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왜 법을 사랑하나?

2010년 7월 10일 토요일 오전 10:48:12 김대식


목요일 밤늦게 사도행전 내용을 글로 올렸습니다. 저는 나름대로 어떤 한 영화를 끝까지 보고 사도행전 공부 내용에 넣어야 겠다 싶어서 글을 써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막상 쓰다 보니 영화 내용을 집어 넣겠다 라는 생각은 사라지고 성경본문의 내용에 심취되어 또 글이 또 너무 더 길어질 것 같고 구지 그 내용을 안 집어 넣어도 되겠구나 싶어서 넣지 않았습니다.

영화관에서 보는 영화는 좀 마음이 편한 것이 집중할수 있는 몰입도가 높고 또 잡생각을 하지 않아서 영화 보기가 편합니다만
집에서 보는 것은 일단 영화 자체에 몰입 보다 다른 생각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집중이 떨어지고 별에 별 일들이 내 몸 신체 중심으로 벌어지다 보니 더 편한 쪽으로 가면 결국 영화 보는게 쉽지 않습니다.

더 군다나 2시간 짜리 영화면 하루 종일 보게 됩니다. 중간에 보다 전화 받다 보면 또 다시 반복해서 이해할려다 보니 4시간 5시간 족히 넘어갑니다.

제가 목요일날 본 영화 제목은 알파치노가 나온 영화
유 돈트 노 잭 (You Don't Know Jack, 2009)
영화라기 보다 티비 드라마 인데
파일을 일찍이 받아 놓았지만 자막이 나오지 않아 한 참 후에 보게 된 영화입니다. 아니 드라마입니다.
다행히 단편이라 시리즈를 싫어하는 나로써는 눈여겨 본 겁니다.

근데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 내용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안락사를 다룬 드라마인데
미국은 유럽처럼 늦게 도입이 되다보니 그 중간 과도기에
안락사를 집요하게 실행하고자 하는 한 의사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아직까지 우리나라에는 이 안락사 문제가 심각하게 다루어지지 않았지만
아마 멀지 않아 그 물결의 흐름은 닥쳐 올 것입니다.

그래서 상당히 이 드라마가 몰입도가 있어서(마치 히틀러 드라마처럼)
그 내용이 안락사 라서 낯선것에 대한 자극이 되다 보니 재미있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래 저래 겨우 겨우 한 편의 드라마를 뚝뚝 끊기는 맛으로 보긴 봤습니다.

그런데 저도 놀랬던 것이
막상 안락사 에 대해서 생각으로 나올 것 같았는데 아니였습니다.
(안락사 라는 심도있는 무게는 단지 미끼였습니다.)

법에 대한 이야기로 저는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저의 사적인 개인적인 견해입니다.

분명 안락사에 대한 이야기 인데
결론 부분에서는 완전 딴판입니다.
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왜 저 의사는 끝까지 법적인 투쟁을 할까?
(법이 걸림돌이자 도리어 그 법이 유일한 상대방을 공격하는 무기인 셈입니다.)

왜 인간은 법을 사랑하는가?
아니 법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되는가?

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공부 내용을 글쓰다 보니 이것 또한 법과의 의미와 상당히 깊은 연관성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또는 바울을 왜 꼭 법정에 세우는가? 그것은 보편적 집단 소욕성을 드러내기 위함 입니다.)

그 드라마는 왜 인간은 법을 찾을까 라는 의문을 저에게 던져 주었습니다.

그것은 상대방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또 상대방이 법을 쥐었습니다. 법 위 보다 더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치 선악과를 따먹으면 뱀은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했습니다. 왜 하필이면 하나님 일까요? 하나님 보다 더 위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지 혼자 못합니다. 그런데 타인이 생기면 졸지에 사랑이든 미움이든 발생합니다.

사람이 자신의 신체에 있는 성기가 아무리 자기 몸에 붙어 있고 자신의 신체에 있어도
그것은 아무리 봐도 자기를 위한 것으로써 있다고 볼 수 없습니다.

결국 타인이 와야 그 신체는 작동이 됩니다. 그렇다면 그 신체는 타인이 있어야 의미가 있고 그 타인을 거쳐서 자신에게 후차적으로 의미를 부여합니다.

아무리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인간도 타인에게 어떻게 행동을 했다는 흔적 때문에 생기는 판단이 이기적이다 라는 평가를 내릴수가 있는 겁니다.

