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끼 인간 (종말 인간)

2010년 7월 15일 목요일 오전 7:19:43 김대식


요 며칠 동안 강이아빠랑 말씀을 나누면서 자주 인간의 은밀한 부위인 성기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사실은 그것은 죄와 연관이 되어 있기 때문이였다.

세 차례 정도 sex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는데
이것도 한번 정리해야 할 것 같아서 메모를 해 본다.

첫 번째로 언급했을때가
인간은 왜 법을 사랑하는가 라는 제목의 글에
인간의 신체에 있는 성기는 타인을 위한 것이라고 언급해서 강이아빠랑 나눈 대화 였다.

http://crosslamb.tistory.com/921

인간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따먹고 하나님과 같이 된 이후로
인간은 자신을 은닉하기 시작 한다.

그러나 그 은닉성이 하나님 앞에서는 소용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 은닉성을 포기할 인간이 아니다.

그 비밀성, 뭔가를 감추이고자 하는 동시에 그것이 발각이 되었을때에 들어나는 수치감 모멸감 도대체 무엇에 대한 수치일까?

결국 그 비밀성이 인간 전체가 되는 것이다. 곧 부끄럽다고 해서 감춘 것이다.

도대체 발가벗었음을 누가 알려 줬을까?
수치를 누가 알려 줬을까?

이유 없이 인간은 자신을 가리우기에 바쁘다.

마치 갓 태어난 젓먹이 아기가 태어나자 마자 자신이 발가벗은 모습을 부끄럽다고 감추이고 자신을 너무 쳐다볼려고 하지 말라고 부끄럽사옵니다 어머니 라고 한다면

어머니는 기겁을 할 것이다.
과연 자신이 낳은 자식이 맞는지 하고 말이다.

결국 인간은 자신의 성기를 안으로 숨기려 하겠지만 정작 인간은 자신의 성기를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닌 타인을 위해서 그 의미가 작동이 되는데 (자신을 위한 성기는 없음, 타인을 위한 성기 뿐임, 곧 신체 뿐임)

그 타인이 과연 누구인가 하는 점이다.

다윗은 다윗에게 찾아온 손님을 대접하고자 다윗은 부한 자의 양을 잡아 손님이라는 타인을 대접하지 않고, 가난한 자의 딸처럼 여기는 암양새끼를 잡아서 손님을 대접했다.

(삼하 12:1, 개역) 『여호와께서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시니 와서 저에게 이르되 한 성에 두 사람이 있는데 하나는 부하고 하나는 가난하니』
(삼하 12:2, 개역) 『그 부한 자는 양과 소가 심히 많으나』
(삼하 12:3, 개역) 『가난한 자는 아무 것도 없고 자기가 사서 기르는 작은 암양 새끼 하나뿐이라 그 암양 새끼는 저와 저의 자식과 함께 있어 자라며 저의 먹는 것을 먹으며 저의 잔에서 마시며 저의 품에 누우므로 저에게는 딸처럼 되었거늘』
(삼하 12:4, 개역) 『어떤 행인이 그 부자에게 오매 부자가 자기의 양과 소를 아껴 자기에게 온 행인을 위하여 잡지 아니하고 가난한 사람의 양 새끼를 빼앗아다가 자기에게 온 사람을 위하여 잡았나이다』
(삼하 12:5, 개역) 『다윗이 그 사람을 크게 노하여 나단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삼하 12:6, 개역) 『저가 불쌍히 여기지 않고 이 일을 행하였으니 그 양 새끼를 사 배나 갚아 주어야 하리라』
(삼하 12:7, 개역)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기를 내가 너로 이스라엘 왕을 삼기 위하여 네게 기름을 붓고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삼하 12:8, 개역)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처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 저것을 더 주었으리라』
(삼하 12:9, 개역)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뇨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죽이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도다』
(삼하 12:10, 개역)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나단 선지자 곧 선지자란 광야인간 단절된 인간이다. 나단 선지자는 다윗에게 그 타인인 손님을 끄집어 내어 은밀한 은닉속에서 바깥으로 돌출 시킨다.

인간은 미끼일 뿐이다. 다윗은 미끼다. 다윗을 통해서 은닉된 그 타인을 끄집어 낸다.

그래서 연달아 3번의 증표를 확보한다. 그 타인이 곧 너의 이웃이 될 수 없다는 증거물이다.

