이 누구인가를 드러내는 갈등 때문에
사랑을 드러내기 위해서
늘 쪼개어 지고 쪼개어 지는 것이다.

그 쪼개어진 틈 사이에서 잉여가 태어나는 것이다.

십자가로써

(약 1:15, 개역)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갈 4:19, 개역)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갈 4:20, 개역)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음성을 변하려 함은 너희를 대하여 의심이 있음이라』
(갈 4:21, 개역)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갈 4:22, 개역)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갈 4:23, 개역)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갈 4:24, 개역)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갈 4:25, 개역)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 노릇 하고』
(갈 4:26, 개역)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갈 4:27, 개역)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갈 4:28, 개역)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갈 4:29, 개역)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죄의 잉태의 확장에

반대 되는 상대적인 십자가의 잉태 해산의 확대를 보여준다.

이웃은 곧 누가 낳은 자식이냐 라는 것이다.

이웃은 곧 십자가가 낳은 자식인가? 아니면 죄가 낳은 자식인가 라는 열매성 이다.

전혀 이웃 스럽지 않은 자가 이웃이 되었고
진짜 누가 봐도 이웃일꺼야 라는 자들이 이빨을 갈며 슬피 우는 지옥의 자식들이다.

과연 그 원수의 자리인 좁은 길에 누가 놓이게 되는가?

과연 누가 처음부터 남은자 무릇 있는것에 넉넉하게 받는자 이고?
누가 처음부터 쫏겨나는 있는 것도 빼앗기는 자인가?

사랑과 용서는 오늘도 이웃을 찾는다.
강도 만난 자를 찾는다.

반가운 원수

사랑이 만들어 낸 발가벗겨진 심판의 자리에 놓여진 자를 찾는다.

(마 13:12, 개역)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마 25:29, 개역)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막 4:25, 개역)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눅 8:18, 개역)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하시니라』
(눅 19:26, 개역) 『주인이 가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참고로 하나 첨부해서

바리새인은 이웃사랑 실천의 달인들이다. 졸지에 이웃사랑 실현자가 둘이 생기게 되었다.
이웃사랑을 실천할려다가 예수님(사랑)을 만나게 되니 졸지에 [대상]으로 삼아 버렸고 졸지에 이웃사랑 실천의 경쟁자가 되어버렸다. 대상 삼은자 니고데모는 그저 저런식으로 따라하고 본받으면 나도 저 만큼 할 수 있겠구나 라는 가능성을 예수를 통해서 봤다는 식이다. 그래서 항상 한 수 배울려는 자세였다(제자도 여기에 해당되고 부자청년도 이러했다). 또 경쟁자로 삼은 자는 늘 죽일려고 넘어뜨릴 구색과 법적인 알리바이를 찾고자 늘 시험했다.

그러나 이웃 사랑 원수를 용서하는 사랑만나 하나가 된 동행자 함께한자 연합된 세례
성령세례받게 된자는

자신이 바로 사랑이 필요한 사랑 앞에 모든 것을 빼앗기는 이웃이고
용서 앞에 원수로 드러난 원수임을 아는 자 이다.
비로소 죄인 인줄 환자 인줄 의사를 보고 자기것을 포기해 버린다. 삭제 당한다. 심판당한다. 이것이 바로 참이웃을 만난 약자이다. 이웃이다.

대상으로 본게 아니라 하나로 봤기 때문이다.
죄인에게 뛰어든 하나 동행 함께함 임마누엘을 본 것이다.

그러나 성화론자는 그저 이웃은 대상 일 뿐이다. 따라하고 조금더 부족한 부분은 모범자를 통해서 따라하면 이웃이 많이 생긴다고 본 것이다. 정작 예수님의 이웃은 되지 못한다.
강도 만난적이 없기에 선한 사마리아 사람 곧 이웃도 못 만난 자 이기 때문이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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