결국 인간의 신체는 타 외부에 의해 의미가 부여되는 겁니다.
(결국 인간이 법을 잡고 싶어서가 아니라 미래에 결정된 진노의 그릇이 덮쳐짐으로써 결정나듯
긍휼의 그릇 또한 미래완료가 덮쳐서이다. 진노의 그릇은 자신의 신체 외에는 다른 것을 붙잡을 수도 붙잡힘도 없는 그것이 전부인 법이다. 자신의 신체만이 유일한 법)

저는 이 드라마를 통해서 왜 저렇게 법에 집착할까 라는 것을 통해서
법이 아니고서는 타인에 대한 자신의 행동의 정당성을 추구할 수가 없다 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을 의도적으로 법정에 세우시는 하나님과
그리고 똑같이 바울을 이용해서 정치적 자신의 인기와 대중을 다스리고자 하는 정치가들의 모습이 똑같이 작용을 하면서 그 충돌로 인해 그 차이는 똑같았음이 아닌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타나는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바울을 끝까지 법정에 세우실려는

마치 예수님을 빌라도 법정에 집요하게 세우시는 그 의도가 뭘까 하는 생각을
이 드라마를 통해서 힌트 삼아서 사도행전을 보게 된 겁니다.

그러나 막상 글 속에 집어 넣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제 밤에 하녀 라는 영화를 보는데
이것 또한 파일을 보다가 중간에 엉터리 파일이라서 다시 다운 받는다고 이틀 걸린후에 제대로 된 파일을 다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재미없는 영화이긴 한데 저는 다르게 보였습니다.
물론 파일이 중간에 끊기다 보니 그 긴 영화가 분명 지겹게 다가올 것인데
막상 막판에는 빠르게 사건이 진행되다가 결국 생뚱맞은 자살로써 여인의 한을 푸는 그런식의 영화라 별거 없었다고 생각이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권력 문제로 비쳐졌습니다. 또 과거 한국 정치권을 이제와서 비판하고자 하는 그런 모습을 보게 되었지만 정작 감독의 의도는 그 과거의 권력이 지금도 여전히 답습이 되고 있고 현 정권을 비판하는 그런 의도도 보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과거의 정권을 비판하는 그 세력이 지금 그 권력을 담습하기에 이것이야 말로 아이러니 아닌가 하는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 보고자 하는 그런 내용이였습니다.
(갈라디아서의 두 여자 두 언약이 생각 났습니다. 한 남자로부터의 사랑을 얻고자 자신이 낳은 자식이 후사요 부활이요 약속이다 라고 싸우는 두 여자의 전쟁. 이미 결정난 후사를 끝까지 갈대까지 가보자 라고 싸우는 전쟁)

자 저는 이 두 영화를 통해서 왜 인간은 법 곧 권력 곧 힘을 사랑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영화 속에서도 나왔지만

상대방이 법으로 권력으로 힘으로 눌러 버리니 졸지에 그 피해자도 결국은 법을 찾아서 자신의 정당성으로 법으로 투쟁 권력으로 투쟁 힘으로 투쟁한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안락사 문제가 아니였습니다.
하녀에서는 아이를 잃은 여인의 슬픔, 억울한 여인의 한풀이가 문제가 아니였습니다.

저는, 이것은 법 힘 권력의 문제였다 라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여전히 인간은 징계 보다는
사생아처럼
우리아이가 달라졌어요처럼

사랑도 아이도 모조리 법으로 해석해서
심지어 교회 하나님 예수님 십자가 믿음 신앙 성령 신학 교리 모든 것을 권력으로 해석해서
그 법이 자신을 방어해주는 힘으로써 자기 주변에 수호신으로 남아주길 바라고자 끌어 모으고 모으고 좀더 남 보다 더 많이 가질려고 한다는 점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백치미처럼 세상물정 모르고 세상의 권력 욕심 아무리 없어도 막상 외부에서 권력이 침투해서 들어오게 되면 늦게 배운 도둑질이 더 무섭다고

자신도 그 가해자 보다 더 많이 권력의 힘을 보여주고자
그래서 복수든 그 가해자를 심판하는 피해자의 정당성이든 뭐든 다 이용해서
남을 넘어뜨리고자 하는
남이 법을 쥐었기에
그 법도 자신의 편이지 너의 편이 아니다 라는 식으로 복수가 가득하다 라는 것을

법을 사랑하고 집착하는 인간의 속에 있는 양쪽의 괴물을 보게 되었습니다.


자 그렇다면 예수님을 한 번 봅시다. 과연 복수를 할까요?
바울을 봅시다. 지금 복수에 신경을 씁니까?