결국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은닉함으로써 감추어 놓은 가짜 하나님 곧 가짜 손님인 타인을 들추어내기 위해서 부정적인 성기를 아주 노골적으로 공격해서 그것을 짤라버림으로써 그 비밀성을 외부로 들추어냄으로써 타인과의(배후세력) 결별을 주님은 다윗을 통해서 보여주신다.

이것이 단절된 인간, 성기가 짤린 인간, 곧 할례 인간이다.

결국 인간의 성기는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닌 타인이 어떤 자인가를 보여주기 위해 있는 것이다. 그 타인은 짤림으로써 정체가 드러난다.

성기가 짤려짐으로써 숨어있고 은닉된 타인이 드러난다.

그래서 선지자는 부정적인 수치를 더더욱 노골적으로 노출시키는 방식으로
홀라당 빨가벗겨버린다. 부정적으로 말이다.
그 수치를 가리우고 가리고픈 부끄러운 부분을 선지자는 자신도 홀라당 완전노출당해버렸듯이 다윗이든 성도든 아주 노골적으로 그 수치를 짤라내고자 더더욱 파고든다.

요한복음 마지막에 다루었던 베드로의 모든 수치 모든 허물을 그런식으로 짤라내고자
예수님께서 집요하게 베드로 쪽에서 배설 표출 되는 모든 방식을 단절시키는 것과 동일하다. 오로지 예수님이라는 이웃 만이 베드로를 이웃 삼는 사랑 외에는 모조리 다 단절 되는 식이다.


두 번째로 강이아빠랑 나누었던 이야기가 바로 율법과 결혼에 대한 이야기이다.

남녀가 서로를 보는 시각이 사실상 건강한 남자 건강한 여자를 찾는데 있어서
그 외모로 파악하는 방식이다.

어떤 다큐였던가 이런 내용을 다루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종족번식의 본능 때문에
여자는 남자의 외모에 풍기는 건강함을 통해서 건강한 성기를 찾는데 코 라든지 등등의 남성을 상징하는 것으로써 본능적으로 찾아낸다 라는 식이다.
그래야 건강한 자녀를 낳지 비실비실한 아프고 병든 자식을 낳을 수 없다 라는 것이다.
여자의 신체는 모조리 아기를 키우는데 동원이 될 신체이다.
그래서 근육도 잘 없고 푹신 푹신 하며 모든 신체가 아기를 위해서 구조화 되어 있다.

또 남자는 여자를 보는데 있어서 여성의 성기를 상징하는 외모를 찾는다.
아름다운 꽃이 만개하여 꽃향기를 날리우는 것처럼
아름다운 눈 아름다운 s라인 등등은 (S 라는 알파벳은 오늘따라 뱀의 이미지처럼 보인다.)
자신의 종족번성에 조금 더 유리하고 영웅과 힘과 권력을 쟁취하는데
더 나은 유전자를 확보하기 위해서 아름다운 여성을 찾는 것이다.

에스더에서 나타난 아름다움이란 왕의 권력 조차도 뛰어넘는다.
그런데 정작 그 에스더의 아름다움은 죽으면 죽으리라 라는 단절로써 권력이라는 힘과 아름다움이란 신체의 모든 한계를 뛰어넘는다. 즉 할례인간 광야인간 세상이 감당못하는 약속인간이라는 뜻이다.

여성은 건강하고 튼튼한 좋은 유전자를 찾기 위해서 월경 때였던가 정확하게 모르겠는데 잊어버려서 얼굴이 발개스레 하게 연지곤지를 찍은듯한 마치 아름다운 꽃의 활짝핀 장미의 붉은 유혹을 표출하듯이 타인 곧 남성을 유혹한다. 그렇다고 아무나 허락하는 것이 아니라 그 중에서도 건강하고 재력있고 유전자를 골라서 어떻게하면 종족번성에 유리한가를 따져가면서 상대방 타인을 고르는 것이다. 곧 신체란 타인 때문에 작동을 한다.

종족번성을 남성 여성이 모두 염두해 둔다는 것은 곧 전쟁을 염두하는 것이다.
크고 힘세고 튼튼한 종족일수록 전쟁에서 유리하고 생존력이 강하다 라는 것이다.

다말이라는 여성은 자신을 창녀로 외모를 변경시키고
빨간 립스틱을 바른 유혹의 입술과
연지 곤지를 찍어 바른듯한 유혹의 불그스래한 볼 터치로써
시아버지 유다를 유혹한다.(남자는 멍청해서 이런 유혹의 기술 앞에 단 0.3초 만에 넘어간다. 힘 보다 아름다움이 더 강하기 때문에 모든 여성은 화장기술을 연마하는데 평생을 보낸다.)

그러나 다말의 관심사는 약속이다.

그 약속을 위해서라면 거짓말도 서슴치 않았던 기생라합처럼

(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사무엘하-2009/37강-삼하17장15-20(도와주는사람)-2sa100711.mp3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사무엘하-2009/37강-삼하17장15-20(도와주는사람)-2sa100711.avi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사무엘하-2009/37강-삼하17장15-20(도와주는사람)-2sa100711.hwp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사무엘하-2009/37강-삼하17장15-20(도와주는사람)-2sa100711.pdf    )

다말은 자신을 부정한 모든 수치를 약속에 올인한다.

마치 불의한 청지기가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에 충성하겠느냐 라는 것이다.

(눅 16:10, 개역)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눅 16:11, 개역)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눅 16:12, 개역)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약속이 타인처럼 왔다 라는 것이다. 그 남의 것 곧 타인에게 자신의 부정한 신체를 올인 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수치를 외부로 드러내는 타인을 인식하지 못한다. 도리어 다윗에게 찾아온 가짜 타인으로 그 수치를 거룩을 동원해서 더더욱 감추기에 급급하다.
(여기서 두 타인이 있다는 것을 염두하자. 두 기도, 두 예배. 두 이스라엘. 두 언약, 두 여자, 항상 두 갈래로써 봐야 한다. 그리고 그 차이성을 알아야 한다. 두 할례 곧 손할례와 마음의 할례가 있듯이, 두 이스라엘도 있다. 두 이웃. 두 하나님 - 임마누엘 = 니 하나님과 내 하나님은 다르다.)

자신의 수치 곧 은밀성을 감추어서 더더욱 멋진 무화과나뭇잎으로 가리우게 해 주는 거룩한 일을 쌓는데 도와주는 타인, 이웃은 가짜다. 그 대표적인 것이 행함을 강조하는 목사나 성화를 교회충성이나 뭐 등등 그런 자는 모조리 가짜다.

반대로 나의 수치를 노골적으로 까발리는 나를 괴롭게 하는 선지자는 참이웃이다.

선지자도 두 종류의 선지자가 있듯이 말이다.

이렇듯 생명나무(약속)의 활동은 선악이라는 인간 스스로가 갇혀버린 그 금기사항을 뚫고서 반드시 그 상대적인 차이로써 증거 된다.

그래서 율법과 결혼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과거 불과 50-60년 전? 만 해도 아이를 낳은 아낙네들은 자신의 신체인 젖을 가감하게 노출했다. 아이를 젖 먹이는데 용이했고 또 자신은 아이를 낳았다 라는 일종의 유세를 부렸다. 또 남편이 있다 라는 증표이다. 그것은 차이성을 노린 것이다.

차이가 나지 않는다면 유세 부려도 받아주는 타인이 없기에 소용 없다. 결국 결혼하지 못한 처녀는 감히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온 몸을 가리우고 또 가리우고 다녔다.

어쩌면 오늘날 현대와는 반대인듯한 패션 같다.

결국 인간 전체 신체 이미지(형상)는 인간이 꽁꽁 감추어놓은 은밀한 성적 부위를 우회적으로 외부로 표현한 것이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처녀 때나 총각 때에 그렇게 금기시 되고 철저하게 법 아래에 갇혀서 그 구속력에서 도저히 자유랍시고는 일체 없는 금기사항이

막상 결혼 후에는 자신의 은밀한 부위는 당신 것입니다 라고 아무런 막힘과 금기와 그 어떤 법적인 구속력이 없이, 어떤 수치심과 부끄러움도 작용치 않고 도리어 마음껏 누리는 자유를 누리는 신체로 변개한다. 희한한 신체다.

방금전 까지만 해도 그렇게 금기되던 것이
도리어 결혼 후에는 마음껏 자유를 만끽하는 즐거움으로 작용한다.

율법 아래에 철저하게 갇혀져 있을때에는 철저하게 금기된 사항이
도리어 신랑이 외부에서 찾아옴으로써 그 율법을 벗어나 결혼함으로써 마음껏 자신의 신체를 그 신랑을 위해서 다 주는 셈이다.

(롬 3:21, 개역)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그 선지자와 같은 이가 참이웃이다. 율법을 뚫고서 다가온 자유이다.
그러나 율법 아래에서 보면 철저한 부정적인 인간이 선지자다.
그 금기사항인 죽음을 넘어서지 못하는 사랑은 가짜다.