정말 복수해야 마땅한 사람은 예수님이요 바울입니다. 왜죠? 신체를 중심으로 하면
그 신체에 피해를 가하고 이용한 사람이 괴롭혔으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하면 같은 놈입니다. 가해자가 피해자를 양산해서 그 피해자가 법이든 뭐든 복수를 해 버리면 피해자는 없고 모조리 가해자만 돌고 돌고 도는
어디에도 피해자 없는 곧 이웃이 없는 식이 됩니다. 타인이란 미끼로써 반드시 이웃으로 타인으로 남아야 합니다.

그러나 타인이란 없습니다 모조리 가해자인 자기자신 뿐입니다.

여기에 예수님은 자신이 피해 당한 그 몸을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그 신체를 없애 버렸습니다.

그러니 법적인 정당성은 없습니다.

그럼 뭐 만 남았는가?

아버지가 아들을 징계하는 사랑만 남은 겁니다.


자 이렇게 되니 사람들이 머리를 한 바퀴 더 돌립니다.
아 그럼 마음대로 살아도 되겠구나 어차피 모든게 다 죄 이니까?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해 질테니 은혜 더하고자 죄를 더 짖자?

그게 말이 됩니까? 그 발상 자체도 그 신체에서 나오는 육의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육의 생각에서 못 벗어나면서 육의 생각 어차피 못 벗어나니 마음대로 죄 짖자?

물론 여기서 육의 생각 뿐이라면 그렇게 해도 됩니다.
역시 육 외에는 없기에 그게 맞습니다.

그러나 육 외에 다른 몸이 있어 버리면
그 다른 몸에 의해서 육은 상대적인 위치에 서게 됩니다.

그것은 더 나은 제사와 그렇게 못한 비교 대상이 된 제사 라는 겁니다.

순종이 제사 보다 낫다 라고 했을때에
겨우 겨우
제사 달인의 몸(신체)으로 겨우 겨우 만들어 놓았는데
순종의 몸 달인이 졸지에 외부에서 굴러 들어온 버린돌로써 주춧돌을 차지하니

제사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그 순종의 몸을 없애버리면 저절로 자신의 몸이 최고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에 일치되는 몸이 된다는 겁니다.

법이란 결국 상대적인 것을 유발하는 겁니다.

인간이 처음부터 법을 쥐고 태어난게 아닙니다.
외부의 타인이 법을 쥐었기에 그 법을 쥐지 않으면 소통이 안되고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충돌이든 사건이든 벌어질려고 또는 그 충돌의 가부 여부가 가려질려면
게임의 룰을 자신도 따라야 하는 겁니다.
그럼 게임의 룰을 사랑해서 따르는 겁니까?
아니지요 상대방을 이기기 위해서입니다.
상대방도 마찬가지입니다.

외부의 자극이 없었다면 법을 쥘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법을 일단 자신 유익에 유리하도록 법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당기는 겁니다.
하나님도 거룩도 예수님도 성령도 다 법 다루듯이 다루어서
법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이기기에 유리하도록 자신 편으로 당기는 겁니다.

결국 복수심입니다.

모든 인간의 언어와
사고방식
심지어 종교용어도

다 이 복수심을 정당화 하기 위한 정치인 게임입니다.

그런데 정작 진짜 제대로 복수의 정당성을 가진 분은 예수님 외에는 없습니다.
그 예수님이 복수하고자 복수의 알리바이가 담긴 그 신체를 증거물로 제시하지 않고
도리어 그 증거물을 십자가에 못 박아 없애버렸습니다.

우리 죄가 다 사라졌을까요?
천만의 말씀

야 이제 더 마음껏 죄 짓자 라는
새로운 기준의 죄가 드러나는 겁니다.

증거물을 예수님이 없애 버렸으니

그것 보다 바보가 어디 있습니까?

법적 근거가 다 사라졌는데?

없던 증거물로 만들어서 뒤짚어 씌워서 어떻게든 이길려고 하는 세상에

가장 확실한 증거물을 없애 버렸으니

이기는데 불리해진게 아니라 아예 이길수 있는 근거를 다 없애버린 겁니다.


저쪽은 신났습니다.

유일한 증거물 딱 하나를 결정적으로 법적을 상황을 뒤짚힘 당할 수가 있는데
그 증거물이 사라졌으니 말이죠.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율법 지켰다 라는 유일한 근거인 할례
또는 기도
또는 뭐 음 찬양 금식 큐티 증거물은 공책 등등
이런 근거를 행했다 라는 근거로 제시하면 얼마나 유일한 증거물입니까

그런데 그것을 다 배설물로 여겨버리면

유일하게 자신이 거룩한 일을 행했다 라는 근거를 다 바보같이 버리게 되는 셈입니다.