마지막 세 번째로 어제 강이아빠랑 대화를 나눈 할례인간과 불임여성 이다.(세례인간, 누구와 하나 된 인간)

이스라엘은 약속 인간이다. 아주 특이한 인간이다.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않은
하늘에서 난 자 이다.

이것을 구약에서는 할례로 표현했다. 즉 남자의 생식기인 성기가 짤려진 인간이다.
아벨에게서는 자신의 신체가 단절된 죽음을 당한 신체였다.
노아에게서는 안식(땅이 단절 된) 인간으로써 구별 차이성을 드러냈다.
아브라함에게서는 행함의 믿음이(우상조각가) 단절된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타인의 믿음인 예수님의 믿음 때문에 값없이 용서받은 믿음인 육에서 난 믿음이 단절된 할례인간이다.
야곱은 죽은 남성 생식기 죽은 불임 여성 그리고 비웃음 속에서 태어난 단절 인간이다.
야곱에게서는 환도뼈가 뿌러졌다.
요셉은 형제들의 미움으로 죽음의 구덩이 속에 갇혀진 차단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잃어버렸다가 되찾은 인간이다.

즉 약속인간이란 땅의 방식을 반드시 거부하고서 그 차이성의 간격을 극과 극으로 벌려놓음으로써 나타난 인간이다. 그 틈 사이의 홈페임 속에서 등장한 포착불가의 인간이다.

이것을 미끼 인간, 광야인간(이스라엘 자체가 광야다. 광야를 이기는자가 아니다. 본인들이 광야이다. 그러니 얼마나 재수 없는 인간으로만 취급받는 구경꺼리 인가?), 할례인간, 단절된인간, 괴롭히는 인간(선지자).

할례맨과 불임우먼이 만나서 이삭이라는 독특한 인간이 태어났다.
이 약속의 방식 외에는 모조리 가짜 인간이다.

결국 예수님의 모형인 그림자 이다.

예수님이라는 타인, 이웃을 말하기 위해서 동원된 이스라엘이다.
그 이스라엘이 예수님의 신부이다.

신랑 된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이 미리 자신의 신체로써
예수님의 형상을 보여준 것이다. 자기를 위한 신체는 없다.

바로 이 완료된 예수님을 곧 약속을 말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속에서 이스라엘을 끄집어 낸다. 누가? 선지자가

두 이스라엘 이다.

이스라엘 속에서 이스라엘을 환도뼈 뿌셔서 그 뿌셔진 이스라엘과
불임으로 망하고 죽었고 실패한 이스라엘 속에서 예수님을 끄집어 내는 일이 바로 선지자의 일이다.

그래서 반드시 할례인간 즉 남성생식기가 짤려진 남자와
아이를 가질수 없는 불임여성 곧 태가 이미 죽어버린 생명이 자랄 수 없는 여자

그 속에서만 예수님은 태어난다.

절대로 인간의 생산방식을 거부하겠다는 단절성이다. 이것이 성령의 일이다.

그렇다면 성령의 일이란 저들의 생산방식과의 차이성을 드러내기 위해
반드시 미끼로써, 미말에 둔 구경꺼리로써, 조롱꺼리로써,
홀라당 발가벗겨진 웃사꺼리로써 저들의 생산방식과 대치를 이루는 식으로 전개 된다.

그 전쟁의 종식에서 태어난 발생된 인간이 바로 안식인간이다.

결국 모조리 다 같은 뜻이다.

할례인간, 불임인간, 잃어버린자, 광야인간, 기도인간, 찬양인간, 단절인간, 세례인간,
성령의 전, 성령의 사람, 선지자, 레위인, 제사장, 교회, 구별된자. 약속의사람, 이스라엘,
안식인간, 성도, 심판인간, 종말인간, 기타등등

이런 의미는 곧 그리스도의 형상이다.

즉 인간의 생식기로써의 생산방식이 철저하게 단절된
도리어 그 생산방식이 짤려서
짤림을 당하는 그 과정을 거쳐서 나타난
약속인간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잉태한
징계로써 낳은 자식이다.
십자가에 못 박혀서 태어난 자식이다.
십자가에서 낳은 자식이다.

피 자식이다.

(갈 5:22, 개역)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갈 5:23, 개역)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 5:24, 개역)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인간의 피가 배제 철저하게 당한
십자가인간.

 

 

 



 

Posted by 김 대식
,