어떤 근거도 거룩한 짖 했다는 증거물이 없으니까요

복수의 정당성을 가진 알리바이 몸도 없애 버렸고
거룩함을 가득 행했다 라는 그 거룩한 몸도 없애 버렸습니다.

무슨 배짱일까요?

다른 몸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법에 의해 저촉 받지 않는 몸이 있기 때문입니다.

법이 적용되지 않는 몸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여전히 자기 신체의 버릇대로 이 다른 몸 조차도 법적인 것을 적용하고자 합니다.

그때는 가차 없습니다. 용서 못합니다. 이것을 다룬 비유가 일만달란트 탕감한 임금이 다시는 용서를 하지 않더라 라는 모순된 의미로 용서를 뻔뻔스러운 배짱으로 아예 모순점을 깔고 증거합니다. 그것도 끝까지 용서한다는 의미를 끝까지 죽어도 용서 안한다는 의미로써 상반되게 증거하는 하나님나라 비유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다 이런 식입니다.

비밀이기에
아무도 패쓰워드를 풀지 못합니다.


법이 적용 되지 않는 몸을 예수님은 완성 했습니다.
그 몸에 베드로가 초대 받았고
바울은 그 완료된 몸을 보았습니다.

그 차이나는 몸을 차이성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바울이 보여주고파서가 아니라
성령이 보여주고파서
성령은 더더욱 바울은 고난받는 상황으로
불속으로 집어 넣습니다.
제 4의 인물이 보이는 겁니다.

신났습니다 바울은

매 맞고 징계 받는 다는 것은 참으라 라는 뜻이 아닙니다.

제 4의 인물을 보라는 겁니다.

그 매 맞고 징계 받음에 누가

과연 누가 뛰어드는가?

강도 맞은 사람에게 누가 뛰어 드는가?

누가 이웃인가 라는 것을 보라는 겁니다.


이웃이란 다른 몸을 가진 분이여야 합니다.

같은 세상에 사는 사람은 이웃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같이 불뱀에게 물린 자들이요
같이 강도에게 당한 신체이기에 서로를 돌 봐 줄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알아라 라고 던져진 것이 율법의 취지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의 완성인데
모든 인간은 서로 서로의 남이 아니라 모조리 한 아담입니다.

그렇기에 남이 와야 합니다.
그 남에 의해서 나는 철저한 남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 나의 운명은 타인에 의해 결정이 됩니다.

어떤 학자는 타인이란 지옥이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공감이 가는지 정말 정말 동의를 합니다.(인간 속의 악마 였던가? 그 저자가 한 말입니다.)

그러나 타인일 수밖에 없지요
자기가 지옥이기에 똑같은 한 아담이니 다 지옥입니다.

유일한 타인은 예수님입니다.
그 예수님이 나를 남으로 여겨주면 이웃이고
나를 남인 타인으로 또는 강도만난 자로 여겨주지 않으면 즉 불쌍히 여겨주지 않으면
법적 정당성을 추구해서 율법에 의거해 레위인처럼 제사장처럼 부정한 시체를
법 지킨다고 피해 버리면 그만입니다.
할 말 없습니다.

법에 의하면 맞거든요

그런데 법을 어기면서 까지 시체를 만져준다면

그것이야 말로 법에 저촉받지 않는 다른 몸
나 와 별 다를게 없는 몸 아닌가 하는 그 몸이 아닌 다른 몸이라면

우리는 이웃을 만난 겁니다.

그 분에 의해 우리는 내가 예수님의 이웃이 되는 겁니다.

법이란 이웃 개념이 없습니다.

그저 모조리 법적입니다.

법의 판결에 의해
생존법칙처럼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내 신체가 편리하고 유리한 방향으로 가도록 법 조차도 부채질하는
법에 저촉받는 법의 신체입니다.

그러나 법이 적용되지 않는 몸은

예수님의 마련한 새 처소에서 난 새 몸입니다.


우리의 십자가에 못박힘에 마땅한 몸은
법 외에는 다른 몸을 일체 볼려고도 하지 않는
안개 허상 허무인 우상 곧 약속과 전혀 상관 없는 몸입니다.

(갈 5:17, 개역)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갈 5:18, 개역)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갈 5:19, 개역)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갈 5:20, 개역)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갈 5:21, 개역)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갈 5:22, 개역)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갈 5:23, 개역)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 5:24, 개역)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갈 5:25, 개역)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갈 5:26, 개역)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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